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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2010년 매일성경 설교 38. 근심하고 답답하여






본문 : 열왕기상 21장 01-18절


나봇 사건의 전말

이스르엘은 아합왕의 겨울별장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 해도 아합은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겨울을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보내기 위해서 이스르엘 궁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마음에 “채소밭 하나를 가꾸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겨울에도 신선한 채소를 마음대로 먹고 싶었고 이스르엘은 비교적 따뜻한 곳이니 겨울에도 채소농사가 잘 될 것이라고 여겨졌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적당한 땅을 물색했습니다. 때마침 발견한 적당한 땅이 바로 나봇의 포도밭이었습니다. 아합은 기뻐하면서 나봇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는 당시의 왕으로써는, 특히 아합으로써는 정말 너무나 관대하고 신사적인 제안을 했습니다. “나봇, 내가 채소밭을 조금 일구려고 땅을 찾아보니 네 포도밭이 제일 적당할 것 같다. 네 포도밭을 나에게 준다면 내가 다른 곳에 더 크고 훌륭한 포도밭을 주겠다. 만약 땅을 원치 않는다면 만족할만큼 현금으로 보상하겠다.” 아합에게 이런 제안을 받는다는 것은 거의 기적같은 일이었습니다. 아합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상상 밖의 대답을 듣습니다. “왕이시여, 제가 왕에게 이 땅을 드리고 싶어도 저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물려주신 유업을 제 마음대로 거래하거나 처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금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일은 아합을 근심하고 답답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권력이나 완력을 써서 강제로 빼앗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이상하게도 그 때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봇의 포도밭을 포기할 수도 없었습니다. 원하는 땅을 차지하지 못했다는 속상함과 애석함은 점점 더 커져만 갔습니다. 아합은 급기야 침대에 돌아누워서 식음을 전폐합니다. 이 때 성경에 등장하는 최고의 악녀가 등장합니다. 바로 이세벨입니다. 이세벨은 아합이 그렇게 누워만있는 이유를 묻습니다. 아합은 어떻게 해서, 왜 그랬는지는 말하지 않고 그저 나봇이 자기에게 땅을 주기를 거절했다고만 말합니다. 이세벨은 그러는 남편이 한심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왕이라는 작자가 시골 촌부의 땅 하나 차지하지 못하고 뽄때 없게 그것 때문에 식음을 전폐하고 있으니 정말 신하들 보기에 낮뜨거운 일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반대 편에서는 나봇을 향한 분노가 불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일개 촌부가 그것도 충분히 값을 쳐 주겠다는데도 왕의 제안을 거절하다니 이것은 왕권에 대한 도전이고, 자신을 무시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이세벨은 아합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왕이 이제 이스라엘 나라를 다스리나이까?” 이 말은 “당신이 그러고도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리고는 남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바보짓 하지 말고 일어나 식사나 하십시오. 그 땅은 제가 당신에게 드리겠습니다.”


머리가 팽팽 돌아가는 이세벨, 악한 일에는 천재성을 가졌던 이세벨은 그렇게 말하는 순간 이미 그 땅을 차지할 방법, 그러면서도 자신과 아합에게는 전혀 누가 되지 않을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곧바로 편지를 씁니다.  나봇이 사는 이스르엘의 장로들과 유지들에게 어인이 찍힌 은밀한 편지를 보냅니다. “장로와 유지들은 보시오. 지금부터 내가 시키는 대로 하시오. 우선 성 안에 금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재판석에 앉히시오. 그리고, 건달 둘을 매수해서 그들에게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했다고 위증을 하게 하시오. 그리고 무리들에게 율법대로 나봇과 나봇의 자녀들을 모두 돌로 쳐서 죽이게 하시오. 좋은 소식 기다리겠소.” 그 다음에 벌어지는 일은 이 편지의 내용을 글짜 그대로 실행에 옮겨놓은 일이었습니다. 일은 정말 한 글짜도 틀리지 않고 착오없이 진행되었고 그렇게 나봇과 나봇의 가족들은 목숨을 잃었습니다. 전갈을 받은 이세벨은 아합에게 말합니다. “나봇이 죽었습니다. 가서 땅을 차지하십시오.” 그 때까지 식음을 전폐하고 누워있던 아합은 그 순간 벌떡 일어나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그 땅으로 달려갑니다. 그리고는 이제는 가져도 아무런 하자가 없는 나봇의 포도원을 ‘적법하게’ 차지하고 맙니다. 


악은 선택이다. 

우리는 이 사건 속에서 대개 아합과 이세벨의 사악함만 보기 쉽습니다. 그들의 악행에만 집중하기 쉽습니다. 그렇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일이 이런 결말에 이르기까지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들 중에서 단 하나라도 자신에게 맡겨진 악역에 충실하지 않았다면 이 일이 이렇게 끝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합과 이세벨이야 워낙 악했으니 다시 생각해 볼 필요도 없겠지만, 이스르엘 성읍에 살았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스르엘은 그렇게 큰 성읍이 아닙니다. 이스르엘 계곡 자체는 엄청나게 넓은 지역이지만 이스르엘 성읍 자체는 그렇게 크지 않았습니다. 나봇은 대대로 그 성읍에서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대대로 물려 내려오는 포도밭을 지키고 일구며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지역의 장로들이고 유지들이라면 나봇 가족의 역사와 그의 됨됨이에 대해서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나봇과 아합 사이에 있었던 그 사건과 나봇의 의로운 결정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세벨의 편지가 도착하자 마자 그저 시키는 대로 한 자도 틀림없이 실행에 옮깁니다. 건달들을 매수해서 거짓 증거를 하게 하고 모인 사람들에게 나봇과 그의 가족들을 몰살시키게 합니다. 장로들과 귀인들이라면 적어도 그 지역의 영적이고 도덕적인 지도자로서 책임과 역할을 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재판관의 역할까지 하고 있으니 그런 책임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자신들이 나서서 아무런 질문도 반항도 하지 않고 그 악한 계획을 실행하는 선두에 섰던 것입니다.  


성경이 ‘무리들’이라고 말하는 이스르엘 성읍 사람들은 또 어떻습니까? 이 사람들은 아무런 책임이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이 나봇과 가족들을 죽인 것은 두 명의 건달들의 증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건달들이 그 지역의 사람들이었다면 분명히 주민들은 그들이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그들이 그 지역 출신이 아니었다면 어찌 생전처음 보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곧이 곧대로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도 익히 자신들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는 나봇에 대한 이야기인데 말입니다. 그들이 나봇 가족을 죽인 것은 그들의 거짓 증언에 속아서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군중심리에 의해서 그렇게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 성의 장로들과 귀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의 그런 행동도 자신들의 선택에 의한 것입니다. 그 사건의 내막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리고 이 일이 지금 어떤 모양으로 포장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 의지로 그 역할을 자처하고 그 악한 일의 마지막 실행자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 이스르엘 성읍에는 “임금님이 빨가벗고 있다”고 외칠 수 있는 어린아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건의 진짜 이유는 집착이었다

나봇의 포도원 사건을 가장 짧게 요약해 보면 포도원을 빼앗기 위해 엄청난 폭력과 위선이 총동원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봇과 그의 가족들이 몰살당하고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법이 이용된 가장 더럽고 악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사건은 최악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런 엄청난 일이 벌어지게 했을까요? 무엇이 그 누구도 책임질 수도 없고 감당할 수도 없는 이런 더러움을 이스라엘 안으로 흘러들어오게 했을까요? 답부터 말씀드리면 그것은 바로 사람들의 집착이었습니다. 


처음에 아합은 그저 채소가 먹고 싶었고, 그래서 작은 채소밭 하나를 일구고 싶었습니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소박하기 그지 없는 소원입니다. 텃밭하나 가지고 싶다는데 누가 욕하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거래를 제안했습니다. 아주 후한 조건이었습니다. 게다가 왕이 제안한 것이니 거절될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거절당합니다. 바로 그 거절이 그를 이상하게 만듭니다. 세상에 채소밭을 가꿀 곳이 나봇의 포도원 밖에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자신의 말대로 더 좋은 포도원이 있다면 거기다 채소밭을 만들어도 됩니다. 그런데, 거절을 당하자 이제 다른 땅은 안중에 없습니다. 오로지 그 땅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만이 가득합니다. 성경은 그런 그의 모습을 “근심하고 답답하여 궁으로 돌아와서 침상에 누워 얼굴을 돌이키고 식사를 아니하니”라고 그리고 있습니다. 이미 그것은 채소밭을 일구고 싶어하는 소박한 소망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좋은 땅에 대한 욕심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그 소박한 소망과 단순한 욕심은 집착이 되고 있습니다. 그는 이미 한 나라의 왕입니다. 그렇지만, 그가 가진 그 땅 전부로도 만족이 없습니다. 다 없어도 그 땅만큼은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집착이 그를 이불을 뒤집어 쓰고 식음을 전폐하고 끙끙거리며 고집피우고 있는 어린아이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이세벨에게도 칩착이 있었습니다. 아합이 거절당했다는 이야기를 듣자 이세벨의 집착이 수면 위로 떠 오르기 시작합니다. 이세벨의 집착은 ‘자존심’에 대한 집착이었습니다. 물론 살짝 진실을 비껴간 아합의 이야기에도 그 원인이 있었겠지만, 이세벨은 나봇의 거절을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이해했던 것 같습니다. “왕이 이제 이스라엘 나라를 다스리나이까?”라는 그의 말도 우리에게 그것을 보여 줍니다. 그는 자존심이 상했던 것입니다. 이세벨에게 있어서 자존심은 아합에게 있어서 땅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통치자로서의 자존심이 상한 이세벨은 이제 더 이상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녀의 악함에 자존심에 대한 그녀의 집착이 더해지자 이제 이세벨이 하지 못할 일이라곤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곧바로 나봇을 죽이고 땅을 빼앗을 계략을 담은 편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성읍의 장로들은 나봇을 죽일 계략이 적힌 편지를 받자 실행에 옮깁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이들은 오랫동안 나봇과 나봇의 가족들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을 것이지만, 그리고 이세벨이 그런 편지를 보낸 이유도 잘 알았을 것이지만 일사천리로 일을 처리합니다. 한 가족 모두의 목숨을 그렇게 빼앗은 것입니다. 이 사람들을 이렇게 만든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이 사람들에게도 어떤 것에 대한 집착이 있었을까요? 네. 그렇습니다. 이들은 성읍의 장로와 유지들 이었습니다. 그 사회에서 어느 정도 위치와 재산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소위 지킬 것이 있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이들은 바로 거기에 집착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런 것들을 지키는 것 자체가, 지키려는 마음과 시도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이런 것들을 지키려는 마음이 너무나 컸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한 가족의 생명보다도 더 크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가진 것이 많을 수록, 위치가 높을 수록 그것을 포기하기가 더 어려워진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만약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사람의 생명, 그것도 아무 잘못이 없는 의로운 사람의 생명과 그 사람의 가족들의 생명까지 희생시키는 데까지 간다는 것은 그 무엇으로도 변명할 수 없는 악하기 그지 없는 집착이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직접 돌을 들어 나봇의 가족을 죽인 사람들은 바로 성읍의 주민들이었습니다. 순박하기 그지 없는 그들, 아무 욕심없어 보이는 그들이 왜 그런 폭도들로 변했을까요? 가진 것 없고, 지킬 것 없어 보이는 이들에게도 그들을 그렇게 만들어 버릴 정도로 집착할 것이 있었을까요? 당시의 평민들은 거의가 가진 것 없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은 항상 자신의 필요를 공급해 주는 누군가에게 의존되어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과의 관계가 끊어진다는 것은 곧 그 공급처를 잃어버린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성읍주민들에게는 그 공급처가 어디입니까? 그 성읍의 장로들과 귀인들이 아니겠습니까? 성읍 주민들이 집착했던 것은 바로 그들과의 관계였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먹고 사는 일, 생계였습니다. 성읍의 주님들은 모두 생계에 대한 집착에 무릎을 꿇고 전혀 죄가 없는 사람, 자신들도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과 그 가족의 목숨을 빼앗았던 것입니다. 자기 식구 먹고 살자고 남의 가족을 죽음으로 내 몬 것입니다. 


나봇의 포도원 사건은 만약 어느 단계에서 그 누구라도 자신의 욕심을 다스릴 수 있었다면 일어나지 않을 수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아합이 그저 거절을 당하고 그칠 수 있었다면, 그 땅이 아닌 다른 땅을 찾아보았다면...  물론 그런 일이야 일어날 리가 없겠지만 이세벨이 그런 아합을 설득하였다면... 또 이세벨의 편지를 받은 장로들과 귀인들이 책임을 가진 사람으로써 이세벨의 요구를 거절하거나 혹은 이세벨을 설득해 보려고 노력이라도 했다면... 만약 백성들이라도 거기 동조하지 않았다면 이 일은 성경에 기록될 필요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 속에 등장하는 그 어떤 사람도 그런 선택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저마다 자신이 가지고 싶어하고 또 지키고 싶어하는 것에 대한 집착에 빠져서 마치 한 사람처럼 가서는 절대로 안될 곳으로 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욕심이 집착이 되기 전에 다스려야 한다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가지고 싶어하는 것이 있고 또 지키고 싶어하는 것이 있게 마련입니다. 위에서 살펴 본 것처럼 그 대상은 어떤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 자체는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게 무엇이든지 그것을 소유하고 지키는 것이 마지막 목적이 되면, 집착하는 대상이 되면 그 때부터는 엄청난 일들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어떤 것이 마지막 목적이 된다는 것은 다른 모든 것은 그것을 얻기 위한 도구요, 과정으로만 받아들여지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 때부터 선악은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되어 버리고, 바로 여기서 부터 악은 우리의 삶과 우리가 사는 세상 속으로 들어올 넓게 열려진 문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엇을 원하든 그것이 일단 그 대상에 대한 집착으로 바뀌면 그 때는 이미 다스릴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립니다. 그 때부터는 집착이 나를 쥐고 흔들게 됩니다. 그래서, 집착은 집착이 되기 전에 다스리고 처리해야만 합니다. 아직은 막연한 소망일 때, 단순한 욕심일 때 다스려야 합니다. 그 때 그냥 놓아두면 소망은 욕심이 되고, 욕심은 집착이 됩니다. 그것을 소유하는 것이 중요하고, 지킨다는 사실 자체가 절대적으로 중요해져 버립니다. 물론 욕심을 다스린다는 것도 굉장히 어려운 일이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단순한 욕심은 아직은 적어도 나보다 작기 때문입니다. 아직은 나에게서 생각하는 힘까지, 악 대신 선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까지 빼앗아가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봇에게 배우라

다른 사람들은 모두 집착에 무릎을 꿇었지만, 나봇은 그 집착을 이겨낸 사람이었습니다. 욕심이 집착이 되기 전에 다스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우리에게 귀중한 교훈을 줍니다. 우리가 우리의 욕심을 다스리고 싶어하고 또 그래서 집착에 빠지지 않기를 원한다면 그에게서 배우는 신앙의 원리들은 우리에게 그 일들을 위한 실제적이고도 강력한 영적인 방패가 되어 주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나봇이 그런 어려움을 당한 것은 그가 하나님이 정하신 땅에 대한 원칙을 지키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열조의 유업을 왕에게 주기를 여호와께서 금하실지로다” 그는 자기 개인의 의견이나 의지에 대해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원칙이고 자신은 그것을 따라야 한다고만 이야기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가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내용은 바로 레위기 25장 23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것입니다. 구약성경 185페이지 인데요. 빨리 찾아서 한 번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로다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이스라엘에서는 형식적으로는 땅을 유업으로 받은 사람들이 그 땅의 주인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 주인은 그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땅을 빌려서 사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누구도 땅을 마음대로 팔아서는 안됩니다. 또 사서도 안됩니다. 주인이 하나님이시니 사람이 함부로 사고 팔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임차인이고 소작인이니 그것을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 말씀을 곰곰히 묵상하며 우리 삶의 원칙으로 적용해야 합니다. 그러면 욕심은 정복불가능한 강적이 아니라 충분히 길들일 수 있는 짐승이 될 수 있습니다. 땅은 농업이 거의 전부였던 당시의 사회에서는 가장 견고한 재산이었습니다. 가지고 싶어하고 지키고 싶어하는 모든 것들의 대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종류의 소유와 자산의 상징이요 대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종류는 달라져도 어느 시대의 누구에게나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모든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도 동일한 원칙과 표준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 영원히 소유하려고 하거나 또 마음대로 하려고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주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아니니 애초에 그럴 권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는 그저 그것을 빌려쓰는 사람이며,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은 그저 하나의 추상적이고 영적인 원칙이 아닙니다. 우리가 잘 받아들이지 못해서 그렇지 실제로 이미 우리 삶에서 경험하고 있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상가에 가보면 언제든지 이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누리며, 또 지키고 살았던 사람이라도 100년이 되지 않아서 그것을 모두 내려놓아야 합니다. 땅만 놓고 생각해 보아도 사라지는 것은 사람이지 땅이 아닙니다. 땅은 언제나 그저 거기에 있고 사람들은 그 땅에 와서 살다가 또 다시 그 땅을 떠납니다. 모두가 내 땅, 내 땅 하지만 땅은 누구도 완전히 소유한 적이 없습니다. 그 일이 계속 반복됩니다. 땅만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모든 것이 마찬가지입니까? 여러분이 지금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죽어서도 계속 여러분의 것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 있습니까? 여러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까? 


집착이 왜 생겨납니까? 그것은 우리가 무언가를 영원히 소유하고 영원히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거짓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임차인이고 임시거주자이며 원주인은 하나님이시라는 진실을 인정한다면, 그런 전제 위에서 살아갈 수 있다면 적어도 욕심이 집착으로 바뀌어 우리 삶을 쥐고 흔드는 것은 방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집착이 만들어 내는 악한 결과들도 방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나봇이 우리에게 그의 삶과 죽음을 통해 알려주는 소중한 첫번째 교훈입니다. 


나봇이 주는 두번째 교훈은 그가 땅을 자기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거기서 만족과 즐거움을 찾으려 하지 않았다는 것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무엇인가에 지나치게 욕심을 내고 집착을 보이는 이유는 단순히 그것을 영구히 소유하고 지켜보려는 욕망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러한 욕심과 집착의 진짜 이유는 그가 그 대상이 되는 것으로부터 만족과 기쁨을 찾고 또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족과 기쁨이 욕심과 집착의 진짜 이유입니다. 나봇은 목숨을 걸고 포도밭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겉으로 보면 나봇은 포도밭을 지키려는 집착이 강했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지만 아닙니다. 나봇은 포도원에 대해 집착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포도밭은 하나님의 원칙을 지키려면 절대로 양보해서는 안되는 마지노선이었지 그가 진짜 지키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만약 나봇이 자신의 소유에서 기쁨과 만족을 찾는 사람이었다면 그는 진작에 포도밭을 양보했을 것입니다. 더 크고 좋은 포도밭을 준다는데, 충분한 돈으로 보상하겠다는데 만약 소유에서 기쁨과 만족을 찾는 사람이라면 어느 바보가 그 좋은 기회를 마다하겠습니까? 


나봇을 만족하게 했던 것, 그리고 그에게 기쁨을 주었던 것은 따로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원칙을 지키며 살아가는 삶, 그렇게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삶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원칙을 많은 재물과 안전보다 더 소중하게 지켜 내려고 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을 사랑했고, 그 하나님으로부터, 그리고 그분이 주시는 은혜로 부터 만족을 얻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만족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위험을 무릅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 희귀한 시절을 살아갔지만 그 속에서도 하나님과 그 분의 은혜로 만족하고 기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만큼 참된 복을 누렸던 사람이었습니다. 


결론 : 문제는 현실이 아니라 영혼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그 분의 은혜가 주는 만족을 모르고, 그것을 누리는 일의 기쁨과 감격을 모른다면 우리는 결코 우리의 욕심을 다스릴 수 없습니다. 그 욕심이 집착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삶과 세상을 망가뜨리는 것도 결코 막을 수가 없습니다. 회원 여러분, 우리 생각처럼 욕심과 집착은 현실적인 부족함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욕심과 집착의 진짜 출처는 바로 우리 영혼의 허전함입니다. 영혼이 비어 있지만 무엇으로 채울지 모르는 인간이 아무 것으로나 자신의 영혼을 채우려고 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바로 욕심이고 집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의 허무와 그 허무의 다른 표현인 욕심과 집착은 실은 하나님으로, 그 분의 은혜로 나를 가득 채워달라는 우리 영혼의 요구이며 간절한 부탁입니다. 우리는 우리 영혼의 그러한 안타까운 외침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무언가에 대해 지나치게 욕심이 나거나 혹은 집착에 빠지려 할 때마다 이 진리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 내 영혼이 비어있구나. 하나님과 그 분의 은혜가 나를 채우고 있지 않아서 이렇게 불만스럽고 기쁨이 없는 것이구나.”라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혜를 찾으십시오. 그 두 가지로 여러분의 영혼을 가득 채우기 위해 노력하고 애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오히려 욕심과 집착은 우리를 참된 영적인 만족과 기쁨으로 인도하는 안내자가 되어 줄 것입니다. 


회원 여러분, 우리는 모두 나그네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은 그저 빌려서 사용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러기 위해 먼저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진실을 삶의 가장 근본적인 진리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또한 욕심과 집착은 눈에 보이는 것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영혼의 허무함과 공허함에서 나오는 것임을 항상 기억하시고 욕심이 커지고 집착이 생겨나려 할 때마다 주머니가 아니라 영혼을 채우는 지혜를 연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하나님과 그 분의 은혜로 채워주시는 그 지극한 복을 알고 누리게 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