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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2010년 매일성경설교 18.청종하면 우리에게 복이 있으리이다

방문하시는 중에서 혹시라도 도움이 될까 적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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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 예레미야 42장 1-14절



     서론 : 기도하는 이유

    우리가 기도해야만 하는 이유는 우리가 모든 면에서 부족한 존재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힘도 약합니다. 능력도 부족합니다. 게다가 지혜와 판단력도 온전치 못합니다. 이런 상태로 예측불가능하며 믿는 사람들에게 적대적이고, 죄의 유혹이 도처에 널려있는 세상에서, 그것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려면 하나님의 도우심은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그래서 기도는 그래서 꼭 필요합니다. 한 편에서는 생활인으로 살아가는 일, 그리고 다른 한 편에서는 성도로 살아가는 일 모두가 공급해 주시고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결코 온전히 이루어질 지고 유지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필요로 하는 우리의 부족함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한 가지는 필요를 채우는데 있어서의 부족함이고 다른 하나는 무엇이 진정으로 유익한지를 판단하는데 있어서의 부족함입니다. 우리는 능력만 부족한 것이 아니라 지혜도 부족합니다. 삶의 물질적인 필요나 혹은 진정한 필요들을 채우는데 부족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얻고 채우기 위해서 무엇을 선택하고 어떤 길을 갈 것인가를 선택하는 능력도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당장 느껴지는 눈에 보이는 필요들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자신에게 진정으로 유익하고 영원히 영광이 되는 선택을 할 수 있는 지혜와 분별력을 위해서도 기도해야만 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그런 기도가 된다면, 그런 것을 분별하고 그런 쪽을 선택하게 하는 기도가 된다면 우리의 삶은 그 기도 위에 더욱 더 온전하고 풍성하게 세워져 갈 것입니다.

    유다의 상황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포위한 지 1년 6개월만에 예루살렘성은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끝까지 성전불패의 신앙으로 버텨보고, 애굽의 세력까지 동원해 보았지만 결국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벨론에게 망하고 맙니다. 몰래 도망치려던 시드기야는 아라바에서 붙잡혀서 눈이 뽑힌 채로 바벨론으로 이송되고 말았습니다. 느부갓네살은 땅을 가지지 못했던 빈민들에게 땅을 주어 식민지가 황폐해 지는 것을 막고 나머지 유다백성들은 모두 바벨론으로 잡아갔습니다. 느부겟네살은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를 유다의 총독으로 세웠습니다. 그는 예레미야의 말대로 유다 본토에서의 삶을 일구고 바벨론을 섬기는 선택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론적으로는 하나님의 징계를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일이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유다 본토는 조금씩 안정과 평온함을 되찾아 갔습니다. 한편 예레미야는 느부갓네살의 제안을 받고 바벨론으로 가서 편안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지만, 오히려 본토에 남겨진 자신의 동족들과 함께 하는 편을 택했습니다.

    바벨론이 떠나고 그다랴가 총독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들에 흩어져 있던 유다의 장군들과 그 부하들이 그다랴에게로 모여왔습니다. 그 중심이 되는 인물은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이었는데, 그들은 들에 있을 때 암몬의 왕 느다냐가 그다랴를 죽이기 위해서 아들 이스마엘을 보냈다는 첩보를 입수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다랴에게 그 첩보를 전했지만 그다랴는 믿지 않았습니다. 몰래 이스마엘을 처치하겠다고 제안해도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다랴는 이스마엘에게 암살을 당하게 되고, 많은 유다사람들도 그의 손에 죽게 되고 남은 사람들은 모두 포로로 잡혀 암몬 땅으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장군들은 이 소식을 듣고 이스마엘과 싸워 동족을 구출합니다. 이제 본토의 유다백성은 정말 소수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레아의 요하난과 그의 부하들이 백성들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동족들을 이끌고 이집트로 가려고 했습니다. 이스마엘이 바벨론이 세운 총독을 죽였기 때문에 바벨론이 그것을 보복하려 할 것이고 그러면 또 다시 전쟁에 휘말리게 될 것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미 이집트로 향하고 있던 이들이 갑자기 예레미야를 찾아왔습니다.

     기도를 부탁하는 지도자들과 백성들

    예레미야를 찾아온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이 갈 길을 알려주시고, 해야할 일들을 알려 주시기를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예레미야는 그 부탁을 받아들이고, 기도한 후에 하나님의 응답을 숨김없이 이야기해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다시 말했습니다. “우리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당신을 보내사 우리에게 이르시는 모든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여호와는 우리 중에 진실무망한 증인이 되시옵소서.”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할 것을 분명하게 약속하면서 하나님을 그 약속의 증인으로 내세우기까지 합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우리가 당신을 우리의 하나님께 보냄은 그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좋고 좋지 아니함을 물론하고 청종하려 함이라” 그들의 태도는 너무나 진지하고 겸손합니다. 이제서야 제 자리를 찾은 것 같습니다. 그들은 주어지는 하나님의 뜻이 자신들에게 유리하든 불리하든, 마음에 들든 그렇지 않든 그대로 따르겠다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리고 또 말합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면 우리에게 복이 있으리이다” 얼마나 틀림없는 판단입니까? 이들은 자신들이 어떻게 하는 것이 옳으며, 또 어떻게 하는 것이 자신들에게 가장 유익한 지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길을 갈 것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기도의 응답 두 가지... 하나님께서 그들의 속 마음을 모두 아시다

    예레미야가 기도하던 열흘 째 되던 날,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기도에 대한 답을 주셨습니다. 예레미야는 모든 백성들과 지도자들을 부르고 하나님의 대답을 전합니다. 그런데, 대답은 두 가지였습니다. 그저 이렇게 하라거나 혹은 저렇게 하라고 하기만 하면 될텐데,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 답을 주셨습니다. 첫번째 답은 이것이었습니다. “너희가 이 땅에 여전히 거하면 내가 너희를 세우고 헐지 아니하며 너희를 심고 뽑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너희에게 내린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킴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유다가 그 땅에 머물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만약 그 땅에 머문다면 그들을 다시 든든하게 세워주시고 다시는 뿌리 뽑히지 않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그 두려워하는 바벨론 왕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희와 함께 하여 너희를 구원하며 그의 손에서 너희를 건지리니 두려워 말라. 내가 그로도 너희를 긍휼히 여기게 하여 너희를 너희 본향으로 돌려 보내게 하리라” 이것이 예레미야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답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답에 또 한 가지 답을 덧붙이십니다. “그러나, 만일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복지 아니하고 말하기를 우리는 이 땅에 거하지 아니하리라 하며, 또 말하기를 우리는 전쟁도 보지 아니하며 나팔소리도 들리지 아니하며 식물의 핍절도 당하지 아니하는 애굽 땅으로 결단코 들어가 거하리라 하면 잘못되리라”

    하나님께서 첫번째 답만 주시지 않으시고 또 한가지 답을 덧붙여 주신 것은 하나님이 유다의 남은 사람들과 지도자들의 진짜 속마음, 심지어 그들 조차도 알아차리지 못했던 그 은밀한 욕구를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41장 17절을 보면 이들은 이미 이집트로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당시 이집트는 바벨론의 경쟁국이고 당시만 해도 세계에서 가장 비옥한 토지를 가진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그 나라로 망명하는 것은 자신들의 안전을 도모하는 동시에 풍요도 보장받을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이라는 계산 하에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리로 움직여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어 보려면 출발하기 전에 물어봐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가야할 곳을 정하고 그리로 향해 가면서 어디로 가야할지 하나님께 물어달라고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이 기도의 응답을 통해 진짜 얻고 싶어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아마도 자신들의 결정에 대한 하나님의 지지와 동의였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러한 자신의 진짜 욕망을 스스로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이 예레미야에게 기도를 부탁하면서 사용한 말들을 보면 얼마나 겸손한 정답들로만 이루어져 있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진지한지 모릅니다. 이 말 모두가 다 의도적으로 한 거짓말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하고 싶은 대로 하면되지 이런 기도부탁 자체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의 진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진심은 진심인데 거짓일 수 밖에 없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를 들자면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예수님께 했던 말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닭이 세 번 울기 전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자신의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런 일을 없을 것이라고 장담합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것도 작은 여자아이 앞에서 예수님을 저주까지 해 가면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 전에 했었던 베드로의 장담이 거짓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진심이었습니다. 적어도 그 때는, 그 당시에는 허세가 아닌 진심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거짓이 되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왜 진심이 거짓이 되었습니까? 그것은 자신이 자신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자기 속에 어떤 숨겨진 욕심이 있는지 모르면 진심으로 한 말도 결국은 거짓말이 되기 쉽습니다. 베드로처럼 유다백성들도 그랬습니다. 이미 뻔한 계산과 욕심으로 몸과 마음 모두 이집트로 향하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은 아직도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순종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그런 완벽한 순종의 언어로 기도를 부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당시의 진심’에 불과했습니다. 그렇게 자신도 자신에게 속고 있었던 것입니다.

     열흘동안의 기다림

    하나님은 그들을 열흘 동안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의 기도에 응답하시는데 열흘 간의 결제기간이 꼭 필요해서 그러셨을까요? 문제가 어려워서 열흘이나 고민하셔야 했기때문이었을까요? 그건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기간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저는 그 기간이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유다백성을 위해서 꼭 필요한 기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열흘은 하나님께서 유다의 백성들과 지도자들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살피고 하나님 앞에 솔직해 질 수 있도록 주신 기회였다고 생각합니다. 열흘 동안 기도의 응답을 기다리면서 초조해 지고 불안해 지는 자신을 보면서 스스로 욕심과 죄악을 드러내고 회개할 기회를 주셨던 것입니다. 사실 주님이 주셨던 두 가지 응답은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는 대답이었던 동시에 그들의 속마음을 훤히 드러내 보여주는 하나님의 말씀이었고 그래서, 그들이 다시 하나님 편에 설 수 있게 해 줄 수 있는 최후의 기회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유다의 진짜 문제 : 두려움과 욕심

    하나님께서는 열흘만에 답을 주시면서 그들의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들과 지도자들이 약속의 땅을 떠나려는 첫번째 이유가 두려움 때문이라는 것을 아셨고 그것을 말씀하십니다. 유다 백성의 두려워 했던 것은 바벨론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정확하게 “너희가 두려워하는 바벨론 왕”이라고 지적하시면서 그 문제를 분명하게 끄집어 내십니다. 그리고는 내가 그의 마음을 직접 움직여 너희를 불쌍히 여기게 만들어 오히려 그가 너희를 회복시키게 해줄테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유다 백성은 바벨론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그렇게 두려워하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하나님께서 그 마음까지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그 분의 종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통해 그것을 알려주셨고, 그렇게 함으로써 유다백성이 바벨론이 아닌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사실 불순종의 근원에는 항상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면 내가 원하는 것과 안전을 확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불만스러운 삶을 살게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바로 수많은 죄와 불순종의 이유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두려움을 다스리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면 우리의 삶은 참된 순종과 참된 신앙으로 전진해 가지 못합니다.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에는 그 두려움이 변해서 생겨난, 하나님께서 우리를 두신 우리의 자리를 떠나고 싶어하는 욕망이 은밀하게 자리잡게 될것이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할 결정적인 순간에 그 욕망은 우리의 발목을 잡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언제나 우리를 찾아오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은 그 두려움에 대해 무기력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 안에는 이미 이 두려움을 다스리고 이기는 법이 들어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유다에게 하신 말씀을 바꾸어 보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상황은 분명히 좋지 않다. 그리고, 너희 눈에는 그 상황만 보일 것이다. 그래서, 그 자리를 떠나는 것이 훨씬 더 유리하고 안전해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그 자리를 지키면 내가 너를 다시 세우고 다시 심을 것이다. 내가 세우면 절대로 넘어지지 않는다. 내가 심으면 그 누구도 뽑을 수 없다. 내가 모든 상황의 주인이고 또 주관자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힘있는 사람을 두려워하는구나. 그런데, 누가 그에게 그 힘을 주었느냐? 나다. 누가 그 사람의 주인이냐? 내가 바로 사람의 주인이다. 그가 왕이건 대통령이건 아무리 크고 강한 권력자이건 나는 언제든지 그의 마음을 바꿀 수 있고, 그들을 그 자리에 올릴 수도 있고, 내릴 수도 있다. 너희가 두려워하는 그 사람의 마음을 바꾸어 너희 편을 들게 해 준다면 오히려 그가 두려운 존재일수록 너희에게는 유리한 것이 아니냐? 너는 누구를 두려워하느냐? 내 종이냐? 아니면 그 주인인 여호와냐?” 우리는 대개 두려움을 극복하려고 두려움 자체와 싸우려 듭니다. 그러나, 사실 두려움을 극복하고 순종으로 나아가는 방법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그 두려움의 방향을 상황과 사람에게서 하나님께로 바꾸는 것입니다.

    회원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둘러싼 모든 상황과 모든 사람의 완전한 주인이시라는 것을 진실로 믿으십니까? 만약 우리가 이 진리를 진실로 믿고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삶을 넉넉히 의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보다 안전하고 든든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 분께 온전히 의지하게 될 때, 우리는 자연히 그 분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 분이 그 모든 것들의 주인이고 주관자이신데, 그 분이 내 편을 들어주시지 않으며 어쩌나, 그 은혜를 거두시면 어쩌나 하는 거룩한 두려움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두고 경외함이라고 부릅니다. 성도들에게는 이러한 경외함이 꼭 필요합니다. 이 두려움이 바로 상황과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내쫓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또 하나의 두려움이 생겨나고 그래서 더 불안해 지는 것은 것은 아닌가 하고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경외함은 다른 두려움과는 달리 우리에게 불안함을 전혀 주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두려움은 더 하나님의 의지하게 하고 더 하나님만 바라보게 합니다. 그리고 그런 만큼 하나님은 우리를 더 편들어 주시고 우리의 모든 것이 되어 주십니다. 거기서 우리는 큰 만족을 누리게 되고 그 만족 안에서 죄를 이길 수 있는 넉넉하고 풍성한 자유를 얻게 됩니다. 만족하니 상황과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고 불순종하려는 마음이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두번째 문제는 그들이 아직도 청산하지 못한 세속적 풍요에 대한 동경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렇지만 만약 너희가 ‘우리는 아무런 갈등과 고민도 없고 영적인 각성도 필요없고 먹고 살 걱정 없는 삶을 추구하며 그것만 붙들고 살겠다’고 말하면 완전히 잘못될 것이다.” 이들이 이집트로 가려는 두번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단지 바벨론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황패한 유대 땅에서의 삶보다는 좀 더 안전한 삶, 좀 더 안이한 삶, 좀 더 넉넉한 삶을 동경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생각에 애굽이야 말로 그런 것들을 제공해 주기에 가장 적절한 곳이었고 그래서 그 곳으로 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면 너희는 완전히 잘못될 것이다.” 원래 이집트는 그 어떤 순간에도 도움을 청하거나 기대어 살아서는 안되는 대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역사의 초기부터 그렇게 하는 것을 가장 엄격하게 금하셨습니다. 그것은 이집트가 그 땅의 풍요와 안전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속이고 그래서 결국은 자신의 종으로 만들어 버리는 그런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 시절의 이스라엘은 그 사실을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왜 하나님께서 출애굽 일세대를 광야에서 모두 죽게 하실 수 밖에 없었겠습니까? 아무리 해도 그들이 애굽에서 얻은 세속적 즐거움을 향한 노예근성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의 공급이 조금만 부족하고 늦어져도 그들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기 일수였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애굽의 빈궁한 풍요로움을 그리워했습니다. 종됨의 댓가로 얻은 그 알량한 풍요를 말입니다. 이집트는 그런 땅이었습니다. 가장 풍요로웠기 때문에, 그리고 가장 안전한 곳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만큼 쉽게 자신의 종으로 만드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기뻐하고 자신이 누리고 그래서 자신이 동경하는 것들에 매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주는 만족을 떠나지 못하고 거기에 묶이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자연스런 성향입니다. 그래서, 이런 성향 자체를 문제삼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성향이 향하는 대상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최고의 만족을 주며, 최고로 기쁘게 하고, 최고로 사랑할만한 대상이 있다면 그 대상을 최고로 기뻐하고 사랑하며 누리는 것은 너무나 바람직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고, 우리가 그 분을 기뻐하고 사랑하며 만족하고 사랑하며 그 분에 묶이고 그 분의 종이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가장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 분이야 말로 가장 고귀하고 가치로운 분이시고, 가장 풍성하고 가장 아름다운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런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아닌 다른 곳을 향하게 될 때입니다.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최고로 사랑하고 동경하며, 기뻐하고 누리고 사랑하게 되고 그래서 그것의 종이 되면 그것은 하나님께 대해서 말할 수 없는 불명예가 되며, 그래서 죄가 됩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그 분과 비교할 수 없이 낮은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심지어는 부패해 있고 악하기까지 것을 하나님보다 가치있게 여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이집트로 가고, 이집트의 종이 되는 것을 보고만 계실 수가 없습니다. 온 우주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의 가치를 알고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우리 믿는 사람들이 이집트가 주는 달콤함에 속아 그 노예가 되어 세상을 섬기는 것을 참고 계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집트의 종이 되면 그 분의 보호와 인도를 거두시는 것 뿐만 아니라, 징계를 내리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욕망을 이기는 방법 : 믿음으로 두려움을 택하라

    유다백성들과 그 지도자들에게 그랬듯이 신앙의 시험은 언제나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것 사이에서 벌어지는 선택의 싸움인 것 같습니다. 바벨론을 향한 두려움을 피하려면 이집트로 내려가야 하고 그러면 안전과 함께 풍요도 얻을 수 있을 것 같이 여겨집니다. 그러나 그건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본토에 머물자니 앞으로 닥쳐올 어려움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해 옵니다. 말 그대로 진퇴양란입니다. 그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엇을 선택해야 합니까? 상황이 그렇더라도 하나님께서 금하시는 것을 택하기 보다는 차라리 두려운 쪽을 택해야 합니다. 지금껏 나의 삶을 실수 없이 이끌어 오셨고 때마다 가장 적절한 은혜를 주셨던 하나님께서 미래에도 나에게 동일한 은혜를 주실 것을 믿는 믿음으로 그 두려운 쪽을 택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오히려 그 두려운 미래에 우리를 세우시고 심으시며, 구하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어렵고 힘든 일이 닥치더라도 우리에게 그 모든 것을 너끈히 이길 수 있는 넉넉한 은혜와 믿음을 주십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것이 이기는 방법이고 또 잘 되는 방법이 됩니다.

    회원 여러분, 바로 이것이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고 말할 때, 바로 그 믿음으로 사는 방법입니다. 믿음으로 두려움과 욕심을 이기는 방법입니다. 나아가 은밀히 숨겨진 마음의 죄까지 이기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분의 말씀을 따르기는 쉽지 않습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믿고 따르면 복이 있습니다. 과거에도 그랬듯이 미래에도 넉넉한 은혜를 주시는 복이 있습니다. 두려울 때, 욕심이 생길 때, 그래서 마음과 생각이 흔들릴 때, 두려움을 주는 것보다는 금지된 것이 훨씬 가까와 보일 때, 이 진리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꼭 기억하시고 항상 거기에 믿음을 더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거기서 우리를 심으시고 세우십니다. 거기서 함께 하시며 보호하시고 붙들어 주십니다. 이집트로 가면 완전히 잘못됩니다. 거기로 가면 우리는 세속의 종이되고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와 함께 하심은 우리를 떠나게 됩니다.

    안전을 주며 풍성함을 약속해 주지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것보다는 두렵더라도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쪽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곳이며, 결국에는 참으로 그 분의 능력이 나타나는 곳이라는 이 진리에 여러분의 믿음을 더하시고, 내가 그 쪽을 선택할 수 있는 믿음의 용기를 달라고 항상 기도하며 애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 그 기도에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그 선택을 통해 우리의 삶을 최고로 유익하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약속을 믿고 하나님 편에 서게 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주님께서 심으시는 든든한 삶을 사는 복을 누리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