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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교회 설교/기타

2009.12.20. 1부예배 -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본문 : 로마서 413-18

 

미국 뉴욕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한 때는 뉴욕이라는 도시, 그리고 나아가서 미국 이라는 나라의 상징물처럼 여겨지는 건축물이었습니다. 그 빌딩의 전망대에 꼭 올라가 보아야 미국에 다녀온 것이라고 여겨질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그 건물이 그런 대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건물의 높이 때문이었습니다. 층수로 하면 102층 높이로 하면 381미터나 됩니다. 그 앞에 서서 위를 올려다 보면 그 꼭데기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니 사람들이 그 높이에 압도될 만도 합니다. 사람들은 높은 건물을 보면 저절로 탄성을 지르게 됩니다. 그 높이와 규모가 사람 을 저절로 그렇게 만드는 것이죠. 요즘이야 사막의 모래 위에도 162층 짜리, 818미터 높이의 버즈 두바이 같은 건물을 지을 수 있지만, 지금보다 건축술이 훨씬 뒤떨어져 있었던 1931년에 그런 건물을 지으려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건 바로 그런 건물을 세 울 수 있는 지반이었습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세워질 수 있었던 것은 그 지반이 거대 한 바위로 되어있던 덕분이었습니다. 그 견고한 지반이 그 엄청난 무게가 만들어 내는 압력을 견뎌주고 있기 때문에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그 때나 지금이나 동일한 자리에 우뚝 서서 사 람들의 감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지지난 주일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인생을 그릇삼아 담아놓으신 복음을 들었 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누구도 이의를 달 수 없는 믿음의 조상입니다. 그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라는 은혜를 받은 최초의 인물이라는 점에서도 그렇고, 또 아들의 목숨을 내어놓는 믿음의 순 종을 보인 인물이라는 점에서도 그렇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그의 아들을 바치는 순종 앞에 서면, 그를 본받아야 하겠다, 그와 같은 믿음을 가져야 하겠다라는 마음을 품기도 전에 그의 믿음의 크기와 높이에 압도되어 할 말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 정말 대단한 믿음이다!'라는 말만 되풀 이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어떻게 해서 하나님이 요구하면 묵묵히 100세에 얻은 하 나 밖에 없는 아들까지도 아끼지 않고 바칠 수 있는 믿음에 이르게 되었을까요? 어떻게 그렇게 불가사이한 순종을 보일 수 있었을까요? 혹시 높은 건물 밑에는 그 건물의 무게와 압력을 견딜 수 있을만큼 견고한 기초가 있듯이, 아브라함이 그런 높은 믿음, 그 든든한 믿음을 가지게 된 것 은 무언가 그의 믿음을 떠받치고 있는 기초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답부터 말씀드리면, 그렇 습니다. 그의 그런 믿음에는 그 믿음을 떠 받치고 있는 기초가 있습니다. 그저 꽉꽉 믿는 것 말 고, 사실은 잘 안 믿어지면서도 확실히 믿는다고 생각해 버리는 그런 것 말고 정말 확고하고도 든든한 믿음의 기초가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이 그런 믿음의 기초가 무엇인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미리 한 가지를 말씀드리면 견고한 믿음의 기초가 되는 것은 바로 그 믿음의 내용입니다. 뭘 믿느냐가 바로 믿음의 기초입니다.

본문의 13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아주 엄청난 복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세상 의 후사, 그러니까 세상의 상속자가 되게 해 주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13절은 그것이 율법이 아니라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율법이라는 것은 성경이 말하 는 행위, 그러니까 무언가를 얻기 위한 공로나 인정받을만한 행동을 통칭하는 말입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이 받은 복된 약속이 결코 그가 그 약속이 보장하고 있는 복을 받을만한 무슨 공을 세 웠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아브라함의 믿음 이야기를 하면서 이 이야기를 제일 먼저 분명하게 하는 것은 사람들이 자꾸 믿음마저도 일로, 자신의 공로로 만들어 버리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제일 떨쳐버리기 힘든 사고방식이 바로 '인과응보'라는 법칙 입니다. 우리는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있다고 믿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내 쪽에서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데 엄청난 결과가 나에게 주어진다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합니다. 귀하고 소중 한 일일수록 내가 뭔가 공헌한 바가 있어야 마음이 편합니다. 그래서, 믿어야 구원받는다는 말을 들어도, 믿음을 구원의 조건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내가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 믿음이 구원을 위한 공로가 될 수 있어야만 안심할 수 있는 것입니 다.

그런데, 만약 믿음이 공로가 되고 조건이 되면 은혜는 헛것이 됩니다. 그러면 은혜로만 가 능한 구원도 그 은혜와 함께 사라지고 맙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대개는 "누가 구원이 은혜 가 아니라고 하나? 누가 믿음을 공로라고 하나?"라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실제의 삶을 살펴보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 믿음에 대해서 자랑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것 도 겉으로 드러나는 믿음생활의 모습을 통해서 말입니다. 내가 교회에서 무슨 무슨 일을 하고 있다, 내가 무슨 무슨 직책을 맡고 있다, 내가 성경을 몇 번 읽었다, 내가 새벽 기도를 며칠동안 했다 등등... 우리는 헤아릴 수 없을만큼 많은 믿음에 속한 행위를 자신의 공로로 자랑하고 있습 니다. 그리고 그 자랑 위에 믿음을 세워가려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아직도 믿음이 은혜라는 말 과 동의어라는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바울은 딱 잘라서 "믿음은 일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바로 이것이 4장 전체에 걸쳐서 계속해서 반복되는 아주 중요한 이 야기입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내용, 그러니까 그의 믿음을 받치고 있는 기초가 무엇이 냐를 이야기하기 전에, 만약 아브라함의 믿음같은 믿음이 되려면, 무엇보다도 그 믿음을 일로 이 해하고, 그렇게 접근하려고 해서는 안된다고 못 박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견고한 믿음을 논하 기도 전에 이미 믿음은 믿음이 아니게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열심히 신앙생활 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열심히 신앙에 속한 일을 한 다고 해도, 그것으로 '내가 무엇을 한다'는 생각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그게 우리의 믿음을 은혜에서 이탈하게 하고, 구원을 은혜 아니게 하는 주범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무엇보 다도 일이 아니였습니다. 그래서 결코 공로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 약속을 받고 또 믿기 위해서 그가한일이란아무것도 없습니다.안믿어지는것을믿으려고기를쓴적도없습니다.그믿 음을 만들어 내기 위한 재료를 제공한 적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복된 약속을 주셨는데, 그저 그 약속이 믿어진 것입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그 믿음을 그의 의로 여기 셨습니다. 그 동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이리 저리 데리고 다니시면서 여러가지 엄청난 것들 을 보여주셨고, 그렇게 그 약속을 믿을 수 있는 준비를 다 시켜 놓으신 후에 약속을 주셨고, 그래 서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믿을 수 있었더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그 믿음이 있다는 것을 보였을 때, 바로 그 믿음을 그의 의로 여겨주셨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믿음도 이와 같지 않습니까? 모든 참된 성도의 공통된 고백은 지금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자기가 믿으려고 해서 믿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일 것입니다. 그게 무엇이든지 내가 믿을 수 있는 준비를 다 갖추어 놓으신 후에, 복음을 주셔서 우리가 그것을 믿 게 된 것입니다. 그저 믿어지니까 믿은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은 그걸 우리의 의로 여겨주신다 는 것입니다. 그렇게 출발되고 그렇게 진행되어지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며 또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우리의믿음은은혜라고밖에 표현할길이없고,우리의의와구원도은혜일수밖에없 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믿는다'고 말할 때,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할 때, 그 믿음 의 참된 의미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이 아닌 믿음, 결코 "공로"가 아닌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 롭다 하심을 얻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으려면 무엇보다도 이 사실을 분명히 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그러면, 이제 이런 그의 믿음의 내용을 살펴볼 차례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이렇게 믿음 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하심을 얻었던 그의 믿음은 나중에 하나님께 100세에 얻은 아들을 바칠 정도의,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믿음이 되었습니다. 의롭다하심을 얻은 믿음이 나중 에는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의인다운 크고 높은 믿음으로 성장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기에, 도데체 그가 신앙의 기초로 삼은 믿음의 내용이 무엇이었기에 그런 믿음으로 성장해 갔을까요? 전 확신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우리들의 믿음의 차 이란 바로 이 기초의 차이에 있고, 그게 다입니다. 그 내용, 그 기초가 다르기 때문에 그 위에 세 워진 건축물도 다른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시점은 그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을 때였습니다. 그렇 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창세기의 원래 기록으로 돌 아가 그 이야기를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여러 왕들과 싸워 힘겹게 조카 롯을 구해낸 아브라함에 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의 방패와 상급이다." 이 말씀을 들은 아 브라함은 감격하기는 커녕 매우 시큰둥해 합니다. "나에게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하나님. 하나 님께서 무엇을 주신 들, 저에겐 그걸 물려줄 자식조차 없습니다. 그저 종에게나 물려주어야죠." 그러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가 낳은 자식이 네 상속자가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고 그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그리고는 하늘을 가득 채운 별을 보게 하시면서 이렇게 약속하십 니다. "저 셀 수 없는 별만큼 네 자손이 많아질 것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놀랍게도 그 약속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겠다고 하니 그렇게 될 줄로 믿은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바로 그 믿음을 그의 의로 여겨주셨던 것입니다.

17절은 바로 이 일을 이렇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 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그리고 19절부터 21절은 그 믿음의 구체적 인 모습을 더 자세히 풀어줍니다.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 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 음에 견고하여 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 으니..." 그리고 이것에 대해서 18절은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영어성경에서 찾아보니 번역하면 이런 식의 표현으로 되어 있었습 니다. "소망 중에서 그는 소망을 거스르며 믿었다"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남아있고, 소망의 조각 이라도 발견할 수 있어야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에게는 가능성이 없었습니 다. 둘 다 아들을 낳을 수 있는 상황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몸도 아내인 사라의 몸도 그런 능력 면에서는 이미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 다. 그런데도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러니 그의 믿음은 소망이 없는데도 믿는 믿 음, 가능성이 없는데도 믿는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믿음을 일종의 소망이라고 한다면 말 그대로 소망을 거스르는 믿음, 소망이라는 말 자체에 대항하는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그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단지 그렇게 말씀하신 분이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아브라 함은 하나님이 능히 그 약속을 이루실 능력이 있는 분인 줄 알았기 때문에 소망이 전혀 없는 상 황에서도 믿음을 가질 수 있었고, 오늘 성경의 증언대로 믿음이 전혀 약하여 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 견고해져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믿었던 하나님의 능히 약속을 이루실 수 있는 능력 이란 바로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능력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의로 인정해 주셨던 믿음의 내용이란 바로 이것이었고, 성경이 보이는 소망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약해지지 않고 더 견고하여졌다고 증언하는 믿음도 바로 이것을 내용으로 하는, 이것을 기초로 하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이란 우리가 요즘 흔히 사용하는 말로 하면, 부활의 하나님, 창조의 하 나님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가 자기 몸과 사라의 몸이 자녀생산이라는 점에서 보면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통해서 큰 민족을 이루시겠다는 그 약속을 믿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믿는 하 나님, 그 약속을 주신 하나님이 다름아닌 부활의 하나님, 창조의 하나님, 그러니까 죽은 자를 다 시 살리시고 생명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이었기 때문입니다. 또 그가 나중에 100세에 얻은 하나 밖에 없는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려 했을 때, 그 일을 가능하게 했던 믿음도 바로 이 믿음이었습니다. 히브리서 1117절에서 19절까지를 보면 그것을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 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 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 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이삭을 통해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은 그 아들을 바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렇게 합니 다. 그러면 이삭은 죽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이루시려면 방법은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이삭을 다시 살리시는 길 밖에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바로 그것을 믿 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그의 믿음은 처음에도 그리고 나중에도 하나님께서 생명의 주이시며 부 활의 주라는 사실을 믿는 믿음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답입니다. 아브라함을 아브라함이게 했던 믿음, 그에게 의롭다하심을 받게 했고, 나중에 이삭을 기꺼이 바칠 수 있게 했던 그 믿음이란 바로 부활을 믿는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처음부터 이 기초 위에 높고 크게 세워진 든든한 건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23절과 24절을 보면 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 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이 구절이 아주 중요합니다. 여기에 우리 믿음의 모든 비밀이 담겨져 있습니다. 아브라함 은 아브라함 개인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가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 습니다. 그는 샘플입니다. 앞으로 의롭다하심을 받고, 구원을 받을 사람들은 다 이렇게 될 것이 라는 것을 보여주는 샘플입니다. 인간은 샘플과 실제의 제품을 다르게 만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샘플이 곧 제품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걸어갔던 믿음의 길은 바로 모든 믿는 자들이 걸어가게 될 믿음의 길이 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다시 살리실 것을 믿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것을 믿습니다. 대상 은 다르지만 내용은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끝까지 부활을 기초로 하는 믿음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큰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우리도 처음부 터 끝까지 부활을 기초로 해서, 그 위에 우리의 믿음을 세워가야 합니다. 그래야 그렇게 큰 믿음 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부활을 그저 죽음 이후에 일어나는, 죽은 다음에만 나하고 상관있는 사건쯤으로 만 생각합니다. 지금은 나하고 별로 상관없고 죽어야만 그 효력이 나타나는 사후보장보험같이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은 그것과 정반대입 니다. 그의 믿음은 부활의 하나님, 창조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부터 출발했습니다. 그가 그 런 하나님을 믿었을 때, 하나님은 그 믿음을 그의 의로 여겨주셨습니다. 우리가 기억하지 못해서 그렇지 사실은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받게 해 주었던 믿음도 부활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었습 니다. 우리 믿음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복음입니다. 그 복음을 가장 간단히 요약한다면 "하나님 이 인간이 되셔서 인간의 죄 때문에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셨다가 삼일만에 부활하셨다"는 것이 됩니다. 이 모든 내용을 진심으로 믿을 때, 우리 믿음의 기초로 삼을 때 비로소 믿음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부활입니다. 그 부활은 나머지 일들을 의미 있게 하고, 효력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 분의 성육신과 그 분의 죽으심은 부활 때문에 오늘날 우리들과 상관있는 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래서, 그 부활을 믿는 믿음을 보 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믿음을 붙들고 자신의 믿음을 더욱 높고 견고하게 세워갔지만 우리는 그 순간 부활을 믿는 믿음 은 뒤로 물려 놓고 전혀 다른 기초 위에 우리 믿음을 세워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렸 지만 높은 건물은 견고한 기초 위에만 세워질 수 있습니다. 요즘은 기술로 지반이 약한 것을 커 버하기도 하지만, 신앙이라는 건축에는 기술이 통하지 않습니다. 신앙이라는 건축물을 높고 견 고하게 세우려면 그 높이와 크기를 감당해 낼만한 기초를 찾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기초는 부활 밖에 없습니다. 부활만이 처음 우리에게 의롭다하심을 줄 수 있고, 부활만이 계속해 서 우리의 신앙을 더욱 크고 높은 믿음으로 세워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이 좋다, 나쁘다는 말을 들으면 자꾸 자기 자신을 봅니다. 내가 부족하다, 내 가 게으르다, 내 열심이 없다... 이런 말들로 자책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 신앙에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그 때뿐이고 우리 신앙과 삶은 곧이어 다시 원위치 되고 맙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왜 부족함의 깨달음과 자책 사이를 수없이 왕복하다가 결 국은 신앙적인 무기력에 빠져 그저 현상유지에 급급한 신앙에 머물게 됩니까? 그것은 우리 자신 의 열심이나 부족함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도 부분적인 이유는 될 수 있겠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아닙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저 인간적인 능력이나 열정 위에 세워진 내용없는 신앙이 진정으 로 크고 높은 신앙이 될 수 있겠습니까? 열정도 능력발휘도 그것을 계속되게 할 수 있는 동기가 있어야 오래 가고 시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동기는 바로 부활입니다. 우리에게 그런 능력을 줄 수 있는 것은 부활을 믿는 믿음 밖에 없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 없는 자를 있는 자처럼 부르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기초가 되어 우리 신앙을 든든하게 바쳐줄 때 우리의 신앙도 무력감에 빠지지 않고 계속해서 더욱 견고한 그리고 높은 신앙이 될 수 있는 것 입니다.

성도 여러분, 도대체 부활이란 여러분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부활이 지금 이 곳, 이 시간을 살아가는 여러분과 무슨 상관이 있으며, 여러분의 삶과 신앙에 무슨 영향을 미치고 있습 니까?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부활은 그가 그의 믿음을 세워가고, 그의 믿음을 그런 믿음이게 한 신앙의 전부였습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믿음 앞에서 감탄하고 놀라는 것은 그가 우리가 한계 라고 생각하는 그 지점을 넘어섰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이것만은 안됩니다'라고 생각하 는 것들 중에서 가장 넘기 어려워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자식입니다. 그런데, 아 브라함은 그 자식이라는 한계를 훌쩍 뛰어 넘어서 하나님을 섬겼기 때문에 우리가 그의 믿음 앞 에서 그렇게 놀라고 감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한계를 넘게 한 것이 바로 부활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분을 믿는 믿음"이었던 것입 니다.

사도 바울은 만약에 부활이 없으면 세상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보다 불쌍한 사람이 없다 고 말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말한 것은 성도가 이 땅에서 성도로 살면서 믿음을 지켜야 하는 이 유가 바로 부활의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믿음이 우리의 부활을 믿는 믿 음, 죽음이라는 더 이상 소망이 없는 상황에서도 그 절망을 넘어서서 영생을 바라볼 수 있는 믿 음이 되어 주기 때문입니다. 제가 신약성경을 읽고 묵상하면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 하나 있습니 다. 그것은 모든 신약성경이 바라보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부활이며, 부활의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그 부활과 더불어 주어지는 선물이구요. 부활이 없다면 사도 바울은 신약성경의 그 수많은 영적인 교훈들을 남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 그 스스로도 그 엄청난 고난과 고생을 참아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니 참으려 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그렇게 해 야할 이유가 전혀 없으니까요. 물론 성경은 성도의 땅에서의 삶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삶 자체가 절대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삶이 부활 이후의 영원한 삶으 로 이어지는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그 삶 속에서 현실을 뛰어 넘을 때, 비로소 부활이라는 영광스러운 소망의 성취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도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땅에서의 우리 삶의 문제들을 해결하라고 우리에게 당신의 그 귀한 능력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 다. 예수님께서 인간이 되어 땅에 오시고, 그 고생을 하시며 사시다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 신 것 또한 우리가 땅에서 살면서 만나는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원래 신앙이라는 것은 땅의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라기 보다는 땅을 넘어서게 하는 능력입니 다. 소망과 관심을 땅이 아닌 하늘에 두게 하심으로써 그 하늘을 바라보며 땅을 넉넉히 이기는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내용도 땅에 속한 일들에 대한 것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땅의 것을 더 쉽게, 더 많이 얻고, 땅의 문제를 해 결하는 것이 신앙의 중심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신앙이 아주 어렸을 때는 잠시 그래도 좋을지 모르지만 정말 성숙한 신앙, 견고하고 높은 신앙으로 성장해 가려면 신앙의 이유는 하늘에 있어 야 하며, 그래서 부활의 소망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문제들이 우리에게 아무리 크게 다가온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신앙생활이 믿 음으로 땅의 문제를 해결받는 것에 머문다면, 우리의 삶은 발이 땅에 묶인 삶이 될 수 밖에 없습 니다. 그래 봤자 우리의 관심은 여전이 땅에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믿음으로 땅을 극복 하시고, 그 땅을 넘어서시기 바랍니다. 그 동안 우리를 그렇게도 괴롭히고, 우리를 그렇게도 단 단히 묶어 놓았던, 우리 믿음을 그렇게 무기력하게 만들었던, 그 땅을 뛰어 넘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려면 가장 큰 땅의 절망을 넘어서 있는 부활을 우리 믿음의 기초요 중심에 놓는 수 밖 에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랬던 것처럼, 그 뒤를 따르는 사도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아니 참으 로 능력있게 살다간 모든 성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의 신앙도 부활을 바라보고, 부활로 가득 채워진 그런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의 믿음은 더 이상 우리를 자책감에 빠 져 무기력해 지지 않게 해 줄 수 있으며, 오히려 땅을 넉넉하게 이기는 우리를 위한 진짜 능력이 되어줄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간절하게 권면합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는 뜨거운 부활에 대한 믿음과 소망으로 여러분의 가슴을 가득 채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땅을 넘어서시기 바랍 니다. 훌쩍 뛰어 넘으시기를 바랍니다. 현실이 믿음의 발목을 잡을 때마다 부활을 바라보며 그 손을 떨쳐 버리시기 바랍니다. 부활을 믿는 믿음이 위대한 것은 그 뿌리가 땅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땅만 보지 마시고 부활의 믿음을 통해서 하늘을 바라보시며, 땅 보다 더 확실하고 분명한 하늘을 위해서 살아 보십시오. 그렇게 하늘에 뿌리를 두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아브라함 처럼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 르시는 분"이심을 확신하게 하셔서 참으로 견고하고 높은 믿음, 땅을 뛰어넘는 키 큰 믿음을 가 지게 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