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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2011년 매일성경 설교 22. 사단이 우리를 막았도다

본문 : 데살로니가 전서 2장 13-20절 


서론 : 욥기에 대하여...

성도들이 고난을 당하면 가장 먼저 찾는 성경이 바로 욥기입니다. 욥처럼 힘든 고난을 당한 사람도 없고, 그 고난을 욥처럼 잘 견디어 낸 사람도 없으며, 또 욥처럼 고난 이후에 큰 복을 받은 사람도 없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는 성도들이 욥기로 부터 받는 위로와 도움은 굉장히 큽니다. 욥기의 주제는 성도의 고난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고난과 고통 중에서도 전혀 자신의 잘못과는 상관없이 당하는 고난입니다. 그런데, 이것 이외에도 욥기에는 아주 중요한, 어찌보면 신앙에 가히 절대적이라고 할만큼 중요한 한 가지 주제가 더 들어있습니다. 고난 이라는 주제는 오히려 이 주제 안에 들어있는 부차적인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주제는 바로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그러니까 욥기는 고난이라는 주제를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틀 안에서 설명하고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 욥이 고난을 받게 되는 설명과 욥이 고난을 경험하면서 깨닫게 된 것이 모두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고난을 받음에 있어서 욥은 잘못이 하나도 없습니다. 사탄이 세상을 두루 돌아다니다가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그런 그 앞에서 하나님은 대뜸 욥 자랑을 하십니다. 욥기 1장 8절입니다.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욥은 하나님이 가지신 최고의 보물이었습니다. 그러자 사타은 이렇게 말합니다. “욥이 어찌 이유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에게 집과 자녀, 그리고 재물을 많이 주셨으니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죠? 만약 하나님이 그를 치시면 그가 하나님을 욕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과 사탄 사이의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전쟁터는 욥이었습니다. 사탄이 욥의 목숨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받고 욥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욥 안에서 사탄이 이기냐, 하나님이 이기냐 하는 전쟁이 벌어진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 고난에 있어서 욥은 잘못이 없습니다. 사탄이 시비를 걸어왔고 하나님께서 그걸 받아들여서 일종의 전쟁과 내기가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찌 이러실 수가 있느냐고 따진들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러기로 작정하신 것이니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물론 이 결정은 선하신 하나님의 지극히 선하신 결정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는 부당하기 짝이 없어 보이지만 말입니다. 결국 이 전쟁에서 하나님이 승리하셨습니다. 그리고 욥도 승리했습니다. 게다가 욥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주권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욥기는 이렇게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캔버스에다가 인간의 고통이라는 주제로 그린 그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악의 문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사탄이 주는 고통은 엄연히 악한 것입니다. 사탄이 주변 사람들을 충동하고 사주해서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아무래도 선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생겨나는 악한 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만 이 악에 대해서 우리는 꼭 알아야 할 한 가지가 있습니다. 비록 그런 경험들이 괴로운 것이고, 또 우리의 삶과 이 세상에 상처와 악한 결과를 남길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허용하심 속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성도님들 중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의아하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악을 허용하신다는 생각이 무척 생소하고 낯설 수가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이 세상 모든 일들의 주관자이십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을 벗어나는 것은 이 세상에 단 하나도 없습니다. 선 뿐만이 아닙니다. 악도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벌어지는 모든 악들 또한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제 아래에 있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큰 일 아니겠습니까? 그 부분에서는 하나님도 어쩌실 수 없게 되니까 말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직접 악을 행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완전히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악을 행하시지 않습니다. 악한 일을 직접 저지르시는 법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저 악을 ‘허용’하시는 것입니다. 악을 행하도록, 악행이 저질러지도록 그냥 내버려 두시는 것이죠. 그것은 우리가 다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거기에 하나님의 크고 선하신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본문을 통해서 그러한 하나님의 결정과 또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데살로니가 전후서는 악 때문에 쓰여졌다

오늘 본문이 들어있는 데살로니가 전후서는 무척 안타까운 상황에서 쓰여진 서신서입니다. 마치 이제 아장 아장 걷기 시작한 어린 아들을 떼어놓고 멀리 갈 수 밖에 없었던 어머니가 그 아들의 소식을 듣고 나서 편지를 보내는 마음같은 같은 그런 마음으로 써 내려간 편지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무척 쉽게 세워졌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회당에 들어가 설교하자 마자 거기 모였던 사람들 중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그들로 이루어진 것이 바로 데살로니가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바울은 처음 데살로니가에서 설교하고 가르친지 3개월 정도 되었을 때 바울과 실라는 그 지역에서 추방을 당하게 됩니다. 이제 막 세워진 교회입니다.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아이입니다. 앞으로도 젖을 더 먹어야 단단해 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런 교회를 놓고 그 도시를 떠나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 도시를 떠나자 마자 기독교인들을 향한 로마의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바울은 다시 그들을 향해 가려고 했습니다. 무슨 수가 있어도 가려고 했습니다. 도와주지 않으면 안되는 급박한 상황이었으니까요. 그런데, 도저히 갈 수가 없었습니다. 적어도 집적 가는 일은 완전히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얼마나 안타깝고 또 안타까웠을까요? 얼마나 안쓰럽고 힘들었을까요? 젖먹이를 떼어놓고 외지로 왔는데, 갑자기 집안에 풍파가 닥쳐왔다는 소식을 들은 어머니의 심정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런데, 너무나 기쁜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 어린 갈라디아의 성도들이 자신들에게 닥친 환란을 잘 견디고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 상황 속에서도 믿음을 잘 지키고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바울은 펜을 듭니다. 그리고는 편지를 써 내려갔습니다. 그들을 칭찬하고 격려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런 고난의 상황 가운데 꼭 필요한 교훈을 주고, 그 고난을 이해하고 선용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쓰여졌고 전해졌으며 지금 우리 손에 성경으로 주어진 것이 바로 데살로니가 전후서입니다. 

사탄이 사람들을 충동해서 바울이 생긴지 얼마 안된 데살로니가 교회를 떠날 수 밖에 없도록 만든 것은 무척 악한 일입니다. 그렇게 남겨진 어린 성도들에게 핍박과 환란이 닥쳐온 일도 선한 일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교회로 다시 돌아가려고 그렇게 애쓰고 애썼지만 결코 갈 수 없게 만든 ‘사탄의 방해’도 너무 악한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데살로니가 교회를 둘러싼 모든 환경과 그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단 하나도 선한 것이나 아름다운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환경과 사건들 때문에 쓰여진 것, 아니 쓰여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 바로 이 데살로니가 전서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 데살로니가 전후서를 성경에 넣으시기 위해서는 이런 모든 악한 상황들이 있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 데살로니가 전후서를 성경에 포함시키셨다면 이 책들은 성경에 꼭 필요한 책들일까요? 아니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책들일까요? 꼭 있어야 하는 책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성도들의 성도들을 바로 세우고 바로 교훈하기 위해서 데살로니가 전후서는 반드시 성경 속에 꼭 포함되어야만 하는 책이었던 것입니다. 아마 사탄은 그런 식으로 상황을 악하게 만들고 그 안에서 성도들과 바울을 괴롭히면서 낄낄대며 웃었을지도 모릅니다. 모든 것이 자기 뜻대로 되어간다고 말입니다. 그렇지만 사탄은 하나님의 깊은 지혜를 절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모든 목적들을 이루시기 위해서 얼마나 치밀하고 빈틈없이 일하시는지, 또 사람들이나 자신들의 생각과 사고방식을 거스르고 부수시면서 일하시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사탄은 자기 마음대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스스로 느끼기에는 그랬을지 몰라도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대적할 가장 강력한 무기로 주실 성경을 완성시키는데 없어서는 안될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때로 우리 삶 속에도 이런 일들이 벌어지곤 합니다. 정말 성경의 표현대로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는 것’같은 상황이 됩니다. 어느 곳을 둘러보아도 선한 것이 없습니다. 내 편이 없고 기댈 곳이 없습니다. 전부가 나의 적이고 나를 괴롭히려고만 합니다. 내 뒤에서 사탄이 낄낄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습니다. 나는 곧 쓰러질 것 같습니다. 회원 여러분, 그렇다면 이런 상황은 사탄의 손 안에 있는 상황일까요? 하나님께서는 그런 상황에서 속수무책이시고 또 나를 버리신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상황은 사탄의 생각대로 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선은 없고 악만 가득 차 있는 것 같으니까요. 그러나, 언제나 변함없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탄 위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황은 사탄의 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느껴지는 느낌만 의지해서는 안됩니다. 보여지는 경험만 보아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없고 악인과 사탄만 있는 것 같이 보이더라도 언제나 그 뒤에서 모든 것을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 가시는 선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생각하고 또 신뢰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사실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러면 그 모든 일들은 악한 일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내 신앙의 역사를 영광스럽게 하기위해 없어서는 안될 재료들이 되어줄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왜 견고했는가? 

비록 굉장히 열악한 상황 가운데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였지만 이 교회는 그 어떤 교회보다도 바울로 하여금 하나님께 더 많은 감사를 드리게 한 교회였습니다. 바울이 그 교회를 바라 보면서 하나님께 얼마나 많은 감사를 드렸는지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이라고 표현합니다. 생각할 때마다 감사합니다. 기억할 때마다 감사합니다. 걱정하고 근심하게 만들 수 밖에 없는 데살로니가 교회는 오히려 바울을 최고로 감사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감사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미 말씀드린 대로 그들이 신앙을 갖게 된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신앙을 너무나 견고하게 잘 지켜나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원래부터 그들이 견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다른데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감사했던 진짜 이유이기도 했고 그들의 믿음이 그렇게 견고한 믿음이 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이것이 바울이 그들을 생각할 때마다 그렇게 감사하게 만들었고, 또한 그들이 그런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참 특별한 교회였습니다. 바울이 도착하자 마자 전한 복음을 듣고 회당에 나가던 이방인 유대교인들 중에서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바울과 실라를 따랐습니다. 몇몇이 회심한 것이 아니라 큰 무리가 회심했습니다. 그리고 평민들이나 혹은 천민들 뿐만 아니라 지역의 명문가문 출신의 부인들도 회심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회심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회심은 온전한 것이었고 핍박 중에서도 흔들리지 않을만큼 견고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왜 그들이 그럴 수 있는지를 알았습니다. 무엇이 그들에게 그런 능력이 되어주는지를 알았습니다. 그것 때문에 그렇게 감사한 것입니다. 이들도 다른 지역의 사람들처럼 전해지는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듣는 것이 다른 사람들과 달랐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자 그것을 자신들을 설득하려는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그 말씀이 그들에게 능력이 되었습니다. 그들 안에서 강하게 역사해서 비록 영적으로 어린 그들이었지만 그들을 너무 일찍 찾아온 어려움과 핍박도 너끈히 견딜 수 있게 해 주었던 것입니다. 

회원 여러분, 오늘날도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집니다. 그리고 우리들도 그 말씀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이상하게도 우리는 쉽게 흔들리는 것 같습니다. 자꾸 넘어지는 것 같습니다. 믿음 때문에 고난과 고통이 찾아오면 쉽게 슬퍼하고 낙심하는 것 같습니다. 오래 믿었는데도 오늘 본문의 데살로니가 교인들보다도 훨씬 약한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고 우리도 그 말씀을 듣는데 왜 우리 안에서는 그 말씀이 강하게 역사해서 우리를 견고하고 든든한 성도로 만들어 주지 못할까요? 그들 속에서는 그렇게 짧은 시간에 그렇게 강하게 역사했던 복음이 왜 우리들에게는 똑같은 일이 일어나지 못하게 할까요? 오늘 말씀이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이 들어 있습니다. 그 해답은 믿음입니다. 바울은 분명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서 역사하느니라” 이 속에서 우리는 바울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향하여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라고 이야기 했을 때 그 말을 무슨 뜻으로 사용했는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말씀이 들려올 때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다는 것은 단지 액면상으로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인정하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기본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고 들은 그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신앙적으로 보면 매우 어린 사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핍박과 환란을 견디어 낼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바울로 부터 들었던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속에서 강력한 능력이 되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말씀이 능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그 말씀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단지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믿음은 말씀을 받아들임으로써 시작되지만 그게 다가 아닙니다. 현관문에 들어선다고 집안 전체를 구경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 풍성한 식탁에 앉아 진수성찬을 즐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거나 또 들려올 때,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은 단지 현관에 발을 들여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진짜는 현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발을 벗고 거실로 성큼 성큼 걸어들어가야 그 집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음식이 차려져 있는 장소로 더 깊이 들어가야 비로소 그 풍성한 식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주인과의 참된 교제를 누릴 수 있습니다. 믿음이 진짜 무엇인지, 그리고 그 믿음이 진짜로 어떤 능력이 되는지를 알려면 믿음의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말씀이 들려올 때 진짜로 필요한 믿음은 바로 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말씀에 삶을 거는 믿음입니다. 그 말씀을 받아들였기에 이제 그 말씀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이 약속하는 것을 마음에 품고 그 소망을 바라보며 그 말씀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사실 내가 말씀을 정말로 믿는다면 이렇게 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진실로 믿는 바대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하나님께서 만드신 인간의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버스 타고 오신 교회에 오신 분 있으시죠? 몇 번 타셨죠? 네. 왜 그 버스를 타셨죠. 그 버스가 나를 대구동부교회 앞으로 데려다 줄 줄로 믿었기 때문이죠. 아무리 버스 노선표에 경유지가 기록되어 있어도 내가 그 노선표를 믿지 않는다면 그 버스를 타지 않습니다. 그 노선표를 믿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 운전사분을 믿었기 때문에 그 버스를 탔고 여러분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는 이런 식으로 믿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들려옵니다. 앉아서 들을 때는 다 믿어집니다. 그런데, 막상 그 약속을 신뢰해서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 때는 그 약속을 따르지 못합니다. 집에서 교회에 가겠다고 생각할 때는 몇 번 버스를 타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정류장에 와서는 그 버스를 타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절대로 교회에 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가 거기에 참 믿음을 더하고 그 약속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 보기 전에는 우리에게 아무런 능력도 되어주지 못합니다. 작은 위로나 잠시의 평안을 줄 수 있을지 몰라도 결코 능력은 되지 못합니다. 힘있게 역사하는 진리가 되지는 못합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서 자신의 믿음생활에 대해서 답답함을 느끼시는 분이 계신다면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성경에서 보고 읽고 묵상하는 말씀들, 그리고 설교를 통해 들려오는 말씀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는지, 참으로 믿고 의지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눈으로 보이는 것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말입니다. 그렇다면 아마 그것이 여러분의 신앙을 힘없게 만드는 주범일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바울과 실라가 데살로니가에 도착해서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바울이 회당에서 세 번에 걸쳐서 전한 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러니까 복음 그 자체였습니다. 그렇게 죽고 또 다시 사신 분이 너희가 기다리는 구원자라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그 복음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구원자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얼마되지 않아서 그 믿음때문에 핍박이 찾아온 것입니다. 회원 여러분, 이 사람들이 예수님이 구원자이심을 흔들림 없이 확신한다면 그 핍박과 어려움 때문에 그 믿음을 포기하고, 구원을 포기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진짜로 복음이 말하는 것을 곧이 곧대로 믿는다면 그런 어리석은 선택을 할 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냥 논리적으로만 생각해 보아도 진짜로 믿는 말씀은 그 사람 속에서 그 사람을 붙들어 주는 능력이 되어 줄 수 밖에 없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가 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의 믿음을 더할 때, 거기에 말씀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강하게 역사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성령충만함 속에서 더더욱 든든해 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어린 데살로니가 교회가 그토록 견고하고 흔들림없이 믿음을 지켜낼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처음에 들려오는 하나님 말씀을 믿은 것은 그들이지만, 나중에는 그렇게 믿음과 하나된 말씀이 그들 속에서 힘있게 그들을 붙들어 준 것입니다. 

오늘 말씀 속에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약속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탄은 언제나 너희 앞을 가로 막을 것이다. 그래서 너희가 아무런 고민이나 어려움 없이 믿음을 지키고 살 수 있는 순간은 거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사탄보다 강하고 사탄이 만들어 내는 그 어떤 방해보다도 강하다. 나는 언제나 그 방해를 뚫고 나의 뜻을 이루어 왔고, 오히려 그 방해를 통해서 하고자 하는 일들을 더 완전히 이루어 왔다. 사탄의 방해를 통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믿음을 증명해 내었고, 참 믿음의 능력을 경험했다. 사탄의 방해는 데살로니가 전후서를 성경에 있게 하는 도구가 되었다. 너는 이런 나를 진실로 믿을 수 있겠느냐? 나를 신뢰하고 나를 따라올 수 있겠느냐?” 회원 여러분, 우리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대답하고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유익하겠습니까? 

우리가 이 말씀에 우리의 참된 믿음을 더하고 합한다면 이 말씀 또한 우리 속에서 강하게 역사할 것입니다. 사탄의 방해와 공격으로 흔들리고 좌절하며 넘어질 수 밖에 없는 순간에 이 말씀이 우리를 붙들고 우리를 다시 세워주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어줄 것입니다. 

결론 : 하나님의 약속에 믿음을 더하자.

고통과 고난은 그 자체로는 선한 것도 기분좋은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괴로운 것이며 또한 악한 것입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 몸으로 느껴지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그 괴로움과 악함 뒤에는 그것을 선한 도구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거듭 말씀드리거니와 들려오는 말씀에 동의하고 받아들이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죄를 이기고 사탄의 방해를 이기기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말씀이 들려오고 그 말씀이 하나님의 약속이 분명하다면 그 말씀에 믿음을 합해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이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가 되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믿음은 나를 세워주고 보호하는 능력있는 말씀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흔들릴 수 밖에 없을 때, 내가 좌절하고 넘어질 수 밖에 없을 때 내 속에서 성령님과 더불어 일하는 그런 말씀이 될 수 있습니다. 

언제나 들려오는 하나님의 약속에 여러분의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리고 그 약속에 여러분의 믿음을 더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의 믿음의 내용이 되도록, 그래서 그것을 의지하고 그것에 순종해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말씀이 여러분의 능력이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을 더함으로 사탄의 그 어떤 가로막음도 뚫고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