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마가복음 11장 27절 - 12장 12절
도입 : 청지기 사상에 대하여
실제로 삶 속에서 그것을 그대로 실천하며 사느냐 그렇지 못하냐는 별개로 하더라도 성도라면 가장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진리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행해야 하는 모든 것들과 하나님 앞에서 보여야하는 모습들은 전부 다 바로 이 하나의 사실로부터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께서 만드신 하나님의 소유가 아니라면 우리는 그 분의 명령을 따를 필요가 없습니다. 그 분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야 할 필요도 없고, 그 분을 의식하며 살아가야 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우리가 그 분의 뜻을 행하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가 마음의 가책을 받고 괴로워할 필요도 없고, 그 문제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해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거꾸로 우리가 그 분의 뜻을 어겼다고 해서 그 분이 우리를 나무랄 권리를 가질 수도 없고, 사람들이 그 분의 영광에 손상을 입혔다고 해서 그 분이 분노하시고 징벌을 내리실 아무런 정당성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이 가능할 수 있고 또 의미있는 것이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 모든 것들의 주인이시라는 이 사실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확실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였을 때 비로소 신앙이 시작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모든 것들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거기서 생겨나는 하나의 신앙의 명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것이 그 분의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물건에 대해서 두 명이 주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만약 함께 돈을 내서 구입한 어떤 물건이라면 둘이 아니라 세 사람, 네 사람이라도 함께 소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기 때문에, 아얘 하나님으로 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에 절대로 공동소유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것들, 그리고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 중에서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이것은 정말 내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부터 ‘청지기 사상’이 나옵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다 우리에게 맡겨진 것이며, 우리가 맡은 것에 불과하다는 사상 말입니다. 그런데 이 청지기 사상은 결코 하나의 사상이나 사고방식에 머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온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반드시 도달할 수 밖에 없는 결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우리가 그런 것들의 청지기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청지기됨에 대한 거부는 결국 하나님의 주인되심에 대한 부인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유대교지도자들과 예수님의 권위논쟁
예수님께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사건으로 예루살렘의 유대교 지도자들은 발칵 뒤집혔습니다. 세상에... 그 거룩한 성전,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성전을 그런 식으로 모독하다니 이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뻔뻔하게도 그 일을 저지른 장본인이 다시 제 발로 성전으로 들어와서는 여기 저기를 걸어다닙니다. 기가 차도 이런 기가 찰 일이 없습니다. 도대체 이 사람은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길래 그런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서도 도망을 치기는 커녕 다시 그 자리로 와서 버젓이 돌아다니는지, 화가 나고 열을 받기 이전에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그리고는 대뜸 이렇게 묻습니다.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가? 누가 너에게 이런 일을 할 권위를 주었는가?”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대답을 주시는 대신에 “만약 당신들이 내 질문에 대답한다면 나도 그 질문에 답해주겠다”고 하시면서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온 것이냐? 아니면 사람에서 나온 것이냐?”로 물으셨습니다. 이 질문은 유대교지도자들을 굉장히 난감하게 했습니다. 만약 요한이 하나님이 주신 권위를 가지고 세례를 베풀었다고 대답한다면, 자신들이 세례를 받지 않은 일에 대해서 변명할 말이 없어질 것이고, 그렇다고 자신들의 생각대로 요한은 자기 임의대로 세례를 준 것이라고 말한다면 요한을 선지자로 믿고 있는 군중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그 유명한 ‘모르쇠 작전’을 사용합니다. “모른다”고 대답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그렇다면 나도 너희에게 대답하지 않겠다”고 하심으로써 논쟁을 끝내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한다고 해도 모두 진실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권위로 이렇게 했다”고 해도 그것은 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내 권위로 이렇게 했다”고 하셔도 하등의 문제가 없습니다. 그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또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어떻게 대답한다고 해도 그들은 그것을 걸고 넘어질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권위로 그렇게 한다고 말한다면 ‘하나님을 사칭한 죄인’으로 취급할 것입니다. 자신의 권위로 그렇게 한다고 말한다면 미친 사람이나 이단의 우두머리로 몰아갈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아무리 진실을 말씀하신다고 한들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 분명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에 관한 질문으로 그들의 입을 막고 처음 말씀대로 대답을 주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수님께서 진짜로 그들의 질문에 답을 주시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이렇다, 저렇다 정확하게 답변하지는 않으셨지만, 그 논쟁이 끝나고 나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들려주신 비유 속에는 너무도 확실한 답이 들어 있었고, 실은 유대교지도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아주 근본적이고 심각한 문제와 그에 대한 답도 들어 있었습니다.
악한 농부의 비유
포도원 주인은 아주 훌륭한 포도원을 만들었습니다. 가장 비옥한 땅을 고르고, 그 땅을 빙 둘러서 울타리를 쳐 주었고, 포도즙을 짤 수 있는 포도즙틀도 새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또 망대도 만들어 놓았습니다. 도저히 농사를 망칠래야 망칠 수 없는 완벽한 환경을 만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동네의 가난한 농부들을 불러모아 그 포도원을 맡기고 일 때문에 다른 나라로 갔습니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열매를 맺을 충분한 때가 되었기 때문에 땅 주인은 종들 보내서 수확 중에서 얼마를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 요구는 결코 과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땅을 잘 경작한 대부분의 혜택은 농부들에게 돌려 주었고 자신은 그저 그 중의 일부만을 가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포도농장에서 농사를 짓는 동안 농부들의 마음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왜 땀은 우리가 흘렸는데, 주인에게 소출을 주어야 하는가 하는 마음이 들었던 것같습니다. 소출을 받으러 온 종을 때려서 돌려보냅니다. 두번째, 세번째 찾아온 종들은 더 심하게 대했습니다. 심하게 때리고 모독하기도 하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주인은 너무 너무 마음이 좋고 인내심이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아들을 보내면 그래도 아들이니까 존중하고 소출을 주고 원래 자기 자리로 돌아가겠지 하는 기대감으로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는 동안에 농부들의 마음 속에는 아얘 그 좋은 포도농장을 차지해 버리고 싶은 욕망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찾아온 아들을 보자 그 욕망은 아주 구체적인 음모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아들을 죽이고 포도농장을 영원히 차지해 버리자는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대로 아들을 죽여 포도농장 밖에 던져 버렸습니다.
이 이야기를 주신 예수님께서는 듣고 있던 유대교지도자들에게 물으십니다. “너희가 만약 이 포도농장의 주인이라면 어떻게 하겠느냐? 이렇게 한 농부들을 그냥 두겠느냐? 돌아와서 농부들을 죽이고 포도농장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겠느냐?”
이 비유와 이런 질문을 들은 그들은 무척 불쾌했습니다. 예수님을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불쾌해졌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예수님께 손도 대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혹시 예수님께서 진짜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면 어쩌나 하는 걱정 때문도 아니었고, 한 사람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단지 예수님을 따르는 수많은 군중들... 그들이 두려워서 그저 돌아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비유의 의미 : 너희들은 소작농이다.
이 비유 속에 예수님께서는 유대교지도자들의 질문에 대해서 분명한 답을 주셨습니다. “무슨 권위로, 누가 준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고 묻는 그들의 질문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권위로, 나 자신 성자 하나님의 권위로 그렇게 한다”고 대답해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그 분이 행하시는 모든 일은 다 하나님으로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분이 무슨 일을 어떻게 하든 다 정당하고 합법적일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권위를 자기 마음대로, 권력이나 힘으로 휘두르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비록 그 분 자신이 하나님이셨지만 스스로를 낮추셔서 완전히 아버지 하나님 밑에 두시고 그 분께 순종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 자신의 권위로도 충분했지만, 하나님 아래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낮은 자리로 내려가 그 자리에 만족하셨습니다.
유대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만나자 마자 대뜸 예수님의 무슨 권위로 그렇게 하시는가를 따져 물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그만큼 자신의 권위에 대해서 자신하고 있었고, 그 권위를 크고 위대하며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자신들의 권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고, 그 동안 그 권위를 사용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삶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며 좌지우지해 왔는가와는 전혀 상관없이 그들의 권위는 그저 일시적으로 그들에게 맡겨진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은 포도원의 주인이 아니라 소작농들이었고, 그래서 그들의 권위란 주인의 권위가 아니라 소작농의 권위였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비유를 통해 그들에게 들려주시고 일깨워 주시려고 했던 그들의 권위에 대한 진실이었습니다.
소작농은 자신을 유익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주인이 소작농들을 고용하는 이유는 소작농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인 자신을 위해서 입니다. 그래서, 소작농들은 최선을 다해서 주인을 유익하게 함으로써 그 안에서 유익을 누리는 사람이고, 그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권위는 그것이 크건 작건 사람들에게는 항상 치명적인 유혹거리가 되게 마련입니다. 권위는 그 권위가 없다면 결코 얻고 누리지 못할 달콤한 것들을 제공해 주기 때문입니다. 농부들은 처음에는 자신들에게 농사지을 수 있는 땅, 그것도 그렇게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훌륭한 땅이 주어졌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고 감격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일하면서 삶의 필요를 공급받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시간이 문제입니다. 시간이 흐르고 이런 것들이 익숙해지고 당연한 것이 되자, 마음 속에서 욕망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습니다. 주인에 대한 불만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주어지는 것, 약속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을 탐내게 되었습니다. 결국은 농장 전체를 차지하고, 완전히 자기 유익만을 위한 자기 세상으로 만들어 버리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유일한 상속자인 아들을 죽이고 그 포도농장을 차지하려는 계획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영광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결코 포도원을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주인의 꺼지지 않는 불과같은 진노였고, 영원한 파멸이었습니다.
물론 이 비유 속에서 농부들이 주인의 아들을 죽인 일, 그러니까 당시의 유대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는 일은 아직은 일어나기 전이었습니다. 그리고, 후에 그들이 예수님을 죽였을 때, 농부들이 그랬던 것처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이들이 알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나 모르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나 전혀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보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았던 것은 자신들에게 맡겨진 권위와 그 권위가 가져다 주는 달콤한 특권들에한 집착 때문이었습니다. 그 집착이 그들의 눈을 가렸고 그것을 더 키우고 영원히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라면 죄 없는 사람을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을만큼 영적으로 눈이 멀고 완악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몰랐다는 것은 이미 정상참작의 이유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회원 여러분, 우리는 그 누구도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든, 심지어 그것이 우리의 목숨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단지 그것을 맡은 청지기이며, 그것을 아름답게 가꾸고 관리해야할 관리자에 불과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이 일에 대해서 부아를 내거나 서운해 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께 “그럼 난 뭐냐? 우리는 뭘 먹고 사냐?”고 따지실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선하시고 풍성하신 분이신지를 알려 주십니다. “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주인이 포도원 농부들에게 요구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소출의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또 많은 부분도 아니었습니다. 주인은 단지 전체의 ‘얼마’만 요구했습니다. 그 땅을 잘 경작하고 돌보았다는 증거로, 아직도 그들이 주인을 진짜 주인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증거로 전체 소출 중의 일부분만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일만시키고 희생만을 강요하시는 분으로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자꾸 뭘 달라고 요구하시는 그런 분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헐벗고 굶주리는 자리로 몰아넣기를 즐기시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아주 특별한 사명을 주시기 위해서 때때로 어떤 사람들에게는 전적인 헌신을 요구하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그런 영광스러운 기회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실제로 그 당사자에게는 그것이 고통과 희생이 아니라 또 다른 엄청나고 비밀스런 영광과 은혜의 기회가 됩니다. 우리 주인되신 하나님은 충분히 너그럽고 풍성한 분이십니다. 그 분은 전부가 아니라 일부를 요구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그 일부를 통해서 전부를 보이라고 말씀하시며, 그 일부를 통해서 전부를 보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분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넉넉할 수 있습니다. 그 분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살아갈 때 그 분이 알아서 덧붙여 주시는 것만으로도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믿음에 우리의 삶을 맞추어 가야 합니다. 만약 내가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살고 또 정직한 길을 가고 있다면 그 때 주어지는 것은 천은보다 더 값진 내 몫의 상급이라고 고백하며 거기 만족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공급해 주시는 완벽하게 적절한 나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악한 농부들이 처음부터 악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들에게도 감사가 있었고 감격이 있었으며 하나님의 농장에서 일한다는 영광스러운 자부심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싶은 열망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자신에게 맡겨진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주시는 것 뿐만 아니라 전부를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기만을 위한 것으로 삼으려고 했을 때, 이들은 결코 가서는 안될 길로 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서 결코 거두지 말아야 할 쓰디쓴 열매를 거두어 들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
예수님은 이 비유를 끝맺으시면서 이런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리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리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이 구절은 시편에서 다윗이 사울에게 버림을 받고 도망자 생활을 하다가 왕이 된 후, 그 일에 대한 감격과 감사를 기록한 시편에 등장하는 구절입니다. 예수님은 이 구절을 앞으로 예수님에게 일어날 일과 그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사용하셨습니다.
자타가 공인하는 당시의 권위자들,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대단한 권위를 가졌던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그 권위를 마치 자신의 힘처럼 마음대로 휘두를 것입니다. 그 힘으로 아무 쓸데 없는 돌을 내던지듯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것이며, 그렇게 자신들의 자리와 권위를 지켜냈다는 확신으로 기뻐할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렇게 죽임당한 예수님, 그렇게 버림받은 거친 돌덩이는 건물의 가장 중요한 주춧돌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시는 새 성전의 유일한 기초가 될 것입니다. 때로는 인간이 자신의 본문을 잊고 자기 자리를 떠나 하나님의 뜻을 방해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뜻은 결코 실패로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일을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가 마지막 날에는 확실히 보게 되겠지만 하나님의 뜻 중에서 단 하나라도 중간에 취소되거나 좌절되거나 실패된 것으로 밝혀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은 이렇게 하시는데 있어서 그 누구의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그 분의 전지하심과 전능하심은 그 분의 모든 뜻을 완전히 이루시는데 전혀 부족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의문이 하나 생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우리를 부르시고 사용하실까요? 왜 부족하고 실수투성이인 우리에게 그 분의 것을 맡기시고, 그 분의 일을 맡기실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분의 뜻을 이루시는 영광스러운 과정에 우리를 참여하게 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마지막 날에 우리에게 그 영광의 상을 나누어 주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자녀인 우리가 아버지의 영광을 함께 누리는 그 날을 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소작농의 영광이며, 청지기의 영광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 영원히 우리의 것이 될 그 영광을 나눠주시기 전까지는 우리는 이 땅 위에서 소작농과 청지기의 몫에 만족해야 합니다. 그 날이 올 때까지는 그 자리에 머물며 그 역할에만 충실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눠주시려는 그 영광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이런 역할을 방해하고 그 자리에서 떠나게 하는 것, 그래서 결국 우리가 영원한 영광을 누리는 일을 방해하는 가장 큰 방해꾼이 바로 “나의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모든 문제는 나도 모르게 맡겨진 것을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할 때부터 생겨납니다. 내 것이라고 생각하면 내 마음대로 하고 싶어지고 영원히 붙들고 싶어지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그 일을 방해하는 것은 전부 장애물로 여겨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거하려고 하게 됩니다. 이것이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든 진짜 이유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만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것을 흔들고 빼앗으려고 한다고 생각하니 예수님을 죽일 방법을 찾을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결론 : “내 것”을 넘어설 때
“내 것”이라는 생각. 이것은 참으로 매혹적인 생각입니다. 정말 기분좋게 하는 생각이고 유혹적인 생각입니다. 그래서 떨쳐버리기가 그만큼 힘든 생각입니다. 그렇지만 그 ‘내 것’이라는 생각, 그리고 영원히 내 것일 수 있다는 생각만큼 영적으로 위험한 생각이 없습니다.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이 목적이 되어지고,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과 하늘의 영광이라는 진짜 목적을 놓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청지기요 소작농의 자리에서 신실하고 겸손하게 그 직분을 감당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에 필요한 것을 부족함이 없이 넉넉하게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나라의 영원하고 영광스러운 다스림에 참여하는 하늘의 영원한 상속자로 삼아주실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뜻 안에서 겸손하게 그 뜻을 섬기며 그 안에서 만족하는 비결을 배워가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고, 영원히 행복한 하늘 상속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약속 : 우리가 하나님의 신실한 청지기로 자기 자리를 지키며 살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충분히 채우시며, 하늘나라를 상속해 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