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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2010.07.07.수요예배 - 또한 기뻐하느니라

[사용법]


방문하시는 중에서 혹시라도 도움이 될까 적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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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다녀가실 때는 짧은 댓글 부탁드립니다. ) 누구 누구 다녀갑니다. 댓글은 저만 있도록도 저장할 있습니다







본문 : 로마서 5장 1-4절



서론 : 태초의 죄의 정체

우리가 잘 알다시피 처음 아담과 하와가 저지른 죄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죄였습니다.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그 치명적인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열매를 따 먹었던 것이 그들의 죄였습니다. 우리는 그 때 그들의 마음 속에 무엇이 자리잡고 있었는지 잘 압니다.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그들의 욕망의 뒤편에는 바로 교만이라는 것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교만을 억누르고 그래서 자신의 악한 욕망을 다스려야 했던 그들은 그 교만을 억누르는데 실패함으로써 결국은 하나님처럼 되려는, 결코 성공할 수 없는 시도를 하게 되었고, 결국 그들에게는 죽음이라는 영원한 형벌만이 남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원죄를 교만이라고 부릅니다. 그렇습니다. 원죄는 교만입니다. 아담과 하와 그리고 그 이후에 세상에 오는 모든 인류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죄는 바로 하나님처럼 되고자 했던 아담과 하와의 교만이 바로 원죄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뒤를 밟는 우리들의 교만이 바로 원죄입니다. 

그런데, 실은 이 교만 뒤에는 더 깊은 숨겨진 원인이 있습니다. 교만의 뒤에서 그 교만을 부축이며, 실제로는 그 교만의 진짜 이유가 되는 더 깊고 근본적인 죄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불만입니다. 원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피조물로서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자리에서, 정해주신 역할을 감당하며,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현실적이고 또 영적인 은혜들로만 만족하면서 살아가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뱀의 교묘한 질문에 속아 자신의 상태와 위치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게 되었고, 그 위치와 상태를 벗어나고자 시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자신의 위치와 상태를 벗어난다는 것을 결국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 위에는 하나님 밖에 계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그런 시도는 필연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정면도전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과 그 분의 은혜를 자신의 모든 것으로 삼아 만족하며 살아야 했던 그들이 스스로 자신의 하나님이 되어서 자신이 자신의 모든 것이 되어 스스로 만족하려고 했던 것, 그것이 바로 모든 인류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처음 죄였으며, 그 근원에는 불만이라는 어찌보면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그 사소한 죄가 자리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 즉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습니다. 믿음만이 우리에게 의롭다하시는 은혜를 받는 손이 되어주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 복음되게 하고, 그 복음이 우리를 구원얻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이유입니다. 다른 의의 길, 다른 구원의 방법은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만큼은 절대로 변할 수 없습니다. 의와 구원에 관한 한 믿음 밖에 다른 길이 없다는 것, 믿음이 전부라는 것이 성경의 교훈입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의와 구원에 있어서 믿음이 이렇게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면 성도가 이 믿음에 대해서 궁금해 해야 하고 물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만약 그게 전부라면 그게 무엇인지 모르면 하나도 모르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기 때문입니다. 갑작스럽지만 여러분에게 질문 한가지를 하겠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믿음 중에도 구원얻게 하는 믿음이 따로 있을까요? 아니면 그냥 믿기만 하면, 예수를 믿는다고 이야기하기만 하면 그 믿음은 다 의롭게 하고 구원얻게 하기에 충분한 믿음일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배워오셨고, 또 어떻게 생각하며 믿고 계십니까? 이에 대해서 여러분 각자의 대답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이런 저런 대답이 아닙니다. 성경이 그것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어떻게 이야기할까요? 성경은 우리로 구원얻게 하는 믿음이 따로 있다고 말하고 있을까요? 놀랍게도 그렇습니다. 성경은 우리를 구원얻게 할만한 믿음은 따로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말씀이 그런 본문들 중의 하나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었은즉...”이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의롭다하심은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잘 살펴보면 “그러므로”라는 단어로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은 이 구절이 독립된 구절이 아니라 앞에 이미 설명한 내용의 결론이며 요약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믿음, 우리에게 의롭다하심을 얻게 하는 믿음이 어떤 믿음인지 알고 싶으면 앞으로 돌아가 보라는 표시가 되어 줍니다. 그 안내에 따라 잠시 4장으로 가보겠습니다. 4장 전체는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은 사람, 그래서 믿음의 조상이 된 사람으로 소개하면서 그렇다면 그에게 의롭다하심을 얻게 한 믿음이 어떤 믿음인가를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4장이 소개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은 한마디로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라는 구절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18절 이하에서 그것에 대해서 풀어서 설명해 주는 부분을 보면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라고 말하며 19절 이하에서는 이것을 다시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 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아니하고 믿음에 견고하여 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것을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라고 설명하면서 결정적으로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은 첫 사람입니다. 그래서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이 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그는 어떤 믿음을 통해서 의롭다하심을 얻었습니까? 오늘 본문은 그 믿음에 대해서 무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몇 가지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첫째, 그의 믿음은 하나님을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자 처럼 부르시는 분으로 믿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부활의 하나님, 생명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 그의 그런 믿음은 마음 속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자신이나 사라나 생산능력이 완전히 없어진 것을 알고도 하나님께서 자녀를 주실 것을 믿어 의심지 않았던, 아니 오히여 더 믿음이 강해져 갔던 아주 실제적인 믿음이었습니다. 세째, 그의 믿음은 단순히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나 그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시리라는 기대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에 뿌리박은 믿음이었습니다. 그 약속이 영원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의 약속이었기에 결코 의심하지 않았던 그런 믿음이었습니다. 네째, 그래서 그의 믿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그런 믿음이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다른 믿음이 아니라 바로 이런 그의 믿음을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이러한 칭의의 원리는 아브라함 뒤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 그와 같은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고 말합니다.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자녀를 낳을 능력이라는 관점에서 아브라함과 사라는 죽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서 생명이 태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과 사라는 그것을 믿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고 우리의 의를 위하여 부활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사실을 믿습니다. 이 두 믿음은 원리상 같은 믿음입니다. 죽음 가운데서 생명이 나타남을 믿는 것,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에 아무리 불가능해 보여도 그 약속에 의지하여 더욱 굳게 믿는 것 그것이 이 두 믿음의 본질적인 공통점입니다. 그래서 이 두 믿음은 같은 결과, 그러니까 의롭다하심을 가져다 주게 되는 것입니다. 


의롭다하심의 결과들 1 : 하나님과의 화평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하는 바는 크게 두 가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아브라함의 믿음과 같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었다는 것과 둘째는 그 결과 우리에게 주어지는 엄청난 유익과 능력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 첫번째 유익이 바로 “하나님과 누리는 화평”입니다. 우리가 죄 가운데 있을 때,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화평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고 풍성한 은혜를 전혀 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하심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은 후에는 그 모든 상황이 완전히 뒤바뀝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그래서 그 분이 주시는 모든 은혜를 받아 누릴 수 있으며 결국에는 영원한 구원을 얻게 됩니다. 죄를 가지고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그 죄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게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죄란 원래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할 영광을 자신이 받거나 혹은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상태나 행동을 가장 참기 어려워하십니다. 가장 큰 모독으로 여기시며 결코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죄를 해결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결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우리를 더 이상 죄인으로 남아있게 하지 않습니다. 그 의는 우리를 의인, 그러니까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는 사람들로 만들어 줍니다.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하나님으로 부터 주어지는 최고의 은혜, 완전하고 풍성한 은혜를 기대하며 또 누리며 살아가게 됩니다. 


의롭다하심의 결과들 2 :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기뻐함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가져다 주는 두번째 유익은 바로 우리의 즐거움, 우리의 기쁨입니다.  2절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 하느니라” 이 말은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상태가 되고, 그것이 우리에게 기쁨을 가져다 준다는 뜻입니다. 로마서 3장 21절을 보면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의 우리들의 상태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우리는 원래 아무리 해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모두가 죄인이었고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오기 전에도 인간은 일반적인 의미의 선한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들에 불과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인간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는 무능력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상관없이 행하는 일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믿음은 우리에게 우리가 결코 만들어 낼 수 없는 의로움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었습니다. 의가 화평을 가져오는 이유는 의라는 것 자체가 근본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기를 원하며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저 사람은 참 의롭다”라고 말할 때, 그 말은 무슨 뜻입니까? 그 것은 “저 사람은 꼭 해야할 일을 반드시 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거나, 꼭 해야하는 일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반대로 “불의한 사람”이라고 말하구요. 그래서 의라는 것은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꼭 해야하는 것을 하는 올바름”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가장 올바른 상태, 그래서 인간을 가장 의롭게 하는 상태란 어떤 상태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모든 영광과 최고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상태일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야 말로 모든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유일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우리를 그런 상태로 되돌려 주고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하심을 받았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의로운 상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상태가 된다고 해서 우리가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앞에서 말씀드렸던 아브라함의 믿음 이야기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고 하셨을 때, 그의 안에서 보신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는 현실을 보고 불만스럽게 여기며 불신에 빠진 것이 아니라 성경이 그러한 현실 때문에 오히려 믿음이 강해졌다고 표현할만큼 하나님의 언약을 온전히 믿었습니다. 모든 색깔은 보색을 배경으로 했을 때 가장 돋보입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에 가장 적대적인 환경, 그 믿음을 가장 많이 흐려지게 할 수 있는 환경일 때 믿음은 원래의 자기 색깔을 가장 강하게 드러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런 믿음이었습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상황, 도저히 믿음을 가질 수 없게 하는 환경이었지만 그는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원래 그가 믿음이 좋은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믿음이 가능햇던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면서 하나님의 무슨 약속이든 지키시는 신실한 분이시고 또 지키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분의 언약이라면 오히려 의심하는 것이 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은 모든 소망을 거스르며 그 성취가 불가능하게 보이게 했지만, 그는 그런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그 분의 약속을 믿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분의 약속이었기 때문에 거기에 자신의 믿음을 더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전적으로 신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 신뢰의 대상과 그 대상이 약속하는 것이 자신의 기대를 완전히 만족시켜줄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는 일입니다.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의 신뢰란 반쪽짜리 신뢰이며 억지 춘향식의 신뢰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신뢰 안에는 의심이 끼어들 수 밖에 없으며, 불안함이 자리잡을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꾸 불안해 하고 여전히 자기 갈 길을 스스로 찾으려는 노력을 그만둘 수 없는 이유는 우리에게 이런 신뢰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아브라함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상태에서도 그 믿음이 오히려 강해졌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은 하나님의 약속을 반드시 이루실 분이라는 것을 결코 의심치 않았으며, 그 분이 이루실 약속이 자신의 기대를 충분히 만족시킬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다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이런 믿음은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을 향한 만족, 그리고 그 분의 은혜를 향한 만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혜에는 결코 부족함이 있을 수 없다는 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또 로마서 4장 20절은 아브라함의 이러한 믿음에 대해서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아니하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의 믿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고 그 분으로만 만족하는 그 믿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린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통해 가장 큰 영광을 받으실까요? 우리가 무엇으로 그 분께 온전한 영광을 돌리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바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하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아브라함처럼 하나님 한 분만으로 충분히 만족하며, 그 분이 이루실 언약만으로 만족하게 될 때, 그 만족 때문에 그 분을 향한 신뢰가 약해지지 않을 때, 하나님은 그 믿음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우리는 흔히 성도의 삶을 “믿음으로 사는 삶”혹은 “믿음 가운데 사는 삶”이라고 표현합니다. 아주 적절한 표현입니다. 그런데, 이 말의 진짜 의미는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이 말을 아브라함의 믿음의 빛에 비추어 생각해 보면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혜로만 만족하는 삶, 그래서 그 은혜에만 의지해서 사는 삶”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장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최선을 다해서 붙들려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떤 것에 가장 크게 의지하며 살아갑니까? 또 무엇을 가장 가치있다고 여깁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가장 큰 만족을 주는 것입니다. 그게 사람이든, 물건이든 혹은 돈이나 명예, 지식이나 세상의 무엇이든 간에 우리에게 가장 큰 만족, 가장 완전한 만족을 준다고 생각하는 것을 가장 귀하게 여기며 그것에 의지하고 살아갑니다. 믿음이란 바로 하나님을 그런 대상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 분만이 나를 참되고 온전하게 만족시키실 수 있으심을 전심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을 가장 사랑하고, 그 분을 가장 좋아하며, 그 분을 가장 열심히 붙들고, 가장 의지하며, 그래서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믿음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런 믿음이야 말로 하나님을 참으로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나의 가장 보배로운 분으로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믿음은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이 믿음은 우리에게 그 믿음이 바라는 것을 가져다 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의심치 않을 때, 그 믿음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모든 은혜가 임하게 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해 주는 유일한 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 믿음은 하나님께 가장 큰 영광이 되는 동시에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선하시고 완전한 모든 은혜가 임하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가장 큰 만족과 기쁨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믿음을 통해서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동시에 기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의롭다하심의 결과들 3 : 환란 중에도 즐거워함

이제 마지막으로 가 보겠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가져다 주는 세번째 유익은 바로 “환란 중에도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을 지키는 것,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은 어느 시대, 어느 환경의 성도에게나 참으로 힘겨운 일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 누구에게나 전혀 예외가 없습니다. 성경은 이런 어려움을 이상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는데에 아무런 갈등이나 어려움이 없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믿음을 지켜내려는 싸움 자체가 없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사실 이 환란, 신앙인으로 살기 위해, 그리고 믿음과 믿음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감당해야할 시련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참된 신앙을 가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또 그런 신앙을 가지는데 실패하고 있습니다. 그 싸움을 싸울 엄두조차 내지 못하면서 말입니다. 그 시련이 어렵고 힘들며 또 고통스럽고 손해를 가져오기 때문이죠. 그런데 성도 여러분, 만약 이런 환란, 그러니까 신앙 때문에 생겨나는 고난이나 생활하면서 만나게 되는 어려움들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고통을 당하고, 손해를 보며, 오해를 받으면서도 오히려 기뻐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런 방법이 알고 있다면 성도의 사는 이야기가 많이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신앙역사는 달리 기록되지 않겠습니까? 그 때는 그런 환란들과 싸워볼만 해지고, 또 이길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먼저 고난과 핍박에 대한 성경적인 시각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은 이런 것들을 특별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예외적인 상황으로 보지도 않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섭리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로 보지도 않으며, 하나님의 통제 밖의 일로도 보지 않습니다. 물론 그것 자체로는 바람직한 일도, 선한 일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항상 피해야만 하고 겁내야만 할 어떤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환영하라고 까지 말합니다. 또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그 분의 허락하심 가운데서 일어나는 일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기 위한 재료가 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이야 말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최고의 환경이며, 하나님의 능력이 가장 명확하고 영광스럽게 나타나게 하는, 하나님께서 승리하시는 방법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고난과 고통에 대한 성경적인 시각입니다. 문제는 현실을 이유로 이것을 우리의 믿음의 내용으로 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진짜 능력은 이런 진리에 우리의 믿음을 더할 때 생겨납니다. 현실만 보면 결코 믿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눈을 조금만 돌리면 믿을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그렇게 절대적으로 생각하는 현실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누가 그 현실을 움직여 가십니까? 하나님 아니십니까?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그 현실이 우리의 믿음 앞을 가로막도록 내버려 두실까요? 하나님께서 모르고 그러실까요? 아니면 그런 일이 끼어드는 것을 막지 못하셔서 일까요? 아니죠. 그렇다면 왜 그러시겠습니까? 그것은 그것을 통해서만 이루어내실 수 있는 목적이 있고, 그것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더 크고 놀라운 유익이 있어서가 아닐까요? 우리의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우리가 현실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게 되고, 그래서 현실을 이유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고난에 대한 성경적인 사고방식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이러한 믿음의 시각을 온전하게 허락해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3절은 말합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할 뿐 아니라 우리가 환란 중에도 즐거워 하나니...” , “우리가 환란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성도 여러분 이것이 바로 믿음이 가지는 진짜 놀라운 능력입니다. 믿음의 진짜 능력은 우리 앞에 놓여진 장애물을 치워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나에게 가져다 주는 것도 아닙니다. “환란 중에도 기뻐하는 것...” 그러니까 장애물이 있어도, 부족함이 있어도 결코 기쁨을 잃지 않게 하는 것, 그렇게 모든 것들 넘어서는 기쁨을 갖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의 진짜 능력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믿음을 주셨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환란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게 해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믿음을 통해서 기뻐할 수 있는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을 앎이로다” 하나님이 왜 환란을 주십니까? 왜 어려움과 고통을 주십니까? 바로 우리의 인내를 이끌어 내시기 위해서 입니다. 성경은 “끝까지 견디는 자만이 생명의 면류관을 얻는다”고 말씀합니다. ‘생명의 면류관’ 그러니까 영광스러운 구원이 인내의 상급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인내가 믿음의 참됨을 증명하는 유일한 시금석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을 위해서 우리에게 인내를 발휘할 수 있는 환경, 그러니까 환란을 주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참된 믿음은 인내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어렵고 적대적인 환경, 믿음으로 인한 고통과 손해들을 얼마나 잘 견디는가하는 것이 그 사람의 믿음의 본 모습을 드러내는 유일한 기준입니다. 성경적으로 보면 인내란 결코 억지로 꽉꽉 참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를 악물고 분노하면서 견디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참된 인내란 불평이나 환멸감 없이 참고 견디는 것을 말합니다. 어렵고 힘든 환경, 믿음으로 인한 손해와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통해서 오히려 성도다움을 회복해 가는 것, 그 안에서 믿음을 더 온전히 해 가는 것, 그것이 인내의 참된 의미입니다. 본문을 보면 인내는 연단을 가져온다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연단이라는 말은 원래 “증명된 성품”, “시험을 통과한 성도의 인격”이라는 의미입니다. 만약 우리가 억지로 분노와 오기로 참는다면 그 일은 우리에게 성도다운 인격을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그런 일을 통해서 남는 것은 우리 속에 생겨나는 원한과 그로 인한 망가진 자아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또한 이러한 성도의 거듭난 인격을 성령의 열매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 안에 성령님께서 내주하시고 계시며, 그가 성령님의 소욕에 잘 순종한 결과로 맺혀지는 열매가 성도다운 인격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자기 안에 이러한 성령의 열매가 맺혀가고 있음을 확신하게 될 때, 성도는 자신이 얻은 구원에 대해서 더욱 깊고 확고한 확신을 얻게 되고 그 안에서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열매는 성령님께서 내 속에 충만히 거하신다는 증거가 되며, 그 성령님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보증으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성도는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고난이란, 그리고 환란이란 그저 어려운 일이 아니라 믿음을 증명해 내며, 그 믿음의 열매를 맺고 그래서 구원의 더 깊고 견고한 확신에 이르게 해 주는 가장 좋은 환경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성도가 이것을 믿을 수 있는 이유는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환란을 통해 주시기로 약속하신 은혜임을 확실히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환란 중에서도 결코 원망하거나 악심을 품지 않고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약해지지 않고 오히려 견고해 지는 것입니다. 


결론 : 믿음은 만족과 기쁨이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모든 종류의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믿음은 아주 특별한 종류의 믿음을 말합니다. 이 이야기가 이상하게 들리시겠지만,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의롭다여기심을 얻게 하는 믿음에 대한 진리입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아브라함이 가졌던 것과 같은 종류의 믿음이 있어야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의롭다하심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 믿음이 우리에게 은혜받을만한 자격이 되어준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렇게 오해하시면 안됩니다. 이 믿음,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며 그 약속을 주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며, 그 분이 약속을 통해 주실 은혜로 충분함을 알고 거기에 만족하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가진 자는 참된 만족이 어디서 오는지 알기에 더욱 더 하나님께, 그리고 그 분의 약속에 의지합니다. 거기서 자신의 만족을 구합니다. 그 은혜를 바라봅니다. 그래서 이 믿음은 결코 공로나 자격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어디 물과 양식이 있는지 아는 사람이 그 곳을 찾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목 마른 사람이 컵에 물을 따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채우고 만족시키는 일이니 그것을 일이라고, 공로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런 믿음은 하나님의 충분하심을 받아들이고 삶으로 표현하는 것이니 하나님께 가장 큰 영광이 되기도 하는 아주 기이한 믿음입니다. 이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가장 큰 영광과 영광과 인간의 가장 큰 유익은 일치점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만족입니다. 그리고 기쁨입니다. 하나님으로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만 만족할 때 누릴 수 있는 기쁨입니다.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믿음은 우리에게 반드시 만족과 기쁨을 가져다 주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기뻐하는 기쁨, 환란 중에도 기뻐하게 하는 놀랍고도 풍성한 기쁨을 가져다 주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기쁨은 하나님이, 그 분의 은혜로 우리 삶을 채워주심으로써 누리는 그 이유가 땅에 있지 않은 만족으로 부터 오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사탄의 속임수는 변한 적이 없습니다. 모양과 말은 달라도 사탄의 모든 유혹은 우리가 하나님과 그 분의 약속으로 만족하고 기뻐하는 상태에서 멀어지게 하고 떨어지게 하는 유혹입니다. 불평과 불만이라는 불신앙으로 떨어져서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서 만족을 찾게 하려는,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망가뜨리려는 시도들입니다. 우리의 만족도 방해하고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일도 실패하게 하려는 속임수들입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은 하나님과 그 분의 약속의 은혜 밖에 없음을 알고 또 믿어야 합니다. 나에게 반드시 그 믿음이 있어야 함을 깨닫고, 그 믿음을 추구하며 그 믿음을 위해서 싸워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경쟁자들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나야 말로 너를 만족시킬 수 있다고, 네가 원하는 만족을 줄 수 있다고 거짓으로 우리를 향해 달려드는 수많은 영혼의 대적들이 있습니다. 그것들과 싸우지 않고는 참된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지킬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 그 믿음을 통해서만 계속 공급되는 은혜와 그 은혜를 통해오는 만족과 기쁨도 불가능해 지며, 나의 삶은 하나님을 향한 불신앙으로 채워져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모든 비극과 죄악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만 만족하는 믿음을 가질 때 비로소 해결될 수 있습니다. 애초에 모든 죄란 바로 그 만족이 깨어졌을 때 찾아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나 하나만으로, 내가 너희에게 주는 그 온전하고도 충분한 은혜로만 만족하며 살아가라는 하나님의 초청에 응답하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터진 웅덩이를 파고 그 웅덩이를 채워보려는 헛되고 어리석은 노력을 그치시고 여러분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는 풍성하고 만족스러운 삶으로 나아오시기 바랍니다. 그 분이 채우실 것입니다. 그 분만이 채우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의롭다하심을 얻게 하는 믿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만족 가운데 기뻐할 수 있는 그 믿음을 주셔서 우리의 믿음 생활이 환란 가운데서도 기쁨을 잃지 않는 능력있고 복된 믿음생활이 되게 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