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법]
방문하시는 분 들 중에서 혹시라도 도움이 될까 적어봅니다.
1. 읽기는 그냥 사이트에서 읽으시거나 마우스로 클릭하시면 다운로드 되는데, 그렇게 읽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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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로마서 10장 1-13절
서론 : 신앙에 있어서 더 중요한 것은 지식이다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신앙생활을 해 보려고 노력해 본 사람들의 공통된 고민이 있습니다. 물론 신앙생활을 하는데는 다른 어려움들도 많지만, 성도들과 대화를 나누어 보면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을 분별하는 것이 참 어렵다는 이야기를 하십니다. 둘 중의 하나가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고 다른 하나는 그렇지 않은 것이 분명할 경우에는 윤리적인 선택만 하면 되니까 그래도 쉬운데, 여러가지의 선택들이 신앙적으로나 양심적으로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모두가 다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여겨질 때는 하나를 선택한다는 것이 참 쉽지 않습니다. 물론 이론적으로는 아무 거나 선택해도 좋겠지만, 실제로는 분명히 그 중에서도 하나님이 더 기뻐하시는 것이 있다는 생각 때문에 섣불리 하나를 선택하기는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실은 이런 문제들과 고민들 때문에 온전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참 어렵다고 여겨질 때가 많습니다. 때로 이런 고민들이 깊어지면 “진짜 신앙이라는 것이 이렇게 복잡한 것이 맞나?”라는 생각이 들거나 “괜히 예수는 믿어가지고 생소생이다”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런 생각과 고민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가 지금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 진지하게 접근하고 있고, 그 사람이 그래도 건강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가 되어 줍니다. 그런 점에서 이런 고민과 고생은 많을 수록 좋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것과 더불어 우리에게는 더 근본적으로 고민해야할 아주 중요한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현실 속에서 여러가지 선택사항 중에서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 하나를 선택하는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신앙을 신앙이 되게 하기도 하고 정반대로 전혀 신앙이 아니게 하는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이 자기 동족인 유대인들의 잘못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말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물론 상황은 좀 다르지만 우리에게도 거의 비슷한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성도들은 신앙에 있어서 열심을 거의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열심이 없고 냉냉하면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반대로 열심을 가지고 무언가를 할 때는 자기 신앙에 대해서 별 문제를 느끼지 못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앙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열심이 있으니 그것으로 족하고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사도 바울을 안타깝게 만든 이유, 그리고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사랑의 대상으로 선택되었으면서도 결국은 구원에서 제외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들에게 열심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열심에 대해서라면 유대인들보다 더 큰 열심을 가진 사람들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사실 그들은 그 열심 때문에 더 심각하게 잘못되었습니다. 결국 그 열심이 그들을 가지 말아야 할 방향으로, 그것도 너무 멀리 떠나오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방향이 올바른 경우에는 열심을 내면 낼수록 선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렇지만, 방향 자체가 잘못된 경우에는 열심이 크고 뜨거울수록 더 심각한 실패를 경험할 수 밖에 없습니다. 신앙에 있어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신앙에는 분명히 열심이 필요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열정이건 내면적으로 흔들리지 않는 은근한 열정이건 간에 열정과 열심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열심만으로는 안됩니다. 열심이 특심이어도 안됩니다. 열심은 항상 그 열심의 방향과 건강함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기초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지식”입니다. 아무리 강하고 뜨거운 열심이 있다고 하더라도 항상 그 지식이 가르쳐 주는 범위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혹시라도 열정이 너무 커서 그 범위를 넘어가는 순간이 생겨나면 그 때는 지식이 아니라 열심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스라엘처럼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꼭 붙들어야 할 지식 : 믿음에 의지해야 한다
이스라엘은 의의 법을 좇아갔습니다. 율법을 지킴으로써 의를 이루어 보려고 열심을 다한 것입니다. 그런데, 법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법을 완전히 지키지 못하였으니 그 법을 완전히 지켰을 때에만 얻을 수 있는 의로움은 더더욱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에게는 이것과는 정반대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의를 좇아간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의를 얻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기를 쓰고 만사를 재쳐놓고 얻으려고 했었지만 결코 얻을 수 없었던 그 의로움을 이방인들은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얻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이런 비극이 일어난 이유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율법을 지키려고 했던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문제는 율법 자체를 지키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그 율법을 지키는 일을 통해서 스스로 의로워지려고 했던 데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믿음에 의지하지 않았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율법은 행위의 법이고, 복음은 믿음의 법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렇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원래는 율법도 믿음의 법이었습니다. 믿음의 법으로 주신 것입니다. 물론 율법은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말미암아 살리라”라고 선언하고 있기 때문에 겉으로 보기에는 율법이 인간을 의롭게 만들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사람이 율법을 모두 하나도 남김없이, 그 정신까지 완전하게 지킬 수만 있다면 율법은 인간을 충분히 의롭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법을 지켜야하는 인간이 죄인이라는 이유때문에 현실적으로 율법은 결코 사람을 의롭게 할 수가 없습니다.
율법은 겉으로 보기에는 ‘네가 이 법을 지켜 너 스스로 의로워져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이 법을 완전히 지키는 것도 불가능하고, 그래서 너 스스로 의로워지는 것도 불가능하니 너를 온전히 의롭게 해 줄 수 있는 은혜만 바라보아라”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은 인간을 의롭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결코 스스로의 힘으로는 의로워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렇게 해서 자기 안에 있는 더럽고 누추한 의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완전한 의를 바라보고 소망하게 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스스로에게 절망함으로써 오히려 참되고 영원한 소망을 붙들게 하는 것이 율법의 임무였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율법을 잘못 생각하고 잘못 사용해서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실수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부정직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자신과 하나님 앞에 정직한 사람들은 율법을 지키려고 하다가 오히려 자신에게 절망하게 됩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자신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의로움을 사모하고 갈망하게 됩니다. 애써보고 노력해 보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의 용서하시고 넘어가 주시는 은혜를 바라보고 의지하는 것 밖에는 소망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원래부터 행위의 법이 아니라 믿음의 법이었습니다. 행위가 아닌 은혜만이 자신을 살게 할 수 있게 해 줄 수 있음을 깨닫게 하는 법, 그래서 하나님께 의지해서 살아가게 만들어 주는 믿음의 법이 바로 율법이었던 것입니다. 반대로 이방인들은 아얘 율법이 없었기 때문에, 그래서 율법을 지킴으로써 스스로 만들어 놓았다고 믿었던 의가 없었기 때문에 쉽게 믿음의 법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스스로의 더러움과 부족함을 이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주어지는 의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고, 그래서 의롭다하심을 얻었던 것입니다.
애초부터 의인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살게 되어 있었습니다. 의롭다하시는 은혜를 입는 것도 믿음을 통해서 이고, 의롭게 살아가는 것도 믿음에 의해서입니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그 원리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구원하는 복음에는 사람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만이 나타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입니다. 그래서, 행위가 아닌 믿음에 의지하는 사람만, 자신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에 의지하는 사람만이 구원을 얻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 지식을 거부했습니다. 그들의 고집으로 이 참된 지식을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에 의지하였고, 자기 의가 주는 만족에 집착하였으며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의를 거절할 수 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로 만족하는 것이다
회원 여러분,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의 유일하고도 완전한 의로움이 되신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처음 예수를 믿을 때도 그렇고, 나중에 성도로 살아갈 때도 꼭같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 지식 안에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성도의 삶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구원을 얻게 하는 믿음과 그 다음에 성도로 살아가는 믿음을 다른 것으로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구원은 믿음으로만, 은혜로만 얻는다고 생각하지만, 구원을 얻은 후에 성도로 살아가는 것은 스스로 결단을 내리고 행함으로써 의로움을 이루어 가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오해가 우리의 신앙을 망치는 주범들 중의 하나입니다. 이런 생각은 신앙에서 감격과 감사를 빼앗아 가고, 나아가서는 하나님을 의지해서 살아가는 삶까지 망쳐버립니다. 행위에 의지하게 만들어서 신앙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일이 아니라 인간의 일이 되어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일을 막으려면 우리는 예수 믿는 처음 순간부터 주님을 뵙는 그 순간까지 그저 하나님의 은혜에만 의지하면서 그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 안에서만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사는 삶을 통해서만 참된 만족과 안식을 얻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신앙의 문제는 이런 만족을 배우고 누리기 전에 다시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기 때문에 생겨납니다.
타락한 인간이 근본적으로 가장 떠나기 어려워하는 죄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기만족”이라는 죄입니다. 인간의 원죄가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으로 자신을 가득 채우려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이것이 왜 그런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한순간에 이런 성향들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많이 약화되기는 해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처음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로 인해서 누렸던 만족이 약해지면 이런 “자기만족”의 욕구는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합니다. 예전에는 죄스러운 일들을 통해서 쾌락과 일시적인 만족을 추구했지만, 이제는 믿는 자가 되었기 때문에 대놓고 그렇게 할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만족을 찾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 이제 만족을 위해서 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 밖에 남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로 신앙생활의 영역 안에서 “자기 만족”을 찾는 것입니다. 이 때 그 만족의 도구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 바로 “율법”이라고 불리는 신앙적인 행동들입니다. 기도와 헌금, 봉사 등 종교적인 행동들에 열심을 내게 되고, 그것을 통해 자신이 더 의로워졌다는 자기만족을 찾게 되고 심지어는 그것을 자랑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통해서 그 만족을 확대하려고 하게 됩니다. 믿음이 아니라 행위에 의지하여 만족을 찾는 것입니다.
4절을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었느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완성이 되셨습니다. 그 분 자신에 모든 율법을 완전히 지키신 후에, 그 의를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우리는 그 분이 의로우시듯이 의로운 자들이 되었습니다. 종교적인 행동과 활동들을 통해서 자신이 의롭다는 느낌을 확대하기를 원하며, 실제로 더 의로워지려고 하는 노력들은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모든 사역과 삶, 그리고 그 분이 이루신 그 완전한 의를 인정하지 않고 거부하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9장 32절은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니라” 원래 그리스도는 이 땅에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으로 오셨습니다. 자기 의에 의존하려면, 행위에 의지해서 만족을 찾고 더 의로워지려고 한다면 그 분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언제나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은 바로 이 돌에 부딪혔고 걸려 넘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무시무시한 분을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구원의 반석으로 삼을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분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나의 온전한 의로 받아들이며, 그 분을 통해서만 올 수 있는 구원의 은혜에 철저히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치는 반석은 우리의 구원의 반석이 됩니다. 여러분 모두는 그리스도를 부딪히는 돌이나 거치는 반석이 아닌 영원한 구원의 반석으로만 삼으시기기를 바랍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일들과 또 행하시기로 약속하신 것에 대한 만족이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이 정의는 얼마나 놀랍고 정확한 신앙에 대한 정의인지 모릅니다. 신앙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이 진리는 완전하게 적용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믿음은 만족입니다. 하나님과 그 분의 은혜를 향한 만족이 아닌 것은 결코 믿음이 될 수 없습니다. 복음에 대한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 분이 이루신 의, 그래서 나에게 주어진 의가 나의 구원을 위해서는 전혀 부족함이 없고 완전히 넉넉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 의에 부족함을 느끼지 않고 만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만족함이 없다면 신앙은 아얘 시작조차 하지 못합니다. 복음을 믿은 후에 신앙생활을 해 나갈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주신 의에 무언가를 덧붙이려고 하고 그래서 그런 것들을 통해서 내가 더 의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런 쪽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결국 그 의가 부족하고 불완전하다고 여기기 때문일 수 밖에 없고, 그러면 그 믿음은 그를 구원하는 믿음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항상 언제나 완전히 하나님의 의와 은혜에만 의지하고 만족해야 하며, 또 그럴 수 있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이란 언제나 미완성이고 또 우리들 자신도 불완전합니다. 흔들리고 변하며 유혹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들이고 또 우리의 믿음입니다. 때로는 자기 만족 쪽으로 기울기도 하고, 자기 의로움에 빠질 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실수에서 끝나야 합니다. 우리는 빨리 제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자기 의와 자기 만족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의에 만족하는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러면 그리스도의 의로만 만족하기 위해서 치열한 영적인 전투를 벌여야만 합니다. 3절을 보면 이런 부분이 나옵니다.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하나님의 의에 우리 자신을 복종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의를 스스로 세우고자 하는 “자기만족”의 성향을 거스르는 것이며, 우리 자신을 우리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에 복종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의에 대한 욕심도 문제이지만 자신의 의로움에 대한 불안함도 우리를 자기 의를 세우기 위한 노력으로 기울게 만드는 큰 이유가 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성경을 보니 그러면 의롭다하심을 얻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은 사람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그런데, 조금씩 불안해 지기 시작합니다. 정말 의로워졌는가, 정말 의인인가... 아무리 고민해도 확실한 증거를 찾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행동, 의로움에 보탬이 된다고 생각되는 일을 함으로써 스스로가 의인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그런 행동을 하게 되고, 그 행동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 행동을 하고 있을 때는 자기 신앙에 문제를 느끼지 않으면서 말입니다. 소극적이기는 해도 이것도 적극적으로 자기 의를 쌓으려고 할 때와 마찬가지 결과를 가져옵니다. 결국 이런 모습도 그리스도의 의에 만족하는 믿음이 없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6절과 7절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다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여기 인용된 말씀은 신명기 30장 12절 이하의 말씀인데 거기서 모세는 이 말씀을 율법을 지키는 것이 어렵지 않은 일이라는 뜻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것을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으로 보고 복음과 연관지어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신명기에 나온 “율법”을 “믿음의 말씀” 그러니까 복음과 복음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구절은 이런 뜻이 됩니다. ‘구약시대의 율법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과 마음에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하늘에 올라갈 필요도, 심연의 바닥으로 내려갈 필요도 없었던 것처럼, 의롭다 하심을 얻기 위해서는 하늘에 올라갈 필요도 없고, 지옥으로 내려갈 필요도 없다. 그렇게 스스로 의를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는 이미 이 땅에 오셨고, 또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 분이 완전한 의가 되셨기 때문이다. 너희가 스스로 의로워지려고 한다면 그것은 직접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만들어 내고, 부활을 만들어 내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면서 믿음의 말씀이 마음과 입에 있다는 구절에 대해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라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니느라” 의에 이르고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기만 하면 되지, 결코 스스로 의로워지려고 하거나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사역을 도우려고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의로움에 대해서 불안해 질 때가 있습니다. 구원에 대해서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비록 이럴 때 우리는 교만해지지 않고 겸손해 지는 유익을 얻기도 하지만, 사탄은 이런 기회도 놓치지 않습니다. 우리의 불안함을 이용해서 더 교묘하게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러니까 뭔가 네 의로움을 확인할 것이 필요하쟎아, 스스로 의롭다는 확신을 얻을만한 공을 세워야 하쟎아. 네 힘으로 무언가를 해야하쟎아.’라고 우리를 부추깁니다. 그 매개체가 되는 것이 신앙 안에서의 일들이고 또 하나님과 관계된 거룩한 일들이기 때문에 많은 경우 이런 유혹을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로 유혹에 넘어가게 될 때가 많습니다. 그것이 뿌듯한 만족을 주기 때문에 버리고 떠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럴 때마다 다시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모시러 하늘에 올라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 분을 끌어 올리려고 심연으로 내려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 분은 이미 이 땅에 성육신 하셔서 율법을 이루셨고, 죽음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우리의 온전한 의가 되셨습니다. 우리의 의와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은 그 분 혼자의 일이고 이미 그 분 혼자서 다 하셨습니다. 우리가 거기에 더할 수 있는 것도 없고, 더할 필요도 없으며, 더하려고 해서도 안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입으로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이라고 진실로 시인하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의 마음으로 그 분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음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나의 구원에 관한 한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다 하셨고, 그것으로 너무 충분하고도 남아서 나는 그 사실을 진실로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것을 다시 기억해 내고 그 사실에 마음과 생각을 묶어 놓아야 합니다. 의라는 선물, 구원이라는 선물을 받기 위해서는 그 고백과 믿음만 필요다하는 사실을 붙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구원얻게 하는 믿음의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물론 이 고백과 믿음을 가지는 것도 간단한 일은 아닙니다. 이 고백과 믿음은 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나의 구원자가 되시고 또 모든 것이 되시며,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나의 참된 주인이심을 우리의 삶과 존재 전체로 받아들일 때에만 가능해 지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공로가 되지는 않습니다. 고백하고 믿어야만 하지만, 그런 믿음을 가지고 그런 고백을 하게 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며, 그 고백과 믿음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은혜가 그만큼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인정하며 그 은혜에 의지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의와 자기 만족의 대안 : 하나님의 은혜로 만족하라
성도는 누구나 자기 의를 쌓으려고 해서는 안되며, 거기서 만족을 얻으려고 해서도 안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지식을 따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만약 참되고 안전한 만족의 근원을 알고 그것에서 만족을 누리는 법을 모른다면 다시 그 쪽으로 기울어질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대안이 없다면 비판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도 그렇게 하지는 않으십니다. 진짜 만족을 누릴 수 있는 것도 주지 않으시고 무조건 그건 안된다고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자주 믿음의 싸움에 실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안된다고 하실 때는 더 온전하고 더 좋은 것이 있다는 뜻입니다. 자기 의와 자기 만족을 추구하면서 거기서 교만한 만족을 얻으려고 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성도들을 진짜로 온전하게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은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완전하고도 안전하게 그리고 전혀 죄가 되지 않는 방법으로 우리를 만족시키실 수 있는 방법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방법이 무엇일까요? 그 해답은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라는 말씀 속에 들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실패한 이유는 그들이 행위에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행하는 일들로 부터 만족을 얻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원래 하나님의 방법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만족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로 만족하는 것, 그렇게 참된 만족을 줄 수 있는 곳에서 만족을 찾는 것, 그것이 원래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고 또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풍성한 삶을 살게 하는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혜로만 만족하는 것보다 우리 자신이 이룬 업적이나 겉으로 보이는 의로운 행위들, 그리고 그것이 주는 자기만족으로부터 만족을 찾고 취하는데 익숙해져 있으며, 우리에게는 그것이 더 쉬운 방법이라는 것을 솔직히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내가 거기서 만족을 얻고 또 더 쉽게 얻을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진짜이고 전부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익숙하지 않고 또 어찌보면 조금 멀게 느껴져서 그렇지 우리에게 진짜 만족을 줄 수 있는 것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은혜로 진실로 그리고 충분히 만족하게 될 때, 그 믿음을 가지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는 사람이 될 것이며, 우리는 행위에 의지해서 죄된 만족을 찾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만족과 거기서 오는 자유를 누리려면 우리는 우리를 손쉽게 만족시키는 것으로 부터 떨어지는 연습을 해야하며, 당장은 멀리있고 익숙하지 않은 방법으로 만족하기 위한 연습을 해야 합니다. 이 방법으로 만족을 얻는 것이 얼마나 좋고 안전한지, 또 풍성하고 능력있는 지를 알고 그래서 이 방법에 익숙해 지고, 다시는 예전의 방법으로 만족을 찾지 않게 될 때까지 그 연습을 계속해야 합니다.
이 싸움은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여러분 모두가 이 참되고 만족스러운 싸움에 함께 참여하시고 또 승리하게 되시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성경에서 은혜를 약속하는 구절들을 찾아서 계속해서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그 약속들을 온전히 신뢰하게 되기까지 그 약속들을 붙들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십시오. 그 은혜를 신뢰하는 믿음이 없다면, 믿음없음을 도와 달라고 간구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그 분을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신 주님이십니다. 나의 의가 아니라, 나의 행위가 아니라 그 분이 나를 만족시키실 것입니다. 충분히 그리고 영원히 만족시키실 것입니다.
믿음은 만족입니다. 그리스도의 의로 만족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만족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풍성한 믿음에 이르러 하나님으로 가득 찬, 가슴 벅찬 인생을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