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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2010년 매일성경설교 41. 화목제 희생을 여호와께 드릴 때에

[사용법]


방문하시는 중에서 혹시라도 도움이 될까 적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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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레위기 19장 1-18절




서론 : 하나님의 스타일은 거룩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우리가 흔히 ‘스타일’이라고 부르는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말로는 아마 취향이라는 말쯤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옷에도 좋아하는 스타일이 있고, 음식에도 좋아하는 스타일이 있고, 심지어는 사람도 더 좋아하는 스타일의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너무 좋아하는 스타일의 옷이어서 좋다고 입고 나갔는데, 다른 사람들은 모두들 내 모습을 보고 당황스러워 합니다. 또 누가 너무 맛있다고 해서 어떤 음식점에 따라갔는데 내 입맛에는 영 아닌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스타일이라는 것은 단순히 취향이라고만 표현하기에는 조금 부족한 부분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실은 그 사람 자체도 그 스타일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스타일이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인 동시에,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전체적으로 규정해 주는 굉장히 넓고 큰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스타일이란 넓게 보면 그 사람의 모든 면들이 함께 만들어 내고 드러내는 그 사람의 전체 이미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스타일이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도 스타일이 있습니다. 그 분 전체를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 스타일,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 분이 선호하는 스타일, 아니 고집하실 수 밖에 없는 스타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거룩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 분은 거룩한 것을 좋아하시고, 그래서 원칙대로라면 거룩한 것만을 용납하시는 분이십니다. 거룩이 그 분의 스타일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신 여러가지 명령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첫 구절이 바로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라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은 단지 처음 명령이 아니라 그 뒤에 나오는 모든 명령들을 한 마디로 요약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 스타일이 거룩이니 너희들의 스타일을 내 스타일에 맞추어라. 그러려면 구체적으로 이런 점에서는 이렇게 해야하고 저런 점에서는 저렇게 해야한다”는 내용이 오늘 본문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거룩을 요구하시는가? 

원래 거룩이란 말은 하나님의 성품을 모두 요약해서 표현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분은 완전하십니다. 완전히 선하시고, 완전히 사랑이시며, 완전히 정직하시며, 완전히 정결하십니다. 이런 모든 완전한 성품들이 드러내는 그 분의 ‘스타일’이 바로 거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 분은 스스로도 거룩하시지만 거룩한 것만을 좋아하시고 또 받아들이시는 것입니다. 레위기에 기록된 제사장이나 제물에게 요구되는 기준을 보면 ‘흠이 없고 결점이 없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기준에 완전히 맞아떨여져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그 분의 스타일이시니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요구하실 수 밖에 없고, 또 그런 것들만을 기뻐하실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라”라고 말씀하시는 명령은 너무 엄격한 순종 불가능한 명령같지만 실은 우리가 하나님께 용납되어지고, 그래서 그 분의 은혜를 덧입으며 복된 삶을 살아가려면 우리 쪽에서 거룩해지는 방법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에 요구되어지는 하나님의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룩하라는 명령은 실은 그렇게 참된 복으로 들어오라는 초대장이기도 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거룩함은...

사람들에게는 거룩이라는 말을 들으면 자꾸 쪼개고 나누려고 하는 습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무엇은 거룩하고 또 반대로 무엇은 속되고...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교회 안은 거룩하지만 교회 바깥은 거룩하지 않다. 주일은 거룩하지만 주중은 거룩한 시간이 아니다. 예배드리는 시간은 거룩하지만 회사에서 일하는 시간은 거룩하지 않다. 내 삶의 신앙적인 부분은 거룩하지만 일상생활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거룩해야 하는 장소와 시간, 거룩해야 하는 부분만 거룩하면 나머지 내 삶과 세상의 다른 부분은 거룩하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하며 살아가게 되는 쪽으로 기울기 쉽습니다. 그렇지만, 거룩함이란 온전함을 뜻합니다. 전체가 한 덩어리로 흠이 없고 점이 없는 것, 그것이 바로 거룩함입니다. 제사장과 제물을 생각해 보십시오. 제사장과 제물은 그 어느 곳에서도 흠도 없고 점도 없어야만 했습니다. 적어도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기준에서는 부분적으로가 아니라 전체적으로 완전무결해야만 제사장이 되고 또 제물이 될 수 있는 자격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거룩’이 제물과 제사장에게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그대로 요구되고 있는 것입니다. 


2절의 ‘거룩하라’는 명령 뒤에 이어지는 계명들을 하나 하나 살펴보면 얼마나 구체적인지 모릅니다. 구체적이라는 말은 포괄적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거룩이라는 말을 들으면 종교적이고 의식적인 부분, 그리고 영적인 부분만을 생각하기 쉽지만, 오늘 하나님께서는 거룩을 말씀하시면서 오히려 생활의 구석 구석을 다루시며, 그 생활이 흘러나오는 우리 마음 속의 문제를 더 깊고 자세하게 다루고 계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거룩이 실은 얼마나 우리 삶과 직결되어 있는지를 일깨워 주는 아주 소중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일상생활과 마음을 등안시 하고서 종교와 신앙만으로는 결코 거룩해 질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거룩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거룩을 하나 하나 묵상해 보면, 그 거룩은 아무런 맥락이 없는 하늘에 붕뜬 거룩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드러나야만 하는 거룩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하나 하나의 명령을 모두 다 살펴보려면 정말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오늘은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거룩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드러나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 요구하신 것이 부모를 경외하는 것과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이 두 가지가 그 뒤에 나오는 모든 명령들의 기둥이요 뿌리가 되는 것들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 있어서 부모는 단지 혈연관계에서 나를 낳아주고 양육해 준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전통에서 부모는 그런 의미보다는 영적인 의미가 더 강했습니다. 부모는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의 선배요 또 스승으로서 자녀들에게 그 신앙을 가르치고 전해주는 역할을 맡은 사람이었습니다. 부모는 땅에 있는 하나님의 대리자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상적인 경우에 부모를 경외한다는 것은 가장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인간관계의 질서를 존중하는 동시에 하나님을 온전히 경외하는 일로 이어지게 되어 있었기에 하나님께서는 거룩을 위한 첫번째 원리로 부모를 경외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또 두번째로 요구하신 것이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신 것인데, 그 이유는 인간이 살아가는 시간 속에서 안식일이란 다른 시간들을 하나님 중심으로 질서 잡히게 하는 중심점의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을 안식일 답게 지키면 다른 날들과 그 날들 속에 속한 모든 일들 또한 제 자리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자기 필요를 채우고 자기를 부풀리기 위해서 했던 모든 노력들을 그치고 하나님을 생각하며 그 분의 베푸시는 은혜를 누리게 될 때, 하나님을 비로소 하나님의 크기로 인식할 수 있게 되고, 한껏 부풀었던 나 자신과 세상의 크기는 제 크기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러면, 인간은 우상숭배를 벗어나 하나님만 섬기는 자리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나의” 안식일이라고 하시는데, 우리가 안식일을 하나님의 날로 여기게 된다면, 나머지 우리의 일상도 우리의 날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균형잡혀진 삶으로 유지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자세한 사항들을 좀 더 간략하게 훑고 넘어가겠습니다. 우상숭배와 관련된 계명이 그 뒤를 잇고 있고, 그 다음에는 화목제와 관련된 규정, 그 다음에는 밭의 곡식과 포도열매를 수확할 때, 가난한 이웃을 생각하면서 바닥까지 닥닥 긁거나 완전히 훑지는 말라는 명령, 그 다음에는 도둑질과 거짓말에 대한 규정들, 약자들을 대할 때 지켜야할 규정들, 재판에 관한 명령들이 나온 후에, 이웃이나 형제들이 해를 끼쳤을 때,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에 대한 규정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큰 덩어리에서 생각해 보면 바로 이런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거룩하라는 명령 속에 포함되는 것들이고 바로 이런 것들이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거룩의 개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그냥 이렇게 훑고 지나갔지만, 하나 하나 살펴보면 얼마나 자세한지 모릅니다. 무척 짧지만 그 속에는 각각의 상황 상황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각각의 규정을 다 지키면 거기에 해당되는 대상을 대할 때, 언제나 거룩한 삶이 가능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회원 여러분, 거룩이란 이런 것입니다. 거룩이란 구름 위에 떠 있는 실체가 없는 모호한 것이거나 어떤 특정한 영적인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우리의 삶으로 옮겨놓는 것이 바로 거룩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거룩하려고 한다면, 그 분의 성품을 닮은 사람이 되어가려면 이런 것들을 생략하고 넘어갈 수가 없습니다. 


거룩한 삶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거룩입니다. 이런 계명들을 지키며 사는 것이 바로 거룩한 삶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동시에 거룩이라는 것이 단지 행동과 실천의 문제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것 또한 생각해야 합니다. 거룩은 삶의 문제인 동시에 우리의 마음과 생각, 그러니까 속 사람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속사람은 행동과 실천만으로는 완전히 새롭게 될 수 없습니다. 마음이 바뀌면 행동은 바뀌게 되어 있어도, 행동이 바뀐다고 항상 마음이 새로워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이런 구절들이 나옵니다.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라....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이게 억지로 되겠습니까? 우리가 다 해 봐서 알지 않습니까? 이런 계명들은 결코 억지로 행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 마음이 새로워지지 않으면 절대로 순종할 수 없는 계명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양쪽에서 접근해 가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려고 애쓰는 동시에 속사람을 새롭게 하는 일에도 게을리 해서는 안됩니다. 아니, 그 일을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연구할 때마다 이렇게 신기하고 오묘할 수 있을까하고 무릎을 치면서 감사하고 감탄하게 되는 때가 많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연구하면서도 그랬습니다. 본문 속에 숨겨놓으신 하나님의 선물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너의 속사람과 삶을 거룩하게 하라고 하신 후에 방법은 너희들이 직접 찾아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행동을 바꾸는 동시에 우리의 속사람을 새롭게 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해답이 바로 지금부터 살펴볼 화목제에 대한 말씀 속에 들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상하게 다른 제사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계십니다. 그저 화목제에 대해서만 말씀하고 계십니다. 저는 왜 그럴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무릎을 쳤습니다. 회원 여러분, 화목제는 다른 제사와는 달리 아주 독특한 점을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화목제의 제물은 제사가 끝난 후에 모두가 함께 나누어 먹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화목제는 의무적으로 드려지는 제사가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자원해서 드리는 제사라는 것 또한 이 제사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이 제사는 비록 피흘림이 있지만, 결코 슬프고 처절한 제사가 아니었습니다. 죄를 고백하고 마음을 찟어야 하는 그런 제사가 아니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제물을 잡습니다. 거기에 슬픔이란 없습니다. 그 후에는 모두가 그 제물을 기쁘고 즐겁게 나누어 먹습니다. 그래서, 화목제는 비록 하나님 앞에서 짐승의 피를 흘려 드려야만 하는 제사였지만 그 제사 자체가 나눔의 잔치가 되었던 것입니다. 화목제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모두가 함께 나누는 것. 이것이 하나님께서 화목제를 제정하신 이유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화목제물은 이틀까지만 먹을 수 있었습니다. 이틀이 지나서 먹으면 그 사람은 이스라엘에서 추방되어야만 했습니다. 만약 이 화목제물을 기간을 두지 않고 언제든 먹어도 된다고 하면 분명히 누군가가 더 많이 차지하려 들 것입니다. 다툼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나눔의 의미가 사라지고 제사는 오히려 욕심을 부추기는 이유가 될 것이고 그러면 그 제사가 더럽혀질 것이기 때문에 화목제물을 이틀이 지나서는 먹을 수 없게 하셨던 것입니다. 


화목제는 다른 제사와는 달리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일에서 끝나지 않고 모인 사람들이 차별과 구별이 없이 제물을 나누어 먹는 일로 끝이 나게 됩니다. 그 나눔에서 비로소 제사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 자리에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과 이웃을 기쁘고 행복하게 하는 섬김이 동시에 일어나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은 그 제사를 기쁘게 받으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가만히 살펴보면 화목제 규정을 가운데 놓고 거룩을 위한 계명들이 양쪽으로 갈라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화목제 이전 구절들은 직접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고, 그 이후의 구절들은 적극적으로는 삶의 수확을 나누어 직접 이웃을 섬기는 일과 소극적으로는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화목제는  그 가운데서 하나님과 이웃 사이를 연결해 주는 다리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거룩을 말씀하시면서 다른 제사가 아닌 화목제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이유입니다. 화목제를 드리는 사람은 화목제의 사람이 되어 화목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화목제를 삶으로 옮겨 놓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거룩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삶이란 결국 화목제의 삶입니다. 제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통로입니다. 화목제는 우리에게 하나님과의 화목이라는 은혜를 가져다 줍니다. 그러나, 화목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화목제는 우리들과 이웃들 사이도 연결해 줍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화목되는 은혜가 위로 부터 부어지고, 그 은혜로 말미암아 사람들과 사람들 사이가 화목되는 은혜가 쏟아지는 곳이 바로 화목제의 자리였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제사의 자리에서 화목제의 삶을 연습하고 삶의 자리로 돌아갔던 것입니다. 


성찬은 우리의 화목제다

우리는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 그 분이 우리의 죄를 속량해 주신 것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신 유월절 어린 양 말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그 분의 희생을 통해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덧입혀져서 우리는 의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이 드리신 제사는 그게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을 화목제물로 드리시기도 하셨습니다. 속죄제물이 되셔서 우리에게 하나님 앞으로 갈 ‘자격’을 주시고, 화목제물이 되셔서 실제로 하나님과 ‘화목’된 관계를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완전히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여기서 훨씬 더 멀리 나갑니다. 에베소서 2장 13절 이하를 보면 이것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께서 자신을 화목제물로 드리실 때,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되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너무 놀라운 기적입니다. 그런데 또 한가지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원수된 것들이 무너지고 사라졌습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이 하나가 된 것입니다. 아얘 그리스도 안에서 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실제로 초대교회 시대의 성도들은 이것이 단순한 영적인 진리나 신학적인 교훈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에베소서의 말씀은 완전한 현실이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교회 안에 있었고, 함께 식사를 했으며, 그 교회 안에서는 주인과 노예가 서로 한 자리에서 예배드리는 형제요 자매였습니다. 그것은 당시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고, 또 기적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일이었지만, 오히려 당사자들에게는 너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께서 드리신 화목제의 은혜를 온 맘과 삶으로 받아들이고 삶으로 반응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에 성찬식을 행했습니다. 성찬식이 있는 날에는 꼭 행해지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빵과 포도주를 나누는 일입니다. 빵과 포도주는 예수님의 살과 피입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란 그 분의 몸입니다. 십자가에서 제물로 드려졌던 그 몸 말입니다. 그러니  한 빵을 먹고 포도주를 나눈다는 것은 어떤 의미겠습니까? 바로 그 제물을 우리가 나누어 먹는 것입니다. 그림이 그려지십니까? 이렇게 보면 성찬식은 무엇입니까? 그렇죠. 그것은 화목제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살과 피를 나누며 행하는 성찬식은 모든 죄를 씻어주시는 유월절의 어린 양을 기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화목제물이신 그 분의 살과 피를 나누는 화목제의 잔치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한 몸에 참여한 한 몸의 지체가 되어질 때, 우리의 화목제는 완성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회원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고, 그 분이 주시는 모든 풍성한 은혜를 얻으며, 참된 만족을 누리를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자신을 화목제로 드리신 예수님 덕분입니다. 그 분이 그렇게 자신을 드려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것을 허물어 주시고 제거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이 은혜 가운데 넉넉히 거하는 복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거의 대부분 우리의 화목제가 여기서 끝나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화목제물로 드리신 예수님 덕분에 하나님과의 화목은 누리지만, 그 풍성한 화목의 은혜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데는 실패합니다. 애써보지만 잘 되지 않습니다. 흐지부지 되어 버립니다. 여전히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거짓을 행하며, 내 맘에 들지 않는 사람들을 폄하하며, 개인적인 호불호에 따라 판단력이 흐려집니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라는 명령, 원수를 갚지 말고 악한 감정을 품지 말라는 명령 앞에서는 한 없이 작아져 버립니다. 그런 시간이 오래 흐르면 이 말씀들은 그저 우리의 귓바퀴만 울리는 말씀이 되어 버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우리의 화목제는 중간에 실패해 버린 제사가 되고 맙니까? 


회원 여러분, 실제로 우리를 위한 영원한 화목제는 이미 드려졌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드려 대신 드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기념하면서 성찬을 나눕니다. 그러면 어디에 문제가 있습니까? 바로 우리들의 믿음입니다. 우리는 성찬을 행하면서도, 또 위에서 읽어드린 에베소서의 말씀같은 말씀들을 읽고 들으면서도 거기에 우리의 참된 믿음을 더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화목제물로 드리실 때, 그 때 거기서 실제로 하나님과 우리들 사이, 그리고 모든 사람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장벽들이 허물어지고 치워졌다는 사실에 우리의 믿음을 더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눈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화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눈앞에 보이는 장벽에 고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들의 화목제 잔치는 아무리 반복되어도 우리에게 참된 화목의 은혜를 가져다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점점 더 희미해져 가는 것입니다. 


결론 : 화목제에 믿음을 더하라

회원 여러분, 순종의 힘은 순종하려는 노력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순종의 참된 힘은 우리의 믿음에서 나옵니다. 우리에게 참된 믿음이 있다면 우리는 주님의 계명에 참으로 순종할 수 있게 될 것이고, 우리는 주님을 닮은 거룩한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덤으로 우리의 반복되는 죄책감과 거기서 생겨나는 영적인 무감각함도 해결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드리신 완전한 화목제에 우리의 믿음을 더해야 합니다. 그 분이 십자가에서 드리신 화목제로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모든 막힌 담은 사라져 버렸으며, 우리가 우리 형제와 이웃을 마음으로 미워하지 않고, 내 몸처럼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모든 장벽들이 완전히 사라졌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화목제의 참된 은혜는 우리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마음으로 형제를 미워하지 않고, 이웃 사랑하기를 내 몸처럼 할 수 있는 그런 참된 변화와 회복의 은혜는 우리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거룩하라는 하나님의 계명은 우리를 하나님 곁으로 이끄시고자 하는 초청이 아니라 여전히 우리를 아프고 힘들게 하는 불가능한 미션으로 남아있을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거룩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이웃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바로 거룩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우리가 참된 화목제의 사람이 될 때, 화목제의 사람이 되어서 화목제의 삶을 살아가야만 비로소 도착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이제 주님의 화목제에 우리의 믿음을 더하십시다. 그 분이 하나님과의 막힌 담 뿐만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막힌 담을 이미 그리고 실제로 허무셨음을, 그런 사건이 십자가 위에서 실제로 일어났음을 믿으십시다. 정말 진실로 믿어지고 그래서 그렇게 살아질 때까지 믿음을 더하고 또 더하십시다. 믿음 없음을 도와달라고 함께 기도합시다. 


사랑하라는, 사랑으로 거룩하라는 하나님의 계명 앞에서 허물어진 우리 마음과 삶이 참된 화목제의 잔치자리가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위에 날마다 풍성하게 부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