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마태복음 19장 23-30절
서론 : 부자에 대하여, 누가 부자인가?
언젠가 연말에 텔레비젼 광고에 나온 한 인사말이 거의 2년 동안 가장 인기있는 인삿말이 된 적이 있습니다. 바로 “여러분, 부자되세요.”라는 인삿말이었습니다. 아마 회원 여러분들도 적어도 한 두 번쯤 이 인사를 건내보셨을 겁니다. 한창 경기가 어려워져서 살기가 그리 만만치 않았던 때에 그런 희망적인 인사는 서로에게 많은 격려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부자되세요.”라는 인사를 들은 사람들 중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나는 이미 부자여서 더 부자가 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까요? 제 생각에는 아마도 그렇게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 같습니다. 대다수는 “그래, 말처럼 나도 부자가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지금 제가 여러분에게 똑같은 인사를 드려도 여러분 역시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들 중 거의 대부분은 자신이 충분한 부자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드러내 주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부자라는 말이 사실은 기준이 불분명한 말이기 때문에 생겨나는 현상입니다.
회원 여러분, 어디까지는 아직 가난한 것이고, 어디서 부터는 부자인 걸까요? 어디까지는 부족한 것이고, 어디서 부터는 충분한 것일까요? 나는 충분합니까? 아니면 부족합니까? 나는 부자입니까? 아니면 그 반대입니까? 여러분은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람들은 그 누구도 그 기준을 알지 못하면서도 다들 부자가 되고 싶어하고 부자로 살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아마도 부자를 부자되게 하는 물질이 힘이 되어주고 의지처가 되어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많은 물질이 자신의 가치를 높여주고 당당하게 해 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들이 부자가 되고 싶어하는 이유는 단지 필요를 채우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돈이 가져다 주는 실제적인 힘을 얻고 그 힘에 의지하여 안전을 얻고 싶어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부자임을 결정하는 판단기준이 없다는 것은 결국 모두가 다 부자일 수 있다는 의미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자란 액면적으로 보면 진짜로 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을 의미하기도 하겠지만 내용상으로 생각해 보면 많은 물질에 자신의 안전과 가치를 의지하고 있거나 아니면 그렇게 하려고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을 이야기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가장 좋은 질문과 가장 좋은 답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율법을 철저히 준수하는 사람이었고, 모두가 부러워하는 재산가였습니다. 그런데도 그에게는 항상 허전하고 불안한 구석이 하나 있었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율법을 지켜도, 또 많은 물질을 가지고 있어도 여전히 자신의 구원과 영생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영생에 대한 대답을 들으러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그 청년이 묻습니다. “선생님, 제가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이 청년의 질문은 가장 좋은 것에 대한 가장 훌륭한 질문이었습니다. 영생에 대한 진지한 물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의 질문 속에는 오해가 하나 있었습니다. 영생을 선한 일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의 생각을 고쳐주시려고 그가 행하고 있는 선한 일로부터 이야기를 풀어가십니다. 영생을 얻으려면 계명을 지켜야 한다고 하시면서 중요한 계명들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청년은 그런 것은 어려서 부터 다 지켰다고 말하면서 또 부족한 것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런 것으로는 자기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진짜 대답은 그 때 주어집니다. “그래, 그런 것으로는 부족하다. 만약 네가 진실로 온전하고자 한다면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하늘의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아라” 청년의 말대로 청년은 아직 영생을 위해서는 충분하지 못하고 온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온전해 질 수 있는 방법,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가장 선한 일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 방법은 두 가지였습니다. 자신의 재산을 내려놓는 일과 주님을 좇는 일이었습니다. 주님은 이 대답을 통해 두 가지를 점검하셨습니다. 첫째는 하늘의 보화를 땅의 많은 재산보다 가치있고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느냐 하는 것과 둘째는 재물에 대한 의지를 떠나서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분명히 자신이 원하던 대답을 얻었습니다.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올 때보다 더 근심하게 되었습니다. 더 근심하며 왔던 길로 돌아갔습니다. 영생의 확신을 떠나 의혹과 불안 속으로 돌아갔습니다. 성경은 그 이유를 그가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평생동안 자신의 힘이고 의지처요 가장 큰 장점이었던 그 많은 재산이 지금 영생을 취해야할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는 가장 큰 장벽이요, 그를 가장 심각하게 무너뜨리는 최고의 약점으로 바뀌었고, 그는 손 앞에 있는 영생을 포기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는 불가능할 정도로 어렵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주님은 그런 청년이 너무 안쓰러우셨습니다. 가장 좋은 질문을 가지고 왔고, 그 질문에 대한 일생 가장 중요한 대답을 얻었으면서도 오히려 더 깊은 절망과 근심 속에 돌아간 그 청년을 안타깝게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뒷모습을 보시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정말 놀랐습니다. 경악했습니다. 주님의 그런 말씀은 지금까지의 자신들의 생각과는 완전히 다른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잠깐 여러분에게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 잘 믿으면 잘 살게 된다는 소리를 수없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습니까? 그래서 어떤 사람이 누리는 부는 그 사람이 좋은 신앙을 가졌다는 증거가 될 수 있을까요? 요즘은 다행히도 그런 분들의 숫자가 조금 줄어든 듯 하지만, 아직도 자꾸 부와 신앙을 직접 연결시키는 분들이 꽤 계십니다. 신앙이 좋으면 하나님께서 현실적인 복을 보상으로 주신다고 믿는 분들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반쪽 짜리 진실입니다. 그럴 때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사실 신앙과 부는 일치하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천국은 이 땅에서 부자로 살았던 사람들만이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을 수 있는 그런 나라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천국에 대한 그런 이야기를 성경 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제대로 믿지 않는 사람들은 결코 잘 살아서는 안되고, 만약 예수를 믿지 않는다면 누구나 최극빈자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정반대입니다. 예수를 잘 믿는 부자들도 있지만, 그 보다는 적당히 믿는 사람들 중에서, 그리고 아얘 안 믿는 사람들 중에 큰 부자들이 더 많습니다. 사람들이 버리기가 가장 어려워하는 사고방식 중의 하나가 바로 보상심리가 아닌가 합니다. 내가 한 만큼의 복을 바라기도 하지만, 내가 큰 복을 받으면 무언가 그럴만한 이유를 자꾸 내 안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복에 대한 오해입니다. 하나님께 주시는 현실적인 복이 과연 얼마만큼이나 우리의 신앙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건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누리는 복에 대한 이유를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생각한다해도 도무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부유함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입니다. 그렇지 않다고 여길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그것을 신앙과 직접 연관지어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신앙이 좋아서 복을 받았다거나 혹은 신앙이 부족해서 아직 복을 받지 못하고 있다거나 하는 생각은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근거없는 판단입니다. 그런 생각에 빠질 때 우리 신앙은 일그러지기가 쉽습니다. 제가 고등학교와 대학교 시절에 다니던 교회는 소위 기복적인 신앙이 대세인 그런 교회였습니다. 목사님은 거의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잘 믿으면 복을 받는다고, 잘 살고 자녀들도 복을 받는다고 말입니다. 무척 세련되게 포장은 했어도 메세지의 중심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메세지도 메세지였지만 진짜 문제는 그런 메세지가 가져온 부작용이었습니다. 예수를 믿고 잘 되신 분들은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 안심하고 자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더 당당해 지고 만족하게 되었습니다. 복이 신앙의 결과라고 가르치니 그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예수를 믿어도 되는 일 없고, 삶이 나아지지 않는 분들은 죄책감과 실망에 빠졌습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신앙의 호불호를 판단하는데 한계가 있겠지만, 제가 보기에 그 교회에는 가난한 분들 중에서 신앙적으로 정말 훌륭하신 분들이 더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이 분들은 신앙적으로 자신을 심하게 자책하셨습니다. 결국 이 분들은 두 가지 열등감에 시달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가난하다는 현실적인 열등감과 그 가난은 자기 신앙이 형편없기 때문이라는 영적인 열등감 말입니다. 그런 가르침은 부자인 사람들이나 가난한 사람 모두에게 전혀 유익이 되지 못했을 뿐더러 오히려 영적인 독소가 되었습니다.
재물과 신앙을 직접 연관짓는 것은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에게는 지금 우리들보다 훨씬 더 뿌리깊은 사고방식이었습니다. 그들은 거의 무조건 부자로 사는 것은 하나님께서 신앙에 대한 보상으로 주시는 상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니, 그 젊은 부자는 그만큼 하나님 앞에서 좋은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질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셨으니 제자들은 자신들의 사고방식을 완전히 부수시는 주님의 말씀 앞에 그렇게 놀랄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말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신앙이 좋아서 많은 재물을 상으로 받은 청년, 게다가 어려서 부터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 계명을 다 지켜온 저 청년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면 과연 누가 구원을 얻겠습니까?” 예수님은 대답해 주십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사람으로써는 할 수 없습니다. 만약 좋은 신앙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많은 재물을 상으로 받았다고 치더라도, 어려서부터 중요한 계명을 다 지켜왔다고 하더라도 사람은 자신의 행위와 능력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지금 가진 것이 많고, 그래서 그 재산 때문에 하늘의 보화와 영생을 얻는 길을 포기한 부자청년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철저히 자신의 부유함에 기대어 살아가지만, 자신이 부자인지도 모르는 부자들, 그런 부자들처럼 살고 싶어서 자기도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 그렇게 부유함에 자신의 안전과 가치를 걸어놓기 원하는 모든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열심있는 신앙과 행위로 하나님을 감동시켜 현실적인 복을 받아보려고 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도 자신의 힘으로 영생을 얻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 누구도 구원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누구에게도 영생을 주실 수 있습니다. 부자여서 지금 영생을 포기하고 돌아가는 부자 청년도, 그 청년처럼 부자가 되기를 원하며, 그렇게 자기 소유와 자기 힘으로 풍성함과 안전을 확보하려는 사람들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면 언제든지 그 가던 길을 돌이켜 가야할 바른 길로 돌아와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람의 구원의 가능성이란 하나님에게만 있습니다. 낙타를 바늘구멍으로 넣을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누구라도, 그 무엇을 하더라도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뿌리깊은 보상에 대한 집착...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예수님은 ‘부자가 구원을 얻지 못한다면 누가 구원을 얻겠는가?’라고 놀라며 당황스러워하는 제자들에게 ‘사람은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구원에 대한 정답인 동시에 제자들을 향한 위로였습니다. 사람은 안되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고 또 하실 것이라는 어둠을 빛으로 바꾸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뜬금없이 베드로가 끼어듭니다. 그리고는 아주 자신있게 말합니다. “예수님 여기 좀 보십시오. 여기있는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좇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충분하지 않습니까? 우리에게는 무언가 엄청난 상이 주어지겠지요?” 예수님과 다른 제자들은 지금 이야기를 한참 진행시켜 왔는데, 베드로는 아직도 자신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좇았다는 사실에 집착하고 있었고 그것을 드러내며 자신이 큰 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이야기되는 순간에 다시 자기 공로로, 행위를 통한 영생의 획득이라는 주제로 돌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치 뒤늦게 회의에 참석해서 이미 결론난 이야기를 다시 끄집어 내는 지각생같이 말입니다. 사실 아직까지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예수님을 진정한 의미에서 따르지는 못하고 있었습니다. 주님께 영생이 있음도 알았지만, 현실적인 기대도 강했습니다. 이미 말씀드렸지만, 예수님께서 왕으로 등극하실 때 자기들도 한 자리 차지하겠다는 욕심이 뿌리깊게 내려 있었습니다. 이런 입장에서 본다면 베드로의 말은 당연한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하신 말씀을 들으면서 나는 주님을 위해서 적어도 이만큼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는 자신감이 생겨났을 것이고 그러니 나에게는 얼마나 큰 상이 주어지겠는가하는 궁금증이 생겨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 궁금증이, 그 욕심이 너무 강해서 진짜 들어야 할 이야기를 듣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보상은 마지막 날에 하늘에서 주어진다...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겠는가?
이제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의 자신감 넘치는 질문을 이용해서 진짜 말해주셔야 할 것을 말해주십니다. 주님은 먼저 상을 언제 받게 되는가를 말씀해 주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베드로의 기대대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사람들에게는 분명히 상이 있습니다. 분명히 엄청난 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적인 보상은 아닙니다. 그가 살아생전에 누릴 수 있는 영광은 아닙니다. 진짜 상을 받으려면 먼저 새 세상, 새 나라가 와야 합니다. 먼저 그 나라에서 예수님께서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아야 합니다. 그 때까지 제자들, 주님을 따랐던 성도들이 누릴 진짜 상과 영광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성도들에게 주어질 마지막 상이란 바로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고, 그 분의 영광스러운 다스림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주님이 그 영광을 되찾으실 때까지는 우리에게도 영광이 주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때로 현실적인 복이 주어질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진짜가 아니고 실체가 아닙니다. 단지 주님의 선하심으로 부터 오는 잠시 잠깐의 선물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신앙에 대한 진짜 보상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래서 그것에 붙들린다면 우리 신앙은 거기서 끝납니다. 진짜를 기대하는 가슴떨리는 소망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어서 주님은 그 상이 무엇인지에 대해 말씀해 주십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제자들에게는 주님과 함께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가 주어질 것입니다. 그 나라의 백성이 되어서 주님과 함께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들에게 약속된 첫번째 상입니다. 그리고 두번째 상이 또 있습니다. 그들이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위해서 때로는 부모를 버렸고 형제자매, 자식과 땅을 버렸기 때문에 그에 따른 상도 주어질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수 배, 수 십배, 수 백배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는 영생을 상속받을 것입니다. 그들은 때로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 부모를 실망시키고 형제자매의 기대를 저버리며, 때로는 자식을 향한 부모의 마음까지 내려놓았기 때문에, 하늘에서는 참으로 복된 영원한 하늘가족을 얻게 될 것입니다. 아프게 할 필요 없고, 실망시킬 이유 없는, 더 이상 가슴 아파해야 할 이유가 없는 그 가족들과 무한히 풍성한 사랑을 나누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이 부분을 묵상하다가 얼마나 큰 은혜를 느꼈는지 모릅니다. 회원 여러분, 잠시 눈을 감아 보십시오. 그리고, 그 가족,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그 가족과 함께 누릴 교제를 상상해 보십시오. 그 날 그 곳의 그 기쁨, 그 웃음, 그 만족, 그 즐거움, 그 풍성함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의 영원함... 정말 기대되지 않습니까? 정말 가슴 벅차오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으십니까?
제가 계속해서 하늘 이야기만 해서 죄송합니다. 하늘 이야기만큼 알아듣지 못하고 느껴지지 않으면 재미없고 상관없어지는 이야기가 또 없는 것을 알면서도 저는 이 이야기를 계속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가 말로써는 제대로 전해질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시니 저도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도 땅에 묶여있는 제자들의 관심을 하늘로 돌리려 하시니 저도 여러분의 관심을 그렇게 돌려보려고 이렇게 애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제 신앙의 경험이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해주니 그걸 알려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 인생이 변하고 방향이 바뀌게 된 것도 하늘을 가슴에 품기 시작했을 때부터이고, 저의 삶이 큰 흔들림으로 부터 자유롭게 되기 시작한 것도 하늘을 알게 된 순간부터였습니다. 저를 진실로 기쁘게 하고 소망 넘치게 하며 항상 제 자리로 회복되게 하는 것, 더 정신차리게 하는 것도 바로 하늘의 소망입니다. 만약 제가 하늘을 알지 못했다면 저는 목사 일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제 속에 하늘나라가 없다면 저는 이런 손해보는 장사는 결코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하나님은 그래서 저에게 하늘의 소망과 그 영광에 대한 확신을 주셨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저는 제가 이미 다 되었다고, 완전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저도 여전히 현실과 하늘 사이에서 갈등하고 싸우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앞으로도 저는 더 하늘에 사로잡혀야 할 것이고, 그렇게 되기만을 소망합니다. 더 그럴수록 이 땅에서의 저의 삶이 더 만족스럽고 당당한, 진실로 영광스럽고 자유로운 삶이 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하늘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은 여러분에게 들려줄 다른 이야기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제가 그러는 것은 여러분 인생을 위한 가장 중요하고 영원한 해답이 바로 하늘나라에 있음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성도가 하늘에 더 강하게 사로잡힐수록 그 성도는 땅에서 더 능력있고 행복하며 확신있는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딱 그만큼만 말입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땅의 일들을 확실하게 하는 것은 땅의 일들에 대한 확신이 아니라 하늘에 대한 확신입니다. 하늘의 소망이 흔들리지 않을 때, 땅의 삶도 흔들리지 않으며, 하늘이 분명히 보일 수록, 땅의 삶도 더욱 분명해 집니다. 저는 다른 것은 잘 몰라도, 다른 믿음은 별로 없어도 이것 만큼은 확실히 알고 확실히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성도로서, 그리고 목사로서 이 소중한 것을 여러분과 나누려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알기만 한다면, 여기에 믿음만 더할 수 있다면 그것보다 좋은 것이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전혀 하늘을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실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오늘날의 많은 교인들이 하늘에 대한 소망 없이, 그런 것이 있다는 것과 그런 것이 왜 필요한지 조차 모르고 살아가고 있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그런 상태로 하늘나라에 가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그런 신앙은 결코 하늘을 땅의 삶과 이어지게 하지 못합니다. 하늘 따로 땅 따로인 신앙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힘이 없습니다. 세상을, 그리고 자신을 이겨낼 능력이 생겨나질 않습니다. 그건 스스로 발을 땅에 묶어놓고 날아보겠다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순간에 계산착오를 일으켜서 치명적인 손해를 보게 됩니다. 부자청년처럼 말입니다.
성도들의 지난 이야기를 들어보면 많은 분들이 자기는 매를 많이 맞고 하나님께로 돌아왔다고 말합니다. 왜 맞았습니까? 하나님께서 말을 안들으니까 그를 혼낸 것일까요? 물론 그는 혼났을 것입니다. 그것도 아주 많이 혼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벌일까요? 아닙니다. 만약 그것이 하나님의 벌이었다면 그의 영혼은 아주 망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치신 것, 그에게 매를 드신 것은 그가 눈에 보이는 것을 붙드느라고 하늘의 보화를 놓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때려서라도 그렇게 붙들고 있었던 것을 빼앗으시고 없애심으로써 그가 더 이상 그것을 붙들지 못하게 하시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보상은 땅의 재물이 아닌 하늘의 보화에 대한 상이었습니다. 그것은 부자청년에게 약속하신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를 때 주어지는 상은 바로 하늘의 보화입니다. 성경은 부자 청년이 가진 것이 많아서 실망하며 돌아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는 가진 것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하늘이 없었기 때문에, 하늘의 보화가 없었기 때문에 사실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영원한 입장, 하늘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빈털털이에 불과했습니다. 거기 갈 수도 없고, 거기서 그는 자기 몫으로 아무 것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전 재산을 요구하신 것은 단순히 선행을 하라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서 영원한 천국보화를 빼앗아 가고 있는 썪어 없어지고 말 땅의 재물들을 버리게 하시고, 그에게 천국의 보화를 주려고 그러셨던 것입니다. 복으로 알았지만 실상은 진짜 복을 보지 못하게 하는 그 단단한 벽을 허물어 주시고 그 너머에 있는 진짜 복을 보게 하시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결론 : 이제 하늘을 보자. 볼 수 있게 되어야 한다.
사랑하는 회원 여러분, 물질이 모든 것이 되어버린 이 시대에 성도로써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감각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계산 능력을 무엇입니까? 그것은 땅과 하늘을 제대로 볼 줄 아는 감각이고 땅의 재물과 하늘의 보화를 제대로 비교하고 평가할 수 있는 계산능력입니다. 우리는 지금 모두가 부자가 되고 싶어하고 그 부에 기대어 살기를 원하는 부자의 정신이 지배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거의 모두가 경제 밖에는 관심이 없는 그런 나라에서 말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이런 환경에 살면서 참된 영성을 유지하려면 항상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게 아무리 좋아보이고 아무리 빛나는 것이어도 그것은 진짜 영광이 아니며 우리 몫의 상속물이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희는 하늘의 상으로 만족할 수 있느냐고, 땅의 재물이 아니라 하늘의 보화를 진짜 보화로 여길 수 있느냐고, 하늘의 가족과 영생에 대한 약속으로 충분하다 여길 수 있는 뜬 눈이 있느냐고 말입니다.
이제 하늘을 좀 보십시오. 그 나라를 올려다 보십시오. 지금은 아무 것도 안 보이더라도 계속해서 자꾸 자꾸 아래가 아닌 위를 보는 연습을 하십시오. 무언가 보일 때까지, 확실히 보일 때까지 보고 또 보고 계속해서 올려다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그게 진짜라고 하셨다면, 그게 진짜가 아니겠습니까? 주님께서 그게 보화라고 하셨다면 거기 있는 것들을 챙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영원한 가족을 얻고, 영광을 얻으며, 영생을 얻는 그 일에 욕심을 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앙의 진짜 상급은 땅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보상은 여기에 있지 않습니다. 이제 그런 생각은 작은 조각이라도 떨처 버리시고 하늘의 상급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그 영원하고 없어지지 않으며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을 그 상급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그 상급에 너무 욕심을 내서 하나님도 부담스러워할만큼 욕심을 한 번 내 보시기 바랍니다. 그 나라를 침략해서 빼앗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 나라를 우리에게 웃으면서 기쁘게 내어주실 것이며, 그 나라는 우리의 차지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땅의 부함이 아닌 하늘보화를 탐내게 하시고 욕심내게 하시는 은혜를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그 나라의 영광과 보화를 영원히 상속받고, 영생을 보장받는 그 영원한 가족의 일원이 되어 영원히 즐거워하는 참으로 복된 성도들이 되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