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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 묵상

2012.06.08. 매일성경 묵상


벧전0412to19.pdf


이번 주 본문은 베드로전서 4장 12-19절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12-14절)


기독교의 가르침은 역설적인 것 투성이다. 한 마디로 말도 안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만약에 땅이 전부이고 땅에서 모든 것이 끝나버린다면 기독교의 역설적 가르침들은 모두 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없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 하늘이 끼어들면 모든 것이 뒤집혀 버린다. 그렇게 역설적이고, 그렇게 가치없게 여겨지는 모든 가르침들은 무한하고 영원한 가치를 지닌 것들이 되어 버린다. 그 중 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바로 기독교의 고난에 대한 가르침이다. 12절은 불시험(그냥 시험이 아니다. 불시험이다. 너무 극심해서 불시험이고, 이 시험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이 참 믿음인지 아닌지가 검증되므로 불시험이다)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으로 여기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그건 일단은 당연한 것이라는 뜻이다. 믿음에 있어서 시험은 평상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까지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힘든데, 13절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즐거워하라’고 말한다. 세상에! 불시험을 당연한 것으로 여길 뿐만 아니라 기뻐하라니! 시련을 그렇게 즐거워하라니! 기독교는 자학적인 종교인가? 그렇지 않다. 13절은 그 이유를 이렇게 이야기한다. 첫째, 그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믿음 때문에 당하는 고난은 다름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는 곧 우리가 그 분 안에 있음을 증명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불시험을 기뻐해야 할 이유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 분의 고난에 참여하는 일이 우리에게 무슨 유익이 있는가? 13절은 그 유익을 이렇게 설명한다.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 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누가 주님 오시는 마지막 날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을까? 답은 이 땅 위에서 믿음 때문에 불시험을 당한 사람들, 그러니까 믿음을 지키느라고 손해과 손해, 오해를 감수하고 살았던 사람들이다.(실제로 베드로전서가 쓰여지던 당시에는 이 불시험은 그야말로 불시험이었다. 죽고 사는 문제였고, 실제적으로 육체적으로 극심한 고난을 당해야 하는 문제였다) 믿음으로 인한 고난은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속해있음을 증명하는 일이고, 그래서 하늘에서 그리스도께서 누리는 그 기쁨을 우리의 것이 되게 해 준다. 그것이 현실이 되는 날이 주님 오시는 날이니 그 날 그렇게 살았던 사람들보다 더 기뻐하고 즐거워 하게 될 사람들이 어디있을까? 그 날의 영광을 ‘지금 볼 수 있는’(오, 주님! 모든 성도들에게 이러한 지극한 은혜를 주시옵소서!) 사람이라면 그것 때문에 이 땅의 불시험까지도 기뻐할 수 있게 된다. 그런 믿음의 눈은 우리를 충분히 그렇게 만들 수 있다. 우리는 기도해야 할 것이다. 그 무엇보다도 간절히 기도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이 땅의 눈에 보이는 것들을 보느라고 잃어버린 ‘하늘의 영광을 보는 시력’을 회복하게 해 달라고, 그 영광이 이 땅 위의 현실보다 더 뚜렷하게 보여서, 그것이 이 땅 위의 것들과는 얼마나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고 또 좋은지 확실이 ‘느끼게’ 해 달라고 말이다. 그 소원이 성취되기 시작하는 날, 우리는 그 시험을 향해 기뻐하며 또 그래서 수월하게 넘어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작은 유익이나 편안함 때문에 신앙과 양심을 저버리는 일들로 부터 자유하게 될 것이다. 두번째 이유는 14절에 나와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난을 받는 자는 복이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영광의 영, 그리스도를 부활하게 하시고, 또 지극히 영광스럽게 했던 성령님께서 그렇게 고난 당하는 사람들 위에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이 땅위에서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 속에서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는 삶이야 말로 가장 복된 삶이다. ‘성령을 소유한 사람’이 가장 복된 사람이다. 믿음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사람은 마땅히 가장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그리스도에 속한 사람이므로 하늘에서 그리스도께서 누리시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고, 또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임재해 계신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 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16절)


고난을 당하는 사람이 잘 처리해야 하는 감정은 바로 부끄러움이다. 확실히 믿음으로 인해서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여러가지 면에서 부족하고 모양이 빠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은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부끄러워해야 할 일은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가지 말아야 할 길을 가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며 그런 일들을 통해서 원하는 것을 얻는 일이라고 말한다. 언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가? 언제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영광을 받으시는가? 사람들은 언제 진실로 하나님을 보게 되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을 때’이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가장 크게 기뻐하신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이,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분이시라는 사실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사실 타락한 세상에서는 그것보다 더 극명하게 하나님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길은 없다. 사람들은 누구든지 자신이 가치있다고 여기는 그것을 위해서 헌신하고 포기하는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런 일들은 절대로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고 부끄러워해서도 안된다. 그것이야 말로 피조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지어다”(18-19절)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는다면’이라는 말씀의 의미는 ‘의인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고난을 견디어 내고 그래서 자신의 믿음이 참된 것을 증명한 후에야 구원을 받는다면’이라는 뜻이다. 고난은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의 믿음을 증명하고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성경은 분명히 증명되지 않은 것을 가치있다고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믿음이 고난을 통해 증명된 사람들이 힘겹게 구원을 얻는다면(이것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이신칭의 교리의 적극적 의미이다) 경건치 않은 자들과 죄인들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서겠는가? 결코 설 수 없다.(설 수 없다는 말은 견딜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그렇지 않은 사람들처럼 살아갈 수 없다. 우리는 경건치 아니한 자들, 그리고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 악한 자들의 마지막이 어떠할지를 생각하면서 때로 믿음 때문에 이 땅 위에서 불이익과 고통을 당하더라도 참고 견디어야 한다. 그럴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의 표현대로 한다면 기뻐하고 즐거워 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어려움들이야 말로 우리 자신을 부끄러움에서 건져 영광으로 인도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고난은 힘겹다. 육신을 지닌 우리로서는 결코 쉽지 않다. 멍에는 멍에다. 믿기 이전보다는 그런 것들이 훨씬 쉬워졌지만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겸손해야 한다. 자신해서도 안되고 단언해서도 안된다. 최선을 다해서 선을 행하면서도 그 영혼의 구원, 영원의 문제만큼은 철저히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 그 분께서 그 영원하시고 강하신 팔로 우리를 붙들어 주시도록 말이다. 그 분의 능력만이 우리를 넉넉히 이기게 하며 그 나라로 충분히 인도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우리는 육신을 입고 있기에 우리는 믿음으로 인한 고통을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손해를 반길 수가 없습니다. 한 번 두 번 그러다 보니 이제는 그런 것이 우리의 믿음과 영원한 영광을 위해서 필요한지 조차 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비록 오늘 우리는 오래전 우리 선배들처럼 믿음 때문에 목숨을 거는 일까지는 하지 않아도 될지 모르지만, 수없는 작은 순교가 없이는 이 땅에서 믿음과 양심을 지키는 순결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성도 뿐만 아니라 목사도 그렇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하늘의 영광이, 내가 받아누릴 그 영원한 상급이 여기 이 땅의 그 어떤 것들보다 분명히 보이게 하시고, 비교할 수 없는 가치가 있음이 알아지게 해 주시옵소서. 그 은혜가 없이 우리는 주님이 원하시는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 땅의 어려움들을 통해 우리의 믿음이 가치있는 것임을 증명해 내게 하시고, 그 길 갈 때에 우리 영혼은 주님께 든든히 맡기는 겸손한 지혜를 알게 해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