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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2011년 매일성경 설교 2.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사용법]


방문하시는 중에서 혹시라도 도움이 될까 적어봅니다


1. 읽기는 그냥 사이트에서 읽으시거나 마우스로 클릭하시면 다운로드 되는데, 그렇게 읽으시면 됩니다

2. 설교를 들으시려면 첨부되어 있는 mp3파일(zip파일)을 위의 방법으로 다운로드 하셔서 들으시거나네번째 회색상자의 작은 화살표를 클릭하시면 들으실 있습니다. , 경우에는 중간에 스톱하시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합니다. 사이트의 서비스가 그렇게 밖에 제공되지 않습니다. 

3. 다녀가실 때는 짧은 댓글 부탁드립니다

) 누구 누구 다녀갑니다. 댓글은 저만 있도록도 저장할 있습니다






본문 : 마가복음 3장 1-19절



다양성이 허용되지 않는 것

여러분도 그런 경험이 있으시겠지만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분명히 그 사람과 내가 같은 사람이나 혹은 같은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전혀 다르게 생각하고 느끼고 있어서 깜짝 놀라게 될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이런 일들에 대해서 놀라고 때로는 이해할 수 없어 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다양성은 거의 모든 사람들의 이익이나 입장, 성향이나 취향 등이 다르기 때문에 생겨날 수 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실 이런 것들에 있어서 이 세상에는 단 두 사람도 완전하게 일치되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다르고, 남편과 아내가 다르며, 형과 동생이 다르고, 선생님과 학생이 다르고,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다 다릅니다. 그래서 이렇게 모두 다른 사람에게 자신과 같아지기를 요구하거나 혹은 다른 사람은 다 틀리고 나만 맞다는 사고방식을 가지는 것은 오히려 가장 틀린 사고방식일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세상에는 이런 다양성들이 인정되는 분야들도 있지만, 단 하나의 사고방식과 반응만이 올바르고 의미있는 사고방식과 반응으로 인정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이 가르쳐 주신 진리입니다. 물론 사람들은 누구나 예수님에 대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 분의 말씀이나 삶, 그리고 존재에 대해서 이런 저런 의견들을 가질 수 있습니다. 또 이렇게 저렇게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모든 의견들과 반응들이 전부 의미있는 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적어도 그 분을 통해서 구원을 얻고, 그 분의 말씀을 통해서 생명의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해서 말씀해 주신대로 예수님을 믿어야 하고, 그 분과 그 분의 가르침 앞에서 그 분이 원하는 반응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은 본문을 통해서 과연 예수님께 대한 올바른 반응이란 어떤 반응인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예수님께 대한 반응 1 : 바리새인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을 둘러싼 여러집단의 사람들이 예수님과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등장하는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도 그 사람들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한쪽 손에 장애를 입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당시 정황을 살펴보면 이것은 예수님께서 회당으로 오신다는 것을 알고 바리새인들이 미리 마련해 놓은 함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안식일이라고 해서 병자를 나몰라라 할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실을 아는 바리새인들은 그래서 일부러 한 손에 장애를 입은 한 사람을 데려왔고 만약 예수님께서 그를 고치면 안식일 법을 어긴 일로 예수님을 고소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덫의 한 가운데로 들어오셨지만, 결코 그 덫을 피해가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일부러 모두가 보는 가운데 그 사람을 세우셨습니다. 그리고는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생명을 살리는 것, 어느 것이 더 율법에 합당하냐? 어느 것이 더 올바로 율법을 지키는 것이냐?” 이렇게 말씀하신 예수님은 무척이나 근심하시면서도 동시에 노하셨습니다. 


안식일은 그야 말로 쉼을 얻는 날입니다. 안식하고 안식을 주는 날이 바로 안식일입니다. 하나님은 일주일의 하루를 거룩한 날로 정하시고는 그 날은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원래 하나님께서 ‘일’이라고 말씀하시며 금하신 것들은 자신의 이익과 생계, 혹은 쾌락을 위한 일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일이란 자기 중심적인 일들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이런 안식일을 더 완전히 지키기 위해서 그 위에 수많은 세부 규정들이 덧붙여졌습니다. 그 규정들은 전혀 안식일을 안식일 답게 지키는 일과는 상관이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심지어 그 규정들 중에는 당장 죽는 사람이 아니면 고쳐서는 안된다는 것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당장 죽는지 아닌지 명확하지 않은 사람들, 당장 죽지는 않지만 무지하게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며, 또 안식이 필요한 세상과 모든 사람들에게 안식을 주기 위해 적극적으로 선을 행해야 하는 날이 그저 일하면 안되는 날이 되었고, 내가 일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에게 안식을 주는 일조차 금지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람들은 바로 그런 율법 아닌 율법을 근거로 예수님을 고소하려고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더 율법에 합당하냐?”고 물으셨고 사람들은 대꾸할 어떤 말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질문의 답은 너무나 명백했고, 그 질문을 통해 자신들이 얼마나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지가 그대로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완악함에 대해 어찌할까 걱정하시면서도 무척 노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서 있던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로 그의 손은 말끔히 회복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생전처음 안식일다운 안식일을 선물해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그리고 그 병자를 고치시는 행동을 통해 진짜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듣고 보게 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참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진리가 가장 명확하게 가르쳐 져야 하는 회당에서 참 스승되시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안식일에 대한 가장 명확한 진리를 귀로 듣고 눈으로 보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이쯤되면 바리새인들과 사람들은 겸손히 그 가르침을 받고 예수님께 고개를 숙이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것이 진리가 가르쳐 져야하는 회당에서 안식일에 온전한 진리를 가르치신 참된 스승에 대한 마땅한 태도요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6절은 그들의 반응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니라”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그들에게 안식일은 생명을 살리는 날이지 죽이는 날이 아니며, 선을 행하는 날이지 악을 행하는 날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주셨고, 그들은 그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듣고 배운 것과는 정반대로 나갑니다.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선을 행하는 대신에 생명을 죽이기 위해서 악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옳은지도 알았고, 또 거기에 동의했으면서도 막상 그 길을 따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진리와 참된 생명과 돌이킬 수 없는 거리로 멀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반응 2 : 큰 무리와 병자들

예수님께서 진리를 가르치시고 이적을 행하시자 바리새인과 권력자들은 예수님에게서 점점 멀어져 갔지만, 예수님을 향해 가까이 오면서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첫번째 사람들이 바로 ‘큰 무리’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사방에서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디를 가든 예수님을 따라다녔고,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을 보기를 원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께로 나아온 주된 동기는 믿음이 아니라 ‘호기심’이었습니다. 무언가 특별한 가르침을 받고, 놀라운 일을 보기를 원하는 욕구가 그들을 예수님께로 나아오게 했던 것입니다. 이들과 섞여서 예수님을 간절히 바란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심한 질병에 걸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어디서도 치료를 받을 수 없었던 이 사람들은 열 두 해 동안 혈루병을 앓았던 여인처럼 예수님을 만짐으로써 치료를 받으려고 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너무 밀어 재끼는 바람에 예수님은 아무 일도 하실 수가 없어서, 바닷가에 배를 띄워놓고서야 가르치실 수 있으실 정도였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반응 3 : 악령에 사로잡힌 사람들

또 한 부류의 사람들도 예수님께 대해서 강렬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들은 바로 귀신들린 사람들, 그러니까 악령에 사로잡힌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들 눈에 예수님이 보이면 당장 달려와서 엎드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외치곤 했습니다. 


각 반응의 의미와 교훈 

각각의 사람들은 자신의 입장과 필요에 따라서 예수님께 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가장 악하고 바람직하지 못한 반응을 했던 사람들은 귀신들린 사람들이 아니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이것은 무척 이상한 일일 수 밖에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뜻에 정통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뜻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은 바른 가르침이 들려온다면, 비록 그것이 자신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바로잡을 요구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 가르침을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보여서는 안되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올바른 가르침을 듣고 거기에 동의했으면서도 오히려 보통 때는 결코 서로 결코 하나될 수 없었던 사람들과 한통속이 되어 예수를 죽일 방법을 찾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그들은 진리와 예수님이라는 ‘자극’에 대해서 가장 바람직하지 못한 ‘반응’을 내놓았던 것입니다. 


이들이 이런 길을 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그들 마음 속에 있는 ‘완악함’ 때문이었습니다. 완악함은 ‘올바른 것에 대한 거부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맞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것도 압니다. 그런데, 마음 속에 완악함이 있는 사람들은 자신을 올바른 것에 맞추어 가는 대신에, 올바른 것을 불쾌해 하며 거부하게 되고, 나중에는 자신이 틀리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나 사람에게 해를 가합니다. 그렇게 진리와 구원에서 점점 더 멀어져 갑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진리는 오히려 독이 됩니다. 진리가 많이 들려오면 들려올수록 점점 더 귀를 닫게 되고, 그 진리만이 줄 수 있는 자유와 구원과는 점점 더 거리가 먼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른 부정적인 마음도 그렇지만, 그래서 이런 완악함이 내 마음 속에 있는지를 살피는 일은 무척 중요합니다. 혹시 올바른 진리가 무리없는 형식으로 전해지는데도 이상하게 마음에 거부감이 들고 점점 더 그것에 대한 거부감이 생겨난다면 빨리 그런 마음을 처리해야 합니다. 그 마음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돌이켜야 합니다. 사실 이런 마음은 많은 경우 자존심을 가장하고 찾아오기 때문에 알아차리고 또 떨쳐 버리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이 더 자라나게 되면 나중에는 내 마음 자체가 완고해져 버립니다. 그러면 진리에 대해 온전하고 바람직한 반응을 내놓지 못하게 되고, 결국 그 진리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도 올바로 반응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될 수 있습니다. 꼭 바리새인들처럼 말입니다. 


큰 무리들과 병에 걸려 고생하는 자들은 호기심과 간절한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예수님을 찾았고, 예수님께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런 반응이 반드시 잘못된 반응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놀라운 일을 보기를 원하고 바른 가르침을 받기를 원하며, 또 절실한 삶의 문제를 해결받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을 만족시켜줄 수 있는 대상에게로 달려가는 것은 결코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도 그런 필요들을 만족시켜 주십니다. 그러나 이런 반응이 잘못된 것은 아닐지라도 충분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신앙의 출발점이나 예수님께로 가는 통로는 될 수 있어도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머문다면 그것은 결코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구했던 믿음, 그래서 우리를 구원얻게 하는 믿음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귀신들린 사람들인데, 이 사람들은 오늘 본문에서 유일하게 예수님을 정확하게 알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디서나 예수님을 제일 먼저 알아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신분에 어울리는 태도를 취했습니다. 예수님께로 와서 납작 엎드려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이들의 고백도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서 완전히 정확한 지식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 사람들을 제외하면 그 때까지 그 누구도 예수님을 그렇게 정확하게 알았던 사람들이 없고, 그렇게 고백한 사람들은 더더욱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더 이상 그런 이야기를 하지 못하도록 금하셨습니다. 아직 그것이 알려질 때가 안되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들의 그런 고백이 참된 의미가 없는 고백이었기 때문입니다. 귀신들린 사람들의 예수님께 대한 지식은 나무랄데 없이 정확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지식을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인정하고 고백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반응 또한 예수님이 원하시는 반응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고백은 그들의 믿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고, 그래서 결코 그들을 구원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른 지식은 중요합니다. 진리에 대한 바른 지식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은 무척 중요합니다. 바른 지식이 기초가 되지 않은 것은 그 어떤 것도 하나님께는 의미없는 것들이기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바른 지식이 전부는 아닙니다. 그 지식을 인정하고 그것을 입으로 고백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바른 지식은 반드시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올바른 믿음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그 믿음은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이 될 수 있습니다. 


열 두 제자를 세우시는 일에서 얻는 교훈

각양 각색의 사람들이 예수님께 대한 서로 다른 반응을 보이는 혼란스럽고 어수선한 가운데 예수님은 많은 제자들의 무리 중에서 열 두 명의 제자를 세우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를 어떻게 부르시고, 왜 세우셨는지를 살펴보면서 과연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바른 반응이 무엇인지를 간접적으로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그런 목적들을 위해서 사람들을 부르시는 것이라면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 대한 바른 반응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성경은 예수님께서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셨다고 말합니다. 결코 제자들이 원해서 제자가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을 부르셔서 세우신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경험하는 모든 부르심이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성도가 되며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우리의 의지나 바램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능력이나 자질, 그리고 됨됨이도 그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니까, 그저 그 분이 기뻐하시기에 그 분이 부르시고 세우시는 것입니다. 참된 믿음은 이것을 압니다. 예수님께서 그 분의 기쁘신 뜻대로 나를 부르시고, 내 속에 그 분의 기쁜 뜻을 두시고 행하게 하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참된 믿음은 견고합니다. 흔들리지 않습니다. 내 의지, 내 능력, 내 관심이 나를 예수께로 이끈 것이 아니라 그 분의 기뻐하심이 나를 부르셨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 사실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을 압니다. 그래서, 참된 믿음은 자신의 감정이나 의지, 혹은 능력에 의지해서 주님을 따르지 않습니다. 참된 믿음은 항상 부르시고 세우신 은혜, 그 기쁘신 주님의 뜻에 의지해서 주님을 따릅니다. 주님이 나를 기뻐하신다는 사실, 그래서 나를 부르시고 또 붙들어 주신다는 사실에 의지해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견고하고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성경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왜 부르셨는지에 대해서 말해 줍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세우신 첫번째, 그리고 가장 중요한 목적은 ‘함께 있게하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제자는, 그리고 성도는 “나는 예수님과 함께 거하기 위해 부름받았다”는 사실을 언제나 기억해야 합니다. 열두 제자들이 제자답게 살아갈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살며 예수님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것처럼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거할 때 그 분을 배우고 성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과 함께 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우신 두번째 목적은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를 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1장 29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해서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그들의 여러 회당에서 전도도 하시고 귀신들을 내쫓으시니라”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을 통해 볼 때, 이 두 가지는 특별한 두 가지 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요약하는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이유도 여기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셨던 일들을 그대로 하게 하시려고 제자들을 선택하고 세우셨습니다. 제자는 스승에게 모든 것을 배워서 스승이 살았던 방법대로 살며, 스승이 하던 일들을 하는 사람입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교회는 예수님께서 하셨던 일들을 그대로 받아서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을 하는데 있어서 자기 열심과 자기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14절을 보면 제자가 주님의 일들을 해야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주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주님의 권한을 위임받아서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분이 보내셔야 전도할 수 있습니다. 그 분이 권능을 주셔야 귀신을 내쫓을 수 있습니다. 영혼을 살릴 수 있으며, 어그러진 것들을 바로 잡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참된 성도들은 마땅히 해야할 일들을 할 때, 항상 자기가 지금 하는 일이 자신의 일이 아니며, 그 일을 하는 힘도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 않습니다. 그래서 항상 그 일을 맡기신 주님의 의중을 살피며, 그 분이 공급해 주시는 능력을 의지하게 됩니다. 맡겨진 일들보다도 오히려 그것을 더 소중히 여깁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목적은 실은 우리에게 한 가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제자란 바로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분과 함께 거해야 합니다. 그 분과 교제하며 그 분의 임재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또한 그 분이 이 땅에 계셨을 때 하셨던 일을 해야하는데, 그 일들 또한 주님이 위임해 주신 주님의 일들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하는데 사용하는 능력과 힘도 주님께서 주시는, 철저히 주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에 항상 그 분만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그렇게 그리스도 중심, 예수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첫번째 목적이 ‘함께 있게 하시는 것’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철저히, 그리고 언제나 예수님과 함께 할 때에만 예수님 중심의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 : 예수님께 대한 바른 반응은 예수님 중심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반응을 보였지만, 예수님께서 원하셨던 바른 반응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중심의 사람이 되는 것, 그 분의 기쁘신 부르심을 받아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것, 그 분께서 주시는 은혜와 능력에 의지해서 살며 주님이 맡기신 일을 주님처럼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반응이었고,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의 참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무엇을 통해서든 항상 주님과 함께 거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모든 것을 그 분께 의지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눈에 보이는 주님과 함께 거하며 그 분을 닮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아니 오히려 더 강력하게 그 분과 거하면서 그 분을 배우고 그 분께 의지해서 살며 일할 수 있는 방법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충만하여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바로 이 성령님을 통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아니 아얘 우리 속에 들어와 계십니다. 우리가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성령님의 온전한 영향력 속에서 살아갈 때, 우리는 그 어떤 방법보다도 더 강력하고 확실하게 그 분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일을 통해 그 속에서 그리스도를 보고 배워가야 합니다. 그 분의 마음과 생각, 성품을 닮아가며 그 분이 살았던 모습을 흉내내야 합니다. 이렇게 하게 하시기 위해서 제자들을 부르셨던 예수님은 오늘도 기뻐하시며 우리들을 부르시고 자녀로, 성도로, 제자로 세우십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대해 다양한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반응이 주님께 대한 정당한 반응도 아니고,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는 반응은 더더욱 아닙니다. 예수님께 올바른 반응을 보여드리시기 바랍니다. 그 분이 원하시는 반응, 우리를 부르신 그 분을 더 기쁘시게 할만한 반응을 보여드리시기 바랍니다. 그 반응은 바로 그 분과 함께 거하며 철저히 그 분께 의지해서 살며 일하는 그 분 중심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런 부분에서 더 자라가고 더 견고해 져서 주님을 날마다 주님을 더 기쁘시게 해 드리고 우리 자신도 더욱 든든한 구원의 반석 위에 세워지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오늘의 약속

이번 주 부터는 설교가 끝나면 그 날의 보너스로 제가 그 날 본문에서 찾은 약속을 하나씩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약속들을 찾아보시고 그 약속에 여러분의 믿음을 더하시기 바랍니다. 그 약속에 순종해서 그 약속이 보증하는 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약속입니다. 오늘의 주신 주님의 약속은 “예수님은 예수님과 함께 하며, 예수님을 의지하려는 올바른 반응을 보이는 사람에게 주님의 충만한 임재를 경험하게 하시며, 성도로 살기에 충분한 능력을 주신다.”라는 약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