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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2010년 매일성경 설교 8. 잃으면 얻으리라





본문 : 마태복음 16장 21-28절



서론 : 투자와 소득의 비교로 투자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재테크’라는 말이 있습니다. 국적이 불분명한 이 정체불명의 단어는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의 무척 중요한 화두가 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우리 사회가 점점 더 눈에 보이지 않는 참된 가치보다는 돈이라는 물질적 가치에 더 많은 관심과 힘을 쏟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사회의 건강도라는 측면에서 보거나 혹은 특히 신앙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런 현상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사회나 신앙이나 공히 그것을 올바르게 유지하는 것은, 돈으로 대별되는 물질이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이고 정신적인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이 재태크란 소극적으로는 어떻게 지출을 줄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방법과 관련이 되어 있겠지만, 적극적으로 보면 어디에 투자해서 얼마만큼의 이익을 남길 것인가 하는 방법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재테크를 잘 하려면 너무나 당연한 것이지만 투자대비 이익을 잘 계산해야 합니다. 어디에 얼마만큼 투자했을 때, 얼마만큼의 수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또 어느 곳에 투자하는 것은 혹시 오히려 큰 손해를 보게 되는 일은 아닌가 하는 것을 잘 계산하고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재태크를 한답시고 오히려 가진 것까지 다 까먹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돈의 운용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인생의 운용에 있어서도 우리는 이 손익계산을 잘 해야 합니다. 나의 인생을 어디에 무엇을 위해서 투자할 것인가를 제대로 파악하고 결정하는 일은 그 어떤 재테크나 투자의 기술보다도 더 중요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 인생 전체를 가지고 남는 장사를 할 것인가 아니면 망하는 장사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직접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본문은 정말 정말 중요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질문 : 예수님은 누구신가?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은 예수님과 제자들 모두에게 아주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바로 거기서 예수님과 제자들은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황제의 도시였습니다. 도시 자체가 티베리우스 황제를 기념하기 위해서 헤롯 빌립에 의해서 재건되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황제는 일종의 신이었고, 그 도시는 그 신을 섬기는 중심지였습니다. 그런데 황제는 부와 권력의 상징입니다. 그런 점에서 가이사랴 빌립보는 부와 권력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세속적인 가치관의 상징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곳에서, 그런 세속적인 가치관의 다스리고 있는 한 복판에서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보고 누구라고 하더냐?” 제자들은 대답합니다. “세례 요한이라고도 하고, 엘리야, 예레미야라고도 하며 어떤 사람은 선지자 중의 한 명이라고도 합니다.” 이제 질문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닌 제자들 자신의 생각을 묻는 것으로 바뀝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는 거기서 세상에 존재하는 예수님에 대한 가장 완벽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돈과 권력이 주인이 되어 있고, 황제가 신이 되어 있는 그 곳에서 황제가 아니라 예수님을 주요, 구원자요,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했던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베드로에게 복을 선언해 주시며 기뻐하셨습니다. 그 신앙고백 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시면서 기뻐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이 고백은 아직 참된 의미에서의 신앙고백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이 고백은 그저 지금까지 주님께서 보여주신 멋지고 화려하며 승리하는 모습만을 생각하면 한 대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고백은 이제까지 그 어떤 주님에 대한 고백보다도 더 정확하고 온전한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제 적어도 명목상으로나마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제대로 아는 사람이 이 땅에 생겨나기 시작했음을 알려주는 아주 중요한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예수님의 수난 예고

오늘 본문은 “이 때로 부터”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것은 지금부터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시간이 될 것을 예고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이전에는 자신의 고난과 죽음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말씀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 분이 보여주신 모습은 탁월한 선생, 하나님의 능력을 지닌 승리자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자신의 모습을 통해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제대로 알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그런 계획은 성공하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에 대한 정확한 신앙고백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때가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말하는 “그리스도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이 정말로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줄 때가 온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때로부터” 예수님 자신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서 명확하게 말씀하시기 시작하셨던 것입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는 정말 큰 충격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예수님에 대한 고백은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구원자이시니까, 하나님의 능력을 지닌 하나님의 아들이시니까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고 다시 다윗 시대의 영광을 되찾게 해 줄 것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도 그 덕 좀 보겠다는 그런 의미였습니다. 말은 같아도 전혀 방향이 달랐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이 주님의 그런 말씀을 받아들일리가 만무합니다. 드디어 우리의 베드로, 이번에도 용감하게 나서서 주님을 만류합니다. 지금 우리가 보는 성경에는 “간하여”라고 번역되어 있는 말은 개역개정판에서는 “항변하여”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사실 그 번역도 많이 약합니다. 원래의 의미는 “꾸짖다, 비난하다”라는 의미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항변하며, 그 분을 꾸짖고 비난했던 것입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그런 일은 주님께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을 걱정하는 듯한 이 말은 사실은 예수님을 위한 걱정 뿐 아니라 또 다른 베드로의 속마음을 담고 있었던 것이고 그래서 성경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꾸짖었다고 증언했던 것입니다. 그 말과 함께 베드로에게 돌아선 예수님은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불벼락을 내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꾸중하신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일이 아닌 사람의 일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목사니까 친구들이 거의 목회자들입니다. 제 친구들과 이야기를 해 보면, 목사가 되었던 과정 중에 겪었던 일들이 거의 비슷합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부르십니다. 그는 고민하며 기도하다가 그 부르심을 받아들입니다. 이제 가족들에게 알릴 차례입니다. 그래서 부모님에게 먼저 말씀드립니다. 그러면, 대개 열이면 일곱, 여덟은 극심한 반대를 경험합니다. 부모님들이 절대로 안된다고 극구 말리시기 때문입니다. 나쁜 마음에서 그렇게 하는 것일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 길을 가는 것이 어렵고 힘들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말리시는 것입니다. 

베드로에게는 분명히 위에서 말씀드린 현실적인 기대가 무산될지도로 모른다는 사심과 더불어 예수님을 걱정하시는 마음도 아주 강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성경을 읽으면서 베드로에 대해서 쉽게 비난할 수 있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면 누구든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 동안 3년의 세월을 주님만 보고 따라왔습니다. 가족도 돌보지 않고서 말입니다. 그건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정작 주님은 이제 곧 자신이 사람들의 배척을 받고 죽음을 맞이하게 될 거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하늘이 무너지는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모든 기대가 단 번에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었고, 큰 배신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좋아하고 존경하는 주님이 죽는다니 그것을 어떻게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있겠습니까? 누군가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이 갑자기 “나, 이제 조금 있으면 죽으러 갈꺼야. 엄청 고통스러운 길로 가고 결국은 죽게 될거야.”라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그 사람을 뜯어 말리지 않겠습니까?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사랑했던 베드로는 이런 이유이건 저런 이유이건 간에 그런 예수님을 뜯어말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탄이 교묘한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탄은 나쁜 것만 이용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의 사랑과 진심까지도 자신의 도구로 이용합니다. 물론 그럴 때 그들의 마음 속에 끼어드는 이기심은 더 좋은 사탄의 도구가 되지만 말입니다. 주님이 베드로의 말에 베드로가 아닌 사탄을 나무랐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사탄이 베드로의 그런 마음을 이용하여 주님을 넘어지게 하려고 하기 때문에 주님은 베드로가 아닌 사탄을 직접 꾸짖으신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우리를 걱정해 주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힘들어 지고 어려워지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사랑할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들의 진심을 의심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 사탄의 시험은 그러한 사랑하는 사람들의 사랑과 나를 향한 염려를 통해 나에게 찾아오기도 합니다. 그들은 나를 아끼는 마음에서 말합니다. “하나님도 네가 고생하는 것 바라지 않으실꺼야.”라고 말하는 그들의 우리를 아끼는 마음은 진심입니다. “하나님도 네가 행복한 것을 더 좋아하셔.”라는 그들의 말 속에는 가식이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하나님이 아닌 사람만을 생각한 것이라면 우리는 그 말을 따라서는 안됩니다. 소명은 우리가 부득불 해야할 일입니다. 주님이 자신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서 “꼭 그렇게 해야하는 일”이라고 말씀하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걱정시키고, 그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은 우리 자신에게도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만약 그것이 우리가 반드시 따라야 하고 꼭 가야만 하는 길이라면 우리는 그 길을 가야 합니다. 

반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힘든 길을 가고, 손해보는 삶을 사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 없어 보이실지도 모르지만 제 자식들은 굳이 목회자로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되겠다고 하면 말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건 하나님의 생각이고 그것을 따르는 것이 더 옳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회원 여러분, 우리의 진심이 하나님께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맡기신 소명을 막는 역할을 하게 해서는 안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사랑이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되지 않겠습니까? 그게 옳은 길이고 바른 길이라면 사랑하는 사람이 그 길을 가려고 할 때, 내 감정과 생각이 어떠하든지 간에, 지켜보는 안타까움을 감당하면서 뒤에서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저는 그것이 바로 신앙이고, 신앙인으로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져야 할 짐이라고 생각합니다. 충성심이든 사랑이든 성도는 인간적인 것만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 뒤에는 더 크고 중요한 하나님의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에 대한 가르침 그리고 질문,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지금 제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로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비록 예수님과 동상이몽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인 것만은 어김없는 사실이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제자들의 생각을 교정해 주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에 대한 진실을 알려주실 수 밖에 없으셨습니다. 진실을 말해 준다는 것은 항상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특히 사랑하는 사이일수록 더욱 더 그렇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제자들이 앞으로도 자신을 따르려면 반드시 알아야말 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자기부인, 자기 십자가 지기... 이것은 최악의 상황에서는 목숨을 요구할지도 모르는 위험천만한 일이었습니다. 아니 사실 제자들에게는 결국 주님을 따르는 일이 그것을 요구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계속 주님을 따르는 제자로 살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고, 아니 적어도 그러겠다는 결단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해 주실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 사실 이것은 주님이 이미 해 오셨고 그렇게 하실 일들이었습니다. 주님은 성자 하나님이셨지만 스스로 인간이 되셨고, 인간으로 살아가셨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분은 하늘영광을 내려놓으셔야만 했고, 하나님으로 대접받는 일을 포기하셔야만 했습니다. 온 우주를 지으시고, 그 안의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어마어마한 분이셨지만 작고 여린 인간의 몸 속에 자신을 제한하셔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자신을 부인하셨습니다. 또한 그 분은 결국 “자기 십자가”를 지실 것입니다. 죽을 필요도 없고, 결코 죽으실 수 없는 분이 죽음에 자신을 내어주실 것입니다. 정말 그 분에게는 죽음에 굴복하는 일은 죽기보다 싫은 일이지만 기꺼이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성부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라면 스승의 길을 가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스승의 길이란 바로 자기를 부인하고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자기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지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제자로 살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예수님께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시고, 자신의 유익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바로 “목숨을 잃어서 목숨을 얻는 방법, 잃어버림으로써 더 풍성하게 얻는 하나님의 방법”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잃어버리지 않고 얻는 방법을 생각합니다. 댓가를 치르지 않고 많은 것을 얻는 방법을 연구합니다. 그리고, 더러는 그 방법이 성공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영혼과 생명에 관한 한, 영생에 관한 한, 잃어버리지 않고, 적어도 정당한 투자를 하지 않고 얻을 수 있는 방법이란 없습니다. 목숨을 버려야 목숨을 얻습니다. 생명을 투자해야 생명을 얻습니다. 사실 그런 점에서 외람되지만 예수님은 손해보는 장사를 하신 것이 아니라 남아도 남아도 그렇게 풍성하게 남기는 법이 없는 그런 장사를 하셨던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9절을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아담은 자신의 불순종 때문에 자신이 죽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뒤를 이어 태어나는 자신의 모든 후손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자기 힘으로 버리지 않고 얻으려 하다가 그렇게 모두를 죽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반대였습니다. 그 분은 버리셨습니다. 온 삶을 헌신하시고, 생명을 버리셨습니다. 그랬더니 모든 사람이 살게 되었습니다. 그 분을 그런 분으로 믿는 모든 사람, 아담 때문에 죽었던 모든 사람들이 다시 살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얻은 것이 없을까요? 그 분은 우리를 위해서 버리기만 하셨을까요? 아닙니다. 그 분도 얻으셨습니다. 정말 엄청난 것, 최고의 것을 얻으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 6절부터 11절을 보면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버리심과 비우심에 대한 가장 유명한 구절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여기서 부터가 중요합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예수님께서는 비우시고 버리심으로써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얻으셨습니다. 가장 높여지셔서 하나님께 가장 높은 영광을 돌릴 수 있으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우리가 믿는 사람으로써 머리를 써야하고 계산기를 두드려야 할 지점이 여기입니다. 빨리 계산해야 합니다. 지금부터 내가 할 장사가 남는 장사가 될 것인지 손해보는 장사가 될 것인지 계산해 보고 빨리 결론을 내고 투자할 것인지 투자를 그만둘 것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회원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내게 없으면 절대로 안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목숨 아닙니까? 영혼이고 생명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얻기 위해서 살아가야 할까요? 무엇을 얻을 수 있는 장사를 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투자이겠습니까? 바로 목숨이고 영혼이고 생명입니다. 만약 이 세 가지를 영원히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럴 수 있는 사업이 있다면 모든 것을 투자해서라도 참여해야 합니다. 그 기회를 놓치면 안됩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또 한 가지를 먼저 저울질 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그 생명을, 주님 안에서 얻는 영생을 온 천하보다도 중요하고 큰 것으로 생각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주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즐거움과 기쁨을 온 세상이 주는 기쁨과 만족보다 더 크고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것이 아무리 내 영혼을 살리고 영생을 얻는 투자방법이라고 할지라도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투자방법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얼마나 무거운 말씀인지, 얼마나 부담스러운 말씀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제자들에게, 그리고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부담을 주시려고 하신 말씀이었을까요? 우리를 짓눌리게 하려고 주신 말씀일까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누누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주님은 우리에게 실패하지 않는 투자방법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영생을 얻는 투자방법, 예수님 안에서 그 풍성한 기쁨과 만족을 얻을 수 있는 가장 비밀스런, 세상은 도무지 알 수도 인정할 수도 없는 투자방법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 말씀이 시도도 해 보지 못할 정도로 부담스럽게 여겨지는 이유는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자꾸 땅의 입장에서만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짧은 우리 인생의 입장이 아니라 영원이라는 입장에서 바라보면 이 말씀 속에 담긴 주님의 깊은 사랑과 은혜를 느낄 수 있습니다. 

죽음만큼 공평한 것이 없다고 합니다. 누구나 죽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땅에서 얻고 누리는 것들이란 결국 그 죽음과 함께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고 맙니다. 내가 아무리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위해서 내 삶의 모든 것을 투자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의 가치와 의미는 내가 이 땅에 머무는 동안만 유지될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끝나버릴 삶이 아니라 끝나지 않는 삶, 항상 부족한 삶이 아니라 그 부족함 가운데서도 항상 풍성한 진짜 삶을 살게 해주는 영생을 위해서 눈에 보이는 삶을 투자하며 살아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안타까우셔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진짜를 놓치고 가짜를 붙들고 살아가는 우리가, 영원을 내려놓고 순간을 붙들고 살아가는 우리가 너무 안쓰러우셔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원을 순간보다, 하늘의 즐거움을 땅의 만족보다 소중하게 생각할 수 있다면 주님의 진심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이 주님의 제자들에게는 글자 그대로 죽음을 의미했지만 오늘을 사는 대부분의 우리들에게는 죽음이 아닌 삶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자기욕심과 욕망을 내려놓을 수 있는 삶, 순결과 정결을 위해서 마땅히 감당해야할 짐을 지는 삶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사회처럼 원칙과 정직이 죽어버린 듯한 사회, 돈이 전부가 되어버린 듯한 사회에서 그렇게 산다는 것은 때로는 정말 죽는 것처럼 어려운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목숨을 위해서, 영생을 위해서 사는 방법이라면, 목숨을 얻기 위해서 목숨을 투자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면 우리는 그렇게 해야만 합니다. 최소한 그렇게 해 보려고 안깐힘을 써야 합니다. 막무가내인 상사 밑에서 먹고 살기위해서 꾹꾹 참고 버티는 심정으로 내 맘같지 않은 불의한 사회 속에서이지만 의롭게 살아보려고 인내하며 견디어야만 합니다. 영원한 월급날과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보너스를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보응하시는 하나님을 기대하라

우리가 믿음하면 떠올리는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이란 것이 무엇인가를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라고 정의내리고 난 후에 이어지는 구절들에서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그 믿음을 가지고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실제의 증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중에 모세에 대한 내용을 보면 이렇습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모세는 공주의 아들됨을 포기했다고 합니다. 애굽의 왕자로 누리는 즐거움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고난받는 것을 더 즐거워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다고 합니다. 정말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로서는 도저히 접근할 수 조차 없는 믿음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의지가 강해서도 아니고 타고난 성품이 그런 것을 더 좋아했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모세 속이 아니라 모세 밖에 있었습니다.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이는 상 주심을 바라 봄이라” 하나님께서 주실 상.... 그것이 바로 그 이유였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받는 모욕과 괴로움을 애굽의 모든 보물보다도 더 가치있는 보물로 여길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그것을 하나님의 영원한 상급, 그 귀하고 가장 무거운 상급을 받는 유일한 종자돈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12장으로 넘어가 보면 11장의 결론을 내리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우리가 우리의 믿음의 눈을 고정시키고 바라보아야 할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런 이유나 목적없이 그 모든 고난과 고통들을 참아내신 것이 아닙니다. 그 분이 그렇게 하실 수 있었던 것은 “그 앞에 있는 즐거움” 때문이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부끄러움을 이겨내면 주어질 그 영원한 즐거움을 훤히 보셨기 때문에 그 모든 일들을 감내하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계속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이 또한 이러한 영원한 투자의 원리를 모르면 우리를 협박하는 소리로 듣게 되고 그래서 두려워할 수 밖에 없습니다. 때로는 마지막 때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에게 많은 유익이 되기도 하지만 그건 신앙을 위한 진짜 건강한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목숨을 잃음으로써 얻는, 그 영원한 투자의 원리를 가지고 살아가려는 제자들에게 주시는 격려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행한대로 갚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모두 성도입니다. 그렇지만 성도라고 해서 모두 꼭 같이 살아가지 않습니다. 백이면 백 다 다르게 살아갑니다. 만약 이렇게 살든, 저렇게 살든 마지막에 주어질 그 영광스럽고 영원한 상이 똑같다면 무엇 때문에 우리가 남들보다 더 정직하고 순결하게 살아가야 합니까? 나의 영광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야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는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라는 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구원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그랬던 것처럼 상 주심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기쁨을 생각해야 합니다. 다른 삶의 모습에 대해서 전혀 다른 크기와 무게로 주어질 그 영광스럽고 영원한 상을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은 구원에도 인센티브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걸 바라보고 실망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참고 견디면 영원히 보상해 줄테니 기대하면서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결론 : 믿음의 눈을 열라

사람을 보면 실망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을 보고, 믿는다고 하면서도 적당하게 사는 사람들을 보면 우리는 실망하게 됩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그런 사람들의 모습이 아닙니다. 상을 바라 보아야 합니다. 심은 대로 거두게 될 그 풍성한 열매를 기대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회원 여러분, 이 땅에서 영원을 위해서 심고, 하늘 영광을 위해서 투자한 사람들에게 주님의 심판의 날은 두려움의 날이 아니라 축제의 날이 될 것입니다. 영광의 날이 되고 가장 완전하고 영원한 주님의 즐거움에 참여하게 되는 첫째 날이 될 것입니다. 


참으로 가치있는 일치고 세상에 쉬운 일이 없습니다. 번듯한 대학하나 들어가려고 해도 밤잠 아껴가며 노력해야 합니다. 고시 하나 패스하려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달려들어야 합니다. 하물며 영원한 영광을 얻는 일이라면, 주님의 기쁨을 상으로 얻는 일이라면 어떻겠습니까? 자기를 부인하는 것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 그것은 분명 믿지 않는 사람들은 질 필요가 없는 꽤 무거운 짐입니다. 그러나, 그 짐을 지는 것은 영원하고 영광스러운 상을 위한 가장 확실한 투자가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를 영원히 잘 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진심을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영생을 얻고 영광을 누리게 하시려고 우리에게만 알려주시는 예수님의 투자방법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이제부터라도 버림으로써 영원히 풍성히 얻는 그 특이한 투자방법에 남은 인생을 투자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 만나는 그 날이, 우리 모두에게 가장 즐겁고 영광스러운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 날이 모세가 바라보았던 그 상, 주님께서 바라보셨던 그 즐거움에 참여하게 되는 영원한 날들의 첫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 날의 영원하고 풍성한 열매를 소망하면서 그 날을 위해 현재를 투자하시는 가장 현명한 믿음의 투자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