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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2011년 매일성경 설교 - 7. 과연 그렇지 아니하냐



본문 : 아모서 2장 6-16절



서론 : 누가 진짜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인가?

여기 계신 여러분은 이미 자녀들을 다 키우신 분이시죠? 그렇지만 한 번 예전의 기억을 더듬어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 이런 일 한 두 번쯤은 모두에게 있었을 것입니다. 밖에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데 집 앞에서 내 아이와 동네의 다른 아이가 티격 태격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 경우 여러분은 주로 누구를 더 나무라셨습니까? 내 아이입니까? 아니면 다른 집아이입니까? 여러분은 어느 쪽이셨습니까? 


제 기억으로는 예전의 부모님들은 거의가 다 다른 아이보다는 내 아이를 더 나무라는 쪽이었던 것 같습니다. 때로는 자기 자녀가 더 억울해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그렇게들 하셨던 것 같습니다. 저도 어렸을 때는 그런 일을 종종 경험했고, 그 때는 부모님이 왜 그러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이 사랑이고 지혜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정말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라면 남의 자식보다는 자기 자식을 훨씬 더 엄하게 다루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기쁘고 즐거워서가 아니죠. 실은 정말 그렇게 하기 싫습니다. 그렇지만 남의 자식은 한 마디 말로 타이르고 넘어갈 일도, 내 자식은 회초리 열 대로 가르칩니다. 부모는 남의 자식보다 자기 자식을 더 사랑하게 마련이고, 그래서 그 자녀가 올바른 사람이 되어서 아름답게 살아가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본능을 억누르고서라도 자기 아이를 더 엄하게 다루는 것입니다. 나중에 잠들어 있는 아이의 회초리 자국에 약을 발라주며 마음 속으로 눈물을 흘리게 되더라도 말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아버지이신가?

그렇다면 우리를 사랑하시는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 우리를 양육하시는 방법은 어떤 방법일까요? 그 분은 나를 더 엄하게 다루실까요? 아니면 옆집 사는 박보살을 더 엄하게 다루실까요? 


우리는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똑같은 잘못을 했을 때, 믿지 않는 사람보다는 우리를 더 후하고 너그럽게 대해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아니, 그렇게 믿으며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 분은 우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십니다. 내가 내 잘못을 인정하고 진심으로 돌이키면 언제나 그 모든 일들을 없던 일로 해 주십니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이 꼭같은 잘못을 했을 때,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는 우리들을 더 엄하게 다루십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 분이 지극히 사랑하시는 그 분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자녀니까 잘못을 바로 잡아주고 또 자녀답게 키우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아모스를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심판의 말씀입니다. 계속해서 지금까지의 걸어온 길을 간다면 이제는 엄하게 매를 들겠다고 말씀하시는 마지막 경고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그 당시 이스라엘을 둘러싸고 있었던 모든 나라들을 향한 심판의 선언들 끝에 마지막으로 주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나라들이 자신들의 잘못으로 징벌을 받게 되듯이 하나님의 자녀인 이스라엘도 그들의 잘못으로 징계를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게다가 우리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 다른 나라들에게 주어질 징벌보다는 북이스라엘에게 주어질 징계가 훨씬 더 크고 강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라고, 자기 자녀라고 해서 그들의 죄와 잘못에 대해서 특별대우하시지는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히려 벌을 주어야 할 때는 더 엄하게 주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왜 엄한 징계를 받았는가?

그렇다면 왜 이스라엘은 다른 나라들보다 더 엄함 징계를 받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그들은 하나님의 집에 속한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집안이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옆집 아이가 우리집에 놀러왔다가 우리집 가풍에 어긋나는 일을 했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옆집 아이를 혼낼 수 있을까요? 그 아이에게 회초리를 들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어떻습니까? 내 아이가 내 눈 앞에서 우리 집 가풍을 무너뜨리는 일을 했다면 그 때는 상황이 다르지 않겠습니까? 그 어떤 경우보다도 더 엄하게 꾸짖지 않겠습니까? 무엇 때문에 이런 차이가 생겨납니까? 그것은 두 아이가 속한 집안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 집안의 가풍은 그 집안에서만 소중한 것입니다. 그것은 그 집안의 아이들에게만 지키도록 요구되는 것이지 다른 집안 아이들에게는 절대로 강요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뜻이죠. 가족에게는, 그리고 자녀에게는 그 집안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에 특별히 요구되는 의무들이 더 있게 마련입니다. 그 집안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중요하고 무게있는 법칙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 집안이 훌륭한 집안일수록 더욱 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나라인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반드시 지켜야할 ‘가풍’ 그리고 ‘집안 법도’는 바로 율법이었습니다. 율법은 겉으로 보기에는 다른 나라의 법들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특별한 것들을 제외하면 다 사람이 어울려 살아가는데 있어서 지켜야 할 것들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겉모습이 같다고 해서 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율법은 단순히 지켜야할 하나의 법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은 바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이었습니다. 그것도 ‘영원한 깨뜨리지 말아야 할 언약’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그 율법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언약을 통해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율법을 어긴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과의 영원한 언약을 깨뜨리고 그 언약 밖으로 나가버리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과의 특별하고 영원한 관계 밖으로 나가 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그 언약을 의 심각하게 깨뜨렸을 때는 하나님께서는 징계를 내리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을 다시 자녀다운 자녀로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이 징계는 하나님께서 아무 말씀 없으시다가 갑자기 화풀이 하듯이 쏟아부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아모스 4장 1절 이하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이키기 위해서 얼마나 오랫동안 애쓰셨는지 모릅니다. 처음에는 먹을 양식을 떨어지게 하셨습니다. 그 다음에는 물이 부족하게 했구요. 자연재해와 병충해로 농작물들을 치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전염병으로 치셨습니다. 전쟁통에 수많은 청년들이 죽게 하셨습니다. 전쟁에서 아주 심한 패배를 당하게 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은 이제 그만하고 돌아오라고 말씀하시는 점점 커져가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바램대로 돌이켜서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제 마지막 입니다. 이번에도 그냥 경고정도로만 넘어간다면, 이스라엘은 결코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취하신 마지막 특단의 조치가 바로 오늘 본문 12절 이하에서 말씀하시는 징계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은혜들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스스로 재판관과 검사가 되어 북이스라엘을 고발하십니다. 6절부터 8절까지 기록되어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지른 잘못들은 하나 하나가 모두 사람이 사람에게 할 수 없는 잔인하고 가혹하며 비뚤어진 일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하나님께서 율법에서 엄격하게 금지하신 것들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일들을 한다는 것은 인간이 인간에게 해서는 안되는 몹쓸 짓을 행하는 것인 동시에 하나님과의 언약을 완전히 무시하고, 하나님을 무시하는 행동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그들의 구체적인 잘못을 지적하신 후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어떤 은혜를 베풀었는지를 말씀해 주십니다. 출애굽 때에, 광야에서, 그리고 아모리인을 몰아내고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셨을 때에 어떤 은혜를 주셨는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특히 광야의 40년은 이스라엘에게는 불신앙에 대한 벌을 받는 기간이었습니다. 원래 벌을 줄 때는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상식입니다. ‘한 번 당해봐라, 고생 좀 해봐라’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기간 동안 이스라엘을 오히려 더 빈틈없고 풍성하게 돌보셨습니다. 그 40년 동안 그들은 전혀 굶은 적이 없었습니다. 목이 마른 적도 없었습니다. 만나로 완벽하게 공급해 주셨고 가는 곳마다 샘이 터지게 하셨습니다. 또 그 40년 동안은 그 험한 광야를 헤매고 돌아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신발도 떨어지지 않고 옷도 헤어지지 않게 해 주셨습니다. 오히려 주변의 나라들이 이유 없이 이스라엘을 두려워하게 만드셔서 그들에게 손도 못대게 해 주시고, 손을 대는 나라는 완전히 박살을 내 주셨습니다. 이게 그들이 불신앙 때문에 벌을 받는 동안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해 주셨던 일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아주 이례적이고 특별한 은혜를 역설적이게도 벌을 받는 기간 동안 누렸던 것입니다. 


가장 특별한 은혜 : 나실인과 선지자

이것도 놀라운 은혜였지만 하나님께서 더 중요하게 생각하셨던 은혜, 그렇지만 그들이 완전히 잘못 받아들이고 잘못 사용한 두 가지 은혜가 있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 보시기에는 이 두 가지 은혜를 올바로 사용하지 못한 것이 이스라엘의 가장 큰 잘못이었고, 다른 죄악들을 저지를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 두 가지 은혜란 바로 선지자를 세우시고, 나실인을 택하신 것이었습니다. 


나실인은 잘 아시다시피 평생을 혹은 자기 인생의 일정기간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린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그 동안은 포도주를 포함한 술을 마셔서도 안되었고, 머리카락을 잘라서도 안되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이렇게 자신의 성결을 지키기 위해서 그 기간 동안은 다른 사람에게는 당연하게 허락되는 일들도 전혀 할 수 없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께 헌신하며 정결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애써야 했습니다. 그런데, 나실인은 단순히 개인적인 의미만을 가지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 앞에서 성결하고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세우신 모범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실인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거기에 자신의 삶을 비춰보게 하려고 거울로 세우신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신의 어떤 점이 거룩하고 성결하지 않은지, 그래서 어디를 어떻게 바로 잡아야 하는지 말입니다. 나실인들은 언제나 이스라엘 백성들 곁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소명은 그렇게 함께 살아가면서 거룩과 성결의 본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나실인들은 이렇게 이스라엘이 아직은 ‘정상적인 범위’에 있을 때 바른 길을 알려주는 존재였던 것입니다. 


나실인이 ‘정상적인 경우’에 이스라엘의 길 안내자 역할을 하는 사람이었다면, 지금 이 말씀을 전하고 있는 아모스 같은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이 ‘정상적인 궤도에서 심각하게 벗어났을 때’, 그들의 잘못을 직접 지적해주어서 제자리로 돌아오게 하는 역할을 위해 하나님께서 특별히 세우신 인물들이었습니다. 이들의 입을 통해 아주 자극적인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려주심으로써 하나님께서 그들을 징계하시기 전에 돌아오게 하는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나실인에게 포도주를, 선지자에게 재갈을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특별한 은혜를 거부하고 더럽혔습니다. 먼저 그들은 나실인에게 포도주를 먹였습니다. 사실 나실인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거기에 자신의 삶을 비춰본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닙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에게 언제나 자신의 부족함과 잘못됨을 보며 깨닫게 해서 양심의 가책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자극은 거룩한 자극입니다. 나를 병들지 않게 하기 위해 꼭 필요한 자극입니다. 마치 예방주사를 맞을 때의 고통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나의 삶이 점점 정상괘도에서 멀어지게 되면, 그렇게 거룩이나 성결과 거리가 생겨나게 되면 그 때부터 사람은 이런 양심의 가책, 꼭 필요한 고통을 싫어하고 기피하게 됩니다. 그럴 때 사람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입니다. 자기가 변하기 싫고 돌아가기 싫으니 기준 자체를 바꾸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실인에게 포도주를 먹입니다. 그렇게 나실인에게서 성결을 빼앗고 거룩을 빼앗습니다. 나실인을 다른 사람들과 별로 다른 것 없는 평범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거룩의 기준 자체를 낮춰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야, 나실인을 보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덜 받을 수 있습니다. 자신을 더 쉽게 합리화할수가 있고, 그 자극과 고통을 피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기준을 낮추고 없애버린 사람들에게 남는 것은 심각한 탈선 밖에 없습니다. 이제는 비틀거리는 것을 넘어서 아얘 선로에서 벗어나 버립니다. 그 때, 그 앞을 막아서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바로 선지자입니다. 선지자는 나실인 보다는 훨씬 더 직접적이고 공격적입니다. 나실인은 그저 자기가 사는 방식을 통해서 거룩과 성결을 보여주는 사람이었다면, 선지자는 직접 대놓고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며 돌이키라고 요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을 때 닥쳐올 하나님의 징벌을 선언합니다. 비록 첫번 단계에서는 실패했더라도 이제라도 돌이키면 됩니다. 그 쓴 소리를 달게 듣고 가는 길을 바로 잡으면 됩니다. 그렇게 다시 선로로 돌아오면 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거의 그렇게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 대신 그렇게 그 앞을 막아서는 선지자를 향해 그대로 돌진합니다. 그렇게 그의 입을 막아버립니다. 처음에는 자신의 귀를 막지만, 나중에는 선지자의 입을 막아버립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마지막 징계라는 낭떠러지를 향해 힘차게 달려갑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람’이라는 은혜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고 특별한 복을 주시는 이유는 그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아이들에게 사탕을 주듯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는 우리를 향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혜택은 우리가 누리지만 은혜는 언제나 그 혜택을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받는 자에게 그런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합니다. 더 의지하고 더 순종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은혜와 복이 좋기 때문에 자꾸 하나님이 아니라 은혜로 주어진 것들 자체에 집중하게 됩니다. 그것을 더 쉽게, 더 많이 얻기를 원하고, 더 마음대로 누리고 싶어합니다. 여기서 은혜는 은혜의 역할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우리가 은혜에 잘못 반응하고 잘못 사용해서 오히려 그 은혜 때문에, 그 복 때문에 하나님을 멀리하는 아주 이상한 일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자칫 그런 실수를 하고 잘못을 범할 경우를 대비해서 나실인과 선지자를 주셨습니다. 그래도 영적으로 정상적인 범위에 속한 상황에서는 나실인을 보면서, 그를 거울 삼아 은혜받은 자 답게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 분으로 만족하며 살아가고, 정상적인 궤도에서 심각하게 벗어나는 경우에는 선지자들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엄한 꾸짖음에 귀를 기울이고 자기 궤도로 돌아오라고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께서 과거에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그 엄청난 은혜들을 잊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내가 처음 구원을 받게 되었을 때의 놀라운 은혜의 경험, 내가 나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더 큰 은혜 가운데 있었던 이해할 수 없는 경험들에도 불구하고 그 은혜를 까맣게 잊고 내가 머물러야 할 길에서 멀어져 갈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사람’이라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삶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믿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나실인’, 그리고 가르치고 꾸짖어 줌으로써 내가 얼마나 제 자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지, 또 그래서 돌아가야 할 곳은 어디인지를 알려주는 ‘선지자’라는 ‘사람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이 두 가지 은혜는 시대와 사람을 막론하고 언제 어디서나 성도들 곁에 있어 왔습니다. 지금도 나실인으로 우리 옆에서 살고 있고, 또 선지자로 말하고 있습니다. 바라볼 눈만 감지 않는다면, 들을 귀만 닫지 않는다면 그들은 언제나 우리 주변에서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려고 삶과 목소리로 애쓰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를 생각함

저는 오늘 설교 본문을 묵상하고 연구하면서 문득 한국 교회, 특히 목회자들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요즘 불거져 나오는 목회자들과 관련된 부끄럽고 슬픈 이야기들이 혹시 오늘날 우리나라 목회자들의 현주소를 말해주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생각에 대해서 아니라고 부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를 부끄럽게 했던 분들은 모두들 소위 한국 교회의 성공한 목회자들이었습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고 영향을 받았던 그런 분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생각해 보면, 그들이 그렇게 무너지게 된 것은 순간의 실수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무너지기 전에도, 적어도 제가 알고 있는 한, 그들의 삶은 ‘나실인’과는 거리가 너무나 멀었습니다. 거룩과 성결을 보여주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분들 뿐만이 아닙니다. 물론 전부는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판단해 볼 때,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은 이미 나실인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아니 어쩌면 이미 나실인이기를 포기했고, 그렇게 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이건 제가 목사이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잘 압니다. 


일이 이렇게 된 첫번째 이유는 무엇보다도 목회자들 자신에게 있습니다. 성공의 유혹, 풍요의 유혹, 적당주의의 유혹, 편의주의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 목회자들, 목회자로서 또 공인으로서의 확고한 윤리적인 기준을 세워놓지 못한 목회자 자신에게 그 책임이 있습니다. 이것을 부인할만한 용기가 없습니다. 변명하고 싶지도 않고, 변명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너무 죄송스럽고 너무 아픕니다. 그렇지만, 저는 일이 이렇게 된 또 하나의 원인은 한국교회 전체의 분위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나실인을 부담스러워하고 은근히 꺼리는 현대 한국교회의 분위기 말입니다. 성도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면 거의 대개는 정직하고 성결한 목회자를 원합니다. 그런 소원은 잘못된 것이 아니죠. 지극히 정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한 번 더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어떤 교회에 속해 있는데 그 교회의 목사가 자신도 빈틈없이 성결하고 정직할 뿐만 아니라 항상 그런 말씀만 가감없이 전하고 그런 점에서 융통성이라고는 전혀 없다면, 그래서 때로는 여러분 자신이 그런 원칙의 적용을 받고, 그런 메시지의 직접적인 책망을 받아야 한다면 그 때도 여러분은 그런 목회자를 전심으로 환영하고 사랑하실 수 있겠습니까? 변함 없이 그럴 자신이 있으십니까? 혹시 부담스러워지고 벅차게 느껴지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회원 여러분 오늘날 한국 교회의 분위기가 나실인의 존재를 부담스러워하고 그래서 나실인을 환영하지 않는 분위기라면 그만큼 나실인이 드물어질 수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나실인은 점점 사라져 갈 수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나실인이 되어야 할 한 사람에게 모든 거룩의 짐, 성결의 짐을 지게 하면서도 그를 기준으로 삼아 자시을 고치려 하지 않는 성도들이고 또, 그런 교회라면 아무리 나실인이 있다고 한 들, 그 교회가 진정으로 그를 반기며 그 교회를 섬길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나실인 같은 지도자를 원하기 전에 그런 지도자를 반길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진실로 그를 사랑하고, 그를 모범으로 삼아 그 뒤를 따라갈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그런 지도자가 주어지더라도 결국 언젠가는 그 존재가 부담스러워질 수 밖에 없습니다. 서로 부대낄 수 밖에 없습니다. 만약 일이 이렇게 된다면 실은 이 일을 통해 불이익을 당하고 피해를 입는 것은 나실인이 아닙니다. 오히려 심각한 피해를 입는 것은 그 나실인을 바라보고 비춰보며 닮아가야 할 일반성도들입니다. 바라보아야 할 기준 없이, 비춰보아야 할 거울 없이 각개전투를 벌이는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준이 흐려졌다고 해서, 기준이 없어졌다고 해서 결코 기준에서 멀어진 책임을 면할 수는 없습니다. 기준이 흐려지고 없어진 것은 실은 그동안 그만큼 기준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나실인에 대해서만 말씀드렸지만 선지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선지자를 반기고 그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선지자들도 우리 곁을 떠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그 은혜를 거부한 손해는 모두 우리가 다 감당해 내야 합니다. 


결론 : 나실인과 선지자를 반기고 사랑하자

오늘날도 우리 주변에는 나실인과 선지자들이 있습니다. 삶으로 목소리로 우리의 잘못을 꾸짖으며 바른 길로 돌아오라고 이야기하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시 은혜로 돌이키려면, 그래도 믿음으로 살아가려면, 언제라도 그런 기회를 얻으려면 여러분이 이러한 나실인과 선지자들을 보호해 주셔야 합니다. 그들을 반기고 사랑해 주셔야 합니다. 그래서, 나실인이 줄어들지 않도록, 선지자들이 여러분 곁을 떠나지 않도록 하셔야 합니다. 그건 여러분이 꼭 하셔야 할 일이고, 또 여러분을 위해서 해야할 일입니다. 교회가 교회를 위해 하나님께서 세우신 참된 사역자들을 사랑하고 보호해 주지 않는다면 그 누가 그렇게 해 주겠습니까? 교회가 그들의 모습에서 은혜를 되찾고 그들의 목소리에서 길을 되찾아 참된 길로 돌이키지 않는다면 누가 그렇게 하겠습니까? 


나실인과 선지라는 그 특별한 은혜를 저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제대로 사용하십시오. 언제나 그럴 수 있는 영적인 준비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특별한 은혜를 제대로 사용하게 될 때, 우리는 언제나 안전한 철로 위를 달리는 열차가 될 수 있습니다. 가끔은 흔들리더라도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가는 그런 성도들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항상 나실인을 바라보는 눈과 선지자의 말을 들을 귀를 열어놓으셔서 이들을 통해 주시는 특별한 은혜를 놓치지 않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약속 : 하나님은 나실인과 선지자들을 사랑하고 반길 때, 언제나 나를 새롭게 해 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