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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2011년 매일성경 설교 11. 이스라엘 자손이 진행할 때에








본문 : 민수기 10장 11-36절



도입 : 일반은총과 특별은총 사이의 균형이 필요하다

우리가 ‘은혜’ 혹은 ‘은총’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에는 크게 나누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일반은총”과 “특별은총”이 그 두 가지입니다. 일반은총은 말 그대로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들에게 공통적으로 베푸시는 은혜를 말합니다. 눈, 비, 물, 공기, 음식, 윤리, 법, 학문, 과학, 이성...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면서 일상적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또 그 안에서 살아가기도 하는 것들은 말 그대로 일반적인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것들을 주시는 데에는 하나님을 믿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서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들이나 믿지 않는 사람들이나 모두 누릴 수 있게 하십니다. 반면에 특별은총은 말 그대로 특별한 은총을 말합니다. 믿음, 소망, 거룩함, 영광,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 영생과 같은 것들이 그런 것들입니다. 이런 은총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만 특별하게 주어지는 특별한 은총들입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은혜를 모두 받아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점에서는 아주 복된 사람들인 셈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겨우 ‘일반은총’만 생각하고 거기에만 매달려 살아가면서도 그것이 은혜인 줄도 모르는 푸석푸석한 삶을 살아가지만, 우리 믿는 사람들은 일반은총과 특별은총, 이 두 가지 은혜를 모두 받아 누리고 있고, 또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으로 부터 온다는 것을 알고 인정하면서 풍성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풍성한 삶은 거저 누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풍성함을 제대로 누리려면 그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이 두 가지 은총 사이의 관계를 잘 이해하고 그 둘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으며 살아갈 때, 비로소 우리의 신앙도 건강한 신앙이 될 수 있고, 우리의 삶은 그 두 가지 은총이 가져다 주는 자유와 풍성함으로 채워질 수 있습니다. 


언약궤와 구름을 따르는 삶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서 처음 광야 길을 갔을 때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본문을 통해 광야에서의 처음 이스라엘의 행로는 철저히 하나님의 인도에 따라 이루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여러 곳에도 분명히 나와 있지만, 민수기 9장 22절을 보면 그것이 얼마나 철저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틀이든지 한 달이든지 일 년이든지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러 있을 동안에는 이스라엘 자신이 유진하고 진행치 아니하다가 떠오르면 진행하였으니...” 광야에서 여행을 하는 동안 이스라엘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서만 움직였습니다. 절대로 자기 맘대로 여행하는 법은 없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이집트 노예살이로 부터 해방된지 며칠 되지 않은 말 그대로 정말 오합지졸들의 집합체입니다. 그리고, 광야라고 해서 정말 아무도 살지 않는 빈 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통과해 가야하는 땅에는 이미 거기 오랫동안 자리잡고 살았던 수많은 주민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과는 달리 이미 군대도 가지고 있었고, 무기도 가지고 있었으며, 성채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환경 속에서 그들은 그렇게 대책도 계획도 없는 여행을 했던 것입니다. 사실 시내산에서 가나안까지는 걸어서 11일이면 갈 거리이지만, 그리고 이스라엘에 대한 소문이 여기 저기 퍼지기 전에 한 시간이라도 빨리, 한 걸음이라도 더 가야 그만큼 더 안전하다는 것을 그들도 알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저 하나님의 인도와 명령만을 따라 움직였던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어떤 것이 더 효율적인지, 그리고 어떤 방법이 더 안전할 것인지 너무나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런 상식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무 계획 없어 보이고, 더 위험해 보이는 선택을 했습니다. 언약궤를 앞세우고 구름을 따라 그야말로 정처없는 여행을 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는 상식이나 계산보다 더 확실하다고 믿는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여행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아주 특별한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33절입니다. “그들이 여호와의 산에서 떠나 삼 일 길을 행할 때에 여호와의 언약궤가 앞서 행하며 그들의 쉴 곳을 찾았고 그들이 행진할 때에는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그 위에 덮였었더라” 첫번째 여행은 삼 일 동안 이루어졌는데, 그 때 진의 맨 앞에는 항상 언약궤가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그 언약궤를 앞세웠을 때, 그 언약궤가 한 역할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이 쉴 곳을 찾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이 보이는 현실이나 상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믿음으로 언약궤를 앞세웠을 때, 그 언약궤는 그 넓은 광야에서 그들을 위한 최적의 안식처를 찾아주어 그들을 쉬게 해 주었던 것입니다. 


앞에서는 언약궤가 인도했다면, 그러는 동안 머리 위에서는 여호와의 구름이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때로는 이 구름이 대책없이 몇날 며칠씩 꼼짝하지 않아서 백성들을 불안하게 하고 답답하게 하기도 했지만, 그들은 이 구름의 행로만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구름은 그들의 인도자 노릇을 했을 뿐 아니라 그들의 보호자가 되어 주기도 했습니다. 광야의 한 낮, 그 잔인한 햇볕으로 부터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호해 주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머리 위에서는 여호와의 구름이 큰 그림을 그리며 이스라엘이 가야할 방향을 지시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맨 앞에서는 언약궤가 그들을 한 걸음, 한 걸음을 인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언약궤는 그들에게 쉼을 주며, 구름은 그들을 보호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여행할 때, 구름의 인도를 받으며, 언약궤를 앞세우고 갔다는 것을 통해서 오늘을 사는 이스라엘인 우리가 교회로, 혹은 성도 개인으로 지켜야 할  큰 원칙을 발견합니다. 먼저 우리가 성도로 또 교회로 살아가면서 바라보고 따라가야 하며 추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본능적으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고 자기가 가지고 싶은 것을 추구하고 또 가져야만 만족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도 내가 바라는 방향에서, 내가 원하는 것들을 얻어야 참으로 만족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내 소원과 내 만족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크게 보면 교회도 마찬가지일 때가 많습니다. ‘비전’이라는 이름 하에 사람들이 원하는 목표를 세워놓고 그것을 이루어야만 교회가 행복하고 온전하게 될 것이라고 여기며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달려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앙의 첫번째 단추가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생겨나는 안타까운 오해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하고,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추구하며 살아야 비로소 참 만족을 누릴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시는 분이고, 또 그것 때문에 우리를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확실히 아는 것이 바로 신앙의 첫번째 단추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첫번 단추가 제대로 끼워지지 않으면 우리는 잠시의 만족은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곧이어 텅빈 공허함을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성도의 행로도, 교회의 행로도 광야 속에 있습니다. 성도도 교회도 결국은 광야와 같은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그 한 낮의 광야 같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 개인에게, 그리고 교회에게 꼭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그늘입니다. 저 위에서 이 아래로 드리워지는 하나님의 은혜의 그늘이 가장 필요합니다. 그 은혜만이 우리를 인도하고 보호해 주며 지치고 낙망하지 않고 계속해서 믿음의 길을 가게 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아무렇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특별하고 놀라운 은혜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일반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참된 은혜는 그 은혜가 부어질 조건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을수록, 더 풍성하게 부어집니다. 그 조건이란 성도들이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 영광을 추구하며 소망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갈증을 해결할 수 있는 만족은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의 임재를 소망하며 하나님의 영광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갈 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만들어진 목적에 맞게 사용될 때, 거기서 얻을 수 있는 유익이 가장 큰 법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만들어 졌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하며, 그 영광을 추구하며 살아갈 때 가장 만족스럽고 유익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런 삶을 살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 외에는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갈 때, 그러한 삶을 지속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연약하고 부족하지 않다면 우리는 한 번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살기로 작정한 다음에는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 중에서 그럴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은혜가 충만할 때는 정말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할 수 있을 것 같고, 또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변함없이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지만, 시간이 흐르면 그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신앙은 자꾸 나 중심이 되어가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삶은 점점 힘이 빠지고 지쳐가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우리들은 감정도 잘 식고, 기억력도 쉽게 흐려지는 사람들이기 때문이고, 그만큼 세속적인 유혹이 강력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우리들을 붙들어 줄 구체적이고 확실한 무언가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바로 ‘언약’입니다. 그래서, 그 언약을 앞세우라고 하신 것입니다. 힘들고 지칠 때마다, 믿음이 약해지고 흔들릴 때마다 앞서가고 있는 언약궤를 보면서 지금 내가 가는 일이 막연하고 보장없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확실하게 보장해 주신 가장 복된 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믿음을 되찾고 다시 힘을 내라고 말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은 가깝고 하나님의 약속은 멀기만 합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당장 경험하는 현실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아야 하며, 그 약속에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묶어 놓아야 합니다. 때로는 그 약속을 믿으며 살아간다는 것이 마치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이방민족들 사이에서 십계명을 지키며 사는 일처럼 비현실적이라고 느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비현실적인 계명을 주시고 또 그 계명을 지킬 것을 말씀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다름 아닌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모든 현실의 주인이시고 주관자라고 고백하는 하나님이 바로 그 비현실적인 약속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눈에 보이는 현실이 더 확실할까요? 아니면 하나님께서 주신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언약이 더 확실할까요? 어느 것이 더 현실적일까요? 언약입니다. 언약일 수 밖에 없습니다. 현실의 주인이요 주관자가 주신 약속이니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언약을 의지해서 살아가면 참된 안식을 주시겠다고, 이 광야같은 삶 속에서 우리만 아는 비밀스런 쉼을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두 가지가 우리가 살아가는 특별은총의 영역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영광, 그것들을 통해 주시는 보호와 인도는 성도들에게만 특별히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중심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 광야의 햇빛에서 우리를 시원케 하시는 하나님의 구름을 만나게 될 것이고, 그 분의 언약에 우리의 믿음을 붙들어 매어 놓을 때 우리는 광야같은 삶 가운데서도 끊임없이 안식을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결코 이 특별한 복, 참된 이스라엘에게만 주시는 이 복을 놓치지 않는 복된 성도들로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일반은총, 특별은총의 ‘돕는 베필’

그러나, 하나님께서 언약궤를 통해 쉴 곳을  찾게 하시고, 구름의 인도를 통해 보호의 은혜를 제공해 주셨다고 해서 그 많은 사람들이 함께 광야를 여행하는 일이 저절로 되어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놀라운 은혜를 받고 있다는 것과 그들이 함께 여행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은 어찌보면 별개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은혜만 받으면 다 된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사람이 은혜만 받으면 갑자기 도덕적인 사람이 되고, 친절한 사람이 되며, 스마트하고 예의바른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모든 짐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큰 은혜를 받아도 여전히 내가 짊어져야 할 짐은 남아있고 대부분의 경우에는 여전히 세밀한 부분에서는 많이 그리고 지속적으로 다듬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은혜 때문에 더 거칠어 지고, 더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되기 도 하고 현실성을 잃어버린 신앙이 되기 쉽습니다. 이 일을 방지하고 성도들 모두가 성숙하고 풍성한 신앙생활을 하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아주 귀한 선물을 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질서’라고 부르는 우리가 지켜야 할 일반은총입니다. 


질서 1 : 지도자를 존중함

13절 이하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름의 보호와 언약궤의 인도라는 아주 특별하고 기이한 은혜를 받았지만, 그 가운데서 그들이 보인 모습은 지극히 조직적이고 질서정연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그렇게 엄청난 은혜를 일상으로 경험하고 있었으면서도 그들이 흥분에 빠져 제멋대로 행동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우선 13절은 그들의 출발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여호와께서 모세로 명하신 것을 좇아 진행하기를 시작하였는데...” 이 구절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알려 줍니다. 첫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따른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었다는 것과 둘째는 그렇지만 그 명령은 하나님으로부터 그들에게 직접 주어진 것이 아니라 모세를 통해 주어진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구조를 보면 철저히 지도자들을 통해서 일반백성을 통제하고 지도하는 방식으로 되어 있는데, 그 정점에 모세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교회를 이끌어 가실 때 일반적으로 어떤 방법을 사용하시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인 것보다 특별한 것을 더 강하고 가치있는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경의 교훈보다 꿈이나 환상을 더 확실한 것으로 받아들이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특수한 것은 말 그대로 특수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비상시에 사용하시는 방법이고 평상시에는 그런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그런 방법을 사용하시더라도 성경의 원리나 하나님의 성품에 어긋나는 방법으로는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그것은 교회를 다스리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성도들에게 직접 말씀하시지 않고 교회의 지도자들을 통해서 그렇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교회를 움직여 가실 때 일반적인 방법입니다. 그래서 일반적인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를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목사 뿐만 아니라 교회 안의 소집단의 지도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보기에 누가 보아도 그 자리에 앉아 있기에 턱없이 부족하고 부적당한 사람들이 그 자리에 있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유와 과정이야 어쨋든 지금 지도자의 자리에 있는 것은 바로 그 사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유와 목적을 다 알 수는 없어도 그 사람이 그 자리에 앉도록 허용하신 것도 하나님이시고 지금 현재 그 사람을 그 자리에 두고 계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존중해야 할 것은 바로 그렇게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이것까지 거부하거나 부인해서는 안됩니다. 내 생각과 다르고, 내 방식과 다르고, 내 취향과 다르다고 해서 지도자를 거부하거나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그가 도저히 그 일을 맡지 못할만큼 영적이고 도덕적인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최대한 그의 지도를 존중해야 합니다. 이런 생각들이 민주적인 사고방식에 젖어있는 현대인들에게는 거부감을 줄지도 모르지만 저는 이런 태도가 바로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요구하시는 겸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부분에서까지 하나님께서 일하실 것을 믿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라고 생각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에라엘을 이끌던 때라고 지금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모세의 지도력 스타일, 의사결정방법, 개인적인 삶의 방식 등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더러는 그런 일에 대해서 불만을 말하고 또 반항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대다수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이스라엘이 은혜 가운데 머물러 있을 때에는 철저히 모세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존중하고 그를 따랐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존중했던 첫번째 일반은총, 그래서 그들을  평안과 성숙으로 이끌어 주었던 첫번째 하나님의 평범한 선물이었습니다. 


질서 2 : 자신의 자리와 역할을 잘 지킴

또 하나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 ‘군대대로’라는 말이 다섯 번이나 등장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기서 군대란 각 지파의 대가족을 기준으로 조직된 하나의 그룹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진을 치거나 혹은 이동할 때는 철저히 이 ‘군대’가 중심이 되었습니다. 각각의 군대는 전체 이스라엘 안에서 정해진 위치와 순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다 이 위치와 순서를 완전히 마음에 들어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처음 이스라엘은 그렇게 정해지고 또 주어진 위치와 순서를 잘 지켰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무 탈 없이 평안하게 광야여행을 하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회원 여러분, 이것이 바로 평안하고 성숙한 교회생활의 두 번째 비결입니다. 지금 있는 자리, 나에게 주어진 자리가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아도 그 자리를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자리로 여기고 잘 지켜야 합니다. 더 좋은 자리, 내가 꼭 있고 싶은 자리가 있어도 그 자리를 탐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남의 자리로 넘어가려고 해서도 안됩니다. 우리가 서로 서로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질서와 자리를 존중하고 잘 지켜낼 때, 모두가 평안한 교회생활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존재하는 수직적인 질서와 수평적인 질서 모두는 마땅히 존중되어야져야 하며 그럴 때, 교회도 성도 개인의 신앙도 평안하고 풍성해질 수 있습니다. 


(호밥에 대한 이야기는 오늘 설교에서는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부분은 조원들이 함께 생각해 보시고 또 나누어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세속적인 지혜와 지식을 교회와 삶 속에 받아들이거나 걸러내는데 사용할 수 있는 합당한 기준이 뭘까’ 본문에서 함께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결론 : 일반은총과 특별은총의 균형점을 찾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특별은총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기셨다면 우리에게 그것만 주셨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나서도 우리를 여전히 일반은총 속에 살게 하시는 이유는 하나님 보시기에 그것이 우리의 삶에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거듭 난 사람들이니 큰 틀에서는 특별은총을 중심으로, 그것을 가장 큰 원칙으로 삼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며 하나님의 임재를 소망하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방법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세속적인 이론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신뢰하며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길을 갈 때 걸어야 할 길은 특별한 것이기 보다는 평범한 것일 때가 더 많습니다. 일상적인 영역에서 또 교회 안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질서와 순서, 그리고 자신의 자리를 잘 지키며 거기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나머지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한 최선의 것들로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가장 편안한 안식과 풍성함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처음 이스라엘은 특별은총과 일반은총의 균형을 이룰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수많은 다른 사람들이 함께 여행을 하면서도 큰 문제를 겪지 않을 수 있었고, 동시에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사람들로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함께 하는 신앙의 여행도 이와 같아지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일반은총과 특별은총 사이의 균형을 잃지 않아서 그 두 가지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성함과 자유를 누리는 행복한 믿음의 여행자로 살아가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약속 : 우리가 특별은총 속에서 일반은총을 존중하며 잘 지킬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안식과보호를 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