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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4.02.28. 금요기도회 -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2(사도행전 51)



행0932to43 -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2(사도행전51).pdf


20140228FE (#01).mp3.zip





본문 : 사도행전 9장 32-43절



지난 금요일에 살펴 본 것처럼 베드로는 자기 계획을 가지고 시간표 대로 움직여 가면서 사역하지 않았습니다. 성령충만했던 베드로는 그저 성령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이곳 저곳을 방문하면서 성도들을 굳건히 하는 일을 했고, 거기에 룻다와 욥바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두 곳에서 베드로는 정말 놀라운 일을 행하게 되었고 그 결과 수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 있었습니다. 첫번째 도시였던 룻다에서 베드로는 애니아라는 중풍병에 걸려 8년 동안이나 누워있던 환자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도시에서는 다비다라는 이미 죽은 여제자를 다시 살렸습니다. 물론 베드로가 이런 이적을 일으킨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사도행전이 기록하고 있는 첫번째 이적인 일어서지 못하는 성전 미문의 걸인을 일어서게 하고 걷게 한 사건이 베드로를 통해서 일어난 일이었으니까요. 그러나 본문이 기록하고 있는 두 개의 이적에는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룻다에서 8년동안 누워만 있던 애니아를 일으킬 때 베드로는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욥바에서 다비다를 살릴 때는 “다비다야 일어나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당시 유대인들이 사용했던 아람어로 하면 “다비다 쿰!”이 됩니다.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죠? 제가 설교를 통해서 종종 밝혀드리는 경우가 있지만 베드로를 통해서 이루어진 이 놀라운 일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과 많이 닮아 있습니다. 애니아 사건은 예수님께서 집에 계실 때 지붕을 뚫고 들어온 중풍병자를 고치신 사건과 닮아 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그를 향해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하셨고, 그는 그 말씀대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다비다 사건은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일과 너무도 닮아 있습니다. 다비다가 다락방에 누워 있었다는 것과 베드로가 거기 있었던 사람들을 다 내보냈다가 다시 들어오게 했다는 점, 그리고 다비다를 행해서 “다비다 쿰!”이라는 말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마치 같은 사건을 달리 기록한 것이 아닌가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많이 닮아 있습니다. 


제가 사도행전 설교를 시작하면서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약속이 성령충만한 제자들을 통해 어떻게 이루어져 가는지를 기록한 책이라고 말씀드린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바로 그런 이야기들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떠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이 말씀은 요한복음 14장 12절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나중에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이유를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 가기 때문이라고 하시는데요. 여기서 ‘내가 아버지께로 간다’는 말은 요한복음을 보면 성령님을 보내시는 일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제자들이 성령충만하게 되면 결국 예수님께서 하신 일과 그보다 더 놀라운 일들을 행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똑같은 일을 행했습니다. 중풍병자를 일으켰고 죽은 다비다를 살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지 못하셨던 일도 했습니다.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를 믿게 해 주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서 무언가 위대한 일을 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아주 큰 계획을 세우고 활발하게 움직입니다. 그렇지만 정작 겸손하게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거기에 순종하려고 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계획한 일은 이루어 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엄밀하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겸손하게 순종하면서 이룬 일들이 아니니까요. 정말 하나님을 위해서 의미있는 일을 하려는 사람들은 먼저 성령충만해야 합니다. 그리고 겸손하게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해야 합니다. 거기서 부터 출발해야 하고 계속 그 길로 가야 합니다. 역사 속에 의미있는 흔적을 남긴 하나님의 일꾼들의 삶을 보면 그들은 항상 그렇게 했습니다. 위대한 일을 하려고 해서가 아니라 그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하다가 보니 하나님의 위대한 일들을 하게 된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 이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약속을 이루는  영광스러운 주인공이 되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인도하심에 겸손하게 순종했고 그러는 가운데 만나게 하시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하셨던 일들을 하셨고 또 더 큰 일도 하셨습니다. 주님의 약속을 정말 놀랍게 성취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이 그렇게 놀라운 주님의 일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베드로가 만난 두 사람의 어려움이 도저히 사람의 힘으로는 해결 불가능한 것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자리에서 일어서지도 못하는 8년 동안의 병상생활, 그리고 죽음… 이 두 가지는 사람의 힘으로는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일들이었습니다. 가장 절망적인 상황이고 그 속에서 선한 부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런 일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두 가지 어려움을 완전하게 해결해 주셨고 오히려 그 일을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두 사람을 고치시고 살리셨을 뿐만 아니라 그 일이 많은 사람이 주님께로 돌아오는 통로가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누가 그 절망스러운 일들이 이런 결과를 가져올 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두 사람에게 고치시고 살리시는 은혜를 베푸셨을 뿐만 아니라 그런 일이 아니었다면 결코 이룰 수 없었을 놀라운 구원사건을 일으키셨습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우리를 힘들게 하고 절망시키는 우리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일들 앞에서 힘들어 하고 불평하며 절망하게 되죠. 그러나, 그럴 때 우리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그 어떤 상황이나 어려움도 다 제 자리로 되돌려 놓으실 수 있으시고 오히려 그런 일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놀랍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치병과 죽음이라는 인간 최고의 한계상황을 통해 두 사람과 교회에 가장 큰 은혜를 주셨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가장 빛나게 드러내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지 못할 상황과 어려움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바꾸려고 하시면 언제든지 바뀌고 회복될 것이고, 하나님께서 쓰시려고 하시면 그 일이 어떤 일이든 간에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가장 놀랍게 증거하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여러분을 힘들게 하며, 또 여러분을 절망하게 만드는, 여러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 있다면 그 일은 여러분의 손에 있는 여러분의 일이 아닙니다. 그런 일들은 하나님의 손에 있는 하나님의 일들입니다. 하나님이 바꾸시고 회복시켜야만 바뀌고 회복될 수 있는 일이지만 그렇게 된다면 우리 자신과 세상을 향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내는 도구가 될 수 있는 그런 일들입니다. 여러분을 힘들게 하고 절망하게 하는 일들을 만날 때마다 애니아의 중풍병과 다비다의 죽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두 가지 일을 가장 영광스러운 도구로 사용하셨던 하나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원하신다면 그런 일들은 언제든지 다시 은혜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진리에 소망을 두고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애니아와 다비다 두 사람은 하나님의 기적같은 은혜를 경험하는 사람이 되었지만 사실 이 두 사람에게는 공통점이 거의 없습니다. 성경은 애니아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도 들려주지 않습니다. 그저 8년동안 누워있었다는 것이 우리가 그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의 전부입니다. 이 사람은 그저 베드로가 그를 찾아간 덕분에 베드로를 만날 수 있었고 그런 은혜와 기적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다비다는 정말 훌륭한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선하게 살면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힘껏 도왔던 주님의 제자였으니까요. 두 사람이 이렇게 달랐기 때문에 우리는 이 두 사람 속에서 하나님이 왜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셨는지에 대해서 공통되는 이유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베드로를 보냈고 이들에게 그런 은혜를 베푸셨다고 밖에는 더 이상 이들이 그런 은혜의 주인공이 된 것에 대해서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물론 일반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은혜는 은혜를 사모하며 또 그 은혜를 받을만한 믿음이 있는 자들에게 부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를 사모하며 은혜 받을 만한 믿음을 준비해야 하지요. 그렇지만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는 그저 하나님의 선하심과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만한 사람들에게 주어지기도 하지만 전혀 그런 은혜를 기대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더 놀랍게 부어지기도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소망이 되는 이유입니다. 만약 은혜가 어떤 조건과 자격에 따라서만 주어지는 것이라면 다비다는 은혜를 기대할 수 있어도 애니아는 은혜를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들은 은혜를 기대할 수 있어도 그렇지 않은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할 수조차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그 분이 원하시는 대로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을 수 있고, 또 그 은혜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원래 우리가 처음 받은 은혜는 다 그런 은혜입니다. 심지어는 은혜가 필요한 지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우리는 은혜를 받았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소망은 여전히 열려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은혜는 너무 너무 좋은 것입니다. 모든 것을 제 자리로 돌려놓고 회복시키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정말 정말 좋은 것입니다. 이 은혜를 기대하십시오. 이 은혜를 향해 여러분의 마음을 열어 놓으시기 바랍니다. 절대로 내가 이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다비다도 은혜를 받았지만 애니아 또한 그에 못지 않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것이 은혜의 부요함입니다. 내가 지금 어떤 상태에 있든지 은혜를 기대하시고 또 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내세울 것 없을 때에라도 언제나 은혜는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베드로를 통해서 애니아를 찾아가셨던 하나님이 오늘 우리도 찾아오실 것입니다. 부족하게만 여겨지는 우리에게도 한량없는 은혜를 부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로 우리를 바꾸시고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은혜롭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자유롭습니다. 그것은 그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 은혜롭고 자유로우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충만하여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했던 베드로는 은혜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그저 자리 보전하고 누워만 있었던 애니아는 은혜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 은혜의 증거자가 되었습니다. 아름답고 향기로운 삶을 살았던 예수님의 여제자 다비다 또한 은혜의 수혜자와 전달자가 되었습니다. 베드로의 특별하지 않은 방문도, 애니아의 오래된 불치병도 그리고 다비다의 죽음도 하나님의 손에서는 모두가 다 놀라운 은혜와 기적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의지하고 소망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 은혜를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 소망하고 바라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 삶에 일어나는 일들은 그 일들이 힘들고 여러운 일들일 수록 더 큰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는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을 이루기 위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그렇게 놀랍게 일하시는 하나님께 우리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항상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시고 그 인도하심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곤경과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에 대한 실망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자유롭고 풍성한 은혜에 여러분의 소망을 두시기 바랍니다. 항상 그 소망과 믿음은 잘 지켜 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