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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 묵상

2012.06.01. 매일성경 묵상

오늘 본문은 베드로전서 1장 1-12절까이지입니다. 


베드로 전서는 ‘신앙으로 인한 고난’이라는 상황에서 주어진 메세지이다. 그래서 그런 상황 속에서 읽어야 ‘제 맛’이 나는 말씀이다. 오늘날 고난에 대한 오해가 있다. 신앙 때문에 생겨나는 것도 고난이라고 생각하고 정반대로 욕심부리고 죄 짓다가 생겨나는 어려움도 고난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고난은 전자이지 후자가 아니다. 후자는 ‘죄의 열매’이다. 악을 심었으니 거기서 생겨날 수 밖에 없는 ‘악한 열매’말이다. 우리 식으로 표현한다면 ‘자업자득’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경우, 신앙 때문에 생겨나는 어려움과 욕심 때문에 생겨나는 어려움을 구분하지 못하고, 성경에 나오는 고난과 관계된 말씀들을 분별없이 적용하지만 그래서는 말씀도 살지 못하고 내 신앙도 살지 못한다. 나의 잘못된 적용 때문에 말씀이 ‘고난’을 당하고, 내 신앙은 비뚤어지기 시작한다. 물론 욕심을 부리거나 죄를 짓지 않았는데 찾아오는 까닭모를 어려움은 그래도 ‘의로운 고난’ 쪽에 속할 수 있다. 그래서 ‘의미있는 고통’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이 경우에도 베드로 전서의 말씀을 적용할 수 있다. 그러나 다시 말하거니와 욕심이나 죄 때문에 생겨난 고통은 ‘하나님의 맴매’이니 이런 고통을 당할 때는 회개하고 그 욕심을 버리고 죄에서 떠나야 한다. 이럴 때는 인내니 하나님의 영광이니 연단이니 하는 것들을 찾을 개재가 아니다. 


“... 흩어진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베드로가 편지를 쓰는 수신자들에 대한 설명이다. 여기서 나그네는 진짜 나그네였다. 그들은 소아시아지역에 흩어져 있었던 유대인 디아스포라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영적인 나그네이기도 했다. 여기 이 땅이 고향이 아니라 저 하늘나라가 고향인 나그네들, 그래서 그 고향으로 돌아가는 여행중인 나그네들 말이다. 그들은 나그네 신분이었기 때문에 이 말을 더욱 더 정확하고 절절하게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나그네이기 때문에 타향에 쫓겨와서 고생 고생을 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나그네이기 때문에 하늘 고향을 떠나 이 땅 위에서 고생 고생을 하고 있다. 하늘 고향을 향해 여행하는 나그네이니 이 땅 위에서는 고생을 할 수 밖에 없다. 이들이 당하는 고난이란 그러한 나그네이기 때문에 겪어낼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하늘을 본향으로 삼아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 땅이 완벽한 곳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해서는 안된다. 이 땅 위의 모든 곳이 우리에게는 객지이다. 객지를 여행하는 나그네들에게 세상 모든 곳은 거칠고 적대적인 곳일 수 밖에 없다. 간혹 그들을 반기는 자들도 있고, 때로는 편히 쉬며 융숭한 대접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그 반대일 경우일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이 ‘나그네’는 세상의 나그네하고는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그들이 ‘부름받은 나그네’라는 것이다. 그래서 ‘부르신 분을 향해 여행하는 나그네’라는 것이다. 나그네로 살면서 우리는 내가 누구에게 무엇 때문에 부르심을 받았는지를 잊지 말아야 한다. 이것을 잊는 순간 우리는 정처없이 여행하는 세상의 나그네처럼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첫째 우리는 하나님의 ‘미리 아심을 따라 택하심을 입은 나그네들’이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여행하는 자들이 아니다. 우리의 나그네됨은 하나님이 아시는 나그네됨이다. 그 분이 계획하셨고 그 분이 진행해 가시는 여행이다. 그 여행 중에 하나님이 모르는 일은 없다. 하나님의 통제권을 벗어나거나 무의미한 것도 없다. 물론 이런 모든 것들이 유익한 것이 되려면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을 아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하늘 고향으로 가는 여행자로 택하심을 받았다. 그래서 우리의 여행은 결정되어 있는 것일 수 밖에 없다. 둘째 우리는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을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나그네들’이다. 우리가 여행은 하늘 고향을 목적지로 삼지만 그 행로는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이 가져다 주는 순종의 발걸음으로 이어지게 된다. 왜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신 후에 바로 하늘나라로 데리고 가시지 않으셨을까?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성령 이전의 사람들이 실패한 일에 성공하게 하시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사탄에게 뽄떼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이다. “봐라! 이게 내 백성들이다.”라고 라고 하시기 위해서 말이다. 성령님은 믿는 자들을 거룩하게 하신다. 거룩한 자로 출발하게 하시고, 거룩한 길을 걸으라고 요구하신다. 그리고 그리로 가려고 기도하며 애쓰는 자들에게 그 길을 갈 수 있는 힘을 주신다. 그 여행의 한 걸음 한 걸음이 바로 순종이다. 실제의 삶 속에서 거룩은 단순히 종교적인 행동들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그 보다는 오히려 실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 뜻에 자신의 삶을 기꺼이 복종시키는 순종을 통해서 드러나고 완성되어져 간다. 하나님의 뜻이 거룩하니 그 뜻에 순종할 수 있는 사람들은 거룩한 사람들이어야 하고 죄인을 거룩하게 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시니, 결국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사람들만이 순종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세상의 나그네 길에서 한걸음 한걸음 거룩한 순종의 발걸음을 걸어가게 하시기 위해서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다. 세째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나그네’들이다. 순서상 이 이야기가 가장 먼저 나와야 하지만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오히려 제일 뒤에 등장한다. 피뿌림은 구약의 제사에서 사용되는 용어이다. 피뿌림은 어떤 것을 정화하고 구별하기 위해서, 거룩하게 만들기 위해서 행해지는 행위이다. 다시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또 머무실 수 있는 상태로 되돌리기 위해서 행해지는 일이다. 우리는 바로 이 일 때문에 택하심을 받았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영단번의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의 다시 정하게 하고 거룩하게 하는 피이다. 그 분의 피 때문에 우리는 다시 하나님이 거하실 수 있는 거처가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이 땅위에서 하나님을 모시고 나그네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귀중한 그리스도의 보혈 덕분임을, 우리를 다시 정결케 한 우리 위에 뿌려진 피 덕분임을 잊지 말아야 하며, 계속해서 그 피의 공로에 의지하여 살아가야 한다.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기도이기도 하지만, 사실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다. 하늘 고향을 향해 여행하는 나그네들에게는 특별히 더 많은 은혜와 평강이 필요하다. 그게 없으면 그 여행을 계속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이 이 땅의 영구 거주자가 아니라 여행객임을 잊지 않고 나그네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더 맣은 은혜와 평강이 부어진다. 그게 나그네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나그네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평강이다. 그들은 항상 불안과 두려움에 시달린다. 그러한 불안과 두려움 때문에 나그네들은 끊임없이 이 땅의 것들에 의존하고자 하는 유혹에 시달린다. 그 유혹을 이겨내고 동시에 불안과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방편은 하나님의 은혜 밖에 없다. 은혜가 우리 속사람을 가득 채우고 강하게 할 때, 나그네들을 비록 여행 중이지만 이 땅 위에서도 하늘을 누릴 수 있고 그래서 하늘이 주는  평강을 누릴 수 있게 된다. 나그네에게, 나그네인 줄 알고 또 나그네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많이 필요하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은혜와 평강을 ‘더 많이’ 부어주신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죠? 실제로 해야할 이야기가 더 많지만 간략하게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이 구절부터는 조금 빨리 가겠습니다.) 나그네의 고단한 삶에도 찬송은 있다. 하늘을 향해 여행하게 하신 분과 그 분이 거기서 주시려고 마련해 놓으신 영광스러운 기업을 생각하며 거기 소망을 둘 때, 여기서의 삶이 아무리 고단하고 힘겨워도 입에서는 찬송이 흘러나올 수 있다. 그래서 하늘 나그네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다. 그 분은 ‘그 많으신 긍휼하심을 따라-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모든 은혜를 지배하는 법칙이다! 할렐루야!’ 모든 일을 행하신다. 우리를 택하시고 구원하시며 결국 하늘을 상속받게하시는 모든 일들은 전부가 다 하나님의 부족하지 않은, 풍성하신 긍휼하심을 따라 되어진 일들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모든 은혜들은 결코 부족하지가 않다. 풍성하다. 넉넉하다. 그래서 그 은혜로 이루어지는 우리의 구원과 하늘의 소망 또한 넉넉하게 이루어진다. 우리의 평안은 여기서 온다. 우리의 구원, 우리의 소망이 풍성한 소망이라는 흔들리지 않는 사실에서 부터.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을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금신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우선 구원은 마지막 날에라야 완성될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하고 또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에 대해서 너무 단순하게 이해하는 것 같다. 물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구원은 우리에게 주어진다. 그러나 그 때 주어지는 구원은 시작이다. 예를 들자면 씨앗이 떨어진 것이다. 그 씨앗이 자라나고 열매를 맺어야 하는데, 그 씨앗의 열매로서 완성되는 구원은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에야 온전한 형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엄밀하게 말한다면 그 때 가봐야 비로소 확실하게 확인되어질 수 있다. 구원의 완성을 보는 일에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믿음의 인내가 필요하다. 여기서 믿음의 인내란 믿음 때문에 생겨나는 일들을 참고 견디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믿음 덕분에 가능한 인내’라고 보는 것이 더 적당하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오늘 본문은 분명히 말한다. 믿음 덕분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다고 말이다. 반복해서 말하거니와 믿음은 모든 은혜의 유일한 통로이다. 믿음이 없으면 은혜도 없다. 각각의 은혜에는 그 은혜를 충만히 누리기 위해서 필요한 가장 적절한 믿음이 있게 마련이다. 하나님의 능력의 보호하심이라는 은혜를 충만히 누리는 일도 마찬가지다. 그 은혜를 누리려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그런 은혜를 주실 것을 믿어야 하며, 그 은혜는 나를 모든 고난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기에 충분한 능력이 되어줄 것을 믿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믿음으로 인한 고난(시험)이 찾아올 때, 우리는 잠시 근심할 수는 있어도 완전히 절망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잠시의 근심 이후에는 크게 기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왜 일까? 우리는 그 믿음의 시험이 우리를 영원히 영광스럽게 할 것을 알고 있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의 보호하심이 우리와 언제나 함께 있어 우리를 넉넉히 이기게 할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몸을 가진 인간이기에 잠시 잠깐의 근심까지 피할 수는 없다.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도, 일상적인 경우, 고통은 고통이고 어려움은 어려움이다. 현실은 현실로 느껴진다. 그러나 이내 우리는 그것을 넘어설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상급과 우리가 믿음을 포기하지 않을 때, 우리에게 주어질 하나님의 넉넉한 보호하심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믿음의 시련만이 우리 믿음을 연단하여 가치있는 것임을 증명해 낼 수 있다. 그 시련에도 불구하고 남은 그 귀하고 증명된 믿음만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믿음이 될 것이고, 그 믿음은 우리에게 영원한 영광과 하늘나라를 소유하게 해 줄 것이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우리는 여기서 믿음에 대한 가장 본질적인 설명을 듣게 된다. 믿음은 단순한 앎과 동의가 아니다. 우리는 여기서 참된 믿음에는 반드시 감정이 동반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된다는 진리를 믿게 될 때, 우리에게는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가? 우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된다.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 이것이 우리가 구원얻는 믿음을 가지게 될 때 우리에게 일어나는 기적같은 변화이다. 우리가 구원얻는 믿음을 가지게 될 때,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하게 된다. 그 사랑은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그러니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즐거움으로 기뻐하게 만든다. 영혼의 구원을 그렇게 기뻐하게 되고, 그 구원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렇게 기뻐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가 예수를 믿고 나서 하나님으로부터 얻게 되는 현실적인 유익들로 인해 하나님을 기뻐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신앙인의 본질적이고 가장 놀라운 기쁨은 바로 구원으로 인한, 그 구원을 주시는 예수님을 향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다. 실제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런 기쁨은 현실적인 유익이 주는 기쁨일 수가 없다. 그런 기쁨은 잠시의 자극은 될 수 있어도 이내 허무와 무감각함으로 바뀌게 마련이다. 그래서 영원한 것이 주는 기쁨, 무한한 가치를 지닌 분이 주시는 기쁨은 우리의 구원과 그 구원의 주인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알게되는 기쁨일 수 밖에 없다. 현대인은 바로 이 기쁨을 상실하고 있다. 성도들 조차 대개 신앙의 기쁨을 현실적인 유익이 주는 기쁨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 같다. 현대인의 신앙이 나약하며 쉽게 절망하고 타락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 주시는 기쁨을 눈에 보이는 현실적인 유익에서 유래하는 것으로만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 주체할 수 없는 기쁨,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을 추구하자.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기에 그 분을 진실로 기뻐하는 그 기쁨을 추구하는 신앙이 되자. 뭔지 몰라도 관심을 가지고 달라고 떼라도 써보자. 


10절이하의 내용은 우리를 그렇게 기뻐하게 하는 구원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해 준다. 그 기쁨은 예언자들조차도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이었고 심지어는 천사들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를 원하는 그런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 구원을 이미 소유한 것이다. 물론 아직 완성되지 않은 형태이고, 그래서 그 때가지 인내해야 하지만 확실히 가지고 있기는 하다. 우리는 얼마나 큰 은혜를 누리고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의 기쁨은 어떠해야 하는가? 확실한 것은 구약의 성도들이 그 구원에 대한 희미한 믿음을 가지고도 그렇게 기뻐하고 또 그렇게 인내하며 순종할 수 있었다면 이미 구원을 확실하게 ‘받은’ 우리의 기쁨과 그 기쁨으로 인해 주어지는 능력은 어떠할 것인가? 이것이 10절이하의 단락이 우리에게 알려주고자 하는 것인 동시에 또 우리에게 남기는 질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1장 13절 이하의 내용은 그 질문에 대한 구체적인 대답이 된다. 내일부터 베드로전서 속에서 그 대답을 찾아보시기 바란다. 


“하나님 나그네인 우리에게 이 세상에 속한 것들이 아닌 구원과 그 구원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뻐하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알게 하시고, 얻게 하시고, 또 누리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가 얻은 구원이 얼마나 놀랍고 가치있는 것인지, 또 그래서 능력있는 것인지를 알게 하시고 그래서 믿음의 시련 중에도 기뻐하며 넉넉히 기뻐할 수 있게 해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