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시편 106편 13-31절
도입 :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인류, 사회 문화 등이 지나온 길. 또는 그 기록”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역사는 인간이 살아온 흔적이나 그 흔적에 대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정의는 객관적인 정의의고, 역사학자들이 그런 객관적인 역사를 연구하면서 내린 정의들은 조금 다릅니다. “아와 비아, 그러니까 나와 남의 투쟁”, “도전과 응전”,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등등 굉장히 의미심장한 정의들을 내놓았습니다. 평생 역사만을 연구한 분들의 내린 역사에 대한 정의이니 만큼 사람들은 이런 정의를 읽을 때마다 역사에 대한 통찰력을 얻게 됩니다.
사람들은 역사를 모르면 미래가 없다고 이야기하곤 합니다. 과거에 대해서 모르면 미래를 준비하는 올바른 방법을 알 수가 없다고 여기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야기하는 역사란 단순히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 자체나 혹은 그것에 대한 단순한 기록 차원의 이야기라기 보다는 그 역사가 던져주는 교훈으로써의 역사입니다. 그 사건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그 사건이 왜 그리고 어떻게 일어났으며 그래서 그와 비슷한 일들이 다시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거나 혹은 그런 일을 다시 일어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무엇이 필요한지를 말해주는 역사 말입니다. 이런 역사는 정확하게는 역사의식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역사를 모르면 미래도 없다는 말은 실은 역사의식이 없으면 과거의 부정적인 경험들과 비극들이 반복될 수 밖에 없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개인이나 혹은 국가, 크게 보면 인류의 역사가 여실히 증명하고 있습니다. 왜 우리는 과거에 저질렀던 잘못을 반복하고, 그 속에서 고통을 주며 또 고통을 당하며 살아갑니까? 그것은 과거의 역사에서 배워야 할 것을 배우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당하지만 그 때뿐이지 그 고통이 지나가면 금새 잊어버리고 그 고통의 원인이 되었던 것을 바로 잡으려고 노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실패의 역사
오늘 본문은 출애굽이라는 사건 이후에 광야에서 일어났던, 이스라엘이 경험한 비극적인 역사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 하나의 사건은 굉장히 짧게 기록되어 있지만, 그 기록의 원래 역사에 대한 기록을 더듬어 올라가 보면 하나 하나의 사건은 얼마나 비극적이고 처참한 사건이었는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의 첫번째 사건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만나 밖에 주지 않는다고 울고 불며 원망했던 일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그대로 정말 물리도록 메추라기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렇지만, 그것과 더불어 엄청난 재앙도 보내셨습니다. 전염병을 보내셔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게 하셨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이 모세와 아론에 대해서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땅을 갈라지게 하셔서그 땅이 그 사람들을 삼켜버리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 일을 다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또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위해서 자리를 비운 40일동안 백성들은 모세를 기다리지 못하고 금으로 송아지를 만들어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자신들의 욕망을 마음껏 드러냈습니다. 이것은 정말 엄청난 영적 반란이었습니다. 송아지는 바알을 상징하는 동물입니다. 그들은 금을 가지고 송아지가 아니라 바알을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것도 자신들을 이집트에서 나오게 한 그 하나님이라고 말입니다. 당시 바알은 자신을 섬기는 인간들의 욕망을 모두 인정해 주고, 또 채워준다고 믿어지는 그런 신이었습니다. 여러분 금이 무엇입니까? 금은 인간 탐욕의 상징입니다. 그 금으로 신을 만들었다는 것은 실은 그들의 욕망이 그들의 신이라는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신의 탐욕과 욕망을 추구하며, 그 욕망을 신으로 삼아 살아가고 싶었던 것입니다.
신이 있다면, 그 신은 그 도구와 조력자 역할만 하면 그만입니다. 더 이상은 참견해서는 안됩니다. 원하는 것만 주고 평상시에는 가만히 구석에 처박혀 있는 신, 그런 신이면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이집트에서 그들을 구원해 낸 여호와 하나님은 절대로 그런 신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타락한 욕망을 버리고, 자기 소원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갈 것을 요구하는 그런 신이었습니다. 자기 백성들에게 요구하는 기준도 분명하고 무척 엄격한 실제로 다른 신과 비교한다면 까다롭기 그지 없는 신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신을 바꾸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여전히 하나님이라고 말하기는 하지만 전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닌, 실제로는 바알인 그런 하나님을 섬기기로 했던 것입니다. 이 일 때문에 하나님은 무척 노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전체를 모두 쓸어버리고 모세로 부터 또 하나의 새로운 이스라엘을 만들려고 하셨습니다. 그 때 모세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섰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모세를 보시고 이스라엘을 용서하셨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가장 큰 반란은 가데스 바네아에서 일어났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거친 광야를 통과하여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 가나안 앞에 와 있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약속대로 들어가서 차지하기만 하면 됩니다. 싸우기만 한다면, 승리는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실 것이었습니다. 그 땅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이들은 낙심하기 시작합니다. 이미 거기 터를 잡고 살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만큼 강한 사람들이었고 성들은 너무 튼튼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두 가지를 폄하하기 시작했습니다. 누가 보아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할만큼 풍요로운 땅을 거기 거하는 사람을 삼키는 험악한 땅으로 폄하하고, 자신들을 이집트에서 구원해 내시고 약속대로 가나안을 주실 하나님을 자신들을 거기서 죽게 하기 위해서 불러내신 분으로 모함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들의 이런 말을 다 듣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말 그대로 해 주셨습니다. 정말 광야에서 죽게 해 주셨습니다. 광야에서 출애굽 1세대를 모두 죽게 하신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사건은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을 때 벌어졌습니다. 그들이 모압의 여인들에게 정신이 팔려서 그 여인들과 음행하기 시작했고, 결국 그 여인들이 섬기는 신들에게 절을 하며 그 제사음식을 먹었던 것입니다. 이 일로 하나님은 크게 노하셨고, 또 전염병을 보내셨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상황을 슬퍼했지만, 여전히 정신차리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죄를 통감하며 울고 있는 상황에서 버젓이 자신의 텐트로 미디안 여인을 데리고 들어간 것입니다. 이 때 나선 것이 바로 아론의 손자인 비느하스였습니다. 그 모습을 본 비느하스는 벌떡 일어서서 창을 집어들고는 그 사람의 뒤를 따라 들어갔고, 두 사람을 함께 찔러 죽였습니다. 비느하스의 행동 덕분에 전염병이 그쳤지만, 이미 2만 4천명이나 죽은 뒤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비느하스의 행동을 보고 이스라엘을 향한 진노를 거두셨던 이유는 그의 행동 속에는 하나님의 마음과 꼭같은 마음이 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역사의 참된 의미
흔히 기독교를 역사적인 종교라고 부릅니다. 그 이유는 기독교 신앙은 다른 종교와는 달리 넓게는 인류의 역사 속에서, 좁게는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늘 함께 하시며 함께 움직여 가셨던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며, 그래서 이런 역사 속에 계신 하나님을 뺀다면 우리 신앙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습니다. 기독교를 기독교이게 하며 우리 신앙의 유일한 소망이신 예수님 자신도 하나님이시면서, 한 명의 인간이 되어 2000여년전 유대 땅 갈릴리라는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살아가셨고, 죽으셨으며 또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 분의 죽음과 부활이 의미가 있는 것,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구원의 사건이 되는 것은 그것이 실제 역사 속에서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의 신앙이 이런 역사적인 사건과 사실 위에 세워져 있지 않다면 우리 믿음은 착각이며 기독교 전체는 엄청난 사기극일 수 밖에 없습니다. 만약 성경에 기록된 그 어느 사건 하나라도 역사적인 사실이 아니라면 그것을 믿는 우리의 믿음은 그 믿음이 강하면 강할수록 오히려 더 우리를 실망시킬 것이며, 결국 우리 인생을 더욱더 확실히 사기당한 인생이 되게 할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일차적으로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사실, 그러니까 역사 속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입니다. 그 역사적 사실이 우리의 신앙을 떠받치는 하나 밖에 없는 견고한 기초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모든 역사가 그렇듯이 성경의 역사도 그저 우리에게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만 기록된 것은 아닙니다. 성경의 역사는 우리 신앙의 객관적인 기초의 역할도 해 주지만, 또 하나의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게 하기 위해서 기록되어 있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이 시편 106편은 시라기 보다는 오히려 간추린 역사같은 느낌을 줍니다. 실제로 이 시편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역사의 기록입니다. 1절부터 3절, 그리고 끝부분인 47절부터 48절을 제외하면 전부가 이스라엘의 아주 어두운 역사를 그리고 있습니다. 출애굽 직후부터 시작해서 사사시대까지 이스라엘이 저질렀던 영적인 반역들을 파노라마처럼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스라엘의 타락과 범죄, 그로 인한 민족적인 멸절의 위기들... 이것이 시편 106편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시편이 이런 참담하고 아슬아슬한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것은 단지 이스라엘의 실패의 역사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 시편이 진짜로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것, 알려주고 싶어하는 것은 따로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멸망하지 않고 여전히 남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지구상에서 참 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섬겼던 유일한 민족이고 또 나라였습니다. 그들이 섬긴 하나님은 이런 저런 허접한 잡신들과는 전혀 다른 분들이었습니다. 열 가지의 상상할수도 없는 기적을 일으켜 애굽의 손아귀에서 이스라엘을 건져내셨고, 홍해를 둘로 쩍 갈라 그 밑에 탄탄대로를 만들어 주실만큼 어마어마한 능력을 가지신 분이셨습니다. 무엇보다도 그 분은 자존심이 무척 강하신 분이셨습니다. 자신이 이런 저런 잡신들과 동급으로 취급되는 것을 가장 못 견디어 하시는 분이셨고, 그래서 다른 신들과 함께 신앙의 대상이 되는 것도 절대로 허락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게다가 사람들의 속마음과 의도까지 속속들이 아시는 그런 분이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이 만약 내 편이 아니라 나를 대적하신다면, 나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대신에 화를 내신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 벌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믿고 섬기는 하나님은 바로 이런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런 하나님을 믿고 섬긴다고 하면서도 이런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는 일들을 반복했으며, 또 대놓고 무시하는 일들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결과가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이스라엘은 망해도 수 십번, 수 백번은 더 망해야만 마땅합니다. 완전히 사라진지가 오래여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여전히 남겨져 있습니다. 여전히 그래도 하나님을 믿는 또 찾는 사람들로서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열 가지 기적이 일어나고 홍해가 갈라졌던 것보다 더한 기적 중의 기적이고 은혜 중의 은혜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시편 기자가 알려주고 싶어하는 첫번째의 사실이 바로 이것입니다. 비록 이스라엘이 지금 하나님의 징계 중에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남아 있고, 그것 자체가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 그리고 긍휼히 여기심을 풍성하게 증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어두운 역사, 누구나 눈쌀을 찌푸릴 수 밖에 없을만한 역사를 이야기하면서도 듣는 사람들에게 함께 와서 찬양하자고, 감사하자고, 선하시고 인자하심이 영원한 하나님을 노래하자고 찬양집회 초청장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신지 모르지만, 저는 문득 문득 ‘내가 정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맞나? 이렇게 하나님을 함부로 대하면서도 진실로 그 분을 섬긴다고 할 수 있나?’하는 생각을 하면서 섬찟하게 두려워 질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수없이 그런 순간들을 반복해 왔으면서도 여전히 살아남아 있고 또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계속해서 그 분의 은혜를 기대할 수 있는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깊은 감사를 드리곤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 그 징계가 조금 심하다고 생각되면 하나님이 정말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 맞는가? 하나님이 나를 선대하시는 것이 확실한가? 혹시 하나님은 나를 미워하시고 버리신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우리는 반대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살아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고 있다, 그 동안 내가 하나님 앞에서 보인 불신앙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바로 잡으시려는 하나님의 수많은 징계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으로 남아있다’고 말입니다. 이것이 진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고, 또 찬양할 수 있습니다. 내가 당하는 환란이 믿음 때문에 당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인증서입니다. 그 정도는 넘어 설 수 있다고 여기셨기 때문에 영원한 상을 주시기 위해서 주시는 기회입니다. 또 내 잘못 때문에 당하는 징계라면 그 징계는 나를 버리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 찾으시기 위해서 주시는 은혜입니다. 또 그저 주어지는 징계는 나를 더 성숙하고 단단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주시는 훈련과정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이런 믿음의 진실을 생각할 수 있어야 그 일 자체에 함몰되고 주저 앉지 않을 수 있습니다. 또 그 일이 끝나고 난 후에 풍성한 영적인 유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과거에 있었던 실패의 역사,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용서하시고 기다리시며 다시 회복시키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우리는 비록 힘들고 어려운 상황 가운데 있더라도 이스라엘이 그랬던 것처럼 원망과 좌절, 그리고 불신앙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분께 가장 뜨거운 감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억’이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이 여기에 이르려면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잊지 않고 기억하는 일’입니다. 오늘 시편을 가만히 읽어보면 시편 기자는 이스라엘의 실패, 그것도 계속해서 반복되는 비슷한 실패를 이야기하면서 그것은 이스라엘이 기억하지 못하고 잊었기 때문에 반복된 것들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시편에 기록되어 있는 이스라엘 실패의 역사들은 그들이 모두 한 가지를 잊어버렸기 때문에 반복된 비극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잊은 것이 무엇입니까? 얼핏 생각하면 그들이 잊은 것이 과거의 역사였을 것같습니다. 과거의 실패에 대한 기억이 없어졌으니 다시 똑같은 잘못을 하게 되는 것이죠. 마치 큰 인심 써서 풀어주면 금방 자신이 미끼를 물어서 죽을 뻔했다는 것을 잊고 그 미끼를 또다시 덥썩 무는 붕어처럼 말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참으로 잊어버린 것, 기억하지 못했던 것은 과거의 사건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심지어는 실패한 역사가 주는 교훈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잊어버린 것, 시편 기자가 이스라엘이 잊었다고 말하는 것, 그래서 다시 기억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성경의 역사적인 기록, 혹은 개인이나 공동체의 신앙적인 역사가 가지는 독특한 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일반 역사는 교훈을 줍니다. 성공의 역사는 같은 종류의 성공을 거두기 위한 교훈을 주고, 실패의 역사는 같은 실수와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한 교훈을 줍니다. 물론 개인이나 공동체의 신앙의 역사, 그리고 성경의 역사 또한 그런 교훈을 줍니다. 성공적인 신앙생활을 가능하게 하고 신앙적인 실패를 피하는데 도움이 되는 여러가지 교훈을 줍니다. 그러나, 개인이나 공동체의 신앙역사는 우리에게 이런 교훈을 주는 것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사실은 이것이 하나님께서 역사의 하나님이 되시고, 역사 속에서 사람들과 함께 하시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보여주고 하나님을 알게 해서 결국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현재의 방향을 정하고 미래로 나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의 신앙적인 경험이 현재의 믿음을 모습을 결정하고, 미래의 믿음을 위한 재료가 됩니다. 만약 과거의 신앙의 역사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린다면 결국 현재를 살게하고 미래를 살게하는 믿음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기억상실증에 걸리지 않는 한 과거에 있었던 신앙적인 경험에 대한 기억 자체가 없어지는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기억은 있습니다. 그 일 자체는 잊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자꾸 실패합니다. 넘어집니다. 똑같은 죄를 반복합니다. 왜 그렇게 될까요? 분명히 기억하는데 왜 그런 일이 일어날까요? 그것은 기억 자체가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과거의 경험을 통해서 주신 기억의 사용방법을 잘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영적인 경험에 대한 기억은 단순히 사건에 대한 기억이 아닙니다. 그 기억은 과거의 사건 속에서 그 사건을 움직여 가셨던 하나님에 대한 기억입니다. 홍해가 갈라진 사건은 단순히 바다가 갈라지고 그리로 걸어갔던 사건이 아닙니다. 그 일을 기억한다는 것은 그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아닙니다. 홍해의 기적을 기억한다는 것은 바로 그 일을 행하신 하나님을 기억한다는 것이고 그 기억을 믿음의 재료로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놀라운 은혜와 기적을 주시는 것은 단순히 그 일에 대해서 놀라고 기뻐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 신앙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오래 예수를 믿은 사람들치고 하나님의 큰 은혜를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간증거리 하나 둘 없는 사람이 어디있습니까? 그런데도 여전히 믿음은 약합니다. 쉽게 흔들립니다. 전에 했던 실패를 거듭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일을, 그 사전 자체를 기억하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그 일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신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로 그 하나님이 언제나 변함없이 영원히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동일하게 함께 하시고, 미래에도 변함없이 함께 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결론 : 하나님을 기억하자, 그리고 하나님을 신뢰하자.
우리는 저마다 과거의 신앙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게 실패한 역사이든 승리한 역사이든 짧든 길든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서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 신앙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마 그 역사가 없다면 그리고 다른 역사였다면 지금 우리의 모습도 지금과는 전혀 다를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는 신앙역사 속에서 일어났던 사건들도 중요하지만 그 사건을 기억하는 기억이 더 중요합니다. 그 기억이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끊임없이 증거하는 증인이 되어 하나님은 언제나 신뢰하고 믿고 의지할만한 분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반복해서 확신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그 기억이 기억에만 머문다면, 그저 과거의 추억에만 머문다면 그 역사와 그 역사에 대한 기억은 우리에게 큰 능력이 될 수 없습니다. 열 가지 기적을 행하신 일에 대한 기억도, 홍해를 가르신 일에 대한 기억도, 심지어는 40년 동안 수백만명을 먹이신 일에 대한 기억도 우리 신앙의 현재와 미래를 승리의 역사로 만드는 재료가 될 수 없습니다.
이제는 내 과거의 신앙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을 보는 연습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 때 거기 계시며 역사하셨던 하나님에 대한 기억을 현재와 미래의 믿음을 위한 재료로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유혹이 찾아오고 그 유혹 앞에 부족하고 연약하게만 보이는 자신을 보게 될 때, 예전에 함께 하셨던 하나님께서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함께 하시며 역사해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믿음을 지켜가시고 또 더 강건하게 만들어 가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우리의 신앙 역사를 통해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 하나님을 신뢰하게 될 때 하나님은 우리 미래의 신앙의 역사를 승리와 찬양의 사건들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이 영원한 말씀의 하나님, 변함없는 약속의 하나님을 신뢰하며 찬양과 감사, 무엇보다도 더 큰 믿음으로 채워져 가는 복된 삶이 되게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약속 : 우리가 우리의 기억을 믿음의 재료로 사용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미래를 신앙의 승리로 이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