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 2019년 9월 15일 일요일
본문 : 요한복음 9장 1-7절
제가 어제 인터넷에서 아주 마음 아픈 동영상 하나를 보았습니다. 그 동영상은 전과자들의 자기 이야기를 적어내려간 편지들이었는데요. 제가 그 중에 하나를 옮겨 읽어드릴테니까 한 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5만 4천 명. 매년 부모의 수감을 마주하는 아동의 수. 그 아이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그 동영상은 이런 질문을 던지면서 시작하고 있는데요. 그 다음에는 거기서 수용자라고 부르는 ‘수감자’들의 자녀들의 편지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다음은 그 편지의 일부입니다. “저는 고등학교 1학년 이예지입니다. 오늘은 학교 참관수업이 있었지만, 저희 부모님은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엄마는 제가 초등학교 때 감옥에 갔고 아빠는 태어날 때부터 없었습니다. 학부모 참관수업이 끝나고 선생님이 절 불러 다른 부모님들이 저희 엄마에 대해 오늘 알게 되었고 앞으로 불만이 많아질 거라고 했습니다. 어디를 쳐다보면 좋을 지 몰라 고개를 숙였습니다. 눈물이 차 올랐습니다. 선생님은 한숨을 쉬시면서 ‘니가 뭘 어쩌겠니?”라고 하셨고, 교무실에 있던 옆 반 친구와 선생님까지 다 우리의 이야기에만 집중하는 것 같았습니다. 머리 속에는 어디로 향해야 할지 모르는 분노와 수치심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리고 나서 다시 막막해 졌습니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이어지는 다른 편지에서는 자기들이 재소자의 자녀여서 아르바이트 자리도 얻을 수 없어서 버스비 조차 마련할 수 없다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절도를 저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쓰여져 있었습니다.
들어보니 어떠세요? 여러분. 이런 이야기는 처음 들으시지요? 저도 그랬습니다. 전과자들이 이미 다 벌을 받고 댓가를 치른 죄 때문에 계속 불이익을 당하는 것도 정당한 일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부모가 재소자라는 이유만으로 그 자녀들이 이런 상처를 받고 이런 고통과 불행을 당하는 일이 있어서는 더더욱 안될 일이겠지요. 물론 이 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결국 사람들의 마음이 새로워지고 마음이 바뀌어야 할 일이기 때문에, 법을 바꾼다고 다 해결될 일은 아니라고 해도, 그래도 법과 제도만이라도 꼭 이런 아이들을 보호하고 볼보는 쪽으로 바뀌어 갔으면 좋겠습니다.
길을 가시다가 예수님은 태어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 한 사람을 보게 되었는데요. 예수님이 그 사람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하시는 것을 보고 제자들은 예수님께 그 사람이 나면서 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이 누구의 죄 때문인가를 물었습니다. 그 당시 유대 사람들은 큰 불행이나 고통은 ‘죄’ 때문에 받는 ‘벌’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맹인은 자기가 지은 죄 때문에 그런 고통을 당하는 것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중간에 시력을 잃게 된 것이 아니라 태어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어머니의 태중에 있을 때, 그렇게 엄청난 죄를 지었다는 이야기인데, 그런 일은 가능하질 않습니다. 그러면, 남는 가능성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의 부모가 저지른 죄의 벌이 그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지요. 그런데, 이것도 말이 안됩니다. 일단 이것은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는데 그의 아들의 이가 시린 법이 없다”는 에스겔서 18장 말씀에 위배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죄를 저지른 부모는 멀쩡한데, 아들이 그 죄의 벌을 다 뒤집어 쓸 수는 없는 일이지요. 그러니, ‘나면서 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이 사람’은 그 존재 자체가 유대 사람들에게는 풀기 어려운 난제였고, 그래서, 제자들도 그 사람을 보자 마자 예수님께 그 문제의 답을 구했던 것입니다. “선생님, 이 사람이 맹인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자기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하고 말이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 때문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시려고 하시는 것이다”라는 답을 주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이 말씀이 그 어떤 질병도 죄에 대한 형벌은 될 수 없다는 그런 뜻은 아닙니다. 분명히 질병은 죄의 직접적인 결과일 수도 있고, 또 죄 때문에 받는 형벌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그렇게 일반화시키면 안됩니다. 전부가 다 그렇다고 말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자주 자주 그렇게 하는 것 같습니다. 우선 우리는 이런 사고방식을 우리의 인생에 적용합니다. 그래서, 무슨 일만 있으면, 무슨 병만 걸리면 그걸 내 죄 때문이라고, 내가 벌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느라고 쓸데 없는 죄책감에 빠지게 되지요. 부끄러운 일입니다만 저만해도 그럴 때가 드물지 않습니다. 큰 어려움이 옵니다. 처음에는 내가 뭘 잘못했나 곰곰히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근래에 는 그만큼 큰 벌을 받을만큼 크게 잘못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그 다음에는 10년, 20년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 때 그 잘못 때문에 지금 이런 벌을 받는다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어떻습니까? 그 죄는 이미 다 하나님께 고백하면서 용서를 구하지 않았습니까? 이미 그 죄에 대한 댓가는 치르지 않았나요? 하나님은 그렇게 치사하고 끈질긴 분이 아닙니다. 이미 용서해 주신 죄, 그리고 한 번 따끔하게 혼내신 것 다시 끄집어 내서 다시 벌주고 그러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그런 분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요. 그래도 답을 발견하지 못하면 그 다음에는 마지막으로 어디까지 가지요?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꼭 들르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전생’이지요. ‘이생’에서 답을 찾지 못했으니 ‘전생’으로 가서 고통의 이유를 찾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꼭 마지막에는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라고 하면서 한숨을 짓습니다. 없는 전생까지 들쑤셔서 거기 내가 알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 다음에야 그나마 혼란스럽던 마음이 잠잠해 집니다.
그런데, 이런 사고방식이 진짜로 문제가 되는 것은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적용할 때입니다. 내가 나를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게 큰 부작용이 없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되돌아 보는 기회가 되고 자기를 죄인으로 낙인 찍는데 까지는 가지는 않으니까요. 하지만, 이런 사고방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적용시키면, 우리는 거의 항상 그 사람을 죄인으로 낙인 찍게 되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당하는 고통이 크면 클수록 그 사람에게 더 크고 깊은 낙인을 찍지요. 그리고는 슬쩍 자기도 모르게 자신을 의인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나는 고통을 당하지 않으니, 나에게는 저런 불행이 없으니 나는 저 사람만큼 큰 죄인이 아니고, 적어도 저 사람보다는 의롭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려고 해서가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됩니다.
인간의 고통과 불행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게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보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인생의 지극히 작은 부분에 불과하고, 그렇게 보이는 부분을 통해서 내리게 되는 우리의 판단과 평가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정확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는 제자들처럼 거의 ‘땅의 일들’만 생각할 뿐, 하늘을 염두에 두고, 하늘의 일들을 헤아릴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 하늘에 땅을 이해하는 열쇠가 있는데 말이지요. 그래서, 땅에서만 이유를 찾고, 땅만 바라보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하늘 이야기를 들려 주신 것입니다. “그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시려는 것”이라고 말이지요. 하지만 우리가 이 말씀을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그 사람에게 그런 아픔을 ‘주시고’ 그런 불행을 ‘주셨다’는 그런 뜻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원래 인간이 경험하는 아픔과 불행은, 인간이 이 세상에 끌어들인 죄가 만들어 내는 당연한 결과이고 부산물이지 하나님의 피조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저 그런 것들을 ‘허용’하실 뿐입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우선 1절을 보면 이 이야기는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라는 문장으로 시작하고 있는데요. 이 말씀, 얼마나 은혜롭고 복된 말씀인지 모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그 높고 영광스러운 보좌 위에서도 이 땅에 살아가는 피조물의 고통과 아픔을 주목하여 보시는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시지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어 십자가를 향해 난 그 높고 험한 길을 걸어갈 때도 우리들의 고통과 불행에서 눈을 떼지 못하시는 우리의 구주이십니다. 그래서, 비록 이 세상에 있는 그 모든 아픔과 불행들이 전부 다 죄가 만들어낸 쓴 열매들이지만 오히려 그런 것들 덕분에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른 것이 아니라 맹인의 어두움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그의 어두움에 뛰어들어 그 어둠을 걷어 버리고 빛을 찾아 주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이 세상의 빛이시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고난이 가지고 있는 역설입니다. 우리의 고난과 고통은 그것 자체로는 선한 것이 아닙니다. 해결해야 할 문제이고 결함이며, 죄가 만들어 낸 부산물이지요. 하지만, 주님은 이런 고통과 고난을 통해서 우리가 당신을 분명하게 보고 만질 수 있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실제로 확인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욥도 그랬지요. 욥은 평소에 하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욥만큼 하나님을 잘 아는 사람도 없었지요. 하지만, 그가 모든 고난을 겪어낸 다음 뭐라고 말합니까?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욥은 그 고난을 경험하고 나서야 자신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 정말로 보잘 것 없었고, 그제서야 겨우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고통과 고난을 주시는 것은 그저 벌을 주시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통을 허락하시는 것은 그 자리에 있을 때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고통과 고난이 우리의 마음을 가난하게 만들어 주고 그래서, 그 고난의 자리로 오시는 하나님을 가장 분명하게 보고 경험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맹인의 타고난 어둠은 그에게 엄청난 고통이고 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어둠 덕분에 빛되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 분이 빛이 되어 주시는 은혜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우리의 고난과 고통이 선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통해 우리에게 하나님의 선하신 마음을 알려주시고, 하나님을 보여 주시고 만질 수 있게 해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고통과 고난을 통해 하시려는 ‘하나님의 일’이고 또 우리가 꼭 보아야 하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불완전한 세상에서 죄인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 말은 고난과 고통은 인생의 필수 조건이 될 수 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것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선한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며 우리에게 하나님을 보여 주시고 만질 수 있게 해 주십니다. 그렇게 우리의 믿음 없음을 도와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해 주십니다. 이것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과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을 알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시며 우리의 아픔에 마음을 두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시지요. 그리고, 진짜로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을 보여주시고, 또 경험하게 해 주십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믿음을 자라게 해 주시고,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로 살게 해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고통과 고난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첫번째 하나님의 일’입니다.
제자들은 누구의 ‘죄’ 때문에 그 맹인이 그런 고통을 당하게 되었느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을 통해 나타내실 ‘하나님의 일’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런 짐을 허락하신 것이라고 대답해 주셨고요. 그런데, 4절로 넘어가면서 예수님은 말씀의 방향을 살짝 바꾸셨습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라고 말이지요.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예수님에게 맡기신 ‘하나님의 일’을 제자들과 우리들을 향한 소명으로 연결시키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 맹인의 눈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그 맹인의 눈을 고쳐주시면서 그 일을 제자들이 감당해야 할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시기 위해서도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맹인을 고쳐 주실 때, 예수님은 꼭 이런 방식으로 그를 고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만으로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눈을 뜨라’는 말씀 한 마디면 충분합니다. 아니, 그런 생각만 하셨어도 그 맹인은 눈을 떴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이런 복잡한 방법으로 그 사람의 눈을 고쳐 주셨다면 거기에는 무언가 특별한 이유가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우선 예수님은 땅에 침을 뱉아서 흙을 이겨 진흙으로 만든 다음 그의 눈에 바르셨는데요. 한 번 같이 생각해 볼까요? 성도 여러분, 이렇게 해버리면, 그래서 진흙이 말라 버리면 그 사람의 눈은 어떻게 될까요? 눈이 떠질까요, 아니면 이전보다 더 확실하게 감겨질까요? 더 확실하게 감겨집니다. 눈거풀도 움직이지 못하게 되니까요. 그리고, 그 전에 희미하게라도 빛을 느낄 수 있었다면 이제는 그 희미한 빛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치유는 이 때부터 시작됩니다. 주님은 그 사람을 실로암 연못으로 보내셔서 눈에 덕지덕지 엉겨붙어 딱딱하게 굳어버린 진흙을 씻어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맹인은 실로암으로 가서 눈을 씻었고, 밝아진 눈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런데, 7절 뒷부분을 보면 요한은 괄호 안에다가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고 그 연못 이름의 의미를 알려주면서 우리를 한 번 더 실로암 연못에 대해서 생각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의 눈에 그렇게 진흙을 바르신 것은 그를 통해 이 세상의 영적인 상태를 보여주기 위해서 였습니다. 이미 요한은 요한복음의 첫부분에서 이 세상과 사람들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안에,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이 모든 말씀 속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의 이 세상에 대한 진단은 이 세상은 철저히 눈 멀어 있다는 것입니다. 눈에 빛이 비춰져도 그 빛을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어둠이 좋아 빛을 피해서 더 깊은 어둠으로 들어가 버릴 정도로, 사람들의 눈은 욕망과 죄악의 진흙이 덕지덕지 발라져 굳어져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진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맹인을, 영적으로 완전히 눈 멀어 있는 이 세상처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사람을 실로암 연못으로 보내셨고, 그 곳에서 눈을 씻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맹인은 난생처음 빛이라는 것을 볼 수 있었고, 그 빛을 통해 이 세상의 모습도 볼 수 있었지요. 그렇게 뜨여진 눈으로 빛을 통해 바라보는 이 세상의 모습은 그가 어둠 속에서 상상하던 이 세상의 모습과 얼마나 많이 달랐겠습니까? 그래서 실망도 했고, 놀라기도 했겠지만 그는 비로소 자신과 이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요한이 준 힌트대로 이 ‘실로암’이라는 단어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은 이 실로암이라는 말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기억 나실 겁니다. 우리는 이미 요한복음에서 ‘보냄을 받았다’는 말을 여러 번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였는데요. 그런 말씀들 속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나를 보내신 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서른 번씩이나 말이지요. 이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생각할 때, 늘 ‘하나님으로 부터 보냄을 받은 자’로 생각하고 계셨다는 뜻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그 맹인을 ‘실로암’ 연못으로 보내 눈을 씻게 하실 때, 예수님은 하나님과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완전히 눈 멀어 버린 세상을 자기 자신에게로 초청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세상을 향해 외치셨지요. 내가 진짜 실로암이다. 나에게로 와서 이미 눈 멀고 세상의 진흙으로 덧칠해진 그 눈을 씻지 않으면 계속 어둠 속에서 빛도 없고 생명도 없이 혼란스러운 삶을 살 수 밖에 없다고 말입니다. 그리고는 그 눈을 씻어 다시 보게 만드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제자들 앞에서 하시면서 이러한 ‘하나님의 일’이 ‘우리의 일’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으니 그것은 제자들과 오늘 우리들을 향한 주님의 부르심인 것이 분명합니다. 제자들은 그 날 내가 이 사람을 실로암으로 보내 치유한 것처럼 너희들도 이 세상의 눈 먼 사람들, 그래서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나에게로 데리고 오라고, 진짜 ‘실로암’으로 보내라고 하시는 주님의 부르심을 듣게 되었던 것입니다.
모두가 맹인의 어둠을 손가락질 하고 죄인으로 낙인 찍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 어둠 때문에, 그 어둠을 통해 그 맹인을 만나셨고, 그 맹인의 빛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 어둠을 통해 하나님을 보여 주셨고, 또 만지게 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그가 죄를 지어 벌을 받는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것을 모두에게 알려 주셨지요. 그리고, 예수님은 그 맹인의 어둠을 ‘통해’ 당신은 눈 먼 세상에 빛을 주는 진짜 실로암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하나님의 일’이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어둠, 이 세상의 어둠은 그대로 놓아두면 그저 어둠으로 남아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어둠은 늘 우리와 이 세상을 혼란스럽고 불행하게 만들지요. 하지만, 주님은 그 어둠을 통해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에게 당신의 빛 되심과 하나님 되심을 알게 해 주십니다. 우리는 이미 이 은혜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뜨여진 눈으로 이 세상을 보고, 하나님을 보는 특권을 누리고 있지요. 주님은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여전히 어둠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실로암으로 보내라고 하시지요. 그렇게 우리가 주님과 함께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랬듯이 이 세상도 우리를 통해 그들의 어두워진 눈을 뜨게 되기를 소원하고 계십니다.
영원한 실로암이신 예수님께서는 맹인의 어둠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빛을 주셨고,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세상의 빛이라는 것도 드러내 보이셨지요. 뿐만 아니라 주님은 그 맹인의 어둠을 통해 제자들을 하나님과 세상을 위해 영광스러운 일을 하도록 불러 내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한 사람의 어둠을 통해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리 각자에게도 자신만의 어둠이 있을 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어둠은 빛이시고 실로암이신 예수님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주님은 그 어둠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시고 이루시니까요. 이 모든 일은 우리 주님이 어둠이 조금도 없으신 빛이시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 맹인의 어둠을 통해 그 맹인을 사랑하셨고, 또 어둠 속에 있는 세상을 실로암으로 초청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있는 크고 작은 어둠도 그렇게 사용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어둠이 우리 주님의 빛되심을 경험하는 통로가 될 뿐 아니라 이 세상에 빛을 주고 사람들을 눈 뜨게 하는 귀한 도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우리 안에는 늘 크고 작은 어두움이 있습니다. 이 시간 그 어둠들을 주님께 맡기십시다. 이 어둠이 빛이 되게 하소서. 빛으로 바꿔 주소서. 이 어둠이 하나님을 알고 경험하는 통로가 되게 하소서.
- 우리의 어둠을 사용하여 주소서. 여러움과 고통, 마음의 어둠들이 주님 손에 들린 세상을 위한 도구가 되게 하소서. 우리도 어둠 속에 있는 자들을 실로암되신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역할을 감당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