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2010년 매일성경설교 14. 듣지 마소서

다시 편집하느라고 4월 18일 설교가 11일 설교 앞으로 옮겨졌습니다. 





본문 : 예레미야 27장 12-22절


서론 : 자존심은 어디에 써야 하는가?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자존심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냥 생각하기에는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가만히 살펴보면 이 자존심이라는 것은 사람에게 무척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때로는 자존심을 살리기 위해서 목숨까지도 아까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면 실제적으로 자존심이 가지는 의미는 상상외로 엄청나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이 자존심은 무엇일까요? 무엇 때문에, 어디다 쓰라고 하나님께서 이것을 인간에게 주셨을까요? 

자존심의 역할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자존심이라는 것을 왜 주셨는지를 알려면 먼저 언제 자존심이 상하게 되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언제 자존심이 상하던가요? 가만히 살펴보니 사람마다 자존심 상해하는 부분이 다르고 또 시점이 다른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아무리 건드려도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어떤 사람에게는 절대로 건드려서는 안되는 성역이기도 하고, 그래서 똑같은 대접을 받고도 어떤 사람은 전혀 개의치 않는데, 다른 사람은 펄쩍 펄쩍 뛰기도 합니다. 그래서, 언제 자존심이 상하게 된다는 공통된 시점이나 이유는 말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이 자존심이 건드려지고 상하게 되어지면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분노라는 반응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화를 내게 되고 공격적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화를 내게 되고 공격적이 되는 이유는 사실은 깨지고 무너져서는 안되는 무언가를 보호하려는 본능 때문입니다. 그걸 보호하려니 평상시보다 더 큰 힘이 필요하고 그래서 분노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존심은 무엇을 보호하려는 것일까요? 자존심이 상하는 경험은 우리에게 꼭 지켜야할 무엇이 상처받고 있다고 가르쳐 주는 것일까요? 그 답은 ‘자존심’이라는 말 안에 이미 들어있습니다. 자존심은 자기 자신을 지키라고 주신 것이고, 자존심이 상하는 경험은 바로 자기 자신이 공격받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우리 식으로 하면 “하나님의 형상”, 이나 “하나님을 닮은 성품”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원래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의 자기 자신이니 말입니다. 그래서, 원래 자존심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을 닮은 성품과 그 고귀함이 상처받을 때, 그것을 알아차리고 보호하라고 주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 자존심이 우리의 죄 때문에 그 기능이 많이 망가져 있습니다. 그래서,우리가 항상 경험하는 것이지만 자존심이 상해야 할 때는 상하지 않고, 자존심이 상하지 말아야 할 때는 자존심이 상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고귀한 성품들이 침해를 받거나 한 명의 인간으로서의 가치가 무시될 때만 자존심이 상해야 하는데 그렇지를 않은 것입니다. 원래 자존심은 이렇게 움직여야 정상입니다. 거짓말을 하고, 정직하지 못한 선택을 하면, 다른 죄를 지으면 자존심이 상해서 괴로워 견딜 수 없어져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주신 하나님의 형상과 성품을 망가뜨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반대로 남보다 가난한 것, 남들보다 능력없는 것, 남들 앞에 내놓을 것 없는 것에 대해서는 결코 자존심이 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건 우리 속의 하나님의 형상이나 그 형상으로서의 우리 속사람의 가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존심이 원래의 기능을 잘 하고 있다면, 자존심은 우리에게 아주 정확한 분별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일은 피하고 하지 않으면 되고, 그렇지 않은 일들을 선택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의 자존심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어느 정도는 망가져 있습니다. 그래서, 자존심만을 기준으로 무엇을 선택하고 버리는 일은 이미 지혜롭지 못한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예레미야냐, 거짓 선지자들이냐? 누구를 선택해야 하느냐? 

오늘 본문은 유다가 자신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될 운명에 처해진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서 그에게 주신 메시지의 일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서 계속해서 유다에게 경고를 하셨습니다. 죄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나라를 망하게 하고, 무너뜨리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왕을 비롯한 유다백성들은 설마, 설마하면서 그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가던 길에서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게 되었고, 이미 하나님의 진노의 잔은 기울어져 거기서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습니다. 돌이킬래야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이제는 그 징계를 피할 수가 없게 되었고, 그래서 고스란히 정해진 징계를 다 받아야 하는 처지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당시 유다의 왕이었던 시드기야는 징계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전처럼 하나님께서 바벨론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게 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바벨론의 침략에 저항하려 들었습니다. 느헤미야가 보기에 이것은 자살행위였습니다. 그것은 섶을 지고 불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나 마찬가지 행위였습니다. 하나님은 만약 유다가 바벨론에게 무릎을 꿇지 않고 저항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직접 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바벨론의 칼은 물론이고 기근과 전염병으로 다시 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을 사용해서 10대만 때리고 끝내시려고 하는데, 고집 센 유다, 어리석은 시드기야 왕은 100대, 1000대를 맞으려 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시드기야의 이런 어리석음을 더 부추긴 것은 바로 거짓 선지자들의 듣기 좋은 소리였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바벨론의 손에 넘기실리가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자존심 상하는 일을 허락하실리가 없다. 싸우자. 하나님을 믿고 저들과 싸우자” 틀린 이야기가 없습니다. 한 나라를 다스리는 왕에게, 자존심 강한 유다백성들에게는 느헤미야의 비겁하고 자존심상 하는 이야기보다는 거짓 선지자들의 이야기가 더 설득력있게 들려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이야기 자체로는 다 맞는 것 같고 더 맘에 드는 이야기임에 틀림없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거짓 선지자들의 거짓말이었다는데 있었습니다. 

거짓말이라고 사탄의 이름으로 말해지지 않습니다. 종교적인 영역, 신앙적인 영역에서의 거짓말은 오히려 진실보다도 더 거룩하고, 더 신앙적으로 들리게 마련입니다. 더 확실하게 하나님의 권위를 빌어서 선포되기 마련입니다. 이단들의 주장을 들어보십시오. 그들의 주장은 다 “그것은 이것이다”라는 식의 딱 떨어지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말합니다. 자신있고 정확합니다. 여러분, 성경이 명확하게 이야기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너무 자신있고 너무 정확하게 단언적으로 이야기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저렇게 확신있게 이야기하니 뭔가 있겠지라고 생각하면서 다 받아들이다가는 크게 낭패를 보게 됩니다. 거기다가 진실된 예언보다는 사람들의 귀에 쏙 들어오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이게 참된 것인지 거짓된 것인지를 구별하는 것은 생각보다 무척 어려울 수 밖에 없습니다. 

잘못된 길을 가고 있을 때일수록 사람은 교만해지기 마련이고 그 교만을 만족시켜줄만한 말들로 기울기가 쉽습니다. 이럴 때 자존심을 기준으로 어떤 일이나 메시지의 진위를 판단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자존심에 의존하는 것, 그 자존심을 살려주는 메시지를 찾는 것은 스스로 망하는 길로 가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유다는 지금 분명히 자신들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징계를 내리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징계가 지금 문 앞까지 와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존심이 아닌 다른 기준들을 사용해서 어떤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고 어떤 선택을 해야할지를 정해야 합니다. 그 첫번째 기준은 바로 자신들이 처해있는 상황입니다. 계속해서 죄를 지어왔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했습니다. 아닌 줄 알면서도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그래서, 이제 징계의 문전에 있습니다. 그 때 메시지가 들려옵니다. “이제 징계는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미 하나님의 회초리는 높이 치켜들려졌다. 이제는 겸손히 받아들이는 수 밖에 없다. 겸손하게 엎드려 지은 죄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치르며 하나님의 자비를 기다려야 한다.” 정반대의 메시지도 들려옵니다. “아니다. 우리는 결코 바벨론의 손에 넘어가지 않는다. 우리가 누구냐?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우리는 결코 바벨론의 왕을 섬기지 않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자신들이 걸어온 길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면, 얼마나 오랫동안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를 차 버렸고, 마지막 경고까지도 무시해 버렸는지, 그러면서도 전혀 제 자리로 돌아오려고 하지 않았는지를 안다면, 자신들이 어느 쪽으로 귀를 기울여야 하는지를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영적인 현실과 국가적인 현실을 바로 볼 수 있다면, 그 때가 자존심을 세워야 할 때가 아니며, 자존심을 살려주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 하나의 기준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지식입니다. 좀처럼 하나님의 백성을 징계하시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엄한 회초리를 들었을 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고 목적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이미 회초리가 하나님의 손에 들려져 있고, 종아리를 향해 내려쳐 지고 있다면 그것을 맞지 않고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너 계속 그러면 정말 혼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 번 이런 저런 통로를 통해서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이번에는 정말 마지막이다”라고 엄하게 경고하셨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그 이야기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모두 농담처럼 가볍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회초리를 치켜 드셨습니다. 바벨론을 유다의 문 앞에 통째로 가져다 놓으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 놓고 그 분이 갑자기, 유다가 별로 변한 모습도 보이지 않는데 그 모든 회초리를 거두실까요? 없던 일로 하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하나님을 그런 분으로 생각한다면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이고, 오히려 하나님을 우스운 분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 넘치시고 긍휼이 많으신 분이시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성품 때문에 스스로를 우습게 만드시는 분은 아닙니다. 특히 하나님은 항상 어떤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결국 그 목적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회초리를 드셨을 때는 그 못된 고집을 꺾으시려고 드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런 변화도 없는데, 갑자기 그 회초리를 거두신다면 하나님은 스스로 시작한 일을 스스로 포기하시는 셈이 되는데, 하나님은 결코 이렇게 움직이시고 일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유다가, 그리고 시드기야가 자신을 알고 또 하나님을 알았다면 그들은 두 가지 정반대의 메시지, 모두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되는 메시지 중에서 어떤 말에 귀를 기울어야 하는가 하는 것쯤은 쉽게 판단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거짓 예언때문에 흔들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 우리는 어떤 어려움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내가 넘어서야 할 장애물인지 아니면 나를 겸손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징계인지 구분이 어렵습니다.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기도해야할지, 싸워이길 능력을 달라고 해야할지 쉽게 판단이 서질 않습니다. 그리고 잘못 판단하면 하나님이 일하시는 이유와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럴 때는 내 감각만 의지해서는 안됩니다. 생각을 하고 묵상을 해야 합니다. 먼저 지금까지 내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 보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정직하게 살펴보아서 내가 하나님 앞에서 가지 말아야 할 곳으로 다녔고,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고 판단된다면 지금 내 앞에 있는 어려움은 넘어서야 할 믿음의 장애물이 아니라 인내하며 감당해 내야할 징계이기가 쉽습니다. 둘은 비슷한 것 같아도 많이 다릅니다. 장애물을 넘는 일은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을 적극적으로 사용해야 하는 외향적인 일이지만, 징계를 견디어 내는 일은 오히려 내 속 사람을 정직하게 살피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최대한 낮추는 내면적인 일입니다. 

또 지금껏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떻게 해 오셨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은 계속 아무 말씀 안하시다가 갑자기 ‘너 잘못했지?’하고 두들겨 패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때로 우리에게 그렇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그만큼 이런 저런 통로를 통해서 들려주시고 알려주셨던 하나님의 사인에 무감각하고 무관심했기 때문입니다. 큰 일을 앞에 두고 정직하게 돌이켜 보면 그동안 놓쳤던 하나님의 사인들이 다시금 깨달아질 것입니다. 다른데 정신이 팔려서 무시했던 하나님의 작은 목소리들이 다시금 크게 들려올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징계이기가 쉽습니다. 그럴 때는 이겨낼 능력을 달라고, 성령충만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할 때가 아니라, 이 징계를 통해서 더 겸손해지고, 더 온전해지게 해 달라고, 그러면서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징계와 고난을 주시는 목적

하나님은 유다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그들을 듣지 말고 바벨론 왕을 섬기라 그리하면 살리라 어찌하여 이 성으로 황무지가 되게 하겠느냐?”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리하면 살리라” 하나님은 지금 유다가 살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괴로움을 주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유다를 죽이시려고 망하게 하려고 바벨론에게 내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괴로움은 교육의 도구입니다. 비뚤어진 자식 바로잡는 회초리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살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징계에서 살아남게하고 제 자리로 돌아와 하나님의 백성답게 참되게 살게 하시려는 것이 징계를 주시는 진짜 목적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혼을 내시면서도, 어쩔 수 없이 따끔한 회초리를 드시면서도 그 상처가 더 깊어지지 않을까 걱정하시며 상처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납작 엎드리라고, 엎드려서 겸손하게 견디어 내고 감당해 내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또 말씀하십니다. “그것들이 바벨론으로 옮김을 입고 내가 이것을 돌아보는 날까지 거기 있을 것이니라 그 후에 내가 그것을 옮겨 이곳에 다시 두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께서는 벌을 내리시면서도 그 백성에게 약속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지금 예루살렘에 남아있는 성전의 그릇들이 바벨론으로 옮겨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건 절망입니다. 그러나 곧이어 말씀하십니다. 그건 일시적이라고, 기간이 정해져 있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때가 되면 다시 제 자리로, 성전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 말씀은 그들의 잘못 때문에 무너지고 버림받을 예루살렘과 성전의 회복에 대한 약속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지금은 파괴되고 버림받을 것이지만 그것은 영원히 버림받고 영원히 무너진 채로 남아있을 것이 아니라 반드시 다시 회복될 것이라는 것을 약속해 주셨던 것입니다. 

비록 잘못해서 징계를 받고 벌을 받는 것이지만 70년 동안 객지에서 고생하다가 절망하고 낙망할까봐 구원과 회복의 약속을 그런 방식으로 구체적으로 유다백성의 가슴 속에 새겨주셨던 것입니다. 그 어떤 순간에도, 그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이 약속을 붙들 수 있다면 견딜 수 있고, 또 그 약속을 붙드는 것 자체가 그들의 믿음을 바로 세우고 강하게 하는 훈련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어려움은 여러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잘못에 대한 징계일수도 있고, 우리를 훈련시키시고 검증하시는 과정 중에 주어지는 테스트일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그 두 가지 모두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우리들이 당하는 어려움에는 무의미한 것은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들입니다. 그 목적이란 결국 우리의 유익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유익하게 하시려고, 참으로 유익하게 하시려고 그런 고통과 어려움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 유익은 바로 우리의 믿음을 더 크고 견고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붙들어야 할 약속을 주시는 것입니다. 

제가 요즘 성경을 보면서 문득 새롭게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 전체가 무수한 약속들로 가득 차 있는데, 그 약속들이란 다 선한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부담스럽게 여겨지는 명령들까지도 실은 큰 은혜를 담고 있는 그릇임을 보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벌을 받고 징계를 받으면서도 하나님의 구원과 회복에 대한 확실한 약속을 받았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항상 약속이 있습니다. 훈련을 위한 시험이건, 징계를 위한 어려움이건 그것은 항상 하나님의 약속과 함께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 약속의 겉모습은 여러가지이지만 그 모든 약속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담는 그릇이 됩니다. 어렵고 힘든 중에서 믿음은 자기 자신의 진짜 모습을 드러냅니다. 우리가 그 자리에서 보이는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 분의 약속을 붙든다면 우리의 믿음은 거기서 더욱 견고해지고 활기찬 믿음으로 바뀌게 됩니다. 소망이 무엇인지 배우게 되고, 믿음의 진짜 능력이 무엇인지를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어려울 때는 자꾸 우리를 위로해 주고, 달래주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게 되기가 쉽습니다. 70년동안 포로생활을 할 것이 아니라, 바벨론의 다스림도 받지 않을 것이라는 메시지, 인내하면서 겸손하게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라는 메시지 보다는 믿음으로 싸워 승리해야 한다고 하는 우리의 자존심을 세워주는 메시지가 더 마음에 와 닿기 마련입니다. 물론 그것이 진실일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려면 내가 지금까지 하나님 앞에서 살아온 길이, 그리고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하신 과정이, 그리고 지금까지 되어온 상황이 우리에게 그것이 틀림없다는 메시지를 전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우리는 우리 앞에 닥친 고난은, 그저 빨리 끝나는 것만이 우리에게 가장 유익한 것은 아니라는 점도 생각해야 합니다. 70년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신앙교육을 위해서 정하신 가장 적절한 시간이었고, 또 최소한의 시간이었습니다. 그 시간의 길이조차도 하나님께서 은혜로 정하신 징계를 위한 최소한의 기간이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기간은 그들에게는 짧은 시간도 아니고 쉽고 편하게 쉬기만 하는 시간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간을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그 분을 만나고 그렇게 더 낮고 겸손해 지는 기간으로 보낸다면, 그 시간들도 결코 지옥같기만 한 시간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하나님과 가까이 있는 시간이 될 것이고, 그래서 그 분이 그렇게 가까이 있을 때만 누릴 수 있는 만족과 은혜를 누리게 특별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세상의 소망과 즐거움이 다 끊어져 버리게 되면 그 어떤 때보다도 그런 것들의 부질없음을 깊게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 부터 오는 만족과 즐거움이 얼마나 놀라운지도 피부에 닿게 경험하게 됩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하나님을 깊게 그리고 제대로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즘 그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내가 과연 예수 믿는 진짜 즐거움과 만족을 알고 누리고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제가 아는 부분이 너무 작고 그 강도가 너무 미약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론과 실제는 다르다고 핑계대면서 넘치는 풍성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을 합리화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죄송스럽고 속이 상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을 신뢰하면 근심도 걱정도 넘어설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인생의 고통쯤은 오히려 감사하고 영광스럽게 생각할 수도 있다고 믿음의 선배들을 예로 들어가면서 우리 눈 앞에 그 증거를 들이밀고 있습니다. 물론 그런 상태는 이상적인 상태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불가능한 상태가 아닙니다. 돌을 맞아 죽어가면서도 얼굴이 빛나고 돌을 던지는 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드리는 상태, 복음 때문에 매맞고 옥에 갇혀서도 찬양과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상태... 이런 모습들은 허상도 아니고 환상도 아닙니다. 과거 어느 때인가 우리와 꼭같은 한계를 지닌 인간들이 믿음과 은혜로 소유했었던 어찌보면 성도들에게 허락된 당연한 모습들이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징계하시고, 그들을 고난 가운데로 몰아넣으시는 이유가 바로 이것을 배우게 하시려고, 이런 믿음을 배우게 하시려고 그러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 최고의 선물을 주시기 위해서, 그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통과하게 하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사이로 난 길들이라고 믿습니다. 회원 여러분, 만약에 말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성경이 이야기하는 그런 믿음을 얻고, 그 믿음이 주는 그 누구도 흔들 수 없는 견고함에 이를 수 있다면, 그 만족과 그 풍성함에 도달할 수 있다면 우리가 그것을 위해서 어떤 대가를 치르고 어떤 상황을 당하더라도 그것은 훨씬 남는 장사가 아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우리가 충분한 고난을 받고 징계를 받는 것도 아프고 힘들기만 한 일은 아닐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그 모든 일이 끝나면 나에게 주어질 그 엄청난 은혜를 향한 소망만 붙들 수 있다면, 그래서 낙망하고 좌절하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키워가면서 그 기간을 보낼 수만 있다면 말입니다. 


결론 : 고난과 징계의 참된 유익을 취하자

사탄은 죄로만 우리를 유혹하는 것이 아닙니다. 힘들고 어려운 시기에 귀를 기울여서는 안되는 우리를 달래고 헛된 기대를 하게 하는 우리를 편들어 주는 이야기로도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렇게 해서 고난과 징계가 주는 교훈이나 그 뒤에 있는 하나님의 선하신 진짜 목적에는 관심을 가지지 못하게 하고 우리에게서 영적인 유익을 빼앗아 갑니다. 상황만 보고 그 상황의 해결에만 집착하는 근시안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면 우리는 비싼 수업료를 내고도 결국은 제 자리인 손해보는 장사를 하고 맙니다. 이것이 수많은 성도들이 그 어려움을 겪어내고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그럴 때일수록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가야하고, 이제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준비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비록 징계를 당하고 있다고 해도 우리의 삶을 가장 유익하게 하시려고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굳건히 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 때는 주변에서 들려오는 이런 저런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가 아니라 오히려 내 속 사람을 살피고 더 정결하게 해야 할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있다면 고난과 징계도 우리에게는 큰 유익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벌하시는 순간에도 우리의 참된 유익을 생각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진리에 여러분의 믿음을 더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을 더하시고 흔들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시고, 더 견고한 믿음을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게 하심으로써 항상 하나님께서 주시는 최선의 은혜를 놓치지 않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