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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9.09.22.요한복음 9장 8-43절 '내가 세상의 빛이로라(2)'

 

 

 

 

날짜 :  2019년 9월 22일 일요일

본문 :  요한복음 9장 8-41절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는 ‘팩트체크’라는 생소한 말이 당연한 듯이 사용되고 있는데요. 우리가 무언가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전에 사실이 무엇인지를 체크해 보는 것은 절대로 나쁜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바람직한 일이지요. 그래야 더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으니까 말이지요. 하지만, 요즘 우리 사회에서 팩트 체크가 그렇게 자주 이루어지고 있고, 그 일의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는 것은 전혀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에 근거 없는 가짜 뉴스나 사실의 일부를 살짝 바꿔서 다른 이야기로 만들어 버린 조작된 이야기들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고 그래서 이제는 무엇이 진실인지를 따져 보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는 뜻이니까요. 그런데, 참 놀라운 것은 그렇게 분명한 근거와 자료를 가지고 팩트를 체크 해 주어도 이미 가짜 뉴스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좀처럼 이전의 자기 생각과 판단을 바꾸려 하지 않고 그저 자기 입장만 계속 고집한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증거와 근거를 가지고 정확한 정보를 알려주면 이전의 잘못된 것을 버릴 것 같은데 그게 그렇지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나면서 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한 사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는 그에게 다가가셔서 침으로 진흙을 이겨서 눈에 발라 주시면서 실로암 연못으로 가서 눈을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실로암으로 가서 눈을 씻은 다음 밝은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 밖에 없는 팩트이고 변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예수님이 세상을 위한 빛이시며,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어둠에서 벗어나 생명의 빛을 얻게 된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었지요. 그러면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게 사실이라면 사람들은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시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사건이 워낙에 믿기 힘든 사건인지라 그 남자의 주변 사람들은 저마다 팩트 체크에 들어갔습니다. 동네 사람들, 그 남자를 알고 있던 사람들, 그리고 바리새인들… 그들이 그렇게 직접 팩트를 체크해 본 후에 발견한 사실은 딱 하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맹인에게 진흙을 발라 주었고, 그 맹인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실로암 연못에 가서 그 진흙을 씻어내고 눈을 뜨게 되었다는 것이었지요. 그것이 유일한 팩트였던 겁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은 모두  똑같이 반응해야 합니다. 이 사건이 그들에게 “그렇다면 과연 예수님은 누구신가?”라는 질문을 던졌다면 정답은 아니더라도 정답에 근접한 답을 내놓아야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하나의 사실에 대해서 모두들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고 그 반응들은 정답과 많이 달랐을 뿐 아니라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더 정답에서 멀어지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바른 신앙이란 것은 결국 ‘진리에 대한 올바른 태도이고,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반응’이기 때문에 이 사람들의 다양한 반응은 ‘뭐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니 그럴 수 있지’하고서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 반응에 구원과 영생의 문제가 매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은 왜 하나의 사실 앞에서 저마다 다른 반응을 보였을까요? 그 무엇이 그들이 예수를 믿고 구원얻지 못하게 가로 막아 구원과 영생에서 멀어지게 만든 것일까요?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하면 이런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지 않을 수 있을까요? 오늘은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 중에서 맨 먼저 나오는 두 부류의 사람들, 그러니까 동네사람들과 지인, 그리고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살피면서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좀 찾아보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들도 진리 앞에서 곧잘 이런 장애물들에 걸려 넘어지기 때문입니다. 

제일 먼저 등장하는 사람들은 앞을 보지 못했던 그 남자과 같은 동네네에 살았던 사람들과 그가 길에서 구걸하던 것을 늘 보아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에게는 그 남자가 나면서 부터 앞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 자기들이 나면서부터 볼 수 있었다는 것만큼이나 분명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사람들은 그 남자가 평생 눈이 멀어 있다가 눈을 떴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확인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었던 셈이지요. 하지만, 실제로는 그랬기 때문에 더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원래 절대로 뒤집힐 수 없는 사실이 뒤집히면 사람은 혼란스러워지는 법이니까요. 이 사람들 중 일부는 저 사람이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사람이 맞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과 꼭닮은 다른 사람이라고 했지요. 그렇게 설왕설래하다가 결국 당사자가 계속 내가 그 사람이 맞다고 이야기 하니까 모두들 그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이게 되기는 했는데요. 하지만, 이들은 그 일을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생각하고 믿음으로 연결시키는 데까지는 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 일을 들고서 바리새인들한테 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사람들이 보인 반응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들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들을 보고 그것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이해력’ 뿐만 아니라 그 일의 의미를 가르쳐 줄 사람을 분별할 수 있는 ‘분별력’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도 유대인들이었습니다. 12살이 되어 성인식을 치른 다음에는 수십년 동안 매 안식일마다 회당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듣고 또 들었던 사람들이었지요. 그렇기 때문에 그 내용만 대충 기억하고 있었더라도, 그런 일을 한 사람이 있다면 적어도 그 사람은 적어도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라는 것 쯤은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거기서 조금 더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맹인의 눈을 뜨게 하는 일은 메시야께서 하실 일로 예언되어 있다는 것도 기억해 냈을 것이고 말이지요. 하지만, 그 사람들 중에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찾아가 도움을 구했던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이미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있다면 더 이상 회당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하겠다고 엄포를 놓은 예수님의 반대자들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들에게 찾아가 봤자 그 사건에 대한 바른 가르침을 들을 수는 없습니다. 그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지요. 하지만 이들은 그저 습관처럼 바래시인들에게로 갑니다. 가서 그 일에 대해서 문의했습니다. 그들이 그저 바리새인들이라는 이유만으로 자기들에게 바른 가르침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만 보면 이 사람들의 행동은 상식에서 많이 벗어나는 것 같습니다만, 사실 오늘도 이런 일은 드물지 않게 반복되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교회에 오래 다녔다고 해서, 어떤 일이나 사건의 영적인 의미를 깨달을 수 있는 이해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성경을 배우고 설교를 들었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실제로 그 두 가지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물론 이런 일은 일차적으로 가르치는 사람들이 잘못 가르쳤기 때문에 일어난 비극입니다. 그 점에서는 저도 피해자였지만, 이제는 목회자가 된 한 사람으로써 성도들을 볼 때마다 굉장히 부끄럽고 죄스럽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자기에게 바른 답을 들려줄 수 있는 선생이 누구인지를 분별하는 일은 그 사람의 몫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제가 예전에 교회에 나오신 지 얼마 안 되었지만 말씀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계신 성도 한 분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이야기 중에 그 분이 옛날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가 교회에 나온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고 하면서 이전에도 한동안 어떤 교회에 나가신 적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잘 몰랐지만, 설교를 몇 번 듣다 보니까 점점 더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금새 그 교회에 나가기를 그만 두었고, 그러다가 다시 교회에 나오게 되었다고 말이지요. 이것 저것 묻다 보니 거기는 구원파였습니다. 저는 가슴을 쓸어 내리면서 참 잘 하셨다고, 정말 감사한 일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고쳐 주신 그 남자의 이웃들과 지인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회당에 나가서 말씀을 들었으면서도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의 의미를 전혀 깨닫지 못했고, 또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답을 들으려고 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동안 그들이 무엇이 진리인지,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그런 것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놀라게하고 당황하게 만드셨을 때, 그것을 예수님을 향한 영적인 궁금증이나 믿음으로 조금도 연결시키지 못했고, 바리새인들이라는 답을 줄 수 없는 사람을 찾아가서 답을 얻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출발점이 어떠하든지 간에, 자신의 스타일이 어떻든지 간에 성도라면 반드시 받아들여야 할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는 결국 어느 시점에는 진리에 대해, 영적인 문제들과 자기 구원의 문제에 대해 진지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니 꼭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만 그랬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만,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가벼움’을 미덕이요 선으로 생각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니까 진지하고 묵직한 것은 못 견디어 하는 사람들의 시대이지요. 심지어는 재미 없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진지한 사람들을 벌레 충자를 써서 ‘진지충’이라고 비아냥 거리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까지도 목회자들과 성도들까지도 이런 세상을 닮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는 진지함을 견디지 못하고 무거움을 좀처럼 참아내지 못합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진리를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는 종교입니다. 이 세상과 우리 인생의 본질, 하나님 나라와 영원이라는 묵직한 주제를 중심에 품고 있는 신앙을 가지고 있지요. 그래서, 진지하지 못하면, 묵직한 것들을 참아내지 못하면 진짜 기독교 신앙에는 다다를 수가 없습니다. 참된 자유와 홀가분함은 그 묵직하고 진지한 것들 뒤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이  십자가 뒤에 있듯이 말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하면, 진리가 무엇인 줄 알게 되고, 그리고 나서야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해 준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 남자의 이웃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서도 그것을 통해 예수님의 그림자도 보지 못했습니다. 교만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무슨 거창한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 앞에서 모든 것들을 곰곰히 헤아려 볼 줄 아는 진지한 태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오랜 신앙생활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영적인 이해력과 분별력을 가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이야기 속에 두번째로 등장하는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인데요. 사실 오늘 본문 이야기의 대부분은 이 사람들이 이끌어 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만큼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에 대해서 생각하고 고민할 기회를 많이 가졌다는 뜻이 되는데요. 그렇지만 바리새인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오히려 예수님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져 갔습니다. 그러다가 자기들을 향해서 열려진 그 구원과 영생의 분을 자기 손으로 닫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출발점부터 잘못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전혀 전에 가지고 있었던 예수님에 대한 생각을 바꿀 의도가 없었고, 예수님을 믿고 태도를 바꿀 생각은 더더욱 없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이 사건을 맞닥뜨리게 된 것이지요. 그러니, 이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멀리 벗어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우선 그 남자에게 어떻게 해서 앞을 보게 되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런데, 15절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그 질문을 한 것이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고쳐 주신 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이었다고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그들은 사실을 알고 싶어서 질문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체크하고 싶었던 팩트는 따로 있었지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어떤 식으로 안식일을 어겼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남자는 있는 사실 그대로를 말해주었고, 바리새인들은 무릎을 쳤습니다. 그들이 지키고 있는 장로들의 전통에 따르면 예수님은 두 가지의 안식일 규정을 어겼습니다. 첫째, 안식일에는 목숨이 위태로운 사람이 아니면 치료해 주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둘째, 무엇을 반죽하는 것도 금지하고 있었지요. 그러니, 침으로 흙을 반죽해서 그 남자의 눈에 발라 고쳐준 것은 이중으로 안식일을 범한 셈이 되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금방 결론을 내려 버립니다. 예수라는 사람이 안식일을 범하였으니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이 아니라 죄인이라고 말이지요. 그렇지만 모두가 다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만 결론을 내리기에는 복잡한 문제가 하나 남아있었으니까요. 그 문제는 바로 “만약 예수가 그런 죄인이라면 나면서부터 맹인인 사람을 고치는 것같은 이적을 행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통해 그런 일을 하실 리가 없으니까요. 그들은 이 두 가지가 충돌하며 만들어 내는 문제를 풀지 못했고, 그래서 둘러 나뉘어서 서로 다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결론이 났을까요? 결론이 나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그 남자에게 물었지요. 만약 그 예수라는 사람이 너를 고쳐 주었다면 너는 그 사람을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말이지요. 남자는 그저 당연한 듯 대답합니다. ‘선지자입니다’라고 말이지요. 그런데요, 참 이상하지요? 그 대답을 듣자 마자 그들은 다툼을 딱 멈춥니다. 그리고, 모두가 다 그 남자가 맹인이었다가 눈을 떴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생각과 판단이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았지만 모두가 다 예수님을 선지자로 인정하기 싫어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아예 그 사건 자체를 부정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사건이 부정되면 지금 하고 있는 논쟁 자체가 필요 없어지니까요. 사람의 마음은 절대로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무언가 강하게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마음 전체가 그리로 움직입니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뻔한 사실을 부인하고 또 전혀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믿어 버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우리 마음을 잘 살피고 간수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생각 뿐만 아니라 우리의 믿음까지 마음 전체의 방향이 완전히 잘못된 곳으로 흘러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떻습니까? 그 남자가 맹인이었다는 사실을 부인하려면 거기에도 증거가 필요 합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그 남자의 부모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의 부모에게 다그쳐 물었습니다. 이 남자가 너희가 말하는 나면서부터 맹인이었다가 앞을 보게 된 너희의 아들이냐?고,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해서 보게 되었느냐고 말이지요. 바리새인들은 이 남자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고 그것을 부모들을 통해 확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들도 바리새인들이 원하는 답을 들려주지는 않았습니다. 두번째 질문에는 잘 모르겠다고, 아들에게 직접 물어 보라고 하면서 대답을 피했지만, 첫번째 질문에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 했습니다. 그래도 부모인데 저 살자고 그 남자가 아들을 아들이 아니라고 하고 아들이 앞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그 남자에게 또 다시 질문을 하게 되는데요. 그들은 질문을 하기 전에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라고 말합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빙자한 협박이었습니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라는 사람은 안식일을 어긴 죄인이라고 말이지요. 그러니 너는 우리가 정해놓은 답만 따라오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 답은 바뀔 수도 없고, 바뀌어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바리새인들은 무엇이 사실인지 아닌지, 무엇이 진리이고 아닌지 거기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자기들이 믿는 대로 예수를 죄인으로 만드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까지 들먹이며 그 남자를 협박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답정너’라는 말 들어보셨습니까? 요즘은 이런 바리새인 같은 사람들을 두고 ‘답정너’라고 부르더라고요. ‘답은 이미 정해져 있으니 너는 내가 원하는 것만 말해’라는 태도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말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답정너들 좋아하세요? 이런 사람들 옆에 계시고 싶으세요? 하나님도 그렇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도 좋아하지 않을 ‘실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많이 버거워 하실 것은 분명합니다. 답정너들은 하나님도 설득하시기가 어려우실 테니까요. 

 

그런데, 그런 협박을 받고서도 그 남자는 예수님이 죄인이라는 것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계속 그 예수라는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다고 주장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결정타를 날리지요. 그 남자의 논리는 아주 단순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죄인의 말을 듣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둘째 그런데, 예수라는 분이 나면서 부터 앞을 보지 못 했던 나를 고쳐 주었다.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그 분은 죄인이 아니라 경건한 사람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일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 전에도 그 남자는 예수님이 선지자라고 주저 없이 대답했던 것이지요. 사실 이야기의 시작부터 본문 전체의 중심에 놓여있던 진리가 바로 하나님은 죄인의 말을 듣지 않으신다는 가장 기초적인 신앙의 원리였습니다. 애초에 바리새인들도 그것 때문에 다투었던 것이니까요. 성도 여러분, 사람은 언제 혼란에 빠질까요? 언제 아집에 빠져서 진리에서 멀어져 갈까요? 그것은 바로 너무나 명확하고 당연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할 때입니다. 그러면 사람은 혼란에 빠집니다. 그것 때문에 말이 횡설수설해지고 앞과 뒤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거짓은 언제나 무질서와 혼돈을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이제 바리새인들은 말문이 막혀 버립니다. 그렇지만 무슨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되니까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라고 그 남자를 윽박지르고는 회당에서 출교시켜 버리고 맙니다. 참 우습지 않습니까? 이 사람들은 명색이 성경의 전문가인 바리새인들이면서도 사람의 고난에 대한 아주 얄팍한 이해 밖에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남자를 향해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났다고 하면서 윽박지른 것이지요. 이들 또한 제자들처럼 ‘하나님의 일’을 전혀 보지 못하는 영적인 맹인들이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들은 그 남자를 회당에서 출교시켜 버리는데요.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일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을 출교하겠다고 결정했는데, 그 남자는 한 번도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아직은 그런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할래야 할 수도 없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힘을 남용해서 그 남자를 내쫓아 버렸던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가요? 그 때 진짜로 쫓겨난 것은 그 남자가 아니라 바리새인들 자신이었습니다. 그 순간 그들은 진리와 영생의 문 밖, 그 빛이 없고 어둠만 있는 곳을 스스로를 내쫓아 버리고 만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빛으로 오셨고, 늘 빛을 비추고 계십니다. 이것이 유일한 팩트이고, 예수님에 대한 변하지 않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대하는 모든 사람이 빛으로 나오는 것도 아니고, 그 빛 안에서 점점 더 밝고 빛나는 삶을 살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늘 사람들 속에는 이 빛을 빛으로 알아보지 못하게 하고, 또 빛을 거부하게 만드는 장애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우리는 빛에 대한 무관심, 진리에 대한 무관심이라는 장애물을 치워 버려야 합니다. 진리는, 주님이 비추시는 빛은 진지하고 묵직합니다. 그래서, 이 진리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 계속 가벼움만을 사랑하려는 사람들은 이 빛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빛이 비춰도 혼란스러워하기만 할 뿐, 그 빛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빛을 받아들이려면 우리는 진리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설사 우리가 진리를 안다고 해도 우리가 곧 진리는 아니니까요. 그리고 진리를 받아들이려면, 더 밝은 빛으로 나가서 그 빛 가운데서 살기를 바란다면 너무 나를 주장하면 안됩니다. 태양에 비한다면 촛불 한개에도 못 미치는 나의 빛은 그 태양 앞에서 기쁘게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빛을 받아들이려면 정직해야 합니다. 나의 진리, 내가 좋아하는 빛을 지켜내려는 욕심 때문에 더 밝고 따뜻한 빛을 꺼버리려고 하면 안됩니다. 그러면, 나는 또 다시 어둠이 됩니다. 나를 향해 열린 진리와 영생의 문은 또 다시 닫혀 버리고 맙니다. 

 

주님은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 빛을 우리 앞에 언제나 비춰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빨리 그 빛으로 나와서 그 빛 안에서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이고, 우리에게 정말로 주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꼭 세상의 빛으로 오신 주님 안에서 영생과 자유를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그 밝은 빛이 비춰주는 환한 삶을 살다가 그 빛을 따라 영원한 빛의 나라로 들어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