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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2010년 매일성경 설교 43. 이런 일을 당하여도

[사용법]


방문하시는 중에서 혹시라도 도움이 될까 적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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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레위기 26장 14-26절




서론 : 가중처벌

사람들이 모두 천사같이 착하다면, 그렇게 다른 사람의 진짜 유익만 생각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면 몰라도 사람들이 어울려서 살아가는데는 법이라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사람들의 이익은 항상 충돌하게 되어 있고, 그것의 조율과정에서 법이 없다면 사회와 개인의 생활은 엉망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법이 이러한 조율 기능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강제성을 띨 수 밖에 없고, 그 강제성은 법을 어긴데 대한 처벌로 확보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런 처벌에 대한 규정이 없다면 아마도 법은 강제성을 잃고 효력을 잃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처벌의 원칙 중에서 “가중처벌”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요건을 만족시키는 범죄의 경우 그 처벌이 일반적인 범죄의 경우보다 무겁게 주어진다는 원칙입니다. 이 가중처벌은 어떤 특별한 죄를 저지른 경우에 적용되기도 하지만, 동일하거나 혹은 비슷한 범죄를 반복해서 저지를 경우, 그리고 다른 종류의 범죄라도 한 사람이 반복해서 저지를 경우에 적용되기도 합니다. 실제로 우리나라 법을 살펴보면  특정강력범죄의 처벌에 관한 특례법 제3조(누범의 형)는 특정강력범죄로 형을 받아 그 집행을 종료하거나 면제받은 후 3년 이내에 다시 특정강력범죄를 범한 때에는 그 죄에 정한 형의 장기 및 단기의 2배까지 가중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 누범가중처벌법을 두고 찬반양론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초범의 경우에는 무지나 혹은 실수에 의해서도 죄를 범할 수 있어도 재범부터는 그런 정상참작이 되지 않기 때문에 무거운 형을 구형하고 있는 것이 법률적으로 상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신 율법도 하나의 법으로 본다면, 그 법을 어길 때는 형벌이 있고, 그 벌이 적용되는 것을 보면 가중처벌법을 적용하고 계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런 내용을 담고 있는데요, 오늘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가중처벌법”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본문의 개요와 하나님에 대한 질문

레위기는 가만히 살펴보면 일종의 법전과 같은 모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레위기의 처음부터 25장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룩하게 살기위해서 지켜야할 것들을 말씀하신 후에 26장 전체에 걸쳐서는 그 법을 신실하게 잘 지켰을 때 주어질 복과 그 법을 어겼을 때 주어질 형벌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계신데, 오늘 본문은 이 형벌에 속하는 부분 중 앞쪽 절반에 해당합니다. 오늘 본문이 속해 있는 형벌에 대한 부분을 전체적으로 본다면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습니다. 첫번째로 무엇보다도 율법을 어겼을 때 주어질 형벌에 대한 내용이 율법을 지켰을 때 주어질 복에 대한 내용의 두 배가 됩니다. 그리고 두번째로 그렇게 선언되는 형벌들은 네 단계로 되어 있는데, 가면 갈수록 더 심해지고 무거워집니다. 마지막 단계에 가서는 정말 읽기도 거북할만한, 정말 그렇게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까지 하셨을까 하고 생각할 정도로 잔인하고 엄청난 형벌이 예고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본문을 통해 만나게 되는 하나님은 정말 차갑고 칼 같은 분이십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한 죄에 대해서는 정말 가차없이 무자비한 벌을 내리시는 분이십니다. 점점 더 무겁고 큰 벌을 내리시는 엄하기 그지없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런 모습은 우리가 성경에서 읽으면서 은혜를 받았던 하나님이 모습은 아닌 것 같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소개할 때, 사랑이 많으시고 인자가 풍성하시며 오래 참으시고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특히 모세가 두 번째로 돌판을 받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자신에 대해서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라고 말씀하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하나님을 진짜 하나님으로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냥 둘 다 하나님의 모습이니 맘대로 하다가 혼나지 말고 말 잘들어서 복받으며 살자고 하기만 하면 될까요? 하나님을 한 손에는 당근을 들고, 다른 손에는 채찍을 들고 계신 조련사로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성경은 실제로 하나님을 그렇게 상반된 두 가지 모습을 지닌 분으로 이야기하고 있을까요? 겉으로 보면 그렇게 보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하나님은 벌 주는 일을 더 좋아하시고 그 일에는 에누리가 없는 분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진짜 모습은 그런 모습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하나님도 그런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아니, 오늘 본문은 오히려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고 인자하시며 화내기를 더디하시는 분이라고, 자녀들을 신실하게 사랑하시는 분이시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가중처벌법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오늘 본문에서 시작되는 율법을 어긴데 따르는 형벌들은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네 단계로 되어 있고 갈수록 더 무거워지고 무서워집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점점 더 무서워지시고 엄격해 지십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하나님의 형벌의 이런 모습이야 말로 하나님이 얼마나 그 분의 백성들을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는 진짜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혹시 “형벌이 사랑이라고?”라고 하실지도 모르지만 하나님께는 이러한 형벌이야 말로 사랑입니다. 그 과정이나 목적이 모두 하나님의 형벌은 곧 사랑이라고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의 형벌은 그 분의 사랑일까요? 단계별로 무거워지는, 점점 더 부담스러워지는 그 형벌이 왜 그 분의 사랑을 드러내고 있을까요? 


우리가 법을 어기면 벌을 받게 되는 시점이 언제입니까? 원래 벌은 법을 어긴 순간 주어져야 합니다. 원래는 위법과 처벌 사이에는 시간간격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법을 어긴 경우 처벌 전에 반드시 재판이라는 과정을 거칩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위법과 처벌 사이에 시간간격이 생깁니다. 이런 시간 간격은 원래 인간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필요에 의해 생겨난 것입니다. 범죄사실을 확실히 밝히고 심사숙고하여 그에 맞는 형벌을 정하기 위해서, 실수와 오판을 피하기 위해서 생겨난 것이 바로 재판입니다. 그렇지만 재판장이 하나님이시라면 이런 재판은 필요없습니다. 그 분은 죄가 저질러지는 순간 가장 정확하게 그것에 완벽하게 맞는 형벌을 정하시고 당장에 집행하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원칙대로라면 그렇게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모두가 다 현장범이고 현행범이니까요. 그런데, 하나님이 형벌을 내리시는 방식을 보면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모르실리가 없는데, 그리고 판단하는데 시간이 걸리실리가 없는데 하나님은 당장 벌을 내리시는 경우가 없습니다. 


14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시는 것이 이스라엘이 실수로, 우발적으로 죄를 저지른 순간, 그 죄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습니다. 그 분의 인도를 받으려 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명백한 명령이 있는데도 지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규례를 무시하고 결국에는 하나님의 법을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싫어하고 혐오하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그렇게 가볍게 여기고 깨뜨려 짓밟아 버립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때 처음으로 움직이십니다. 처음으로 그들에게 벌을 내리십니다. 이 순간까지는 그냥 보고만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성급하십니까? 무자비하십니까? 그 때까지 하나님은 얼마나 무시를 당하시고 얼마나 큰 모욕을 당하셨습니까? 그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하셨을까요? 백성들에게 자비를 베푸셨고, 그들을 오래 참고 계셨습니다.  노하기를 더디하셨습니다. 그렇게 그 어떤 면에서도 더 이상 그대로 놓아둘 수 없다고 여기셨을 때 비로소 첫번째 형벌을 내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벌을 사랑입니다. 긍휼이며 자비입니다. 오래 참으심 끝에, 더디 노하신 끝에 마지막 순간에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의 형벌이 단계적이라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의 증거가 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형벌만 심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만큼 하나님은 점점 더 잔인하고 무자비해지시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회원 여러분, 각 단계의 형벌은 그 단계에서 저질러진 불법에 적당한 형량으로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원래 처음부터 모든 형벌이 다 쏟아부어진다고 해도 절대로 과하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마지막 단계의 벌을 내리신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마지막 형벌이 너무 과한 것이 아니라 처음 형벌이 너무 가벼운 것입니다. 처음 형벌은 하나님께서 적절한 벌을 터무니 없이 가볍게 해 주신 결과인 것입니다. 


얼마 전에 연평도 사태가 벌어졌을 때, 진돗개 하나라는 경계태세가 내려졌습니다. 진돗개는 셋부터 하나까지 있는데, 진돗개에서는 하나가 가장 높은 것이라고 합니다. 경계태세의 각 단계는 그 명령이 내려질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기준으로 해서 내려지게 됩니다. 하나라는 것은 진돗개 내에서는 가장 심각한 수준이었던 셈입니다.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벌이 네 단계라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단순히 벌이 심해진다는 것을 뜻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형벌이 심해지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가 점점 더 악화되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벌도 심해지고 무거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형벌들은 실상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적인 현주소를 알려주는 하나님의 사인인 셈이고,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들이 경험하고 있는 고통과 어려움을 통해 자신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그리고 심각하게 벗어나 있는지를 판단할 수 있었고 또 그만큼 빨리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형벌이 미리 예고되고 있다는 점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 모든 형벌들을 미리 말씀해 주신 것일까요? 본문을 보면 하나님의 형벌이 이 단계에서 저 단계로 넘어갈 때마다 비슷한 말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표현은 조금씩 다르지만 요약해 보면 “너희가 그런 일을 당하고도 돌이키지 않으면...”이라는 말입니다. 


요즘 저는 참 고민이 많습니다. 저희 집 둘째 아이 때문인데요. 형하고 얼마나 다른지 모릅니다. 너무 주관도 강하고 고집도 세서 도무지 말을 들으려고 하질 않습니다. 하루도 소리를 지르고 얼굴을 붉히지 않고는 넘어갈 수가 없습니다. 다른 부모들도 거의 마찬가지겠지만, 저도 아이가 너무 말을 안듣고 제 맘대로 하려고 할 때마다 “너 계속 그래라. 한 번 두고 보자.”라고 으름장을 놓습니다. 물론 거의 효과가 없죠. 참다 못해 종아리를 때립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 다음에 또 그러면 다음에는 열 대다.” 여러분 제가 왜 이런 말을 합니까? 열 대를 때리고 싶어서 일까요? 아니면 때리기 싫어서 일까요? 저를 비롯한 부모들이 이렇게 뻔한 대사를 사용하는 이유는 모두 같습니다. 거기서 멈추라는 겁니다. 더 나가지 말고 거기서 그만 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어긴 일에 대한 형벌을 네 단계로 정하시고, 그것을 미리 말씀해 주시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벌을 주고 싶으셔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시기 싫어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고, 제발 거기까지는 가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자녀에게 형벌을 위한 형벌은 없다

제가 오늘 설교를 하면서 내내 형벌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제가 그렇게 한 이유는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고통과 어려움을 그렇게 이해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회원 어려분, 자녀에게 형벌은 없습니다. 적어도 단순히 잘못에 대한 책임을 지게하고, 고통을 당하게 하기 위해서만 주어지는 그런 형벌은 절대로 없습니다. 자녀에게 주어지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형벌이 아니라 징계입니다. 징계는 벌을 주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징계의 목적은 제 자리로 돌려놓고 더 나은 곳으로 가게 하려는 것입니다. 26장 40절 이하의 말씀이 그것을 증명해 줍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심한 징계를 말씀하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그 할례받지 못한 마음이 낮아져서 죄악과 형벌을 순히 받으면 내가 야곱과 맺은 내 언약과 이삭과 맺은 내 언약을 생각하며 아브라함과 맺은 내 언약을 생각하고 그 땅을 권고하리라” 이것이 징계 안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진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진짜로 하고 싶어하시는 말씀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다시 하나님의 백성을 용서하시고 받아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옛 언약, 그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고 그 언약대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무시무시해 보이기만 하고, 가차없어 보이기만 하는 징계의 선언 속에서 하나님은 바로 그러한 당신의 진심을 자녀들에게 전하고 계신 것입니다. 


결론 : 신앙은 진심의 문제다

사랑하는 회원 여러분, 신앙은 결코 어떤 행동을 해서 복을 받고, 그 행동을 하지 않아서 복을 빼앗기고 벌을 받게되는 것에 관한 일이 아닙니다. 신앙은 진심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진심을 알아가고 그 진심을 알아드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진심에 설득되어져 가는 과정이 바로 신앙입니다. 신앙 안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을 닮은 사람으로 영적이고 인격적으로 성장해 갈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진심을 알아차린 자녀만이 그 아버지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고 그래서 그 아버지를 닮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가중처벌법은 결코 잘못에 대한 형벌을 더 심하게 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자녀들을 윽박질러서 무서워서 억지로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기위해서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가중처벌법은 더 이상 나아가서는 안된다는, 더 이상 그리로 가서는 안된다는 하나님의 강력한 스톱사인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해야 하시기 때문에, 율법을 지켰을 때 주시는 복에 대한 약속 뿐만 아니라, 언약을 깨뜨렸을 때 주시는 징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신실하셔야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바램처럼 우리가 무엇을 하든 우리를 무한정 그냥 놓아두실 수는 없습니다. 그 분은 어느 순간엔가는, 반드시 움직이셔야 할 때는 움직이셔야만 하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럴 때라도 미리 말씀하신 징계를 내리시는 그 순간에도 그 분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오늘 본문이 언약을 어긴데 따르는 징계를 이야기 하고 있기에 그 부분만 다루었지만 징계는 꼭 그래서만 찾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겪는 고통과 고난 중에는 순전히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순전히 믿음의 연단을 위해서 주어지는 욥의 고난과 같은 것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종류가 무엇이 되었든 그런 것들이 우리 삶을 찾아올 때 그 일을 통해서 자신이 지금 있는 위치를 되돌아 보고 조금이라도 더 제 자리로 자신을 되돌려 놓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그 고통은 충분한 유익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회원 여러분, 하나님의 가중 처벌법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를 위한 오래참으심이고 더디 노하심의 증거입니다. 그것을 미리 알려주시는 하나님의 진심을 헤아리시기 바랍니다. 그 속에서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도록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애타는 마음을 헤아리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가중처벌법 속에 담긴 하나님의 진심, 그 사랑을 헤아릴 때 우리는 그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도 오히려 더 깊은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을 것이고, 그래서 가지 말아야 할 곳으로 가고자 하는 헛된 욕망을 더 쉽게 내려놓을 수 있을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여러분의 부모님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나서 부모님과 함께 엉엉 울어본 경험이 있으십니까? 혹시 그 때의 여러분의 마음이 기억나십니까? 자녀가 부모와의 관계 속에서 자녀로서 진짜 철이 들기 시작하는 것은 부모의 손에 들린 매를 보고, 그 속에 담긴 사랑을 보며 눈물을 흘릴 수 있을 때가 아닌가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받는 자녀에게는 징계가 없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징계는 오히려 자녀됨의 가장 큰 증거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도라면, 그 분의 자녀라면 크고 작은 징계를 완전히 면제받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려고 해서도 안됩니다. 혹 여러분 중에는 과거에 이런 저런 징계를 받았거나 지금 징계를 받고 있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앞으로 징계를 경험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시기가 언제이든, 그 징계가 무엇이든 간에 우리는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비통한 감정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절망하고 좌절해서도 안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있다고 여겨지 때, 우리는 그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나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나의 아버지이시며 나는 그 아버지의 자녀로 아버지의 징계를 받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 사랑을 확신하면서 제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전보다 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녀의 자리로 말입니다. 


혹 징계를 경험하더라도 그 징계 때문에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마시고, 오히려 더 확신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그런 참된 자녀들이 되어서, 상이나 벌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심을 알기에 기꺼이 그 분을 섬기고 따르는 성숙함에 이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