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2010년 매일성경 설교 12. 주인이 이르러



본문 : 마태복음 24장 45-51절 


서론 : 종말에 대한 관심

귀한 보석과 미술작품일수록 가짜와 카피가 많습니다. 그것과 같은 이치인지 모르지만 이상하게 기독교에는 유독 이단들이 많습니다. 이단이란 ‘다를 이(異)자와 끝 단(端)’를 쓰는데 저는 이것이 정말 이단에 대한 기가막힌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이단인지 아닌지 겉으로는 잘 구분이 가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교리와 성경전체에 대한 균형잡힌 지식이 없는 경우 분별해 내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런데, 다른 것이 있습니다. 바로 끝, 그러니까 마지막이 다릅니다. 그래서, 이단은 처음에는 그 본모습을 알아차리기 힘듭니다. 거의 끝에 가서야 그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늦습니다. 너무 깊이 발을 들여놓은 다음이라 빠져나오려고 해도 여간해서는 그러기가 어렵습니다. 빠져나오려고 하면 이단들은 그 사람의 삶을 아얘 망쳐놓으려고 달려듭니다. 그래서 자기 팔다리를 끊겠다는 정도의 각오가 아니면 한 번 깊숙히 빠진 이단에서는 빠져나오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단들이 가장 많이 관련되어 있는 것이 바로 종말론입니다. 세기말이 되고 또 새로운 천년이 시작될 때마다 종말론, 그러니까 주님의 재림과 관계된 이단들은 기승을 부리고 사람들은 또 거기에 유혹되어서 가지 말아야 할 길로 가는 일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사실 주님의 재림만큼 기독교에서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다른 것들도 모두 중요하지만 만약 주님의 재림이 없다면, 기독교는 더 이상 기독교로 남아있지 못할 것입니다. 바라보아야 할 가장 큰 소망과 믿음의 근거를 잃어버리는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재림이 이렇게 중요한 만큼 우리는 이것에 대해서 건전한 관심과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종말에 대한 건전하지 못한 관심과 생각은 성도의 삶과 신앙을 일그러뜨리기 때문입니다. 일단 가장 중요한 것이 주님이 언제 다시 오실 것인가에 대한 관심일 것입니다. 재림과 관계된 다른 것은 재림이 오고 난 후의 문제이지만, 재림의 시기를 아는 문제는 재림을 믿는 사람에게 주님의 재림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그리고 내가 천국에 갈 것인가 그렇지 못할 것인가와 관련된 아주 중요한 현실적인 문제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재림과 관계된 이단들이 가장 손쉽게 사용하는 것이 재림의 시기에 대한 지식이고, 사람들도 그런 사기극에 쉽게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재림과 관계된 이단을 구분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기준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재림의 시기에 대한 그런 주장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나 집단이 주님의 재림에 대해서 주장하면서 마치 자기가 그 정확한 시기를 알고 또 알려줄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건 모두 다 이단입니다. 100퍼센트 그렇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는 그 누구에게도 그 정확한 때를 알게 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종말의 징조는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으로써는 그 징조만으로 마지막 때를 정확하게 읽어낼 능력이 없습니다. 주님이 재림에 대한 말씀을 하신 후에 2000년이 지났지만,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가 사는 시대를 일컬어 “말세”라고 말해 왔습니다. 요즘에도 지진이나 해일, 화산폭발 같은 것이 조금 빈번해 지면 믿는 사람들의 입에서는 “말세가 가까와지고 있다”는 소리가 저절로 흘러나옵니다. 그러나, 사실 그런 자연재해들은 언제나 있어 왔습니다. 우리는 “우리 시대”라는 한 시대를 살기 때문에 현재의 그런 일들이 더 와 닿아서 그럴 뿐이지 그런 일들은 항상 있어 왔고 또 계속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바로 앞에 있는 24장 42절을 보면 주님은 재림의 때에 대해서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고 못을 박고 계십니다. 

주님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깨어 있으라”는 것 밖에 없습니다. “예비하고 있으라”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그 때를 아는 지식이 아니라, 그 때를 기다리면서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삶의 태도입니다. 그것이 종말에 대해서, 주님의 재림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직접 주시는 가장 중요한 교훈이고  사실 우리는 그것만 알면 충분합니다. 


누가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인가? 

주님은 자신의 재림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두 종에 대한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먼저 말씀하신 것은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종들, 그러니까 주인에게 무엇인가를 맡은 사람들에게 첫번째로 요구되는 것이 바로 충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충성은 우리가  신실함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종은 무엇보다도 신실해야 한다는 것이 성경전체의 시각입니다. 신실함이란 변함없는 태도를 말합니다. 겉다르고 속다른 것, 지금과 나중이 다른 것은 신실함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내 이익과 편안함과 상관없이 변함없는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바로 신실함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신실함은 주인에 대한 인격적인 헌신을 말합니다. 신실한 종은 주인에게 인격적으로 헌신되어 있기 때문에 주인이 맡긴 일에도 최선을 다하며 변함없이 일합니다. 주인이 보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그에게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이 충성과 더불어 요구되는 또 한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지혜입니다. 지혜는 분별력을 말합니다. 좋은 종은 마구잡이로 일하지 않습니다. 자기 열정에 북받쳐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일하지 않습니다. 지혜로운 종은 주인의 마음을 헤아리는 종입니다. 주인의 입장에서 자기에게 맡겨진 것들을 감당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줄 자가 누구뇨” 이것이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에게 주님이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착한 종, 선한 청지기의 역할을 잘 하려면 이것을 잘 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이 구절에서 아주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회원 여러분, 여러분은 자신이 주님의 종이고 그래서 주님께서 나에게 무언가를 맡겼다는 생각을 할 때 제일 먼저 무엇을 떠올리십니까? 혹시 주님께서 맡기신 “일”과 그 일을 위한 “능력이나 물질”을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그래서, 능력이 없고 가진 것이 없어서 주님의 일을 하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으십니까? 아마 많은 경우 그러실 것입니다. 사실 그것이 우리가 충성에 대해서 배워온 개념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사람들을 맡아...” 주인이 종에게 무엇을 맡기셨다고 말씀하십니까? 돈입니까? 양식입니까? 아니면, 일입니까? 아닙니다. 주님께서 맡기신 것은 “그 집 사람들”입니다. 주인이 종에게, 주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가장 중요한 것은 “양식”이 아닙니다. 심지어는 그 양식을 나눠주는 “일”도 아닙니다. 주님이 당신의 종인 우리에게 맡기신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의 사람들입니다. 교회의 성도들과 그 분의 형상대로 지은 사람들을 맡기신 것입니다. 그 분이 맡기신 양식, 그리고 그 분이 부탁하신 일은 목적이 아니라 도구입니다. 목적은 바로 사람, 그 분이 맡기신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 사람들을 위해서 우리에게 맡기신 “양식”을 “때에 따라 나눠 줘야”합니다. 그렇게 주님의 사람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을 가장 적절한 때에 공급해 주는 일을 통해서 주님의 생각과 마음을 헤아리며 섬기고 돌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 일을 하다 보면 우리가 한 일의 규모와 그 성공에만 들뜨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한국 교회와 성도들이 가장 빈번히 빠지는 함정이기도 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였다느니, 그 일에 헌금이 얼마나 모였다느니, 몇 명이 섬겼다느니... 마지막에는 이런 이야기들만 남게 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물론 이런 객관적인 숫자들도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숫자 때문에 그 일의 혜택을 받고 섬김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정말로 “때에 알맞는” 적절한 섬김과 도움을 받았느냐? 그 일은 처음부터 그런 것을 제공하기 위해서 계획되고 진행되어졌느냐?”하는 질문이 가려져서는 안됩니다.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들은 바로 이런 목적을 가지고 계획되고 진행되어져야 합니다. 당회, 교육부서, 전도회, 위원회, 찬양대 등... 교회 내의 모든 조직들은 그 섬김을 받는 사람이 교회 안의 사람들이건 아니면 교회 밖의 사람들이건 간에 그들에게 때에 따라 적절한 양식을 나눠주기 위해서 세워진 하나님의 “종”들의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생각해야 할 점은 교회 안에서 한 몸을 이루고 있는 우리들은 종들인 동시에 또 “그 집 사람들”이기도 하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섬겨야할 책임을 맡은 사람들인 동시에, 또한 서로에게 맡겨진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바라볼 때, 우리는 서로를 위해서 무엇이 “때에 따른 적절한 섬김인가”를 생각해야 하며, 그것을 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필요한 양식이 무엇이든지 간에 가장 적절한 때가 언제인지 생각해야 하며, 어느 정도가 가장 적절한지를 헤아려야 합니다. 우리 서로가 서로에게 제공하는 섬김은 이러한 속깊은 헤아림으로 부터 나와야 합니다. 내가 너를 바라 볼 때 그렇게 하고, 네가 나를 바라 볼 때 그렇게 한다면 교회는 얼마나 풍성하고 아름다운 곳이 되겠습니까? 모두가 얼마나 행복하고 만족하겠습니까? 이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도움과 섬김은 주는 사람이 중심이 아니라 받는 사람이 중심입니다. 내가 무엇을 주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받는 사람이 무엇을 받느냐가 중요하고 그것이 진실로 그의 필요를 따른 것인가가 더 중요합니다.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통해 교회가 그리고 성도들이 꼭 얻어야 할 양식을 얻는가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또 그렇게 중요하고 꼭 필요한 것이라면 그것은 가장 적절하게 주어져야 합니다. 때를 따라 나눠줘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열정과 만족이 아니라 이러한 적절함을 헤이라는 지혜와 충성심으로 우리에게 맡겨진 일들을 감당한다면 우리 모두가 그 혜택을 누리는 행복한 교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어서 “주인이 돌아올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인은 언젠가 돌아옵니다. 주님은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그런데 언제인지 모르니 그것이 오늘이 될 수도 있고, 내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쨋든 분명한 것은 그 날은 올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주의 종말이 오지 않아도, 내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은 바로 그 분을 만나는 순간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주인은 종을 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그 동안 우리가 걸어왔던 삶의 모든 흔적들을 살피실 것입니다.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으로 살아왔는지 말입니다. 

사실 우리가 기억해야할 정말 중요한 사실은 비유에 나오는 주인은 돌아와서야 종이 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지만, 우리 주님은 지금도 우리가 일하는 것을 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아주 큰 두려움을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으로 살기만 한다면 그 순간이 언제이건 우리는 전혀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주인이 있으나 없으나, 보고 있으나 그렇지 않으나 그 주인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심과 사랑으로 살아가는 종들은 오히려 그 날을 그 어떤 날보다 기다리고 또 기다릴 것입니다. 주어질 상급을 바라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날이 그렇게 사랑하고 신뢰하던 주인이 돌아오시는 날, 자신의 수고가 끝나는 날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항상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려고 최선을 다하기만 한다면 결코 재림이나 종말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아얘 잊고 살아도 좋을 것입니다. 

주님은 충성되고 지혜롭게 주님이 맡기신 사람들을, 주님이 맡기신 것들로 잘 섬기고 돌본 종들에게는 큰 상을 주실 것입니다. 종이니 상을 주지 않으셔도 할 말이 없겠지만 선하신 우리 주님은 종들에게 영광스러운 상을 주실 것입니다. 그 상이 바로 “주님의 모든 소유”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상이 종들에게 주어질 때, 그것이 그들의 소유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또 다시 그들에게 “맡겨지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한 고을을 잘 다스린 신하에게 열 고을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고을들을 다스릴 권세를 주시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받는다고 하면 자꾸 내가 가지는 것을 생각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러나 종이 주인에게 받는 것, 우리가 주님께 받는 것은 아무리 대단하고 영광스러운 것이라도 우리의 것으로, 우리의 소유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우리에게 맡겨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받는 복들에 대한 아주 중요한 교훈을 들려 줍니다. 그게 천국에서 주어질 것이든, 아니면 이 땅에서 주어지는 것이든, 그게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종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단지 맡겨지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받은 것들을 주님이 우리에게 맡긴 것으로 이해하고 인정한다면 우리의 삶은 아주 놀랍게 변할 것입니다. 이전에는 복을 받으면 내가 잘 해서 받은 내 것이니 모두 내 맘대로 해도 된다는 이기적인 생각에 머물렀겠지만, 이제는 내 것이 없습니다. 모두가 다 그저 맡은 것입니다. 많은 적든, 크든 작든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을 어떻게 내 맘대로, 내 욕심대로 할까를 고민하지 않고, 어떻게 주인의 마음과 생각에 맞게 관리하고 사용할까를 고민하게 될 것입니다. 회원 여러분, 여러분은 욕심을 다스리시기가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무척 어렵죠? 그런데, 이걸 한층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욕심과 바로 싸우려고 한다면 이길 수 없습니다.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다른데 있습니다. 바로 나에게 주어진 것을 내 것이 아니라 내가 맡은 주님의 것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게 재물이건 권력이건 지위나 혹은  자녀이건 간에 지나치게 욕심부리지 않을 수 있고 그만큼 그런 것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종의 자유입니다. 주인이 맡긴 일을 하는 종된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참된 자유입니다. 사람들은 소유자가 자유롭다고 생각합니다. 내 맘대로 해야 자유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내 맘대로 하면 오히려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오히려 얽매이게 됩니다. 한 번 돌이켜 보십시오. 내 맘대로 하려 했던 것이 지금의 나를 어떻게 만들어 놓았나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내가 얻은 참된 만족과 자유가 있었는지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신지 몰라도 적어도 저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제 마음대로 하려고 했을 때는 평안도 만족도 없었습니다. 제 맘대로 되는 것도 없었고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 했었습니다. 

사랑하는 회원 여러분, 자유로운 것은 소유자가 아니라 관리자입니다. 주인이 아니라 종이 자유롭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도 여전히 풍성한 자유를 모르는 것은 우리가 종이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고 알더라도 그 지식에 따라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인이 아닌 종이라는 사실을 더 온전히 인정하고 그것에 따라 사는 만큼 우리는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유만큼 더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으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마지막 날 주님의 그 영원한 다스림에 참여하여 주인의 모든 것을 맡아 다스리는 영광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 영원한 인정과 칭찬을 우리의 것으로 삼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진짜 우리가 소유하게 될 것, 진짜 우리에게 주어질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칭찬과 인정, 그 영원한 영광만이 우리의 영원하고 참된 소유로 남을 것입니다. 


악한 종은 왜 악해졌는가?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에 대해서 말씀하신 예수님은 이번에는 “악한 종”의 이야기를 들려 주십니다. 주인은 악한 종에게도 집 사람을 맡겼고, 그에게 때에 따라서 양식을 나눠주며 그들을 돌볼 책임을 맡겼습니다. 그러나, 이 종은 그 일에는 도통 관심이 없습니다. 주인이 집을 떠나자 마자 태도를 180도 바꿉니다. 그가 착는 함께 일하는 종들을 때리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집이란 교회이니 이건 함께 같은 일을 하는 하나님의 종을 핍박하는 일임에 분명합니다. 만약 평범한 한 집안의 일이라면 악한 종이라고 갑자기 함께 일하는 종들을 때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집은 교회이기 때문에 주님은 그런 일이 교회에 일어나고 있고 또 일어나게 될 것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악한 종은 함께 일해야 하고 돌보아야 할 다른 종들을 괴롭히고 핍박하게 됩니다. 이게 그렇게 하려고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는 행동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저절로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주인이 맡긴 집안 사람들을 주인이 맡긴 양식으로 돌보고 섬기는 일에 관심이 없어지면 그는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집안 사람들의 유익이 아니라 자기 유익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성경은 그가 “술친구와 더불어 먹고 마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소명을 잃어버리고 그저 자신의 타락한 욕심만을 챙기는 전형적인 모습을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소명을 잃어버리고 부르심의 이유를 상실하면 자기 욕심을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신앙생활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 이유 없이 교회를 섬길 수 있습니까? 무언가 만족이 있고 기쁨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원래의 소명을 버렸다면 그런 만족과 기쁨을 얻을 곳은 한군데 밖에 남지 않게 됩니다. 바로 자기 자신의 타락한 욕망을 채우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살든지 자기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살든지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자기가 적극적으로 원치 않아도 다른 사람을 “때리는” 일을 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본문에서 이 종이 이렇게 망가지게 된 것이 아주 단순한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단 한 가지 생각, “주인이 더디 오리라”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그가 악한 종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입니다. 그는 언제나 “주인님은 늦게 오실거야”라고 생각했습니다. 계속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결국 주인은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주인이 오늘도 내일도 모래도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그의 행동은 함께 일하는 종들을 때리고 술친구와 더불어 먹고 마시는 일에 전념할 정도로 망가져 버리고만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주인이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다시 온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 다시 오시는 시간에는 예측이라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여러분, 주님이 내일 오실 가능성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있습니다. 그 가능성 면에서는 매일이 동일합니다. 주님은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을 항상 깨어있게 하고 항상 긴장하게 하는 힘은 바로 이 사실을 아는 데서 나옵니다. 우리의 의지나 결단은 우리를 항상 깨어있게 할 정도로 강하지 못합니다. 항상 주님 뵈올 준비를 하며 거룩하게 살 수 있는 힘은 주님이 언제 오실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만 생겨날 수 있습니다. 


회원 여러분,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주님이 더디 오실 것 같습니까?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늦게 오실 것 같습니까? 혹시라도 그렇다면 그 생각부터 바꾸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게을러지게 되고, 자신만 챙기는 욕심꾸러기가 되고 맙니다. 주님이 맡기신 것으로 주님 집안 사람들을 돌보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나 자신의 만족만 위하게 되는 자리에 떨어지게 됩니다. 주님은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의 율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외식하는 자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별명입니다. 주님 보시기에 그들이 악한 종의 전형적인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영혼의 양식을 맡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이 오실 때까지 충성스럽게 집 안 사람들에게 그 양식을 나누어 주는 임무를 맡았던 종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그런 일에 관심이 없어졌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 권한과 양식으로 자신의 영광을 추구했으며, 자기 욕심을 채우기에 급급했습니다.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진리를 거부하고 진리를 말하는 종들을 핍박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화를 자초하게 된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악한 종’이 되게 하는 유혹은 교회에도 그대로 존재하고 있음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되지 않도록 경고하고 또 조심시키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 이 악한 종들이 받을 벌이 아주 무시무시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이 표현은 마태복음에서 지옥에 대한 전형적인 표현입니다. 악한 종은 단지 가벼운 처벌을 받고 끝나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그들은 지옥에 버려지고 맙니다. 

우리는 대개 천국은 믿음으로만 가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천국은 믿음 이외의 것으로는 전혀 갈 수 없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과 같은 본문들은 단순히 그렇게만 이야기하고 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주님은 어떤 잘못된 생각과 동기, 그리고 그로 인한 불충과 불순종이 지옥에 가는 이유가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항상 나무는 그 열매로만 진정으로 판단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열매는 바로 그의 평상시의 삶입니다. 그 삶 속에서 그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람을 어떤 태도로 대했으며, 그들을 섬기고 돌보는 소명을 어떻게 감당했느냐가 그 사람의 믿음의 진실성을 증명하는 유일한 증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믿음과 행위를 따로 생각합니다. 아마도 구원은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만 받는다고 하도 열심히 배워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머리 속에는 이 두 가지가 전혀 나눠져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믿음이 없는 행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그렇다고 행위없는 믿음이 구원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애초에 믿음과 그 믿음에 걸맞는 행위는 나눌 수 없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시작은 믿음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반드시 행위로 이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둘은 뗄래야 뗄 수 없는 하나입니다. 악한 종은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그의 악한 삶이 그의 믿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서 이를 갈면서 슬피 울게 될 것입니다. 


결론 : 주인이 아닌 종으로, 충성되고 지혜로운 자유로운 종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고 자기도 모르게 자기 만족과 욕심을 찾게 되는 이유는 여러가지가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이유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하나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인이 더디 오리라”라는 생각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악한 종이 악한 종이 되고, 그래서 그에 걸맞는 화를 당하게 된 이유는 거창한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생각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이런 생각은 단순히 그의 예측이 아니라 사실은 그의 바램을 담고 있었습니다. 주인이 영원히 오지 않았으면 하는, 그래서 영원히 내 맘대로 할 수 있기를 바라는 바램 말입니다. 그런 바램이 그런 생각이 되었고,   그런 생각은 그의 불충스런 삶으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이 “집 사람들을 맡아 때에 따라 양식을 나눠”줄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반대입니다. 그는 주인이 더디 올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언제든지 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여기에는 주인이 빨리 돌아오기를 기대하는 그의 바램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주인이 빨리 돌아와 자신의 부족함을 메꿔주기를 바라는 바램, 주인을 기쁨으로 맞이하고 싶은 바램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주인을 기다리면서도 기뻐할 수 있었고 그 기쁨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서 맡겨진 사람들을 섬기고 돌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인이 더디 오리라는 생각은 자신을 주인으로 여기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삶으로 이어졌으며, 주인이 금방 오리라는, 빨리 오셨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기대는 그를 계속해서 종으로 남아 충성스럽게 섬길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들이 되고, 또 그렇게 살아가시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은 그 분이 우리에게 상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상을 주시고 싶으셔서, 우리를칭찬해 주시고 영원한 영광 가운데 두시고 싶으셔서 주신 말씀이지, 그렇지 않으면 우리를 벌 주겠다고 엄포놓기 위해서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회원 여러분, 우리는 종입니다. 그래서 종으로 살아야 합니다.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이 되어 주님께서 맡기신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맡기신 것들을 가장 적절하고 효과적으로 나누어 주며, 공급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종으로 살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원하는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며, 주님의 모든 것을 맡아 주님과 함께 다스리는 천국을 섬기는 천국의 영광스런 종들이 될 것입니다. 회원 여러분, 우리는 누구나 다 한 번 살 뿐입니다. 어떻게 살든 한 번 사는 것과 한 번 죽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우리 삶에 대한 진짜 평가는 우리가 살아있을 때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맞이한 후에 하나님께서 하시게 됩니다. 그리고 그 평가만이 우리에게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할까요?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잘 사는 것일까요? 주인이 되려고 사는 것이 아니라 종으로 살려고 사는 것이 가장 지혜롭지 않겠습니까? 그 분이 우리를 종으로 부르시고 그 분의 사람과 양식을 맡기셨으니 말입니다. 


이제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의 삶이 어떠했든지 이제부터는 자신이 주인이 아닌 종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그런 마음으로 주인을 기다리고 소망하는 종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집 사람들에게 때에 따라 양식을 나누어 주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것만이 이 땅 위에서의 우리의 삶을 참으로 자유롭게 해 줄 것이며, 우리 모두를 참된 영광에 이르게 할 것입니다. 그 나라가 임할 때, 그 분의 모든 것을 맡아 영원히 다스리는 영광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철저히 종되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서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의 정신이 결코 사라지지 않는 은혜를 주시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우리 주인 다시 오시는 날이 우리 모두에게 가장 영광스러운 칭찬과 인정을 받는 날이 되게 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