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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2010년 매일성경 설교 11. 화있을진저





본문 : 마태복음 23장 13-22절 



서론 : 화 있을진저

마태복음 5장으로 돌아가 보면, 처음 사역을 시작하실 때 예수님께서는 산 위에 모인 사람들에게 여덟가지 복을 선언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이 땅에서 진리와 하나님께 헌신하여 살면서 여러가지 아픔과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던 사람들, 그러면서도 대접한 번 제대로 받아보지 못했던 사람들, 그래서 결코 스스로를 복되다고 생각해 보지 못했던 사람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위로가 되었으며, 무엇보다도 복된 약속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향한 가르침을 마감하시면서 그 마지막에 일곱 번의 화를 선언하십니다. 스스로 천국의 백성이 되길 원하고, 그래서 그 초청에 응한 사람들에게 천국 잔치의 풍성함과 기쁨을 약속해 주셨던 예수님은 이제 정반대로 어떤 사람들을 향해서 일곱 번의 화를 선언하십니다. 그 어떤 사람들이란 바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 한 가지는 그 자리에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23장 한 장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 대한 말씀의 일부분인데, 그 시작인 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들려주신 대상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아니라 ‘무리와 제자들’ 그러니까 오늘날로 하면 교회의 성도들과 교회 지도자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선언되는 화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해 있지만 정작 그 말씀을 듣는 듣는 사람들은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과 무리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 말씀은 그들을 향한 화의 선언이기 이전에 무리들과 제자들을 향한 경고의 말씀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실제로 23장 3절에서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시면서 무리들과 제자들에게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것을 보아도 이것이 사실은 이미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향한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그들 자신의 악한 모습 때문에 화를 당하게 될 것이라면, 만약 그런 모습이 제자들과 무리들, 그러니까 성도들과 교회 지도자들 속에 나타나게 되면 그들도 동일한 화를 당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려 주시는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위험한 전염병이 유행할 것이 분명하다면 반드시 예방주사를 맞아야 합니다. 주님은 곧 있으면 적어도 일곱가지 영적인 전염병이 제자들과 무리들에게도 찾아올 것을 아셨습니다. 만약 그들이 그 병에 걸린다면 그들에게도 치명적인 화가 미칠 것입니다. 지금은 천국의 복을 약속받고 있는 그들이지만, 그렇게 되면 그들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영적인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영적인 죽음에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땅을 떠나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무리들과 제자들에게 그 전염병에 걸리지 않을 수 있는 예방주사를 맞게 하셨던 것입니다. 제가 신문을 보고, 책을 읽으면서 또 성경을 읽으면서 발견하게 되는 간접적인 진리 하나는 인간의 유사이래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으며, 그래서 인간의 문제도 꼭같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겉모습이지 속모습이 아닙니다. 문제의 본질은 언제나 같습니다. 신앙도 그런 점에서는 예외가 아닙니다. 사람들의 앓는 신앙의 질병은 언제나 증상이 같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도 꼭 같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문제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들의 문제는 언젠가는 무리들과 제자들의 문제가 될 수 있는 것들이었고,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들, 성도들과 교회 지도자들에게도 그대로 일어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방주사를 맞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들이 지금 당장은 우리랑 상관없는 문제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든지 우리를 찾아올 수 있고 또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 때를 대비해서 우리는 오늘 말씀을 진지하게 경청해야 합니다. 우리를 영적인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는 그런 병균들에 대한 면역력을 기르기 위해서 말입니다. 


첫번째 화의 원인 : 천국과 복음의 방해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화를 선언하신 첫번째 이유는 그들이 “사람들 앞에서 천국문을 닫고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있으며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들도 못 들어가게 막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후에 천국문은 이미 열렸습니다. 누구든지 그 문을 통해서 하늘나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항상 예수님의 극렬한 반대자들이었습니다. 사사건건 예수님을 걸고 넘어지려고 했으며, 함정에 빠뜨리려고 했고 심지어는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일들에 대해서 사람들 앞에서 공공연히 사탄의 힘을 빌어서 그렇게 한다고 떠들기 까지 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좋은 소문을 퍼뜨리는 사람들에게는 협박을 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사람들 앞에 열린 천국문을 닫았고, 자신들도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으며, 들어가려는 사람들까지 엄포를 놓아가면서 못 들어가게 방해했던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맡긴 이유는 사람들을 천국의 문으로 인도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이 말씀을 맡고, 그 말씀을 해석하여 가르치는 목적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 천국의 문이 열리자 그 문을 닫고 못질해서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려 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율법을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원래 구원의 방법, 그러니까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방편으로 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비록 율법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가야 할 삶의 원리들을 담고 있는 가장 귀한 선물이기는 했지만, 그것은 결국은 사람들에게 사람은 자기 힘으로는 결코 의로워질 수 없는 죄인이며 그래서 바깥으로 부터 오는 덧입혀지는 의를 기다리고 갈망하게 하려는 목적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 율법을 오해해서 하늘나라 입장권을 따내는 방편으로 가르쳤던 것입니다. 자기 의를 만들고, 주장하는 도구로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율법을 제대로 이해하고 가르쳤다면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셨을 때 그들은 그것이 닫혀있는 하늘 문을 활짝 여는 놀라운 소식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그들이 만약 모세를 제대로 알았다면, 예수님도 제대로 알아보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을 오해했습니다. 율법을 구원의 방편이라고 생각했으니, 또 다른 구원의 방편이 왔을 때, 진짜 구원의 길이 열렸을 때 그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천국문으로 한 발자국이라도 더 가까이 인도해야할 그들이 오히려 열린 천국문을 닫고 들어가려는 사람들까지 협박해서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저는 이 부분을 묵상하면서 제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가를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되었습니다. 목사는 무엇하는 사람일까요? 저는 여러분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 사람일까요? 저는 저에게 배우고 저와 함께 하는 사람들을 한 발자국이라도 더 천국문으로 가까이 가게 해야하는 사람입니다. 새벽이 오면 양떼들을 양의 문으로 인도하는 목동처럼 양의 문, 천국의 문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여러분을 인도하는 사람입니다. 제가 이런 일을 해야한다는 말을 뒤집어 보면 여러분이 저에게 기대해야 할 것도 바로 그것이라는 이야기도 됩니다. 저는 장년 2부를 섬기면서 여러분이 저에게 주시는 사랑과 지지에 언제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제 부족함에 비하면 그 사랑과 지지는 너무 분에 넘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그렇기 때문에 한 가지만 더 부탁드립니다.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여러분을 천국에 들어가게 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을 천국의 문 앞으로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인도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제가 여러분 앞에 열린 천국문을 더 확실히 볼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할 수 있도록, 그리고 여러분이 저로 인해 그 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그 밝은 빛을 더 확실히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 저에게 그것만을 기대해 주십시오. 저에게 여러분을 천국문으로 가까이 가도록 돕는 일을 요구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그 일을 잘 하고, 여러분이 저를 통해서 기대한 것을 얻게 된다면 우리는 항상 주님이 약속해 주신 팔복 속에 머무는 복된 성도들이 될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어떤 것이라도 우리 앞에 열린 천국문을 닫히게 만든다면 우리는 그것이 무엇이건 그것을 피하고 버려야 합니다. 누가 뭐래도 떠나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상식과 관습이라는, 남들도 다 그런다는 이름으로 우리 앞에 놓여져서 우리가 들어갈 천국문을 가로 막고 있는 수많은 장애물들이 있습니다. 때로는 신앙보다 더 중요해져 버린 교회생활의 방법들과 결코 신앙적이지 않은 관습들이 있습니다. 지금 당장 그것을 떠나기란 현실적으로 어려울지 몰라도, 적어도 내가 그런 것들을 옹호하고 주장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런 것들을 분별하기란 참 어렵습니다. 그런 것들 중에는 명백히 잘못되어 보이는 것들도 있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선하고 좋은 것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만약 내가 예수님께로 가는 길을 방해하는 것들이라면, 복음을 복음으로 듣는 일을 가로막는 일들이라면 그게 무엇이 되었든 그것은 오늘날의 율법이 되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선언되었던 그 화가 임하게 될 수 있습니다. 영적인 잠에 빠지게 될 것이고, 서서히 영적인 죽음을 향해 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신앙의 풍성함은 사라져 버리고 푸석 푸석 말라 버린 영혼만 남게 될 것입니다. 

항상 복음과 천국이라는 기준에서 자신의 신앙과 교회생활의 방법들을 살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이미 열린 천국문을 닫는 역할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은혜의 은혜됨을 망쳐놓고 있지는 않은지 주의깊게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런 역할을 하는 것들을 하나씩 처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내 영혼은 살아있고 풍성한 은혜를 놓치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두번째 화의 원인 : 빗나간 열정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화를 선언하신 두번째 이유는 그들의 빗나간 선교의 열정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의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새로운 사실을 하나 알려드립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에도 선교사가 있었을까요? 네. 있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파송 목회자쯤 되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런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교인’은 ‘이방인 유대교 개종자’들을 말합니다. 당시에 이방인이 유대교에 들어오는 방법에는 두 단계가 있었습니다. 첫번째 단계는 유대교의 교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단계이고 두번째 단계는 할례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의 유대교 선교사들은 이 중에서 첫번째 사람들을 위해 헌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직접 전도를 하지는 않았지만, 스스로 유대교의 태두리로 들어오면 그를 가르치기 위해서 이방 땅으로 여행하고 머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으며 그들을 설득해서 할례를 받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그런 열정을 가지고 행한 일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에 대한 순수한 마음으로 유대교의 문을 두드린 이방인들을 자기 식으로 가르쳐서 엉뚱한 방향으로 이끌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그 경건한 이방인들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열정적인 가르침을 통해 사랑하게 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할례를 통해 얻게 되는 “유대인이라는 지위”와 율법준수를 통해 얻는 “의로움”인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어린아이들은 백지와도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는 대로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저는 어린아이들 뿐만 아니라 처음 예수를 믿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백지입니다. 영적으로는 막 태어난 아이와 같기 때문입니다. 그 위에 처음 그리는 그림이 그 사람의 평생의 신앙의 모습을 좌우하게 됩니다. 계속해서 그 그림이 그 사람에게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저는 목사로서 이런 모습을 자주 보게 됩니다. 신앙이 처음 접한 한 가지 색깔에 묶여버린 성도들을 만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느끼시겠지만, 목회자는 목회자마다 특별히 더 강조하는 것이 있게 마련입니다. 때로는 저 이야기들이 정말 모두 하나의 성경에 함께 들어있는 이야기가 맞나 싶을 정도로 목회자에 따라 그 강조점이 다를 때도 있습니다. 사실 각각의 강조점은 한 사람의 목회자가 성경을 붙들고 씨름하면서 그리고 삶의 경험을 통해서 발견해 낸 보석과 같은 진리일 것입니다. 그런 진리들은 성경의 대부분의 원리를 포함하는 넓은 진리일 때도 있지만 반대로 너무 좁은 것일 때도 있습니다. 문제는 강조되는 것이 좁은 진리일 때, 그리고 그것이 진리의 전부인 양 너무 심하게 과장되어 강조되는 경우에 생겨납니다. 이미 기독교 신앙과 진리의 풍부함을 경험하고 아는 사람이라면 괜찮은데, 듣고 배우는 사람이 초신자이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그런 진리에 대한 풍성한 경험이 없는 사람인 경우에는 신앙이 그 좁은 틀 안에 갖혀 버리게 됩니다. 말하는 사람은 이미 다양한 진리를 경험하였고, 그 중에서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만을 강조하는 것일 수 있지만 듣는 사람은 그것만을 듣기 때문에 그런 안타까운 일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사실 목회자는 그렇게 해서라도 성도들을 최소한 그것만이라도 붙들고 살아가게 해 주고 싶어서 그럴 수 있지만, 배우는 성도들은 결국 그것 밖에 모르는 성도들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신앙의 넓이를 잃어버리게 하고, 그에게서 자유와 풍성함을 빼앗아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그것과 다른 가르침에 대해서는 마음을 닫아버리게 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어쩌면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이방인 개종자를 그런 식으로 가르치고 인도했던 것은 그렇게 해서 하루라도 빨리 그들을 확고한 유대교 신자로 만들기 위해서 였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어떤 과정과 규칙을 정해놓고 그것만 하면 자격을 갖출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가장 손쉽고 매력적인 방법이었기 때문에 그 방법을 택했을 것이구요. 그러나, 문제는 그런 규칙과 방법, 과정에 대한 지나친 강조가 결국은 위선적인 신앙으로 이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선생들이 덕지 덕지 덧붙인 규례들과 규칙들에 가려서 그들이 처음 가졌던 하나님에 대한 관심을 없어지고 그런 것들을 지키려는 집착만 남게 됩니다. 또 이런 신앙의 특징은 항상 자신을 남과 비교하게 하고 그들을 넘어서야 한다는 압박감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결국 자신을 가르쳤던 사람보다 더 외형과 형식에 집착하는 위선만 남게 만들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한 사람이라도 더 유대교인을 만들어서 교세를 확장하려고 그런 방법을 사용하였지만 결국은 그렇게 해서 그들을 자신들 보다 더한 지옥의 자식이 되게 했던 것입니다. 

선교의 열정, 전도의 열정은 좋은 것입니다. 한 사람을 한시라도 빨리 신앙좋은 사람으로 만들어 주고 싶어하는 마음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이런 열정이 그 사람의 속사람과 영혼의 참된 변화에는 관심을 두지 않으면서 단지 교세를 확장하려고 하거나 혹은 한 명의 교인을 늘리기 위한 도구가 되어질 때입니다. 영혼에 대한 열정은 반드시 그 개인을 향한 사랑으로 부터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처럼 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에서 나온 열정이어야 하고, 그 사람의 참된 변화와 구원을 위한 열정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열정은 덜익은 열매를 따려는 조급함으로 변하기가 쉽다는 것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만약 여기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경우처럼 나의 잘못된 신앙관이라도 더해지는 날에는 그 영혼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때로 우리는 목회자든, 평신도든 간에 어떤 사람의 영혼의 도화지 위에 첫번 흔적을 남기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그 사람이 기독교를 접하는 첫번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그를 도와주려는 열정, 하루라도 빨리 어엿한 성도로 만들어 주고 싶은 열정이 지나쳐서 내가 그 열매를 만들어 내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바울이 말했듯이 우리는 항상 씨 뿌리는 자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씨뿌리는 자의 겸손과 절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영혼이 백지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그리지 말아야 할 선을 그리지 않고 남기지 말아야 할 흔적을 남기지 말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 실수는 우리와 그 사람을 공히 화에 이르게 하는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세번째 화의 원인 : 분별력 없음

주님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세번째로 화를 선언하신 것은 그들이 맹세에 대한 말도 안되는, 정말 우습기 짝이 없는 주장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맹세는 자기가 하는 말이나 약속의 신빙성을 높이기 위해서 적어도 자기 전부나 자기보다 더 큰 권위에 의지해서 하는 말입니다. 당시 사람들도 요즘 사람들처럼은 아니지만 맹세를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하늘에 걸고, 땅에 걸고, 성전에 걸고, 또 성전에 속한 그 어떤 것에 걸고 말입니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그러면 어떤 맹세는 꼭 지켜야 하는 맹세이고 어떤 맹세는 그럴 필요가 없는 맹세인지에 대한 논쟁이 생겨났습니다. 한 쪽에서는 맹세는 어떤 경우에라도 꼭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고, 다른 한쪽에서는 아니다, 맹세라고 무조건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어디다 대고 맹세를 했는지가 중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말했습니다. “만약 성전에 대고 맹세했으면 지키지 않아도 되지만, 성전 안의 금에 대고 맹세했으면 지켜야 한다. 만약 성전 안의 제단에 대고 맹세했으면 지키지 않아도 좋지만 제물에 대고 맹세하면 지켜야 한다.” 물론 인기를 얻었던 것은 맹세를 했으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하는 주장보다는 그건 경우에 따라 다르다는 주장이었습니다. 그것이 맹세를 했더라도 피해갈 수만 있으며 피해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속마음에 더 맞아떨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더 인기를 얻었던 이런 주장은 예수님께서 보시기에는 정말 우습기 그지 없는 주장이었습니다. 그것은 성경,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에 정통하다고 주장하는 그들이 사실은 아주 기초적인 것에 대한 비교능력조차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주장이었던 것입니다. 말 그대로 넌센스였던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물으셨습니다. “어느 것이 크뇨 그 금이냐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어느 것이 크뇨 그 예물이냐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겉으로 보이는 것으로 크기와 중요성을 판단했습니다. 성전보다는 그 안에 있는 금이 더 빛나고 값어치 있어 보였습니다. 제단 보다는 그 위에서 드려지는 제물이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전이나 제단에 대고 맹세한 것은 지킬 필요가 없지만, 성전의 금이나 제물에 대고 한 맹세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준은 달랐습니다. 예수님께 중요한 것은 무엇이 무엇을 거룩하게 하는가 하는 것이었고, 거룩하게 되는 것보다는 거룩하게 하는 것이 더 크고 중요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크기를 가늠하는 하나님의 기준이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겉으로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정작 무언가를 평가할 때는 겉으로 보이는 것만 보고 평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화려하고 겉으로 보기에 큰 것이 그렇지 않은 것보다 더 나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신앙인들도 그런 겉모습에 속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겉모습에 속는 사람들은 결국 겉모습을 따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크고 빛나는 것이 가치있다고 생각하니 그것을 얻고 세우려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이죠. 그런데, 만약 신앙이 이렇게 되어버리면 신앙은 결코 내 속사람의 일이 아니라 바깥을 꾸미고 바깥을 세우는 일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런 일이 계속되면 우리는 분별력 없는 사람들이 되어 버립니다. 우리는 주님이 처음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해서 “외식하는 자” 그러니까 “위선자”로 부르셨다가 16절부터는 이들을 “소경된 인도자”, “우맹”이라고 부르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위선자는 결국 보면서도 볼 수 없는 소경이 되고 일의 경중을 가늠할 수 없을만큼 어리석은 사람이 될 수 밖에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위선자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은 속 사람과 상관없이 겉 모습만 신경쓰는 사람들이고, 내용과 상관없이 형식만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내려놓고 중요하지 않은 것에 집착하는 자들이고  더 무거운 것은 가볍다 하고 가벼운 것을 무겁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결국은 분별력을 잃어버릴 수 밖에 없습니다. 소경이 되고 우맹이 됩니다. 

회원 여러분, 무엇이 더 중요하고, 또 가장 중요한 것입니까?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눈에 확 띠고 누가 보더라도 빛나는 것들은 정말 중요한 것들이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껍데기와 겉모습이 아니라 그 속을 채우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성전의 금보다는 성전이 중요하며, 제물보다는 제단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의 가장 큰 목적 중의 하나가 하나님을 닮는 것이라고 한다면,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를 거룩하게 해 줄 수 있는 것, 나를 더 하나님 닮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것, 그렇게 내 속사람을 새롭게 하고 온전하게 해 줄 수 있는 것들이 중요하며, 그렇게 하는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의 중심은 바로 그런 것들이 되어야 하고, 우리가 가장 힘써야 할 일들이란 바로 그런 일들이 되어야 합니다. 보이는 것에 속아 크고 화려한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면 위선은 반드시 끼어들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분별력 없는 소경과 어리석은 자들로 변해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고 싶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위선 다음에 어리석음이 오는 것, 그것이 자연스러운 순서이기 때문입니다. 


결론 : 바리새인의 누룩을 조심하라

예수님은 오늘 말씀 속에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해 화를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나 듣는 사람들은 그들이 아니라 제자들이었고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진짜 걱정하신 사람들은 바로 제자들과 무리들, 그러니까 새로 생겨날 교회와 교회의 지도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언젠가 제자들에게 “바리새인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사고방식, 그들의 가치관, 그들의 신앙관이 교회에 들어와 자리를 잡게 되면 교회가 망가져 버리고, 신앙은 겉만 그럴 듯한 텅빈 것이 되어버릴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결국 모든 영적인 풍성함과 생명을 잃어버리게 되는 화가 임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이 바리새인들의 누룩이라고 이야기한 것,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이 화를 당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들의 형식주의입니다. 율법은 복음을 기다리게 하고 결국 복음을 담아내기 위한 그릇으로 주신 것이지만 그들은 율법을 복음으로 착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늘문을 닫아버리고 말았습니다. 전도와 선교의 열정이 있었지만 그것조차도 형식적인 개종자를 만들어 유대교인을 한 명이라도 더 늘리려는 빗나간 열정에 불과했습니다. 맹세에 대한 그들의 주장은 그들이 형식과 겉모습에 집착한 결과 거룩하게 해 주는 것보다 거룩해 지는 것을 더 크고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이런 그들의 태도 때문에 결국 위선에 빠질 수 밖에 없었으며, 소경이 되고 분별력 없는 어리석은 자들이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원래 하늘나라에서 가장 가깝고 그 나라의 큰 상과 가장 가까이 부름받았으면서도 결국은 화를 당하는 자리로 떨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은 특히 형식과 외형을 중시하는 우리나라의 성도들이 더 귀 기울이고 주의를 쏟아 들어야 할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회원 여러분, 오늘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들의 관심사는 무엇입니까? 나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무엇을 추구합니까? 바른 목적과 내용이 없다면, 열정조차도 형식이 되고 위선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위선이라는 말을 들으면 무척 사악한 말로 생각하지 사실 위선이라는 것이 별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겉과 속을 혼동하는 것이고, 내용과 형식에 대해 가치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선택하고 살아가는 것은 자연스럽게 위선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예방하려면 우리는 어떤 것이 나를 천국문에 한 발자국이라도 더 가까이 가게 해 주고, 그 문틈으로 새어나오는 빛줄기를 더 밝게 해 줄 수 있는지를 잘 분별해야 합니다. 또 열정은 참 좋은 것이지만, 열정이 있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내 열정이 하나님과 사람들을 사랑하는 진심에서 나온 열정인지를 체크해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방향을 다시 잡아야 합니다. 또 내 신앙생활에 있어서 어떤 것이 나를 거룩에 더 가까이 가게 해 주며 하나님의 성품을 더 닮아가게 해 줄 수 있는지 확실히 분별해야 합니다. 내 겉모습을 그럴 듯하게 해 주고, 빛나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 속 사람을 빛나게 해주고 온전한 것으로 바꾸는 일에 도움이 되는 일들을 열심으로 따라가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에 있어서 가장 크고 중요한 일이라는 눈을 떠야 하며 그래서 그것을 따라 움직이려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회원 여러분, 우리는 누구나 시간이 흘러가면 내용보다는 형식을 붙드는 방향으로 가기가 쉬운 사람들입니다. 그게 우리의 본성입니다. 그러나, 본성이 그렇다고 해도, 그것이 옳은 것이 아닙니다. 그건 타락한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본성의 흐름에 자신을 맡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형식을 좇고 외형을 추구하는 문화를 거부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위선을 떠나서 생명과 풍성함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는 언제나 주님께서 처음 우리에게 부어주셨던 그 복, 그 여덟가지 복 속에 영원히 머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바리새인의 누룩에 물들지 않을 수 있는 분별력과 결단을 허락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그 순간까지 주님께서 주신 이 자유와 풍성한 은혜를 빼앗기지 않는 복을 누리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