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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2010년 매일성경설교 24. 복음의 진리로

 방문하시는 중에서 혹시라도 도움이 될까 적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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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다녀가실 때는 짧은 댓글 부탁드립니다. ) 누구 누구 다녀갑니다. 댓글은 저만 있도록도 저장할        있습니다





본문 : 갈라디아서 2장 1-10절


서론 : 복음은 완벽하고도 충분하다

오늘 설교를 위해서 먼저 국어 공부를 좀 하겠습니다. 먼저 ‘완전함’이라는 단어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부족하거나 흠이 없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완벽함에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군더더기가 있어서도 안되지만, 또 부족한 것도 없어야 합니다. 이런 두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추어야 비로소 완전하다, 완벽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두번째는 ‘충분함’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만족할만큼 넉넉하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충분하려면 부족하면 안됩니다. 최소한 부족하면 안되고 남아야 합니다. 어떤 필요를 넉넉하게 채우고 남아야 충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이 두 단어는 어느 부분에서는 겹치는 부분이 있지만 또 다른 부분도 있습니다. 충분함의 특징은 어떤 필요를 채우고 남는다는 것인데, 완벽함이란 남는 것이 있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완벽함과 충분함은 한꺼번에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완벽하면서도 충분할 수 있고, 또 완벽하면서도 충분해야만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복음은 완벽합니다. 그래서 거기에는 덧붙일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덧붙이는 순간 그 완벽함이 깨어집니다. 그렇다고 부족하기 때문에 보충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복음은 이미 우리를 구원하기에는 역부족인 것이고 그래서 우리를 구원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복음은 충분합니다. 복음은 믿는 자들을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하기에 충분합니다. 복음이 보여주는 진리는 그것을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기에 넉넉합니다. 그 풍성함은 다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 가운데서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안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음의 놀라운 점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복음은 완전하고 완벽하지만 동시에 충분하고 넉넉합니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지만, 구원을 위한 충분히 차고 넘치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이 자기 변호를 하는 이유

갈라디아서는 다른 서신서와 비교해서 바울 개인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자기의 과거를 이야기하고 현재를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 속에는 어찌보면 자신이 진짜 사도이고, 자신이 전하는 복음만이 진짜라는 듣기에 따라서는 아주 거북하고 독선적인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자신의 이야기로 귀한 지면을 채워가며 어찌보며 자기 변호와 변명을 하는 이유는 자기 자신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전하는 복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왔고 또 그 복음은 수많은 사람들을 믿음과 구원으로 인도해 왔습니다. 그런데, 특히 갈라디아 교회에, 바울이 떠난 후, 자기들을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보낸 사람들이라고 주장하는 일단의 사람들이 들어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받는 구원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했고, 그 주장을 더 확고히 하기 위해서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을 전했던 사도 바울의 사도로서의 자격을 문제삼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단지 개인으로서의 바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을 사도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자신을 사도로 생각했다는 것은 그는 개인의 삶을 살아가는 한 사람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복음을 맡은 공인으로 생각했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자신이 사도인 것이 그렇게 중요했던 이유는 그 직분 때문이 아닌 그 직분을 자신에게 맡기신 하나님 때문이었고, 또 그렇게 자신에게 맡겨진 복음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자신의 사도됨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부분을 보면, 그가 자신의 사도직에 대해서 매우 집착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그것은 그가 그 직분 자체를 사랑해서라기 보다는 그 직분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사도로서의 정당성이 의심받고 흔들리면 결국 자신이 전한 복음도 의심받게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사도됨에 대해서 그렇게 힘주어 강조하고 또 강조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건 너무 당연합니다. 여러분이 저를 목사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제가 이 자리에서 설교하고 말씀드리는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제가 아무리 진짜를 이야기 해도 여러분이 저를 가짜라고 생각한다면 오히려 저 자신이 그 진짜 진리를 가로막는 걸림돌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부족한 복음?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쓸 당시는 아직 복음전파의 초기였습니다. 복음전파의 초기라는 것은 그만큼 혼란이 많다는 뜻도 됩니다. 유대인 중에서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많았고, 이방인들 중에서도 예수를 믿게된 사람들이 많았지만 양쪽 모두 아직 자신들이 익숙해 있는 종교와 문화의 영향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습니다. 특히 문제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뿌리깊게 가지고 있는 생각 중 하나는 구원은 유대인들만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들 중 일부는 복음을 믿게 된 이후에도 이 생각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구원을 얻으려면 예수를 믿음으로써 내면적이고 영적으로 유대인이 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할례를 받음으로써 형식적으로도 완전한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 중의 일부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복음이 전파된 헬라의 여러 도시들을 돌아다니면서 그런 주장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도 자기들은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보내서 왔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이방인들은 아무래도 하나님을 믿는데 있어서는 유대인들보다 늦게 시작했고, 그만큼 스스로를 유대인들보다 부족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이방인들에게 이제 할례를 통해서 천국의 이류시민이 아닌 명실상부한 천국의 일등시민이 되는 자격을 얻을 수 있다고 꼬득이는 유대인들의 주장은 아주 달콤한 유혹이 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왜 할례받으면 안되는가?

여러분 어떻습니까? 얼핏 보면 이런 주장은 별로 이상할 것도, 위험할 것도 없지 않습니까? 이미 믿고 있었던 예수를 안 믿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또 이미 믿는 복음의 내용에서 무언가를 제거하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이미 믿고 있는 복음은 그대로 놔두고 거기에 할례를 하나 더 더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주장은 복음에 아무런 지장이 없지 않습니까? 복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닙니까? 겉으로는 충분히 그렇게 보입니다. 아마 이런 이유 때문에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의 표현대로 그렇게 쉽게 그러한 유대인들의 주장을 수용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바울의 보기에 이건 절대로 안될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진짜와는 다른 복음, 그러니까 복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복음에 무언가를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아예 복음을 망가뜨리는 것이었고, 그래서 복음으로 인한 구원마저도 취소시킬만큼 중요하고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만약 그런 것을 복음이랍시고 전한다면 전하는 자가 천사일지라도 저주를 받을 정도로, 또 그것을 받아들여 할례를 받는다면 아얘 구원에서 끊어질 정도로 절대로 전해서도 받아들여서도 안되는 주장이었습니다. 

버팀목 세개로도 충분하지만 나중에 나무가 흔들릴 것을 생각해서 버팀목 하나를 더 세워주는 것은 전혀 잘못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조금 낭비이기는 해도 그리 큰 문제는 없습니다. 지금 믿는 복음으로도 충분합니다. 안전합니다. 그렇지만 거기에 안전장치를 하나 덧붙이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 복음을 더 견고히 하고, 그 복음이 가져다 주는 구원을 더 확실히 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까? 그 귀한 구원을 그런 식으로 더 견고하게 하는 일은 오히려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까? 만약 복음이, 그리고 그 복음을 믿고 구원을 얻는 일이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만나고 또 행하는 일들에 속하는 일들이라면 그런 태도는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고, 오히려 지혜롭고 사려깊은 일이 될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복음이 이야기하는 바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이기 때문에 생겨납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유일하고도 충분한 구원자와 그를 믿는 믿음으로만 가능한 구원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문제는 아주 심각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은 단순히 하나의 구원을 위한 방법이 아닙니다. 그것은 유일무이한 구원의 방법이며, 또 완전한 구원의 방법이기도 합니다. 이 복음을 믿는 것 밖에는 전혀 다른 구원방법은 없습니다. 게다가 그 방법은 완전하고 완벽합니다. 무언가를 덧붙여야 할 부족함도 없지만 빼버리고 생략해도 좋을 군더더기 또한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 어떤 죄인도 믿음을 통해 구원얻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전혀 부족함이 없습니다. 다른 것들은 거기에 무언가를 덧붙인다고 해서 그 본체까지 완전히 망가지지는 않습니다. 본체는 그대로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다릅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거기에 무언가가 덧붙여지는 순간 완전히 망가지고 맙니다. 그렇게 무언가를 덧붙인 사람들에게 복음은 더 이상 구원을 주지 못합니다. 그것을 믿는 믿음은 복음을 믿는 믿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원래 복음은 인간은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완전히 무능하다는 진리를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만약 인간에게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그 어떤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십자가의 복음은 전혀 필요없는 것이 될 것이고, 또 은혜는 전혀 은혜되지 못합니다. 인간이 그 어떤 것으로도 전혀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기준과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기에 하나님께서 직접 그 방법도 정하시고 직접 그 모든 필요한 일을 행하셔서 그 분이 이미 이루어 놓으신 구원을 믿음이라는 손을 통해 받게 하셨다는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바울이 얼핏보기에 별로 문제 없어 보이는 할례의 문제를 복음의 본질을 망가뜨리고 그래서 구원을 취소시키는 최고로 심각한 일로 보았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은혜에 무언가를 덧붙이는 순간 이미 그 복음이 복음일 수가 없게 된다는 특징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복음을 믿었습니다. 그 복음을 믿음으로 그들은 구원을 받았고, 성령의 충만하신 임재도 경험했습니다. 성령충만이란 바로 하나님의 보증입니다. 미래의 완전한 구원을 보증하는 계약금이 바로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이 하나님의 영이고, 그래서 또 하나님 자신이시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최종적이고 완전한 구원의 계약금으로 지불하신 것입니다. 복음을 믿는 믿음을 통한 은혜의 구원은 그만큼 확실하고 확고한 일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어떤 사람이 무언가를 덧붙이려 한다면 이것은 어떤 일이 되어버립니까? 그것은 이미 완전하다고 여기는 일에다 무언가를 덧붙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실은 복음이 자신을 구원하기에는 불안하고 부족하다는 것을 행동으로 증명해 보이는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 할례라는 것을 받지 않는다면 구원은 흔들릴수도, 실패할수도 있다고 말하는 셈이 됩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이런 생각과 행동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구원을 위해서 행하신 모든 일들보다도 내가 덧붙이는 할례라는 조건이 구원을 위한 더 중요하고 결정적인 조건이 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가능한 구원”은 “할례를 받아야만 비로소 확실해 지는 나약하고 부족하며 그래서 나의 도움이 꼭 필요한 구원”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복음은 결코 복음이 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흔들릴 수 있는 구원, 실패할 수 있는 구원, 그리고 부족하고 나약한 구원은 이미 구원이 아닙니다. 나의 행위와 노력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구원이라면 그 구원은 이미 아무런 가치없는 구원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주면서 수영하는 법을 알면 살려준다는 조건을 단다면 그것이 무슨 구원의 소식이 되겠습니까?  100점 맞을 수 있는 사람에게만 공부를 가르쳐 준다고 말한다면 그게 무슨 좋은 소식이겠습니까? 이미 할 수 있는 사람에게 할 수 있게 해 주겠다는 것은 그리 좋은 소식이 아닙니다. 우리는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다고 배워왔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무엇을 믿음이라고 말합니까? 바로 “나는 내 구원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완전히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모든 일들이 나의 구원을 위해서 완전하고도 충분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완전히 만족하고 거기에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러한 겸손한 받아들임과 만족을 바로 믿음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미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이 거기에 무언가를 덧붙이려고 한다면 그가 정말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완전하고 충분하다고 하면서 자꾸 무언가를 갖다 붙여야만 만족스럽고 든든해 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이 진짜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그런 태도는 그 동안의 믿음이 어쩌면 온전한 믿음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증거는 아닐까요? 


할례는 모든 율법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오늘 본문을 보면 5절 이하에서 사도 바울은 그가 사도들에게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갔던 일을 언급하면서 자신의 제자였던 헬라사람 디도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라도 억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우리가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헬라인 디도에게 할례를 받게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럴만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실 할례는 할례 자체로는 받거나 안 받거나, 그 할례를 구원의 더 확실한 조건으로 내세우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주장이 생겨나면서부터 할례는 복음이 복음되게 하는 일을 가로 막는 가장 큰 문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도에게 절대로 할례를 받지 못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는 그 일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원래 예수를 믿기 전에 모든 사람은 그것이 그 사람의 양심의 법이든 혹은 기록되어 있는 율법이든 율법의 종이었습니다. 여기서 율법의 종이라는 말은 율법에 매여, 결국 그 저주를 받을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성경의 용어입니다. 원래 율법은 두가지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기준이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동시에 그렇지만 인간은 결코 그 기준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현실을 알려줍니다. 그런데, 그 기준을 만족시키지 못하면 영원한 죽음이라는 형벌을 받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율법은 결국 언제나 “율법의 저주”를 가지고 그 율법을 통해 의로워지려는 사람들을 묶어놓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그 율법의 저주를 모두 감당하심으로써 우리를 율법의 저주로 부터 풀어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가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덧입혀짐으로써 우리는 더 이상 스스로 의로워질 필요가 없어졌고, 그래서 율법은 더 이상 영원한 죽음이라는 형벌로 우리를 협박하고 두려워하게 만들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자유입니다. 그런데, 할례를 받는 일은 이 일을 무효로 돌립니다. 할례는 그 사람을 다시 자신의 노력을 통해서 의로워지려고 하는 사람으로 돌려놓는 일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다시 모든 율법을 지켜야 하지만 결코 그럴 수 없다는 현실 속에서 고통하는 사람으로 되돌아 가고 맙니다. 그리고 결국은 그 율법이 정하는 형벌인 영원한 죽음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다시 율법의 종이 된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다시 율법의 종이 된다는 것은 실은 그리스도의 의의 덧입음으로써 얻게되는 구원이 무효화된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당시의 갈라디아인들과 같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안에 있는 우리에게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중요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할례의 유혹은 오늘도 계속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얻게되는 구원의 복음”은 완벽하고 완전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그 어떤 것도 덧붙여서도, 덧붙일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은 충분한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무엇을 덧붙이려 드는 것은 복음의 완전함을 부인하는 것이며, 복음의 충분함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구원은 은혜입니다. 그 은혜를 은혜로 받을 수 있는 믿음이라는 손만 있다면 구원은 온전하고 안전하게 주어집니다. 그러나, 오늘날도 여전히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불안해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탄은 그 불안함을 통해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자유를 빼앗고 우리를 다시 율법의 종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그 유혹은 정말 집요합니다. 항상 새로운 모습의 “할례”를 가지고 우리를 찾아와서는 너 스스로 성도의 자격을 갖추라, 구원의 조건을 만족시켜 더 확실한 구원을 움켜쥐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마치 성도다운 성도가 되라는 소리처럼 들려서 구분해 내기 참 어렵습니다. 게다가 그 옛날 처럼 우리 바깥의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가 아닌 우리 내면의 목소리를 통해서 우리를 유혹하기 때문에 더더욱 분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꼭 분별해 내야 하고 또 끊임없이 싸우고 떨쳐버려야 합니다. 

불안함은 항상 그 불안함을 느끼지 못하게 할만한 무언가가 주어지면 오히려 자기 모습을 만족으로 바꿔 버립니다. 돈이 많기 때문에 생겨나는 만족은 실은 돈이 없음에 대한 불안함의 이면입니다. 건강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만족은 건강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의 반대편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된 만족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비슷한 일이 신앙의 세계에서도 일어납니다. 구원에 대한 불안함은 그 불안함을 없애줄만한 어떤 조건이 주어지면 확신으로 바뀝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참된 구원의 확신이 아닙니다. 단지 확신으로 가장한 불안함의 다른 모습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혹시 여러분에게는 스스로 정해놓은 자신만의 성도됨의 기준이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만족시킬 때는 구원의 확신 가운데 기뻐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자신의 구원을 의심하게 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하는 그런 기준이 있지는 않습니까? 이런 것에는 할례처럼 기도나 봉사와 같은 종교적이고 신앙적인 것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속에는 우리가 흔히 “축복”이라고 부르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들도 충분히 이런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복을 충분히 받을 때는 그런 복을 받고 있기에 안전한 성도, 좋은 성도라고 생각하지만 그 복이 없어지면 자신의 신앙과 하나님의 사랑마저도 점점 희미하게 느껴지는 성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분들에게는 그 복 또한 새로운 할례가 될 수 있습니다. 


결론 : 답은 복음에 대한 만족이다

인간에게는 더 중요한 일에 대한 것일수록 그만큼 더 스스로 기준을 세우고 싶어하고, 그 기준을 만족시킴으로써 스스로 만족하고 안전감을 느끼고 싶어하는 너무나 집요하고 떨쳐버리기 힘든 욕구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탄도 그러한 우리의 마음을 이용해서 우리를 자기 의의 사람으로 만들어 다시 율법의 저주 가운데로 몰아넣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런 시도는 애석하게도 제가 보기에는 많은 경우 성공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런 유혹이 그렇게 강하다고 해서 우리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생각하는 것만큼 저항하기 힘들거나 혹은 이겨내기 힘든 것도 아닙니다. 모든 문제의 답은 그 문제 안에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할례의 유혹”을 이겨내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 안에 답이 있습니다. 왜 갈라디아인들이 예수를 믿고도 할례를 받았습니까? 왜 오늘날의 성도들이 예수를 믿으면서도 자꾸 자기가 만든 기준을 만족시키고 그 안에서 영적인 안전과 확신을 얻으려는 헛된 노력을 합니까? 그것은 복음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 구원에 대한 확신, 그리고 그 구원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정하신 하나님의 방법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할례의 유혹”에서 자유를 얻는 유일한 방법, 다시 율법의 종이 되는 삶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자유를 풍성하게 누리며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복음을 복음으로 제대로 믿는 것입니다. 그 방법 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 믿음이란 바로 은혜를 은혜로 받아들이는 손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를 위한 완벽하고도 유일한 하나님의 구원방법이며 또 충분한 구원방법임을 깨닫고 거기에 충분히 그리고 완전하게 만족하는 것”입니다. 이미 최고의 음식을 배부르게 먹은 사람은 맛있는 음식에도 식욕을 느끼지 않게 마련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최고의 복음으로 충분히 만족한 사람에게는 그 어떤 자기 의의 유혹, 자기 만족의 유혹도 유혹꺼리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미 배부른 사람에게 더 먹으라고 하는 불쾌한 제안이 될 것입니다. 


회원 여러분, 할례는 받아도 그만 안 받아도 그만인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완전하고 충분한 복음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에 또 다른 조건과 기준을 붙이고 그것을 따르는 일은 결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일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결코,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아직 구원받기 이전의 상태로 돌려놓는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할례의 유혹”이라는 치명적인 유혹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우는 사자처럼 우리를 삼키려고 틈을 노리고 있습니다. 주의 하십시오. 그리고 이제 적어도 구원에 관한 한, 복음으로만 만족하시기를 바랍니다. 복음으로만 배부르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려면 한가지 꼭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시간과 마음의 투자입니다. 복음에 대해서 조금 더 관심을 가지시고, 왜 복음인지, 왜 복음이어야만 하는지, 그리고 왜 복음이면 충분하고 더 이상 필요없는지를 알고 확신하는 일에 여러분의 시간을 들이십시오. 십자가로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겸손한 믿음을 달라고 항상 기도하시고, 또 성경과 좋은 서적들을 통해서 거기에 필요한 참된 지식을 얻어가시기 바랍니다. 아주 천천히라도 좋으니 꼭 그렇게 하십시오. 그렇게 하셔야 합니다. 움직이는 일에만 몰두하지 마시고, 그저 이렇게 복음에 대해 한 번씩 설교듣는 일로만 만족하지 마시고 그렇게 하십시오. 그렇게 십자가의 복음에 점점 더 깊게 빠져가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영혼에 그것만큼 중요하고 유익한 일은 없을 것이고, 또 강건하고 흔들림 없는 영혼을 만들어 줄 좋은 투자는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모두를 복음에 관한 한, 그 복음으로만 가능한 구원에 관한 한 결코 흔들림이 없는 견고한 성도들이 되게 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