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2010년 매일성경 설교 36. 여호와 보시기에

[사용법]


방문하시는 중에서 혹시라도 도움이 될까 적어봅니다


1. 읽기는 그냥 사이트에서 읽으시거나 마우스로 클릭하시면 다운로드 되는데, 그렇게 읽으시면 됩니다

2. 설교를 들으시려면 첨부되어 있는 mp3파일(zip파일)을 위의 방법으로 다운로드 하셔서 들으시거나

    네번째 회색상자의 작은 화살표를 클릭하시면 들으실 있습니다. , 경우에는 중간에 스톱하시면 처음부터     시작합니다. 사이트의 서비스가 거기까지 밖에 안됩니다. 죄송합니다.

3. 다녀가실 때는 짧은 댓글 부탁드립니다. ) 누구 누구 다녀갑니다. 댓글은 저만 있도록도 저장할 있습니다




본문 : 열왕기상 16장 21-35절



서론 : 성도의 삶은 어렵다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다 그렇기는 하지만 성도는 이것을 알고 인정하며 그 어떤 사실보다도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간다는 점에서는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성도가 누군인가의 정체성을 결정하고 또 성도로서의 삶을 순결하고 영광스러운 삶으로 만들어 줍니다. 그렇지만 반대로 그렇기 때문에 성도의 삶을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은 것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그것은 성도들에게 사람들 사이에 살면서도 하나님을 생각하며 살 것을 요구하며, 사람들의 눈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을 의식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사람보기에 좋은 것이 하나님 보기에도 좋다고, 사람들이 칭찬하면 하나님도 칭찬하신다고 말하곤 하는데, 이것이 때로는 맞아 떨어질 때도 있지만 정반대가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는 이 두 가지는 일치하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이런 갈등의 순간에 어느 한쪽을 택한다는 것은, 비록 우리가 성도들일지라도 그렇게 쉽기만 한 일은 아닙니다. 살아가는 자리는 사람들 사이인데 사람들이 보기에 좋은 삶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삶을 산다는 것, 그들의 인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살아간다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두 왕 이야기

오늘 본문에는 이스라엘의 세 왕이 등장합니다. 첫번째 등장하는 시므리는 반역을 일으켜 왕이 되었지만 7일천하로 끝나버립니다. 나라가 전쟁인 상황을 틈타, 그리고 왕이 술에 취한 틈을 타서 모반에 성공하고 왕위를 손에 쥐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자기 생각과는 정반대였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왕은 나라가 전쟁 중에 궁에서 만취하여 대낮부터 골아떨어질 만큼 엉망이었고 그래서 왕위만 손에 쥐면 모든 사람이 자신을 지지하고 자기 세상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달랐습니다. 왕을 싫어하면 그 왕을 죽인 자신을 지지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백성들은 시므리도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그는 모반이 실패하게 되자 궁 안에 불을 질러 자살을 하고 맙니다. 성경은 이 사람이 이런 허무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에 대해서 “이는 저가 여호와 보시게에 악을 행하여 범죄함을 인함이라 저가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로 범죄한 그 죄 중에 행하였”기 때문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시므리의 성급하고 서툰 반역을 덕분에 어부지리로 왕위를 차지한 사람은 바로 오므리였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오므리는 놀랍게도 북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한 획을 긋는 일을 한 왕이 되었습니다. 그가 왕이 되기 전에 북 이스라엘은 그야말로 서로가 죽고 죽이는 권력투쟁의 장이었습니다. 45년 동안 왕이 다섯 번이나 바뀌었는데, 한 가문에서 2대를 넘긴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는 중에도 남유다와의 전쟁은 계속되었고 북이스라엘은 혼란하고 불안한 세월을 보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북이스라엘 6대 왕인 오므리의 통치가 시작된 이후에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 때 비로소 북이스라엘에는 그래도 왕조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처음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오므리의 통치를 기점으로 해서 45년 동안 한 번도 왕조가 바뀌지 않았고, 오므리의 가문이 4대 동안 통치를 계속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그의 통치가 순탄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절반이 자신이 아닌 디브니라는 사람을 지지했고, 그들과 싸우느리고 왕이 되고나서 4년 반동안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 이후 나머지 7년 반 동안 오므리는 대단한 일을 해 냈습니다. 우선 전략적 요충지에 수도를 세웁니다. 은 두 달란트로 세멜이라는 사람에게서 산을 사고 그 꼭데기에다 성을 세우고는 그 사람의 이름을 따서 사마리아로 이름을 짓는데, 이 사마리아는 북이스라엘의 중앙지대에 있어서 사방에서 오는 적들을 쉽게 막아낼 수 있는 천연의 요새가 되었습니다. 또한 그 동안 지긋 지긋하게 계속되던 남유다와의 전쟁을 끝냈고, 그 당시 해안지대인 페니키아 지역의 맹주였던 시돈의 엣바알과 동맹을 맺어 그 누구도 함부로 넘볼 수 없는 위치를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앗수르의 열왕기에 보면 북이스라엘을 일컬어 “오므리의 땅”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그 짧은 기간 동안 오므리가 이루어낸 정치적인 업적과 성과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려주는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므리의 뒤를 이어 왕이 된 그의 아들 아합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 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오므리의 뒤를 이어서 22년간 북이스라엘을 다스리게 되는데, 그는 그 통치기간 동안 아버지가 이루어 놓은 업적을 더 견고히 하고 확장시켜 나갔습니다. 특히 그의 군대는 정말 막강했습니다. 그는 수리아와 동맹을 맺었는데, 수리아와 함께 당시 초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었던 앗수르와 전쟁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비록 전쟁에서는 패배했지만 앗수르에게도 큰 타격을 주어서 곧 스스로 철수할 수 밖에 없는 상태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 북이스라엘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국제적인 강국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오므리와 아합에 대한 성경의 평가

오므리와 아합의 통치기간은 모두 34년이었습니다. 그들의 뒤를 이었던 아하시야와 여호람까지 하면 이 가문이 북이스라엘을 다스린 것은 45년 동안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4대 동안 북이스라엘은 강성대국이 되어있었습니다. 실은 이것이 성경이 말해 주지 않는 성경의 기록 뒤에 숨겨져 있는 북이스라엘의 역사, 실제로 당시 그 땅에서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피부로 느꼈던 현실이었습니다. 카리스마와 능력이 넘치는 지도자의 등장과 그로 인한 나라의 재건, 점점 더 강해지고 부유해져 가는, 초 강대국도 함부로 넘보지 못하는 나라로 세워져 가는 이스라엘의 정치, 경제, 군사... 이런 것들이 실제로 그 당시 백성들이 피부로 느꼈던 북이스라엘의 현실이었습니다. 그들은 45년간의 혼란과 불안의 시기를 끝내고 바야흐로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분명 당시 북이스라엘에 살았던 누군가가 그 당시의 상황을 목격했고 그래서 그것을 역사적인 기록으로 남기고, 그 시기의 왕들에 대한 기록을 남긴다면 제가 위에서 소개해 드린 그런 역사적 사실을 중심으로 아주 긍정적으로 기록할 것입니다. 그 시기야 말로 북이스라엘 역사상 최고의 시기였고, 그들이야 말로 북이스라엘을 하나의 명실상부한 나라로 우뚝 세운 인물들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열왕기의 기록 속에서는 이들에 대한 그런 기록을 거의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없는 것은 아니지만 기록하더라도 그저 슬쩍 건드리고 지나가는 것이지, 그것에 대한 자세한 기록들은 찾아볼 수가 없고, 칭찬하고 높이는 것은 아얘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본문은 오므리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저가 은 두 달란트로 세멜에게서 사마리아 산을 사고 그 위에 성을 건축하고 그 건축한 성 이름을 그 산 주인이 되었던 세멜의 이름을 좇아 사마리아로 일컬었더라” 오므리가 사마리아 성을 짓고 그리고 천도한 일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뿐입니다. 그 사마리아가 북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곳이 되었는지, 그래서 그 일이 얼마나 잘 한 일인지를 전혀 적고 있지 않습니다. 그 대신 오므리에 대해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오므리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더욱 악하게 행하여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로 죄를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하여 그 헛된 것으로 이스라엘 하나님의 노를 격발케 하였더라” 칭찬은 없습니다. 공치사도 없습니다. 그저 그를 천하의 못되 먹은 인간으로 그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의 뒤를 잇는 아합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이 사람에 대한 기록은 더 심합니다. 그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이렇습니다. 조금 길지만 제가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로 아내를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숭배하고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사당 속에 바알을 위하여 단을 쌓으며 또 아세라 목상을 만들었으니 저는 그 전의 모든 이스라엘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발하였더라” 갈수록 태산이죠. 정말 첩첩산중입니다. 아합의 악행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열왕기에서 왕들을 욕할 때마다 기준으로 사용하는 악인의 모범, 여로보암의 죄도 아합이 저지른 일들에 비하면 말 그대로 새발의 피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두 왕이 한 일이 우상을 숭배한 일 밖에 없었습니까? 그들의 업적은 죄를 지은 것 밖에 없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저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업적으로만 본다면 이 두 왕은 북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영웅적인 두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런 기록은 남겨놓지 않았습니다. 열왕기가 한 왕에 대한 기록을 끝낼 때 항상 사용하는 말이 하나 있습니다. 그 말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왕들에 대해서 꼭같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먼저 20절을 보시면 오므리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오므리의 행한 그 남은 사적과 베푼 권세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그리고 아합에 대한 결론은 22장 38절에 가서야 등장하는데, 그 기록도 20절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아합의 남은 행적과 무릇 그가 행한 일과 그 건축한 상아궁과 그 건축한 모든 성은 이스라엘의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무엇일까요? 그렇죠. 바로 거기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 대답입니다. 열왕기에 수없이 반복되는 이 말은 우리를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을 찾아보려면 성경을 보지 말고 역대지략을 찾아보아라. 이 사람들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 소위 객관적인 평가를 찾으려면 그 책을 보아라. 성경은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데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라고 말입니다. 


사람들의 평가는 객관적인가?

사람들이 “객관적”이라고 말할 때, 그 객관적이라는 말의 뜻은 사람들의 생각이 들어가지 않고 그저 보이는 대로 적거나 표현했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성경은 전혀 객관적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사람들이 객관적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서는 도통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성경이 관심을 갖는 것, 성경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어떻게 보시는가? 하나님의 평가는 어떠한가?”하는 것입니다. 열왕기는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의 왕들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렇다면 그 기록은 그저 역사적으로 있었던 사실들을 그림 그리듯이 적고 있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열왕기는 오히려 그런 그림과 사진보다는 왕들에 대한 비평서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그 비평가는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역대상이란 바로 그 분의 눈으로 본 왕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대개 사람들의 평가는 업적과 성과에 따라 이루어 집니다. 그가 남긴 눈에 보이는 업적이 어떠했는가? 그가 어떤 일에서 어떤 성과를 거두었는가에 따라서 그 사람을 성공한 사람이라고 평가하기도 하고, 그저 그렇다거나 혹은 실패한 사람이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로부터 영웅이나 위인이라는 평가를 사람들은 어쨋든 눈에 보이는 엄청난 결과물을 내놓은 사람들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인류의 역사, 적어도 기록된 역사는 바로 그런 사람들이 남겨놓은 크고 작은 흔적들과 업적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보고 평가하는 눈이 이렇다 보니 모두들 그 기준에 맞추어서 살아가게 됩니다. 능력이 안되서 그렇지 능력만 된다면 좀 더 큰 업적, 좀 더 화려하고 빛나는 흔적을 남기고 싶어하고 또 남기려고 애쓰며 살아갑니다. 물론 이런 사람들의 노력 덕분에 인류의 문화와 문명은 지금까지 발전을 거듭해 왔고, 역사도 그러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문제는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들도 이런 시각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며, 주로 그런 시각에 따라서 나의 삶과 다른 사람들의 삶을 평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전부 다 그렇게 하고 있느냐? 라고 묻는다면 다행히 그렇지는 않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 개교회 전체, 그리고 교계 전체로 보면 무언가를 평가하는 잣대가 그것 하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제가 질문을 하나 드려보겠습니까? 저는 이런 말자체가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하기는 합니다만, 회원 여러분,  여러분은 “성공한 교회”, “성공한 목회자”라는 말을 들으면 제일 먼저 어떤 모습이 떠오르십니까? 혹시 큰 교회와 그 교회의 담임목회자가 떠오르지 않으십니까? 또 “성공한 사람”, “성공한 인생”이라는 말을 들으면 남보란 듯 눈에 보이는 재산과 업적을 이룬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오르지 않으십니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고 한국교회는 교회와 사람에 대해 세상이 자신을 평가하는데 사용하는 것과 꼭 같은 기준을 가지고 있고, 적어도 그 기준을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사용하고 있는 셈일 것입니다. 


이런 시각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 것들은 이스라엘 역대지략에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 그건 지극히 인간적인 시각이고 그래서 하나님의 시각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거기에만 관심을 갖고, 그것을 칭찬하고 그것으로 성공과 실패를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제가 “객관적”이라는 말에 대해서 잠깐 말씀드렸습니다만, 실은 이 객관적이라는 말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냥 생각해 보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 대다수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기준이 “객관적”이고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생각과 기준은 객관적이기 보다는 주관적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요? 사람들의 생각이 객관적이고 하나님의 생각은 주관적일까요? 일반적인 기준이 객관적이고 성경의 기준은 주관적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객관적”이라는 말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흔히 객관적이라고 하면 사진을 찍어놓은 듯이 있는 그대로를 모습이라고 생각하지만, 참으로 객관적이라고 불리려면 그렇게 겉으로 보이는 대로가 아닌 “원래의 모습, 진짜 모습”을 이야기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기준이 객관적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기준, 성경의 기준이 객관적일까요? 당연히 성경과 하나님입니다. 실은 우리의 기준이 아니라 그 분의 기준이 객관적인것이고 이스라엘 역대지략이 아니라 열왕기의 평가가 객관적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가장 주관적인 평가가 바로 가장 객관적인 평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사람 속에 숨겨진, 우리가 경험하는 일들 뒤에 숨겨진 진짜 모습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눈에 보여지는 것이 아무런 가치가 없다거나 그래서 그런 것들은 아무래도 좋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그런 것들 대로 제 자리에서 제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순전히 인간적인 영역에서도 선하고 아름다운 업적들은 얼마든지 있고, 그런 것들을 이룬 사람들은 칭찬받아야 하며 그 업적들은 인정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런 평가들이 결정적인 평가가 될 수 없습니다. 열왕기가 여러 왕들에 대한 기록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이름과는 전혀 달리 그들이 이룬 업적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들려주지 않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남긴 업적으로 평가를 받을 수 밖에 없는 왕들일지라도 그들에 대한 참되고 객관적인 평가는 바로 하나님의 평가라는 것을 이야기해 주기 위해서 입니다. 


역대지략이냐? 생명책이냐?

저는 우리 모두의 삶이 하나님과 사람들 모두가 보기에 정말 아름답고 칭찬할만한 삶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원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언제나 그럴 수는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큰 틀에서 내가 둘 중에 어떤 것을 중심으로 살아야 할지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그리고 순간 순간 그런 선택의 기로에서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며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의 눈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눈인가, 역대지략에 잠시 잠깐의 훌륭한 기록을 남길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기억 속에 영원히 아름다운 기록을 남길 것인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회원 여러분, 언젠가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여러모로 두 가지 사이에 끼어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땅과 하늘 사이에 끼어 있고 현실과 소망 사이에 끼어 있으며, 시간과 영원 사이에 끼어 있고 무엇보다도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끼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도 둘 중에서 항상 눈에 보이는 것들 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더 무겁고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야 하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어쩌면 우리가 이 땅에서 치러야 할 가장 어려운 시험인지도 모릅니다.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성도라면 반드시 통과해야 할 시험말입니다. 


결론 : 업적중심, 칭찬 중심의 삶을 팔아 하늘을 사라.

하나님께서 왕들을 평가하심에 있어서 그들의 업적에 관심이 없으시다는 것, 그래서 우리들을 보실 때에도 우리들이 남긴 업적을 보지 않으신다는 것은 우리들에게 항상 기억하고 따라야할 영적인 원리 하나를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우리가 업적 중심의 삶을 버릴 때, 그 때 비로소 하나님의 평가를 위해 살아갈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성도가 성도답게  살아가는 일을 실패하게 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업적 중심의 삶입니다. 이것은 보여지는 것 중심의 삶이라고 할 수도 있고, 또 사람들이 나에 대해 내리는 평가 중심의 삶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것들에 묶여 있는 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사람으로 살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역대지략에 번쩍 번쩍 빛나는 기록을 남길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하나님의 기억 속에, 그 영원한 열왕기에는 영광스러운 기록을 남길 수는 없을 것입니다. 성경은 오므리와 아합의 인생의 마지막 모습을 “열조와 함께 자매”라는 짧은 말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회원 여러분, 이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언젠가는 그렇게 끝이 나게 될 것입니다. 누구도 예외 없이 열조와 함께 자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그 다음에는 하나님 앞에서 결산하는 일만 남습니다. 그리고 그 결산의 결과에 따라 영원한 상급을 받고 그 영광 가운데 살아가는 일만 남습니다.

저는 예수를 믿으면서도 여전히 업적 중심의 사고방식과 다른 사람의 칭찬과 인정을 중심으로 살아가시는 분들을 보면 정말 안타깝습니다. 왜 그렇게 얽메여서 자유가 없는 삶을 살아가며 영원한 영광과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시는지 정말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회원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업적을 세우고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려는 욕망을 내려놓는 것은 힘든 포기가 아니라 영광스러운 투자입니다. 그 동안 결코 알지 못했던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를 얻기 위한 투자이고, 하나님의 영원한 칭찬과 하늘의 보화를 얻기 위한 투자입니다. 업적과 칭찬 중심의 삶은 모든 인간들에게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또 어쩔 수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세상의 사고방식으로 성도들을 속이려는 사탄의 속임수에 속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최선을 다하되 그 일의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살아갈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사람들의 평가와 반응이 어떻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갈 수 있는 특권이 있습니다. 성도인 우리에게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은 바로 이 자유와 특권을 누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회원 여러분, 이제 참된 자유와 영원한 영광의 비결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그 첫 걸음은 바로 업적과 칭찬을 향한 우리의 상식을 바꾸고 그래서 욕망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 욕망을 팔아 하늘을 사는 것입니다. 오므리와 아합에게서 배우십시오. 이 두 사람을 여러분의 반면선생으로 삼으십시오. 더 이상 그들과 같은 동기를 가지고, 그들처럼 살아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가 더 이상 역대지략의 한 줄을 더 채우기 위해 살아가지 않게 하시고 생명책에 아름다운 기록을 남기며 자유롭고 당당한 삶을 사게 하시는 은혜를 더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