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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매일성경설교 22. 거짓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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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디모데 후서 1장 1-8절



서론 : 성령충만은 과연 모든 연약함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가? 

성도들은 성령충만을 원합니다. 언제나 그것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아마도 성령충만한 상태에 대한 어떤 특별한 기대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무조건 성령충만하기만 하면 모든 일이 다 해결될 것 같습니다. 나의 약점도 없어지고, 연약함도 강해지며, 이런 저런 능력을 얻어서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며, 죄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아무런 고민도 없어지고, 갑자기 인격도 완전해 지고, 자동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양심상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다 기대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대개 성령충만을 생각할 때, 성도들의 마음 속에는 이런 것들이 떠오를 것입니다. 물론 일시적으로지만 성령충만을 통해서 이런 상태가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대처럼 한 번 성령충만하기만 하면 이런 상태가 영원히 지속되는 것도 아니고 대부분의 경우에는 성령충만하다고 해서 갑자기 이런 변화가 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느끼는 것은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하게 되면 무엇보다도 우리의 감정이 흥분된 상태가 되기 쉽고, 그래서 자기의 상태에 대해서 과대평가하기 쉬워지기 때문입니다. 

또 많은 경우 성령충만을 성령의 은사와 연결지어서 생각하곤 하는데, 이것은 성령충만에 대한 무척 좁은 이해에서 나오는 생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성령충만이라는 것이 이런 초월적인 능력을 가져다 주기도 하지만 그것은 성령충만의 가져오는 결과의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필수적인 부분도 아닙니다. 사실 본질적으로 생각한다면 성령충만, 그러니까 성령님께서 우리 속에 충만하게 거하시는 일은 우리 자신의 온전한 회복을 의미합니다. 성령충만하게 되면 죄 때문에 잃어버리고 망가져 버렸던 마음과 생각의 기능이 온전히 회복되고 바로잡아 지는 일과 그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의 방향전환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것도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시작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성령충만해 진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적인 연약함들을 해결해주시고 없어지게 하시지도 않습니다. 물론 살면서 생겨난 마음의 상처와 죄 때문에 망가져 버린 우리 영혼의 문제들은 바로잡아 주시고 고쳐주시지만 원래 그 사람이 가지고 있었던 선천적인 성향이나 연약함들은 여전히 그가 평생 감당해야 할 때가 대부분입니다. 

또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연약함이 때로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온전함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의 예를 들면 쉽게 이해가 가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인간의 유형을 더 좋아하십니까? 목표가 있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전혀 흔들리거나 약한 감정을 가지지 않고 끝까지 이루고야 마는 강인한 사람이 좋습니까? 아니면 때로는 사람 때문에 고민하고 자신의 연약함에 몸부림치며 힘겨워 하는 사람이 더 좋습니까? 우리는 대개 앞의 유형을 더 좋아하고, 또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것같습니다. 그렇지만, 사도 바울은 정반대의 방향으로 갔던 사람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일을 위해서는 앞에서 사람이 돌에 맞아 죽어도 눈하나 꿈쩍하지 않는 바늘하나 들어가지 않을 정도의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는 물론 그의 목적에 있어서는 추호의 흔들림도 없었지만, 항상 사람 때문에 고민하고 자신의 연약함과 죄악에 몸부림치며, 성도들의 사랑과 위로를 그리워 하며 자신의 그런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소위 말하는 훨씬 더 “인간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실제적으로  본다면 훨씬 더 살기에 불편해진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성령님께서 바울 안에 만들어낸 변화고 회복이었습니다. 

성령충만은 우리를 우리가 원하는 모습으로 만들어 주는 도구가 아닙니다. 성령충만을 바라면서 그것을 기대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자신을 잘못된 방향으로 가게 하는 일이 되기 쉽습니다. 여러분도 때로는 신앙은 좋은 것 같은데, 성령충만한 것 같기는 한데 무척 냉정하며 감정없어 보이고 다른 이들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그런 잘못된 생각의 피해자입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그 분은 우리가 진실로 예수를 믿는 순간 우리 속에 다시 들어와 거하시기 시작하시고, 죄 때문에 망가져 버린 우리의 속 사람을 원래의 상태로 돌려놓으시기 시작합니다. 이성도 감성도 함께 회복되기 시작합니다. 생각이 바로잡아지기 시작하고 사라졌던 감정도 다시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런 감정에는 우리가 그 동안 귀찮다고 여겨서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없애버렸던 감정들도 포함됩니다. 인간이기에 다른 인간의 사랑과 위로를 필요로 하는 감정, 다른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감정, 자신의 죄 때문에 괴로워할 수 있는 감정 등... 우리가 어쩌면 성령충만하면 완전히 벗어버릴 수 있다고 여겼던 감정들까지도 생생하게 되살아 납니다. 게다가 인간이기 때문에 가지는 연약함들, 그리고 부족함들이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약점 자체가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바울이 편지를 쓴 이유 : 낙심과 두려움에 빠져가는 디모데를 다시 세우길 원함

디모데 전후서의 수신자인 디모데는 인간적으로 볼 때 결코 강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일단 그는 매우 여린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감성적인 면이 강한 사람이었고, 성격은 밝고 쾌활하기 보다는 우울한 사람에 가까웠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몸도 약했습니다. 아마도 어떤 만성 질병을 가지고 있었던 것같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바울의 양육을 받은 후에는 바울의 뒤를 이어서 어린 나이에 에베소 교회의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일단 그 엄청난 바울의 뒤를 이어서 에베소 교회를 돌보게 되었다는 것은 여린 마음을 가진 그에게 가장 큰 부담이었을 것입니다. 나이때문에 주눅들기가 십상이었고, 바울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나는 왜 바울과 같지 못할까 하고 스스로 절망한 적도 많았을 것입니다. 외부적인 이유도 그를 힘들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주변에서는 이단들이 힘을 얻기 시작했고, 핍박이 시작되고 있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자신이 아버지처럼 믿고 따르던 바울은 감옥에 갇혀서 사형을 당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그는 점점 더 믿음의 용기를 잃어가게 되었고, 두려움에 빠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디모데는 그 누구보다도 훌륭한 사역자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실망과 두려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분명히 성령충만한 사람이었지만 그의 기질적인 연약함과 신체적인 연약함은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당시 바울도 가장 힘든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 노령에 그렇게 차고 음습한 지하감옥에서 지내는 일은 육체적으로 볼 때 그에게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주변의 사람들이 한 사람씩 자신을 떠나가고 있는 상황에서 오는 외로움과 상실감도 무척 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디모데에게 편지를 쓴 이유는 그런 저런 문제들로부터 오는 자신의 어려움이나 필요를 하소연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좌절감과 두려움에 빠져가는 디모데를 하나님의 사역자로 다시 든든히 세워주기 위해서 디모데를 다시 한 번 꼭 만나기를 원했고, 그 전에 먼저 편지를 통해서 그 작업을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기뻐하지 못할 때처럼 힘든 경우가 없습니다. 스스로의 한계를 절감하고 자신에게 좌절하는 것처럼 견디기 어려운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럴 때, 누군가가 특히 자신이 신뢰하는 사람이 진심으로 자신을 인정해 주고 사랑하고 있음을 알게 되는 것만큼 큰 힘이 되는 일은 없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바울은 자신이 디모데를 위해서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또 자신이 디모데를 보고 싶어하는데, 그것은 그 만남이 자신의 충만한 기쁨을 회복되게 해 줄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의 이야기는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디모데로 인해서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었고, 그런 그를 무척이나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런 자신의 마음을 전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안에서 그를 격려하고 바로 세워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바울이 디모데에게서 본 것, 그래서 디모데를 기뻐할 수 밖에 없고, 다시 볼 때에 자신의 기쁨을 충만하게 해 줄 것을 기대하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를 사랑했기 때문만도 아니고, 그가 자신의 필요를 채워줄 것을 기대했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그가 디모데를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할 수 밖에 없었고, 큰 기쁨을 누릴 수 있었던 이유는 디모데 안에서 “거짓없는 믿음”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실망과 두려움에 빠져들기 시작한 디모데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 있었던 믿음, 청결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거짓이 없는 믿음”이 디모데에게 있음을 알려주고 그것 때문에 자신이 디모데를 크게 기뻐하며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고 알려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 안에도 있고, 디모데의 할머니와 어머니 속에도 있었던 그 ‘거짓이 없는 믿음’이 그에게도 있음을 꼭 알게 해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아마 정서적이고 육체적으로 연약한 그가 사역을 하는 도중에 약해지는 자신을 보면서 스스로의 믿음에 대해서 회의하고 실망하게 되었을 때, 바울의 이런 이야기는 디모데의 영혼을 소생시키기에 충분한 하나님의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그러나, 바울은 단순히 디모데를 격려하고 위로하는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더 나아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6절이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 말은 6절이 5절의 결론이라는 것을 알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 힌트를 근거로 바울의 말을 풀어보면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너의 거짓 없는 믿음을 생각할 때마다 너무 기쁘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된다. 이것은 여기 갇혀있는 나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가장 큰 격려고 위로다. 너는 결코 너의 믿음에 좌절할 필요가 없다. 그렇지만, 내가 진짜로 하고 싶어하는 이야기는 그게 아니다. 내가 너의 거짓 없는 믿음이 있다고 말해주는 진짜 이유는 그 믿음이 바로 너로 하여금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얻게하는 통로가 된다는 점을 알려주기 위해서다. 마음 같아서는 직접 만나 안수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너에게 그 은혜를 주시도록 간구하고 싶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기 때문에 편지로 나마 먼저 알려준다. 너에게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기에 네 안에는 항상 하나님의 선물인 성령님이 충만히 거하고 계신다. 너는 그 사실을 의지해야 한다. 두려움은 결코 성령님의 역사가 아니다. 하나님의 영은 결코 두려워하게 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 분은 오히려 능력의 영이시며, 사랑의 영이시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바른 생각과 결정을 하게 하시는 온전한 영이시다. 나는 네가 이 점을 잊지 말기를 바라며, 네가 이미 이 충분한 은혜 안에 거하고 있음을 확신하기를 바란다.” 

바울이 디모데에게서 거짓이 없는 믿음을 보면서 그렇게 기뻐하고 감사했던 것은 그 믿음을 알고 또 지켜보는 것 자체가 바울에게는 크나큰 기쁨이자 감사의 조건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디모데가 가지고 있는 거짓없는 믿음이 성령의 충만한 임재를 가능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열린 통로가 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디모데가 가지고 있는 연약함은 사역의 방해물이나 한계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디모데가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다는데 있었습니다. 자신의 연약함과 주변의 방해와 반대 때문에 그 귀한 사실을 잊어가고 있었고, 그래서 두려움에 빠져가고 있었다는 것이 그의 문제였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연약함이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연약함 자체가 나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연약함이 사탄이 우리를 시험하며 좌절과 두려움에 빠지게 하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선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은 두려움의 영이 아니다.” 바울은 디모데의 모든 문제의 근원이 그의 두려움에 있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그러면서 너는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너는 네 안에 있는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영을 선물로 받았는데 그 분은 두렵게 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해 줍니다. 충분히 두려움에 빠지게 할 수 있는 조건이 있습니다. 기질적으로 겁이 많을 수도 있고, 환경이나 건강적인 조건이 충분히 그를 두렵게 만들만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그에게 정당한 것도 당연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혼자가 아니라 성령님이 항상 그와 함께 계셨는데, 그 성령님은 두려워하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그 두려움을 이기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내부적인 연약함과 외부적인 어려움은 서로를 증폭시켜서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부족함과 연약함에 집착하게 만들기 쉽습니다. 하나님과 그 분의 함께 하심이 아니라 자기의 능력이나 기질, 그리고 환경만 바라보게 만들기 쉽습니다. 이것을 그냥 두면 우리는 금방 두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이내 무기력함으로 바뀌게 되고, 우리에게서 영적인 열정과 기쁨들을 빼앗아 갑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는 결코 두려움에 굴복해서는 안된다”고 말합니다. 네 건강이, 네 기질이, 네 성품이, 너의 환경과 주변의 극심한 반대가 너를 충분히 두려워하게 할만하지만 그래도 그 두려움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거기에 굴복해서는 절대로 안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다시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성령님은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의 영, 그러니까 판단력과 분별하게 하시는 영이다” 성도가 두려움에 빠지면 가장 먼저 잃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주신 능력입니다. 두려움이 자꾸 우리 자신만을 바라보게 함으로써 성령님이라는 막강한 도움의 근원을 보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은혜를 받아들이는 손입니다. 아무리 큰 은혜가 있어도 그 은혜를 믿지 못하면 그 은혜는 우리에게 큰 능력이 되지 못합니다. 그 다음에 두려움에 빠지면 사랑하지 못하게 됩니다. 사랑은 두려움이 없어져야 비로소 진실로 가능하게 됩니다. 사람이 주변의 반대와 공격을 받게 되면 두려움이 생기게 됩니다. 거절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또 오해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손해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사람들을 향한 이러한 두려움들이 생기게 되고, 그 두려움이사랑을 방해해서 결국은 사랑하지 못하게 합니다. 또 두려움은 정확한 분별력과 판단력을 방해합니다. 그 이유는 두려움이 모든 문제의 크기를 지나치게 과대평가하게 만들고 반면에 나 자신과 성령님의 도움을 과소평가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뻔히 보면서도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무엇이 나에게 가장 유익한 것인지를 분별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두려움은 그 사람의 삶과 사역 전체를 망가뜨리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두려움에 빠져 그런 실패를 하지 말고 성령님께 의지하여 두려움을 이겨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디모데에게처럼 우리에게도 두려움에 빠질 수 밖에 없는 여러가지 조건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나의 여린 마음이, 겁많은 성향이, 상대적으로 비관적인 기질이, 주변의 환경이, 사람들의 반대가, 그리고 우리의 신체적인 부족함이 우리를 두려움에 빠지게 하려고 달려들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면, 두려움은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참된 성도는 결코 그 두려움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됩니다. 그 두려움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순간 성도는 모든 면에서 성도로 사는 일에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영적인 좌절을 경험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의 의미

우리가 참된 믿음을 가지고 성령충만해 진다고 해도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우리의 연약함이나 취약함들을 치워주시지 않으실 때가 더 많습니다. 디모데가 참된 믿음을 가졌고, 성령충만한 사람이었지만, 여전히 육체적인 연약함과 정서적인 취약함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이렇게 하실까요?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으로 모든 것을 넘어서는 강인함을 주셔서 그 어떤 장애도 없이 성도로 살고 사역하게 해 주시지 않으실까요? 우리 생각에는 그렇게 해 주시면 하나님과 우리 자신 모두에게 다 좋을텐데 말입니다. 우리가 그 모든 세세한 목적을 다 이해할 수는 없어도 그래도 확실히 알 수 있는 것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시는 것보다, 그렇게 해 주시지 않는 것이 우리나 하나님 모두에게 훨씬 더 유익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그 언제나 그렇지 않은 일은 결코 하지 않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이 그대로 남아있게 하시는 것이 왜 하나님과 우리에게 모두 좋은 것일까요?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인간의 연약함은 인간으로부터 자기자랑을 빼앗아 갑니다. 그 부족함과 연약함이 그 자신의 완전치 못함을 인식하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또 인간의 부족함은 자기를 의지하지 못하게 합니다. 자신은 의지할만큼 충분하고 강한 대상이 못된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족한 사람, 자신의 불완전함을 진실로 인정하는 사람은 자기를 자랑하고 자기를 의지하는 대신에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고 그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을 자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자기 삶에서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실제적으로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손해만 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실은 그 사람이야 말로 참으로 유익을 누리게 됩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누구보다도 더 많이 경험하게 됩니다. 그 은혜가 자신을 성도로 살게 하며 또 그 은혜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은혜로 만족하게 됩니다. 


성령의 은혜는 나의 연약함을 상쇄하기에 충분하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도, 성령충만해도 우리는 여전히 연약합니다. 예수를 잘 믿는다고 해도 갑자기 기질적으로 취약한 부분이 사라지거나, 모든 육체의 약함이 치유되거나, 주변의 반대와 장애가 사라지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요, 하나님의 종으로 사는 우리 모두는 종종 그런 자신을 바라보며 두려움에 빠지게 되고, 그 두려움이 자칫 영적인 패배감과 무기력으로 이어지게 되는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회원 여러분, 아무리 두려움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게 하는 객관적인 조건들이 많다고 해도 성도들은 두려움을 자신과 동행하는 친구로 삼아서는 안되며, 오히려 싸워서 이겨내야 하고 또 이겨낼 수 있는 적으로 알고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시지 않습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 사탄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두려울 때일수록 나 자신이 아니라 은혜에 집중해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그 두려움을 능히 이기게 하는 능력과 사랑과 영민한 분별력과 판단력이라는 은혜로운 진리에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고정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연약함과 부족함이란 두려움의 조건이 아니라 더욱 더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게 하려는, 그래서 그 분의 더 크고 풍성한 은혜를 알고 경험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연약하고 부족해도 또 환경이 아무리 열악하다고 해도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풍성한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성도로 살고, 또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들을 온전히 감당하게 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습니다. 우리가 이 진리에 믿음을 더하고 의지한다면 우리는 능히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결론 : 거짓없는 믿음을 위해 싸우라

우리의 믿음에서 거짓이 없어지는 그만큼 우리 속에는 두려움을 이기게 하는 성령님의 능력이 충만할 것입니다. 거짓없는 믿음이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짓없는 믿음은 자기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믿음은 자신의 부족함과 약함을 알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거짓없는 믿음은 자기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의 능력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를 알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짓없는 믿음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드러내며, 그 분의 은혜를 가장 은혜답게 빛나게 합니다. 그 은혜만 의지하고 그 은혜로만 만족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눅들고 좌절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그 믿음을 통해 부어지는 성령님의 은혜와 능력은 그런 부족함을 보충하고도 여전히 흘러 넘칠만큼 언제나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성도로 살다가,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나의 부족함과 연약함 주변의 반대와 장애물로 낙심이 찾아오고 두려움이 찾아올 때, 그 때야 말로 거짓없는 믿음을 위한 싸움을 다시 시작해야 할 때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내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새롭게 하고, 나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해야 하기 위한 가장 적절한 때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거짓이 없는 믿음을 가진 자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능력의 영이며, 사랑의 영이고, 또 지혜와 온전한 분별력의 영이신 성령님을 주셨습니다. 약함에 집중하지 마시고, 믿음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부족함에 집중하지 마시고 그것을 덮는  풍성한 은혜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를 성도답게 사는 일에 성공하게 하고 또 두려움을 이기게 할 것입니다. 


우리 속에 거짓없는 믿음이 더욱 온전해져 감으로 인해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덮고도 남는 두려움을 이기게 하시는 성령님의 은혜가 풍성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