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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2010년 매일성경설교 13.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본문 : 마태복음 26장 36-46절 




서론 : 고난주간을 맞이하며...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던 날을 기념하여 그렇게 부르는 날입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 사람들에게 가장 영광스러운 대접과 존경을 받았던 날입니다. 사람들은 호산나를 외치며 야자수 잎사귀를 흔들어 댔고 길에는 자신들의 옷을 벗어서 양탄자처럼 깔아 놓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입성은 그 분의 십자가를 향한 본격적인 첫 발걸음이었고, 가장 큰 고난과 고통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영광스럽고 기쁜 종려주일이지만 내일부터는 가장 엄숙하고 무거운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우리는 하루의 가볍고 들뜬 기쁨 이후에 곧바로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며 묵상하는 시간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주간이 되면 마음 속에 두 가지 감정을 품게 됩니다. 바로 감사와 죄송스러움입니다. 그 분의 고난이 가져다 준 복을 생각하면 기뻐하고 감사하게 되지만, 그 복을 위해서 그 분이 감당하셔야만 했던 그 고통스러운 짐을 생각하면 한없이 미안하고 죄송스러워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감정에서 머문다면 잘못된 것은 아닐지 몰라도 많이 부족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마음으로 주님의 일주일 간의 흔적과 말씀, 그리고 고난을 묵상하면서 그 각각의 일들이 우리의 구원과 삶에 가져다 준 온전한 은혜를 깨닫고, 나아가서 그것이 우리의 삶과 신앙에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는지를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기는 것이 그 분의 마지막 일주일을 살피면서 가져야할 가장 온전한 모습일 것입니다. 

주님의 고난과 십자가 지심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주님의 가장 은혜로운, 유일무이한 사역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주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에게 귀한 모범이 되어주기도 합니다.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우리가 성도로 살고, 예수님의 제자로 산다는 것은 그 분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 분의 뒤를 따르는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계셨던 마지막 일주일간의 주님의 모든 모습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가까이 가고,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어떻게 하셨는가를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기록입니다. 그 분의 십자가 지심은 그 분에게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어떤 것보다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고, 피하고만 싶은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또 이겨냄으로써 하나님께서 그 분에게 주셨던 십자가를 묵묵히 감당해 내셨던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수가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 그랬듯이 크든 작든, 쉽든 어렵든 우리에게도 살아가면서 져야할 우리 몫의 십자가가가 있습니다. 그 십자가를 받아들이고 감당해 내지 않는 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뜻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성도로, 또 제자로 살아가는 일은 묘연해지고 맙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그 십가가를 지는 일은 쉽지도 간단하지도 않은 짐입니다. 예수님께 그 분의 십자가가 그랬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분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 몫의 십자가를 피하지 않고 질 수 있는 방법을배워야 하고 또 연습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 

예수님은 제자들과 유월절 만찬을 함께 하셨습니다. 그 식사는 주님과 제자들의 즐거운 교제이기도 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지심의 또 다른 표현이었습니다. 그 식사에는 언제나 처럼 빵과 포도주가 제공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날 주님은 예전처럼 하지 않으시고, 손수 빵을 찟어 주시면서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라고 하셨으며, 포도주를 따라 주시면서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식사자리에서 주어진 떡과 포도주는 주님의 살과 피였습니다. 빵과 포도주가 사람의 육신을 살리듯이 사람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 영원히 살기 위해서는 주님의 살이 찟겨지고 피가 흘려져야만 했고, 거기서 흘러나온 하나님의 생명이 사람들에게 주어져야 했던 것입니다. 그 날 그 자리에서 주님은 그렇게 자신을 유월절 어린 양으로 내어주셨고, 제자들은 그 어린 양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심으로써 죄 용서가 주어짐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유월절 식사를 마치신 후,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감람산으로 가셨습니다. 그 곳에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한 마지막 기도를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감람산에 도착하자 주님은 다른 제자들은 조금 멀리 떨어뜨려 놓으시고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만 데리고 기도장소로 가셔서 그들에게 이렇게 당부하셨습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예수님은 그 동안 그 무슨 어려움을 당해도, 그 누구에게도 자신에 대해서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단 한 번도 약해지시거나 두려워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날만큼은 제자들에게 “내가 너무 고민스러워서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깨어서 여기 머물러 있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이 왜 그렇게 심하게 고민하고 고통스러워 하셨는지 자세하고 정확하게 알 길이 없지만, 그래도 분명히 알 수 있는 한 가지는, 그 분에게 있어서 십자가란 예수님을 이렇게 만들만큼 고통스럽고 무시무시한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는 죄인인 인간이 자신의 죄의 값을 치르기 위해서 당해야만 하는 당연한 형벌이 아니었습니다. 양편에 있는 강도들처럼 단순히 어떤 커다란 뜻을 위해 육체적인 생명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분의 십자가는 온전하신 성자 하나님으로서 모든 인류의 죄악과 그 죄악때문에 부어지는 성부 하나님의 그 엄청난 진노와 저주를 한꺼번에 뒤집어 쓰고, 자신과 온전히 하나이신 아버지 하나님께 완전히 버림받아야 하는 일이었고, 그것이 말할 수 없는 영적인 고민과 고통을 가져다 주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첫번째 기도

예수님은 그 고통과 고민을 가지고 기도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그게 가능한 일이라면, 이 잔을, 이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렇지만 나의 원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주님은 자신이 십가가를 지셔야만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또한 그 십자가를 지고 싶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피할 수만 있다면, 생략할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기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힘든 데도 힘들지 않은 척, 원치 않는데도 원하는 척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대신 자기 마음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을 여과없이 그대로 하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가능한 일이라면 지금이라도 십자가를 지지 않겠다고, 그렇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회원 여러분, 우리의 기도도 그래야 합니다. 저는 때로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너무 거룩한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고서 애써 우리의 본모습을 가리려는 헛된 수고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기도는 강자의 언어가 아니라 약자의 언어입니다. 충분한 자가 아니라 부족한 자의 언어이며, 독립선언이 아니라 의존의 고백이며 청원입니다. 그것도 이미 나의 모든 것을 온전하게 속속들이 알고 계시는 하나님 앞에서 행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기도는 어떠해야할까요? 우리의 기도는 철저히 약한 자, 부족한 자 그러나 자신의 힘으로는 그 약함과 부족함을 메꿀 수 없는 자가 그 부족함과 연약함을 채우실 수 있는 강하고 부요한 유일하신 분에게 드리는 철저한 의존의 고백이어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정직하게 볼 수 있다면 우리의 기도는 모두 그렇게 될 것입니다. 기도의 시작은 겸손과 정직입니다. 그 분 앞에 말 그대로 마음과 연약함을 모두 다 쏟아놓을 수 있어야 진정한 기도가 가능해 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주님의 기도를 닮기를 원한다면 우리도 그 분처럼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정직하게 모든 것들 드러내는 기도, 이미 아시는 그 분 앞에 모든 것을 쏟아놓는 그런 기도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가능하다면 십자가를 그냥 넘어가게 해 달라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아무 여과없이 그대로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그 분의 기도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분은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피땀을 쏟아 기도드렸지만,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덧붙이셨습니다. 이 기도가 얼마나 놀라운 기도인지 모릅니다. 십자가를 생략하게 해 달라는 기도, 그것은 가장 간절한 소원입니다. 절절하고 애절한 부탁입니다. 다른 방법이 전혀 없는 줄 알면서도 드릴 수 밖에 없는, 드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기도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러한 자신의 기도를 스스로 뒤집으십니다. “그러나...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그렇게 하심으로써 그 분은 자신의 절절한 소원 앞에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셨던 것입니다. 이 기도가 주님께 쉬운 기도였을까요? 아닙니다. 그렇게 고민하여 죽게될 지경까지 만든 그 문제에 대한 자신의 소원을 스스로 뒤집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일 수가 없습니다. 그게 쉬웠다면 예수님은 애초에 그렇게 기도하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분은 그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자신의 절절하고 애끓는 소원 앞에 두셨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우리의 진솔한 소원과 간청으로 시작되어야 합니다. 필요와 부족함을 아뢰는 것이 우리의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기도가 거기서 끝난다면 우리의 기도는 참으로 능력있는 기도가 될 수 없습니다. 내 원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는 곳까지 갈 때 우리의 기도는 참으로 능력있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우리가 원하는 것을 말씀드리고 그것을 얻어내는 방편으로만 이해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 일을 일어나게 하는 기도만이 능력있는 기도라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물론 기도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그게 나의 욕심대로 구하는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한 것을 구하는 것이라면 말입니다. 그러나, 기도가 참으로 기도다운 기도, 그래서 참으로 능력있는 기도가 되려면 우리의 기도에는 항상 “그러나”를 덧붙일 수 있는 공간이 남아있어야 합니다. 바로 그 여백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부분이며, 그 분의 역사가 가장 온전하게 나타나는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분명히 무척 어려울 것입니다. 내 소원이 간절하고 절실한만큼 그 여지를 남겨두는 일은 더 어려워질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 기도는 내 불완전한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될 수 있고, 내가 그 분의 뜻을 받아들이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우리에게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실수 없으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합니다.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따를 때, 결국은 나를 가장 선대해 주실 하나님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믿음이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기도에 언제든지 “그러나”를 덧붙일 수 있는 공간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두번째 기도

첫번째 기도를 마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로 오셨습니다. 제자들은 피곤함을 견딜 수가 없어서 자고 있었습니다. 졸던 베드로가 부시시 깨어났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를 바라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와 함께 잠시 동안도 깨어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고민하며 사력을 다하여 기도하는 동안에도 잠에 빠져버렸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자지 않고 깨어있으려는 의지가 없어 잠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의지와 결심이 있어도 육신을 가진 사람들이기에 잠조차 이기지 못할 정도로 약한 존재들일 수 밖에 없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을 나무라시지는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 앞으로를 위해서 한가지 교훈을 주셨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있어 기도하라”,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있어 기도하라” 제자들은 약했습니다. 우리들도 약합니다. 우리들의 의지와 소원만으로는 잠시동안 고통에 몸부림치며 기도하는 주님과 더불어 깨어있는 일조차 감당해 내기 어려울 만큼 약합니다. 그런 약함은 우리를 시험에 빠지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기도입니다. 강하다면, 시험에 빠지지 않을만큼, 마음 먹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만큼 강하다면 우리에게 기도는 필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약하기 때문에 너무 약하기 때문에 깨어 있으려면, 시험에 빠지지 않으려면 기도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것이 제자들이, 그리고 우리들이 우리 자신과 기도에 대해서 기억해야 할 중요한 교훈입니다. 우리 자신은 약합니다. 눈꺼풀의 무게도 이기지 못할 정도로 약합니다. 쉽게 영적인 잠에 빠져 심각한 시험에 빠질 정도로 약합니다. 그 약함을 극복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우리의 결단도 우리의 의지도 아닙니다. 그 능력은 기도로부터만 옵니다. 

예수님은 이제 두 번째로 기도하러 다시 기도의 자리로 가셨습니다. 그 분은 기도합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첫번째 기도와 비슷한 듯하지만 두번째 기도는 첫번째 기도와 많이 달라져 있습니다. 무엇보다다 두번째 기도에는 더 이상 “그러나”가 없습니다. 첫번째 기도에서는 “아버지께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소서”라고 기도드리지만, 두번째 기도에서는 “내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원합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첫번째 기도에서는 예수님의 소원과 하나님의 소원이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둘은 갈등의 커다란 소용돌이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기도의 무게 중심은 점점 예수님의 소원이 아닌 하나님의 뜻 쪽으로 기울게 되었고, 두번째 기도에 와서는 둘 사이의 갈등은 거의 없습니다. 예수님의 소원이 하나님의 뜻에 스며들게 되어 이제 예수님의 소원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회원 여러분, 기도란 무엇일까요? 도대체 기도는 왜 해야하는 걸까요? 기도는 어쩔 수 없이 우리가 주님께 우리가 바라는 바를 말씀드리는 형식으로 이루어질 수 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원하는 바를 얻어내는 방편으로만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그 대신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 뜻에 나의 뜻을 맞춰가고 복종시키는 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겟세마네 기도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기도에 대한 보석같은 진리입니다. 우리는 삶 속에서 항상 주님의 뜻과 나의 뜻이 부딛히는 것을 경험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참된 성도라면 이런 일로 인해서 생겨나는 고민의 중압감은 무척 클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중압감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는 상황을 바꾸는데도 대단한 능력을 발휘하지만, 그보다는 그 상황을 대하는 사람의 마음을 바꾸는데 더 크고 확실한 능력을 발휘합니다. 무엇이 하나님 뜻인지 잘 압니다. 그런데, 도저히 그 길을 가고 싶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기도합니다. 처음에는 그 길을 가기 싫은 마음이 훨씬 더 큽니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것을 앞세웁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무엇이 옳은지 알기 때문에 그 길을 갈 수 있는 힘을 달라고도 기도하게 됩니다. 그러면, 바뀝니다. 상황이 아니라 내 마음과 생각이 바뀝니다. 쉽지 않은 선택을 해야만하는 내 마음이 이상하게 편해지고 담대해 집니다. 도저히 갈 수 없던 길을 즐겁게 걸어갈 수 있게 됩니다. 모두가 다 기도가 상황이 아니라 마음을 바꾸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상황만을 바꾸는 도구라면 우리는 일이 있을 때마다 기도하고 또 기도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 상황을 붙들고 매번 끙끙대면서 말입니다. 그러다가 한 번이라도 상황이 내 소원대로 되지 않으면 낙심하게 되고 신앙은 시험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를 통해 내 마음과 생각이 바뀌고 내 마음에 든든한 평안이 찾아오면, 상황이 바뀌고 문제가 해결되면 더 감사하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담대하게 하나님 편을 들고, 그 분의 뜻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기도를 통해서 내 소원이 하나님의 뜻 속에 스며들게 되니 그만큼 하나님의 원하시는 것을 선택하는 편이 쉬워지는 것입니다. 내 소원이 아무리 강하고 간절하더라도 우리가 내 기도 뒤에 놓여야 할 “그러나”를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구할 수만 있다면, 결국 우리의 소원은 그 분의 소원의 일부가 되고, 그래서 우리는 기도를 통한 참된 승리를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

주님은 세 번째 기도를 드리셨니다. 오늘 본문은 그 기도가 두번째 기도와 꼭 같은 기도였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세번의 기도를 모두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돌아오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자고 쉬어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릴 것이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처음 기도를 시작하시기 전 주님의 마음 속에는 격랑의 소용돌이가 일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예수님의 소원 사이에 하나될 수 없을 것 같은 갈등이 거대한 소용돌이로 맴돌이 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처음 기도 후, 그 파도는 잦아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두번째 기도를 드리시는 동안 예수님의 소원은 하나님의 뜻 안으로 빨려들기 시작했고 소용돌이는 작은 파도만 남겨 놓았습니다. 마지막 기도를 드리신 예수님의 마음은 평온하고 잔잔한 호수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그 무엇도, 그 누구도 흔들거나 뒤엎을 수 없는, 견고한 잔잔함을 지닌 유리바다가 되었습니다. 

 기도하시기 전의 예수님과 기도하시고 난 후의 예수님의 모습은 완전히 딴 사람 같습니다. 조금 전에 고민스러워 죽겠다고 제자들에게 그 고통을 토로하셨던 예수님, 십자가를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게 해 달라고 고개를 땅에 박고 기도하셨던 예수님은 이제 찾아볼 수 없습니다. 도무지 그런 짧은 시간에 사람이 그렇게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변하셨습니다. 자신의 소원과 하나님의 뜻 사이에서 너무 심하게 고민해서 죽게 되었던 예수님은 이제 그 무엇으로도 움직일 수 없는 단호한 바위가 되어 하나님의 뜻 위에 서 계셨던 것입니다. 그 모든 기적이 기도를 통해 그 짧은 기도를 통해 일어났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회원 여러분, 진짜 기도의 능력이 무엇입니까? 기도가 일으키는 진짜 기적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마음의 풍랑을 잔잔케 해 주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도망치고 싶어하던 일을 향해 당당히 다가가게 해 주는 평온한 힘을 얻는 것. 이것이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진짜 이유, 그리고 기도가 일으킬 수 있는 진짜 기적입니다. 그렇게 전혀 다른 사람, 든든하고 흔들림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는 것 말입니다. 


기도... 제자도의 가장 강력한 능력

제자들은 예수님이 떠나시고 난 후, 두고 두고 이 일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자신의 소원이 부딛힐 때, 그 길을 가야한다는 것을 알지만 절대로 갈 수 없는 길이라 여겨지는 그런 길을 만났을 때, 그들은 그 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던 예수님을 기억하면서 기도하고 또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그들의 기도가 그렇게 주님의 기도를 닮아 있는 기도였다면, 그들의 기도는 멋부리는 기도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싫은 것을 싫다고 하고, 피하고 싶은 것을 피하게  해 달라는 기도였을 것이고, 자신의 원함을 아뢰는 기도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도에도 분명히 “그러나”가 들어 있었을 것입니다. 가장 간절하고 절박한 기도를 드리는 순간에도 그들의 기도 속에는 언제나 “그러나”가 새겨져 있었을 것이고,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승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회원 여러분, 주님은 우리가 주님의 제자로 또 성도로 사는 일이 얼마나 힘드는 일인지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것을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는 지는 일”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의 약함도 아십니다. 우리가 자신의 눈꺼풀의 무게도 이기지 못할만큼 연약한 존재들이라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들에게 기도라는 무기를 주셨습니다. 그 길을 가려면, 그 길에서 승리하고 흔들리지 않는 평안을 가지려면 이렇게 기도해야 하고, 또 그 기도를 통해 주님이 얻으셨던 그 능력을 얻어야만 한다고 오늘 본문을 통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기도 속에만 마음의 격랑을 잠잠케 하는 능력이 있다고, 바위처럼 든든한 속사람을 만드는 능력이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자신의 소원을 접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은 예수님께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 분은 결국 승리하셨다는 것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승리의 비결은 바로 그 분의 기도 속에서 생략되지 않았던 “그러나”에 있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기도를 가지고 싸울 때 기억해야할 가장 중요한 사실입니다. 


가장 능력있는 기도는 “믿습니다”의 기도가 아니라, “그러나”의 기도입니다. 내 소원과 내 원함으로부터 시작하지만 그 뒤에 “그러나”를 붙있을 수 있는 신뢰의 기도, 그 용기있는 기도만이 우리에게 참된 능력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 속에서 ‘그러나’가 잊혀지지 않을 때, 그리고 결국 그 ‘그러나’가 하나님의 뜻 안으로 스며들어갈 때,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가장 강한 바위같은 자들이 될 것입니다. 그 무엇으로도 흔들 수 없는 속 사람의 평안을 소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다 주님 닮은 이런 기도자들이 되게 해 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예수님을 닮아 “그러나”를 말할 줄 아는 능력있는 기도자들이 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비록 우리를 둘러 엎으려고 달려드는 수많은 시험이 있고, 연약함을 지니고 살아가면서도 언제나 주님의 편에 서고, 결국은 당당한 승리자가 되는 복을 누리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