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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2010년 매일성경 설교 10. 둘째 아들이니이다

* 읽거나 들으신 후에는 댓글 한 줄 부탁드립니다. 




문 : 마태복음 21장 23-32절



서론 : 권위에 대하여, 그리고 권위의 위험


사람들이 어울려서 세상을 살아가는데는 참 많은 것이 필요합니다. 눈에 보이는 유형의 것들도 그렇지만 무형의 것들도 꼭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런 무형의 것들이야 말로 사실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를 유지시켜 주며 무너지지 않게 지켜주는 더 중요한 것들이기도 합니다. 권위도 그런 것들 중의 하나입니다. 요즘 사람들, 특히 젊은 사람들은 이 권위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권위라는 말만 들어도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킵니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은 권위라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이어서라기 보다는 권위를 가진 사람들이 그동안 권위를 잘못 사용해 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권위를 가지고 그 권위 아래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억누르고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권위라는 말 자체에 거부반응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권위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리고 그 권위가 완전하든 불완전하든 권위라는 것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만약 그 어떤 권위도 존재하지 않고, 또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사회가 있다면, 그런 사회는 자유가 넘치는 사회가 아니라 오히려 그 누구도 자유롭지 않은 폭력이 또 다른 권위가 되는 그런 사회가 되어버릴 것입니다. 

원래 권위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 분이 모든 권위를 다 가지고 계셨습니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크고 작은 권위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게 하시려고, 질서와 조화 속에 살아가게 하시려고 사람들에게 위임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아서 그렇지 세상에 그렇지 않은 권위는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그 사람 자신이 원래부터 가지고 있는 권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잠시 어떤 역할을 맡기시면서 그가 그 역할을 잘 해내도록 하기 위해서 그에게 빌려주신 것이 바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권위입니다. 그런데, 이 권위는 결국 어떤 힘을 동반하게 되어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권위를 가지고 싶어하고 탐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가지고 싸우고, 다투며 하지 말아야 할 일까지 서슴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 자리의 권위가 주는 힘을 탐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권위를 이런 식으로 이해하기 시작하면 그 사람은 그 권위 때문에 망가져 버립니다. 첫째는 권위란 어떤 역할을 위한 도구인데, 그 도구 자체를 목적으로 삼고 거기에 집착하는 불안하고 좁은 사람이 되어 버리고, 둘째는 그 권위가 손에 들어왔을 때, 자기 멋대로 하는 안하무인의 폭군이 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권위를 지키고 보호하느라고 꼭 가야할 길을 가지 못하고, 결국은 큰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가장 비겁한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이 땅에 살고 있고 또 살았던 권위를 가진 수많은 사람들이 결국은 볼품없는 모습으로 전락해 가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질문 :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용어정리를 좀 하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개역성경과 개역개정판 성경 두 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간혹 같은 본문인데 사용하는 말이 다른 경우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권세’라는 단어도 그런 말들 중의 하나입니다. 개역성경에는 ‘권세’로 되어 있고, 개역 개정판 성경에는 ‘권위’로 되어 있는데, 둘 중에서 더 정확한 번역은 권위입니다. 아마 신약성경에 사용된 ‘권세’라는 말은 모두 ‘권위’로 바꾸어야 의미가 더 정확해 질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권세라고 하면 자꾸 물리적인 힘을 생각하고 겉으로 드러나는 권력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권위는 그런 힘이나 권력이 아닙니다. 권위는 겉으로 드러나는 힘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감추어진 영향력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권세는 드러나야 알 수 있는 반면에 권위는 감추어 있어도 다 알아차리게 되는 그런 특성이 있습니다. 또한 일반적으로 권세는 자기 맘대로 획득할 수 있는 것이어도, 권위는 다른 사람들이 인정해 주어야만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두 가지는 같은 것 같으면서도 많이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강도의 소굴이 되어버린 성전을 정결케 하시고, 성전에서 병자들을 고치시자, 기세등등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복음을 전하실 때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한 번 따져 보고 혼을 내 주리라 작심하고 찾아온 것입니다. 거두절미하고 그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따져 묻습니다. “너는 도대체 무슨 권위로 그런 일들을 하며 누가 너에게 그런 권위를 주었느냐?” 이 질문은 이렇게도 또 저렇게도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만약 “내 맘대로다.”라고 한다면 성전을 모독한 죄로 돌에 맞아 죽게 됩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주신 권위로 그렇게 한다”고 말한다면 그 또한 더 크고 끝나지 않는 논쟁을 일으키게 될 것입니다. 그 권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은 결코 증명할 수 없은 말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이미 자신이 하나님께서 주신 권위로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을 충분히 보여주었습니다. 수많은 이적을 행하고 이전에는 단 한 번도 고침을 받은 적이 없는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하시는 말씀마다 사람들을 놀라게 할만큼 거부할 수 없는 권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스스로를 최고의 권위자라고 믿고 있었던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확실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예수님의 권위를 문제삼고 있었던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이것은 얼마나 우스운 일인지 모릅니다. 지금 이들은 자신에게 권위를 위임해 주신 그 권위의 원래 소유자 앞에서 네가 그 권위를 어디서 받았느냐고 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자기 권위에 빠져버린 사람이 가지는 서글픈 모습입니다. 자기 권위를 절대시하고 거기에만 빠져있기 때문에 너무나 확실한 권위, 자기 권위보다 더 큰 권위조차도 인정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명확한 증거가 보여진다고 해도 말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아닌 대답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이르리라”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훤하게 꿰뚫고 계셨습니다. 그 질문은 예수님의 권위를 무너뜨리려고 손상시키려고 마련된 함정이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한 가지 조건을 달고 그것을 만족시킨다면 대답해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내 질문에 대답하면 나도 대답해 주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질문은 그들이 예수님께 가지고 온 질문하고 꼭 같은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물으십니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 하늘로 부터냐 사람으로 부터냐?” 대답하기가 아주 곤란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의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서로 말했습니다. “이거 진퇴양란이군. 만약 세례 요한의 권위가 하늘에서 왔다고 한다면 왜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느냐고 할 것이고, 그러면 우리는 변명할 말이 없어질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 생각대로 세례 요한은 하나님께서 주신 권위가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그렇게 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를 위대한 선지자로 생각하는 저 백성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궁여지책으로 그 유명한 발뺌, 질문자를 최고로 어의 없게 만드는 “우리는 모릅니다”라는 카드를 꺼내들었습니다. 

이 경우와는 조금 다르지만,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우리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기도제목을 가지고 하나님께 구하고 물으러 들어갔는데, 하나님은 대답이 아니라 질문을 주시는 경우 말입니다. 자녀가 속을 푹푹 썩입니다. 자식이 아니라 웬수덩어리입니다. 아무리 참고 기다려도 변할 기미가 보이질 않습니다. 그래서 기도합니다. 하나님께 따지기도 하고, 그러다가 미안하면 이런 자녀를 허락하신 이유가 무엇이냐고 하나님께 묻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무런 대답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자녀가 변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 대신 문득 마음 속에 한가지 질문이 들려옵니다. “그런데, 너는 그 자녀를 내가 너에게 준 선물이라고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대한 적이 있느냐? 내 면류관에 달린 보석 중 하나를 너에게 맡긴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그렇게 귀하디 귀하게 말이다.” 우리는 갑자기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 됩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성경에서 배운 정답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저 정직한 대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 대답으로 부터 다시 시작하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질문은 생각하고 말고 할 필요가 없는 질문입니다. 정답을 요구하는 질문이 아니라 진실을 묻는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질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자기 생각을 말하면 됩니다. 자기들이 세례 요한을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 그대로 말하면 그만입니다. 가부를 묻는 것도 아니고 그런 질문에 무슨 의논이 필요합니까? 의논한다는 것 자체가 그 질문 앞에 정직하게 설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해야할 대답을 피하겠다는 심산인 것입니다. 

우리의 질문에 대해서 더 깊고, 본질적인 질문으로 대답해 주시는 것은 우리를 다루시고 고치시는 하나님의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통째로 드러내지 않고는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주심으로써 우리의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시고 근본적인 해결책을 주시려고 하십니다. 만약 그럴 때 우리가 진실을 말하는 대신에 핑계대고 얼버무리려고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해결책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비록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런 불순한 의도로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그 순간 예수님의 질문 앞에서 정직할 수 있었다면, 비록 틀린 답이라도 정직하게 말할 수만 있었다면 그들은 또 다른 기회를 얻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의 단단한 껍질을 벗고 새 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기회를 스스로 버렸습니다. 정직대신에 거짓을 택하고 구원대신에 이미 가지고 있던 것들을 지키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모른다는 그들의 대답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내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말하지 않을 것이다.” 대답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권위로 그런 일들을 행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정직하지 않은 사람들, 이미 예수님을 거부하고 그 분의 권위에 손상을 입히겠다고 작정하고 찾아온 그들에게 올바른 대답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마치 돼지에게 진주를 던져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 가치를 알기 보다는 예수님을 공격하게 될 것입니다. 

회원 여러분, 하나님 앞에 자신을 정직하게 드러내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진리를 거부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신을 드러내라고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요구에 거부반응을 보이고, 그래서 결국은 진리를 떠나고 진리를 말하는 사람까지 미워하고 헤치려 하게 되어 있습니다. 때로 이런 저런 통로로 우리에게 들려오는 하나님의 질문은 부담스럽기 그지 없을 때가 많습니다. 대답하기가 정말 곤란한 질문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부담스럽고 곤란한만큼 그 질문은 분명히 중요하고 결정적인 질문일 것입니다. 정직하게 대답하지 않으면 안되는, 그러면 새롭게 되고 온전해 질 기회를 놓치게 되는 그런 질문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곤란한 질문을 하실 때, 그런 질문 앞에 정직하게 서 보십시오. 드러내 놓고 있는 그대로 대답해 보십시오. 그러면 그것은 분명히 우리를 새로운 은혜와 자유로 인도하는 새롭게 열리는 문이 되어줄 것입니다. 


두 아들의 비유 : 누가 순종한 사람이냐?


대답대신 질문을 주신 예수님은 한 가지 이야기를 통해서 또 하나의 질문을 던지십니다. 이야기의 자초지종은 이렇습니다. 한 농부에게 아들 둘이 있었습니다. 포도밭에 할 일이 있어서 그 아들들에게 말했습니다. 먼저 첫째에게 말했습니다.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해야 겠다.” 아들은 흔쾌히 대답합니다. “예. 가겠습니다.” 아버지는 흐뭇했습니다. 그런데, 아들은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대문을 나서면서 옆으로 새고 맙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도 말했습니다. “얘야, 오늘 포도밭에 할 일이 많구나. 나가서 일해야 하겠다.” 우리의 둘째, 역시 둘째다운 반응을 보입니다. “에이, 왜 맨날 일만하라고 해요. 짜증나 죽겠네. 오늘은 형만 일시키면 안되요? 싫어요. 안 갈래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문을 쾅 닫고 집을 나와 버립니다. 그런 뒷모습을 보면서 아버지는 저게 언제 철이 들까 한숨을 쉽니다. 그런데, 마음 약한 우리의 둘째 몇 걸음 가지 못해서 욱하는 성질에 저질러 버린 일에 대해서 후회합니다. 아버지한테 미안해서 눈물이 나려고 합니다. 그는 이내 방향을 바꾸어 포도밭으로 나갑니다.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꾸역 꾸역 해야할 일들을 합니다. 그게 아버지의 뜻이고 또 집안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들 생각에 누가 아버지의 말에 순종한 아들이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뭐 그런 것도 문제라고 내느냐는 듯이 툭 대답합니다. “당연히 둘째 아들이지.” 그 때 전혀 예상치 못한 직격탄이 그들에게 날아옵니다. 그들은 방비할 새도 없이 그 직격탄에 얻어맞고 맙니다. “내가 확실히 말한다.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늘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자타가 공인하는 첫째 아들이었습니다. 천국 상속권을 일순위로 소유한 부동의 상속자였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말은 청산유수였습니다. 입만 열면 정답을 이야기했고, 모든 것을 말로 해결했습니다. 그러나, 대답은 항상 “예.”였지만, 행동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라고 대답해 놓고는 그 대답을 피해갈 수 있는 방법들을 고안해 냈고, 그 방법을 따르기만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믿었으며, 또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그 대답을 따를 때에도 마음 없이 그렇게 할 때가 많았습니다. 은혜에 대한 감사대신에 자기 만족에 빠져서 말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결코 자신들의 위치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의심해 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다른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을 안듣는 둘째 아들이었습니다. 항상 자기들보다는 열등하며 하늘나라에서도 훨씬 낮은 자리에 앉아있을 가치없는 인생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르고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자신들의 가진 권위나 말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누가 하나님의 말씀에 뉘우치며 돌아서서 마지막에 순종하느냐 하는 것이 결정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세리들과 창녀들... 이들은 그들의 생각에는 둘째도 아닌 자녀 축에도 못드는, 지옥 땔깜으로 밖에 쓸모없는 버려진 자들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죽었다가 깨어나도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들려졌을 때, 바로 그렇게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수많은 죄인들, 세리들과 창녀들이 복음 앞에 꺼꾸러 져서 자기 죄를 뉘우치고 예수님을 따랐던 것입니다. 이들은 둘째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요구에 대해 명백하게 “싫어요”를 외치고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만 했던, 의지적이고 의도적으로 그릇된 길을 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돌아섰습니다. 새로워졌습니다. 결코 떠날 수 없었던 죄에 중독되어 있던 이전의 삶을 떠나서 완전히 다른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그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때로는 삐걱거리고 때로는 힘들다고 투덜거리기는 했겠지만 그렇게 포도밭에 나가 아버지가 부탁한 일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좋은 신앙이라고 하면 항상 완벽한 신앙만을 머리에 떠올리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정답만을 이야기하며 스스로 그 정답대로 살고 있다는 확신과 만족을 얻고 싶어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언제나 어느 순간에도 주저없이 “예.”라고 할 수 있는 신앙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신앙은 우리가 우리 삶의 중간지점에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수준의 신앙입니다. 물론 우리는 노력하고 힘써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더 순결해 지고, 더 온전해 지며, 더 많은 순종으로 채워져 가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힘쓰더라도 우리는 결코 항상 “예.”인 수준에는 이를 수 없습니다. 만약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자신에 대해 나는 이미 그렇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자신들을 부동의 맡아들로 생각했던 본문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착각에 불과합니다. 우리 모두는 지금 결승점이 아니라 중간지점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서로 달려온 거리는 다르고 그래서 서 있는 위치는 다를지 몰라도 아직은 그 누구도 결승선을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결과는 결승점을 통과한 후에, 그것도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상관없이 주님이 판단하실 것입니다. 그 누구도 주님의 평가를 받기 전까지는 내가 몇 점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함께 신앙생활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른 성도들을 판단하는 자리에 갈 때가 있습니다. 이 집사는 이렇다, 저 집사는 저렇다고 그 사람의 신앙에 대해서 이리저리 판단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일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을지라도 우리가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신앙을 제대로 파악할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겉으로 보이는 것 밖에는 도무지 볼 수 없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그 사람이 미래에 어떤 사람이 될지도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 사람 뿐 아닙니다. 나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어떻게 변하게 될지 누가 압니까? 지금은 괜챦지만 나중에는 엉망이 될지, 또 지금은 엉망이지만 나중에는 얼마나 훌륭해질지 그 누가 압니까? 그래서, 우리는 그게 나 자신이든 혹은 다른 사람이든 그리고, 그게 현재의 모습이든 혹은 미래의 모습이든 확실히 점수 매길 수 없습니다. 그런 능력이 우리에게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주 죄송하고 부끄러운 고백입니다만, 저도 사람인지라 사람에 대해서 편견과 선입견을 가지게 될 때가 많습니다. 교회에서 이렇게 저렇게 행동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 분은 저런 사람이다. 또 저 분은 이런 사람이다라고 저도 모르게 그 사람의 인격과 신앙에 대해서 판단하게 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 분의 가정에 심방해서 길고 짧은 이야기를 나누어 보면 내가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래서 심방하는 도중에 아무도 모르게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 분의 살아온 이야기와 진솔한 이야기들을 들어보면 제가 얼마나 단편적으로 사람을 보고 있었는가를 깨닫게 됩니다. 물론 정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정말 좋다고, 훌륭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 중에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 드러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경험이 하나 둘 쌓여가게 되니 저는 거기서 아주 귀중한 원칙 하나를 얻게 되었습니다. 내가 직접 그 사람과 장시간의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충분히 많은 면을 볼 때까지는 그 사람의 보이는 모습이 어떻더라도 함부로 단정짓지 말자고 원칙입니다. 저 처럼 남을 판단하기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런 경험이 주는 교훈은 얼마나 큰 유익이 되는지 모릅니다. 저는 이런 점에서는 하나님께서 저를 더 많이 깨뜨려 주시길 바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천국에서는 놀랄만한 일이 많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땅에서 부동의 첫째라고 여겨졌던 사람이 하늘에서는 마지막이 되고, 땅에서는 마지막 하발이 인생이라고 여겨졌던 사람들이 천국에서는 첫째로 등극하는 일이 얼마든지 일어날 것이라고, 그러니 하늘나라에 오려거든 많이 놀랄 준비를 하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게 나 자신이든지 혹은 남이든지 간에 지금 보이는 모습으로 사람을 평가해서는 안됩니다. 적어도 그렇게 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천국의 입장에서 사람을 보는 연습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가 아닙니다. 천국을 위해서 중요한 것은 앞으로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복음이 들려올 때,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올 때 내가 그 말씀을 듣고 돌이켜 바른 길로 돌아갈 수 있는가, 그리고 그 바른 길을 계속해서 걸어갈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내가 나의 신앙에 대해서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그만큼 건강한 신앙을 가지고 있을수도 있구요. 그렇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끝도 아닙니다. 신실함을 가지고 끝까지 그 모습을 유지해야 합니다. 반대로 지금은 나 자신이 세리와 창녀처럼 형편없이 여겨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거기서 출발하기만 하면 됩니다. 지금이라도 들려오는 말씀에 반응하여, 뉘우치고 돌이켜 포도밭으로 가면 됩니다. 때로는 투덜거리게 되더라도 그 일을 그만두지만 않으면 됩니다. 지금 나 자신에 대해서 판단하지 마십시오. 현재의 모습에 너무 집착하지 마십시오. 그저 들려오는 말씀 말씀을 모두 나에게 주어지는 말씀으로 들으시면서 계속 순종해 나가면 됩니다. 때로 “아니요.”라고 대답했을지라도 그게 진정 하나님의 뜻으로 여겨진다면, 나중에 돌이켜 제 길로 갈 수 있는 겸손한 마음, 부드러운 마음만 남아있으면 됩니다. 그렇게 우리의 삶을 계속해서 “예”쪽으로 다가가게 하기만 하면 됩니다. 



첫째가 버림받은 이유 : 둘째의 회개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왜 버림을 받게 될 것인가 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지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다. 그렇지만 세리와 창녀는 믿었다. 게다가 너희는 그들이 믿는 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않았다.” 세례 요한은 분명히 의의 도로 이 세상에 왔고, 또 가르쳤습니다. 수많은 사람들, 심지어는 이방인인 로마의 병사들까지 그에게 나와서 구원의 길을 물을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이 그가 선지자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진리와 가장 가까이 있다고 하는, 그래서 스스로를 가장 분별력 있다고 믿었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요한이 전하는 메시지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항상 입으로는 진리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실제로는 진리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들에게 하나님은 또 한 번의 기회를 더 주셨습니다. 그들 앞에서 그들이 최고의 죄인이라고 판단하고 정죄하던 죄인들이 요한의 메시지 앞에서 회개하고 변화되는 모습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만약 요한과 그의 메시지가 자기 마음대로 전한 가짜였다면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그런 변화는 결코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세리와 몸을 파는 여인들이 뼈속까지 새겨진 악한 습관과 삶의 방법을 떠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그것을 통해서 그 메시지가 하나님의 메시지이며, 그 뒤에서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것을 보고 알아야만 했습니다. 자신들도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기회도 살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첫째가 되는 특권을 부여받았으면서도 마지막 보다 나중이 되는 처지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들이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이 진리 자체보다는 자신들이 가진 권위와 그 권위가 주는 실제적인 유익에 눈이 멀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도구를 목적으로 생각하게 되니 진짜 목적을 놓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일은 우리의 삶 속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십니다. 그 좋은 것들은 우리에게 실제적으로도 많은 유익을 가져다 줍니다. 재산이 그렇고, 잘 자라준 능력있는 자녀들이 그렇고, 내 지위와 평판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나중에는 오히려 그것을 주신 하나님을 대신하게 되고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만듭니다. 처음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것들을 주실 때,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더 많이 생각하고 하나님께 더 영광이 되는 삶을 살라고 하신 주신 것인데, 시간이 흐르면서 주객이 전도되어 나중에는 하나님은 온데 간데 없어지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역할을 하는 것을 우리는 “우상”이라고 부릅니다. 우리에게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빼앗아 버리는 것들. 우리가 좋은 것이라고 여기는 것들, 그래서 복이라고 여겨지는 그 어떤 것들도 그런 것들의 목록에 포함될 수 있으며 또 언제든지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것들 때문에 언제든지 마지막이 되어버린 첫째 아들이 될 수 있습니다. 


결론 : 정직하고 마음 약한 둘째로 살아가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예방하려면 우리는 우리가 둘째 아들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런 위치로 떨어진 것은 그들이 자신을 첫째 아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 번 첫째 아들이면 영원한 첫째 아들일 수 있다고 너무 일찍 안심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세계에 있어서 첫째의 위치는 고정된 것이 아닙니다. 그 위치는 언제든지 바뀔 수 있고, 누구에게나 주어질 수 있습니다. 마지막에 누가 첫째가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이것은 우리의 소망이기도 하고, 동시에 우리를 긴장하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내가 첫째가 되려고 하거나 혹은 첫째일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거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첫째됨을 영원히 보장받을 수 있다는 생각은 더더욱 버려야 합니다. 우리를 영적으로 안전하게 하는 방법은 첫째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유지하는 것도 아닙니다. 역설적이게도 그 방법은 계속해서 둘째로 남아서 둘째로 살아가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그렇게 결국은, 마지막에는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녀가 되기 위해서 애쓰는 것입니다. 당장은 ‘아니요, 싫어요’라고 하더라도, 당장은 투덜거리고 불평하더라도 금방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약해져서 뉘우치고 순종의 자리로 옮겨갈 수 있는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하나님 앞에서의 정직한 마음을 남겨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그 어떤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에도 피하거나 얼버무리려 하지 말고 정직하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하고, 당장은 싫은 일에 대해 싫다고 버티다가도 그게 옳다는 것과 그래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길로 돌이킬 수 밖에 없는 정직함, 그 정직함을 항상 남겨두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그 정직함까지 잃어버린다면 우리는 언젠가는 첫째처럼 변해버릴 수 밖에 없습니다. 앞에서는 예라고 하고서 뒤 돌아서는 그렇게 하지 않을 핑계를 찾고, 불순종하면서도 전혀 마음 아파하며 돌이키지 않는 그런 첫째 말입니다. 


첫째로 살아야 첫째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둘째로 살아야 첫째가 됩니다. 부족하고 거칠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아버지를 향해 마음 약한 둘째가 되어야 하늘나라에서 첫째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온 세상이 첫째가 되기를 요구하고, 때로는 교회에서 조차도 첫째만을 인정해 주더라도 항상 둘째로 남아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둘째로 사는 겸손한 특권을 허락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둘째들의 나라, 우리 아버지 하나님 나라의 영원하고 영광스러운 상속자들이 되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