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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2010년 매일성경설교 21. 사람마다 우준하여 무식하도다

방문하시는 중에서 혹시라도 도움이 될까 적어봅니다


1. 읽기는 그냥 사이트에서 읽으시거나 마우스로 클릭하시면 다운로드 되는데, 그렇게 읽으시면 됩니다

2. 설교를 들으시려면 첨부되어 있는 mp3 파일을 위의 방법으로 다운로드 하셔서 들으시거 나, 네번째 회색상자의 작은 화살표를 클릭하시면 들으실 있습니다. , 경우에는 중간에 스톱하시면 처음부터     시작합니다. 사이트의 서비스가 거기까지 밖에 안됩니다. 죄송합니다.

3. 다녀가실 때는 짧은 댓글 부탁드립니다. ) 누구 누구 다녀갑니다. 댓글은 저만 있도록도 저장할 있습니다







본문 : 예레미야 51장 15-26절



서론 : 인간은 과연 지혜로운가?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판단력과 분별력이 어떤 한계를 가지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아주 간단하지만 정확한 경구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들은 대개 자신이 무척 똑똑하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에 대해서 생각할 때도 인간은 대단한 지적인 능력을 가진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위의 속담처럼 인간은 열 길 물 속에 무엇이 있는지는 알 수 있어도 한 치 밖에 안되는 사람 속에 무엇이 있는지는 도무지 알지를 못합니다. 사람은 보이는 것만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졌을 뿐, 보이지 않는 것은 거의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더러는 다른 사람들보다 사람의 마음을 읽어내는 능력이 탁월한 사람들이나 인간의 심리에 대해서 많은 연구를 해서 그런 능력면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나은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 사람들의 능력이라는 것도 단지 보이는 모습을 통해서 통계적이고 논리적으로 추론한 결론일뿐 그 정확성 면에서는 누구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인간이 생각하고 추론하며 또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한 치 사람의 속에 있는 마음 마저 제대로 잃어내지 못하는 이유는 인간이 눈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다는 것, 볼 수 있다는 것이 정말 큰 능력임에는 분명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또한 보이는 것에 압도되고 그것에 묶여 버립니다. 보아야 제대로 알 수 있지만, 반대로 보기 때문에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일도 많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보이는 것에 속기 쉬운 것입니다. 


보이는 것에 속는 사람들

사람이 보이는 것에 속기 쉽다는 사실은 사람은 크고 성공적인 무언가를 보면 거의 무조건적으로 그것이 그렇게 큰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에 그런 성공을 이룬 방법과 사고방식이 맞는 것이고 옳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려고 한다는 점이 증명해 줍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어떤 나라가 다른 나라들보다 훨씬 잘 살고 있고, 또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 나라는 무조건 옳고 그래서 그 나라의 방식을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크게 성장하고 있는 교회가 있다면, 무조건 그 교회에서 하고 있는 것들은 좋은 것이라고 여기고 받아들이려고 하고 또 따라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고방식입니다. 크고 눈에 보기 좋은 결과를 나타낸다고 해서 모든 것이 반드시 좋고 옳은 것이 아닙니다. 큰 영향력을 가진 개인이나 국가가 선택한 방법이라고 해서 무조건 옳은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사실은 결과만 좋으면, 아니 결과만 그럴 듯하면 된다는 가치관이 낳은 사고방식에 불과합니다. 

오늘 본분에 나오는 바벨론은 당시 최고의 강대국이었습니다. 그 주변의 모든 나라들을 초토화시키고 자신의 속국으로 만들어 버린 강대국 중의 강대국이었고 최고의 부자나라였습니다. 자연히 바벨론의 방식은 아주 커다란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고, 바벨론의 성공에 매료된 주변의 나라들과 개인들은 바벨론식의 사고방식과 생황방식을 기준으로 삼고 무조건적으로 수용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당시의 사람들은 강한 나라가 섬기는 신이 강한  신이라는 신념이 있었기 때문에 바벨론은 종교적인 면에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바벨론이 나서서 요구하지 않아도 그 나라가 성공한 나라이기에, 그 나라가 가장 부유한 나라이기에 그 나라의 방식을 따르고 그 나라의 신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바벨론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바벨론이 가지고 있었던 이런 막강한 영향력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아니지만 51장 7절을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바벨론은 여호와의 수중의 온 세계로 취하게 하는 금잔이라 열방이 그 포도주를 마시고 인하여 미쳤도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심판하시는 첫번째 이유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큰 힘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 그들을 강대국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자연히 그들의 영향력은 커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벨론은 가지 말아야 할 길로 갑니다.  심각한 우상숭배에 빠지고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는 타락에 빠집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기 까지는 그들은 계속 강대국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때 주변의 사람들, 다른 나라들의 눈에 보이는 것이 무엇일까요? ‘아... 저렇게 하니까, 저런 방식으로 살고 저 신을 섬기니까 저 나라가 저렇게 잘 되는구나.’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들이 이르는 결론은 그러니까 바벨론처럼 생각하고 바벨론의 방식으로 살며, 바벨론이 섬기는 신을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변의 나라들과 개인들은 바벨론의 성공에 도취되어 음녀 바벨론의 잔에서 독한 포도주를 마시며 제정신을 잃고 미쳐갔던 것입니다. 

어떤 개인이, 어떤 나라가, 그리고 심지어는 어떤 교회가 번성하고 잘 된다고 해서 그것이 언제나 그들의 가치관이 올바르며, 그들의 방식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신다고 생각하는 것, 그래서 그것을 무조건 흉내내고 따라가려고 하는 것은 그저 보이는 겉모습에만 속는 일이 되기 쉽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바벨론의 잔에서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제 정신을 잃어버리는 일이 되기 쉽습니다. 그 옛날 바벨론 주변의 나라들이 갔던 길을 따라가는 일이 되기 쉽습니다. 

회원 여러분, 큰 성공을 이루는 방법이라고 해서, 화려한 결과를 가져다 주는 방식이라고 해서 언제나 옳고 좋은 것이고 그래서 따라가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보이는 것만 보고 판단하려고 하다가는 그렇게 되기가 너무 쉽습니다. 바벨론의 길로 가기가 쉽습니다. 회원 여러분,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지혜롭고 정확한 분별력을 가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만 볼 수 있다는 선천적인 한계를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의 사고방식, 우리 자신의 기준과 판단력에만 의존해서는 안됩니다. 언젠가 미국의 한 목사님께서 현대의 교인들을 생각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현대의 교인들은 가치의 기준을 성경의 진리가 아닌 자신의 경험과 세속적인 정보에 의존한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판단기준이 어떤 지를 성경이라는 저울로 저울질 해 봐야 합니다. 그 평가를 통과한 다음에라야 나의 기준은 사용해도 안전하다는 허가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나의 기준, 눈에 보이는 크기와 성공이라는 기준이 아닌 성경의 기준을 우리의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큰 결과를 가져온 방법과 사고방식을 하나님의 기준으로 평가하는 과정을 꼭 한 번 거치고 나서 사용여부를 결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바벨론에 대한 심판을 이야기하시는 중에 하나님께서는 갑자기 하나님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여호와께서 그 권능으로 땅을 지으셨고 그 지혜로 세계를 세우셨고 그 명철로 하늘을 펴셨으며 그가 목소리를 발하신 즉 하늘에 많은 물이 생기나니 그는 땅 끝에서 구름이 오르게 하시며 비를 위하여 번개하게 하시며 그 곳간에서 바람을 내시거늘 사람마다 우준하고 무식하도다 금장색마다 자기의 만든 신상으로 인하여 수치를 당하나니 이는 그 부어만든 우상은 거짓이요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줄 알고 그것을 섬깁니다. 거대하게 보이는 것들을 섬기고, 놀라고 두렵게 하는 것들, 자신에게 풍요로움을 가져다 주는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을 신으로 섬깁니다. 그래서, 땅을 신으로 만들고 하늘을 신으로 만들며 비를 신으로 만들고 번개를 신으로 만들었습니다. 그것으로도 불안하니 스스로의 상상력을 동원해서 신이라고 생각되는 모습을 동상으로 만들어 그것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어리석게도 그 모든 것들을 만들어 내시고 움직이시는 하나님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땅을 지으시고 세계를 세우셨으며 하늘을 펼치시고 구름과 비를 내려 식물들이 자라게 하시며, 그들이 두려워하는 번개를 만들어 내시는 하나님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이 신의 형상이라고 만든 그 모든 짐승들을 만드신 분이 있음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마다 우준하고 무식하도다 금장색마다 자기의 만든 신상으로 수치를 당하나니 이는 그 부어만든 우상은 거짓이요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 모든 것이 잘 되어 갈 때, 번성하고 성공하는 것처럼 보일 때, 하나님 아닌 우상을 섬기는 것, 세속적인 지혜와 방법을 따르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여겨지고 심지어는 그것들이 그런 번영과 성공을 가져다 주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의 인내가 한계에 달하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성공과 번영에 손을 대실 때, 그것을 가져가시고 무너뜨리실 때는 그런 것들은  결코 구원도, 보호도, 피난처도 되어주지 못합니다. 정작 그렇게 도움이 가장 절실하게 필요할 때는 아무런 도움이 되어주질 못합니다. 그 이유는 그런 것들은 다 “인간 스스로가 자신의 손으로 만든 거짓된 것이고 그 속에 생기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만들어진 것은 만든 사람보다는 항상 작고 약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우상은 언제나 그것을 만든 인간보다도 약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어리석은 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 누구도 그 신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저 자신의 상상력을 동원해서 있다고 여겨지는, 자기 마음에서 나온  신을 만듭니다. 그리고는 이내 그 형상에 묶여 버리고 맙니다. 그 형상 자체를 신이라 생각하며 두려워하고 섬기게 됩니다. 그것은 사실은 자신의 상상력을 섬기는 것에 불과합니다. 아니 자기 상상력보다도 작은 것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이 참된 것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참되지 못한 것은 견고할 수 없습니다. 영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또한 그것은 그저 상상력의 산물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결코 생명이 없습니다. 그것에 의지해서 생명을 구해보려고 하는 것은 항상 실패하는 시도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상을 만든 자, 그 우상을 섬기며 기대며 살아가는 자는 결국에는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실체가 없고 거짓되고 생명이 없는 것을 철석같이 믿으며 살았기 때문에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설혹 그 대상이 우상이 아닌 사탄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탄은 없지 않습니다. 우상과는 달리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탄은 거짓됩니다. 그의 별명은 거짓의 아비이고 속이는 자입니다. 그렇게 참되지 않으므로 영원할수도 없고, 견고할 수도 없습니다. 게다가 그는 생명을 주는 자는 더더욱 아닙니다. 그는 생명을 빼앗는 자입니다. 생명을 망하게 하는 자입니다. 그러니 그게 우상이든  사탄이든 하나님이 아니라면 결국에는 그를 수치스럽게 하고 망하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악한 방법,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방법을 사용하면서도 여전히 흥하고 번성하기를 원합니다. 그런 방식이 자신이 원하는 힘과 성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넌센스입니다. 거짓된 것에서 참된 것을 기대하는 것이고, 생명이 없는 것, 오히려 생명을 빼앗아 가는 것에서 풍성한 생명을 얻으려는 시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이런 방법과 시도들을 지혜라고 부르고, 처세술이라는 그럴 듯한 말로 치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은 우둔한 것이고 무식한 방법이라고 부르십니다. 그것은 보이는 것만 보느라고 보이지 않지만 정말 결정적인 것은 전혀 보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을 벌하시고 부수실 분이 계신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심각한 어리석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사람들은 세상에 예수님처럼 어리석은 분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비웃고 모독했습니다. 그리고 사탄은 승전가를 부르고 파티를 벌였습니다. 그렇지만 사탄도, 사탄의 정신에 물들어 살아갔던 그 사람들도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십자가야 말로 하나님의 최고 최상의 지혜였으며, 사탄에 대한 결정적인 승리였다는 사실입니다. 십가가는 단순히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그 십자가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이 어떠한지를 가장 명확하게 알려주시는 시청각교재이기도 합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참된 지혜를 볼 수 있는 사람, 십자가에서 가장 큰 하나님의 승리를 볼 수 있는 사람만이 그 십자가의 참된 가치를 알고, 그 십자가의 지혜를 따라 살 수 있습니다. 비록 패배와 실패처럼 보이지만 결국에는 가장 큰 승리가 되는 가장 지혜로운 방식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바벨론과 바벨론의 길을 따른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하신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다시 한 번 우상과 하나님의 차이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그것들은 헛것이요 망령되이 만든 것인즉 징벌할 때에 멸망할 것이나 야곱의 분깃은 이같지 아니하시니 그는 만물의 조성자요 이스라엘은 그 산업의 지파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라” 우상은 기껏해야 이 세상에 있는 동물과 식물의 모습을 본 따 만든 것이고 잘해야 인간의 상상력에서 나온 가상의 이미지에 불과합니다. 그건 그저 만들어진 것, 그래서 실체가 없는 허무하기 그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심판당해야 할 것이고 결국 그것을 만들어 섬긴 사람들과 함께 다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릅니다. 그런 우상과 같지 않습니다. 그 분은 모든 것들을 만드신 분이십니다. 인간이 우상으로 섬기는 만물을 만드시고, 그 우상을 만든 인간을 조성하신 분이십니다. 그 모든 것의 주인이시고, 그 모든 것을 마음대로 다스리시는 만군의 여호와이십니다. 하나님은 우상과 비교할래야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우상과 완전히 다르다고 하시면서 자신에 대해서 조금 독특한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야곱의 분깃”이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분깃이 무엇입니까? 분깃은 어떤 사람의 몫으로 떼어준 상속물을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진짜로 주시고자 하시는 것, 그리고 진짜로 주신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 줍니다. 야곱, 그러니까 성도들의 분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들이 아닙니다.   만드셔서 이 세상에 두신 것들이 아닙니다. 놀랍게도 야곱의 분깃, 성도의 상속물은 다른 어떤 것도 아닌 하나님 자신, 그 분 전부이십니다. 

회원 여러분, 우리는 얼마나 큰 은혜를 누리고 있는 자들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얼마나 헤아릴 수 없이 큰 은혜를 베푸셨습니까? 우리는 성경의 표현대로 하면 하나님을 상속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왜 다른 것들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주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만으로만 만족하는 친백성을 만들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그 분으로 온전히 만족하며 그래서 그 만족함을 통해 하나님께만 영광돌리는 사람들을 만드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상숭배가 어떻게 생겨나는지 깨닫게 됩니다. 우상숭배는 불신앙입니다. 그 우상이 어떤 모습의 무엇이 되었든지 우상숭배는 불신앙입니다. 이것에 반대하시는 분은 한 분도 안계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상숭배의 근원은 무엇일까요? 왜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섬길까요? 그것은 하나님만으로는 결코 만족할 수 없다고, 하나님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분 대신에 자기가 만들고 자기가 선택한 것에서 만족을 찾으려고 하는 것, 그것이 우상숭배입니다. 이것은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에게 ‘나는 당신 전체를 주어도 만족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고, 그 무한한 지혜와 능력으로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시며, 필요를 공급해 주시는데 그것이 불완전하고 부족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간장종지가 바다보다 크다고 하며, 그 바다가 자신을 채우기에 부족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시며 전부가 되시는 그 분에 대한 무시이며, 가장 큰 불명예와 모독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론 : 하나님으로 만족하라

우리가 우리의 영원한 분깃이신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으로 만족하지 못할 때, 우리의 영혼은 항상 갈하며 항상 배고플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서 만족을 찾기 위해서 ‘우상숭배’라고 부르는 죄악된 선택을 반복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을 분깃으로 내어주시며 ‘나로 만족하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그 분이 우리를 충분히 만족시키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작고 유한한 우리를 꽉 채우고도 남는 무한히 크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 사실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으로만 만족하는 것입니다. 그 분을 나의 온전한 분깃으로 받아들이고 그 분이 내 삶에 허락하시는 모든 것들을 가장 선하고 온전한 것으로 인정하며 그 안에서 가장 큰 만족을 누리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이미 샘근원을 소유했기에 더 이상 터진 웅덩이를 파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분에게 진심을 다해 “나는 하나님 당신 한 분만으로 충분합니다. 당신이 나의 삶에 주시는 것들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최고로 선한 것이며, 그래서 가장 만족스러운 것입니다. 언제나 항상 나의 모든 것이 되어 주십시오.”라고 말씀드리는 것만큼 그 분께 큰 영광이 되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그 분의 은혜에 온전히 의지하며 사는 것만큼 그 분께 돌려드릴 수 있는 큰 영광은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거기에 이를 때, 우리의 믿음은 비로소 우리를 만족하게 하는 동시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온전한 믿음이 됩니다. 


보이는 것을 보지 마십시오. 그것을 따라가며 거기서 만족을 찾지 마십시오. 그런 것들은 다 만들어진 것이고 헛된 것이며 그 속에 생기가 없는 것들입니다. 결코 우리를 진실로 만족하게 할 수는 없는 것들입니다. 우리의 분깃은 그런 헛된 것들이 아닙니다. 우리의 분깃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은 그 분만이 우리에게 충분한 분이시고, 또 그 분만이 우리의 모든 것이 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믿음의 눈을 뜨십시오.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시고, 그 분의 흘러넘치는 충분하심과 온전하신 아름다우심을 발견하십시오. 우리의 육안은 결코 그것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믿음의 눈만이 그 분의 참 모습을 보며, 그 분으로만 만족하게 할 수 있습니다. 왜 보이지 않는 것을 보지 못합니까? 그것은 보려는 소원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것도 그 분만으로 만족하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말 보고싶어 한다면 볼 수 있고, 그 분으로만 만족하려고 하면 충분히 만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은혜라면 결코 아끼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이런 은혜에 욕심을 낸다면, 그 분은 얼마든지 쏟아부어 주실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자신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그 풍성한 은혜에 더욱 의지하십시오. 다른 것이 아니라 그 은혜에 의지해서 살아가십시오. 그 믿음이 우리를 만족과 기쁨으로 인도해  줄 것이며, 그래서 우리를 우상숭배로 부터 넉넉히 지켜주고 우리를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친백성이 되게 해 줄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는 순간이 속히 오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다시는 갈하지 않으며 다시는 배고프지 않고 그 속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는 주님께서 약속하신 진짜 복을 누리며, 다른 만족을 찾지 않는 참으로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