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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2011년 매일성경 설교 37. 이태를 지내서

날짜 : 2011-10-16

본문 : 사도행전 24장 24절 - 25장 12절


서론 : 견고함의 중요성

제 삶을 이렇게 돌이켜 보면 하나님께서는 저의 삶 속에서 참 풍성하고 넉넉한 은혜들을 베풀어 주셨던 것 같습니다. 꼭 필요한 은혜가 있다고 여기시면 어김 없이 손에 꼭 쥐어 주시고, 발견하게 해 주셨으며, 또 더 풍성하고 새롭게 만들어 주시곤 하셨습니다. 저는 바로 이런 은혜들이 저를 한 사람의 성도와 목사로서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게 만들어 주었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제 신앙생활의 가장 큰 시행착오들 또한 이런 은혜들을 받은 이후에 생겨났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십니다. 저는 너무 너무 좋아하고 기뻐합니다. 그런데 그 은혜들을 너무 쉽게, 너무 빠르게 놓쳐버립니다. 그래서 때로는 그 은혜를 받기 전보다 더 허전하고 허무해 지며, 허탈감에 빠집니다. 그리고 그 귀한 것을 그렇게 금방 잃어버렸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마치 아빠에게 아주 귀한 선물을 받아들고 너무 너무 좋아하다가 금새 땅에 떨어뜨려 망가뜨려버린 어린아이와 같은 심정이 되어버립니다. 이것이 제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연관해서 반복해서 경험했던 시행착오였습니다. 

저는 이런 일이 왜 계속해서 반복될까를 생각하다가 그것이 다름 아니라 제가 영적으로 견고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말 좋은 것, 정말 필요한 것을 주시고, 그런 것들을 통해서 나를 더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려고 하는데, 그것을 붙들고 간수하며 또 변질시키지 않게 해 주는 영적인 견고함이 없으니 그 풍성한 유익을 누리지 못하고 금새 놓쳐버리고 또 죄책감까지 갖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 보니 은혜를 은혜로 간직하는 데에만 견고함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개인의 영적인 성장과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일답게 하는 것, 그리고 믿음이 주는 유익과 능력을 제대로 누리기 위해서도 영적인 견고함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때부터 견고함이라는 단어를 마음에 새기게 되었고,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게 되었고 조금씩 조금씩 그 견고함이 단단해 질수록 그것이 얼마나 유익하고 능력이 있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바로 그러한 영적인 견고함을 지니고 있었던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 사람은 바로 바울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삶을 통해서 영적인 견고함의 능력을 보여주며, 그리고 그 견고함을 갖추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들 중의 한 가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오늘은 본문을 통해 바울의 견고함을 살펴보면서 그에게서 그 비결 중 한가지를 배워보려고 합니다. 

재판의 아이러니 : 누가 죄인인가? 

죽음을 당하기 일보직전에 천부장에게 구출된 바울은 그 천부장에게 자신이 로마인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그것 때문에 가이사랴로 이송됩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 곳에서 두 사람의 총독에 의해서 재판을 받게 됩니다. 바울이 재판을 받는 동안 총독이 바뀌었던 것입니다. 처음 총독은 벨릭스라는 사람이었고 두번째 총독은 베스도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부화뇌동하고 초조해 하기도 하고 눈치를 보기도 했던 것은 바울이 아니라 두 명의 총독들이었습니다. 

처음 바울에 대한 재판을 맡았던 벨릭스는 애초부터 바울이 아무런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복음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재판을 연기시키고 오히려 바울을 불러서 그 복음에 대해서 더 자세하게 배우는 시간까지 갖습니다. 바울은 당연히 복음을 가감없이 전했습니다.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에 대해서 강론했습니다. 25절은 이 복음을 자세하게 전해들은 벨릭스의 반응은 ‘두려움’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듣고 두려워했다는 것은 그가 복음을 제대로 알아 듣고 인정했다는 것이고 그래서 그 복음을 받아들일 필요를 느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런데, 벨릭스는 그 복음을 온전히 받아들이지도 않고 바울을 놓아주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바울의 상소대로 로마로 보내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 대신 그는 바울을 자주 불러서 대화했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감금해 버립니다. 

바울이 감금당해 있는 동안 가이사랴의 총독이 벨릭스에서 베스도로 바뀌었습니다. 베스도가 총독으로 취임하고 처음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예루살렘의 유대교 지도자들은 그런 정황을 이용해서 바울을 자기들 마음대로 처치할 요량으로 베스도에게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베스도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가이사랴에서 다시 재판할 것을 명령합니다. 그래서 가이사랴에서는 다시 바울에 대한 재판이 벌이지게 되었습니다. 이전처럼 유대교 지도자들은 바울의 죄를 증명해 보려고 안깐힘을 썼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바울의 유죄를 증명해 낼 수 없었습니다. 결국 베스도는 하는 수 없이 바울을 바울이 상소한대로 황제에게로 보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벨릭스는 바울의 무죄를 알았고 복음을 듣고 두려워하기까지 했지만 복음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를 놓아주지도 못합니다. 그 대신 다시 감금해 버립니다. 베스도도 또한 재판을 통해서 유대인 지도자들이 바울을 무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뻔히 그렇게 하면 바울이 죽게 될 것을 알면서도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보내려고 회유합니다. 두 사람은 총독으로서, 그리고 재판관으로서 상황을 아주 잘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진실은 바울은 무죄이며 유대 지도자들은 그런 바울을 무고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을 놓아주어야 하는데, 둘 다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자신이 판단한 대로, 옳은 것을 따르지 못합니다. 오히려 바울을 감금하고 부화뇌동하여 유대인들의 계략대로 바울을 죽음으로 내몰려고 합니다. 여기에 덧붙여서 벨릭스의 경우에는 치명적인 실수를 한 가지 더 합니다.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기회까지 놓쳐 버린 것입니다. 복음을 들었을 때 생겨난 두려움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 두려움은 마음을 열고 그 복음을 받아들이라고 하나님이 그를 준비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주저 앉습니다. 성경은 그가 이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돈 때문이었다고 말합니다. 벨릭스는 몇 번이나 바울을 불러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그것은 처음 자신에게 두려움을 주었던 복음에 대해서 더 듣고 배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바울에게서 돈을 얻어내려는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돈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그에게는 더 이상 복음을 복음으로 받아들이고 반응할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에게 만족을 준다고 생각하는 것의 눈치를 보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사람이라면 그는 사람의 눈치를 보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돈이라면 돈의 눈치를 보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명예나 권력이라면 또 그런 것들의 눈치를 보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의 눈치를 보게 되면 그는 더 이상 선하고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없게 됩니다. 특히 정말 중요한 일에서 올바른 판단력을 상실하게 되고, 올바로 판단한다고 해도 그것을 따르지 못합니다. 그럴 수 있는 자유를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사람의 총독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사람들이 힘을 가지기를 좋아하고 자신의 힘을 늘리려고 애쓰는 것은 그 힘이 자유을 주고 두려움을 없애 준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든든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총독이라면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가장 큰 힘을 가진 사람입니다. 적어도 유대 땅에서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누구보다도 큰 자유를 누리는 사람이어야 하고 누구보다도 흔들림이 없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보면 정반대로 그들이 가장 부자유한 사람들이었고 가장 큰 두려움을 가진 채 이리 저리 흔들리는 사람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회원 여러분, 사람이 힘으로부터 자유를 얻고 견고함을 얻으려면 사람에게 어떤 능력이 있어야 할까요? 바로 언제든지 그 힘을 마음대로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그 힘에 얽매이고 휘둘리게 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사람은 결코 그 누구도 힘을 자기 마음대로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그 힘이 권력이건 명예건 아니면 돈이건 그 어느 것 하나 자기 마음대로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결코 이런 것들을 통해서는 자유와 견고함을 얻을 수 없고 그것을 계속 유지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총독들은 자신들의 권력과 부의 원천이 ‘사람’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은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일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잃어버린다면 그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항상 그들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고, 가장 큰 힘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오히려 가장 부자유하고 가장 불안한 사람들로 살아갈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울은 그와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죄수된 신분으로 재판관인 벨릭스 앞에 불려가지만 그는 흔들림 없이 당당합니다. 전혀 가감 없이 의와 절제와 심판에 대해서 총독과 총독의 부인을 가르칩니다. 두려워한 것은 바울이 아니라 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벨릭스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었고, 그렇게 하면 쉽게 석방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결코 그런 타협을 하지 않습니다. 다시 베스도 앞에선 바울의 모습 또한 전혀 변함이 없습니다. 너무나 당당하고 담대합니다. 재판을 받는 죄인의 신분이지만 전혀 빼앗긴 자유도 없고 두려움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그는 여전히 이전처럼 해야할 말들을 하며, 가야할 길로만 가고 있습니다. 결코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한 채로 바위처럼 든든하게 서 있습니다. 

이태를 지나서

가끔씩 성경을 읽다가 보면 평상시에는 잘 안보이고 그냥 지나쳤던 것들이 이상하게도 눈에 확 들어와 마음과 생각에 깊이 와 박히는 경험을 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저는 예전에도 오늘 본문을 읽은 적이 여러번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상하게 다른 때와는 달리 눈에 밟히는 단어가 있었습니다. 그 단어는 바로 27절에 나오는 ‘이태’라는 단어였습니다. 이 단어가 눈에 들어온 순간 저는 ‘어? 이태라고? 이 이태가 내가 알고 있는 그 이태가 맞나?’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주석을 찾아보고 본문을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그 이태가 맞았습니다. “2년...” 본문은 바울이 예루살렘의 천부장의 호의로 가이사랴에 와서 죄수아닌 죄수로 감금된 지 2년이나 되었다고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단 여섯 자의 두 단어 “이태가 지나서...”라는 말로 말입니다. 

저는 제가 그 동안 사도행전을 읽으면서 왜 이 말을 놓쳤는가를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는 아마도 이 말이 너무 짧고 아무렇지도 않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인 것같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잡혀서 로마로 가는 동안 2년이나 억울하게 감금되어 있었던 엄청난 일에 대해서 사도행전은 이제 겨우 하루나 이틀이 지났다는 듯이 “이태를 지나서...”라고 말하고 휙 지나쳐 버립니다. 그래서 제가 이 말이 얼마나 무게가 있는 말인지 모르고 그냥 지나쳤던 것 같습니다. 둘째는 본문이 보여주고 있는 총독들 앞에서의 바울의 모습이 하나도 변함이 없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벨릭스를 만나는 바울의 모습과 베스도를 만나는 바울의 모습이 너무나 꼭같이 당당하고 견고하며 변함이 없습니다. 그저 어제 그 자리에 섰던 사람이 오늘 다시 거기 서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제가 그 두 번의 재판 사이에 무려 2년이라는 억울하고 답답하며 지루한 세월이 끼어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꼭 가야할 곳이 있었던 바울, 로마로 가야만 했던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잡히게 되고 그래서 가이사랴로 이송됩니다. 금방 끝날 것 같았던 재판이 벨릭스 총독이 유대인들의 눈치를 보는 바람에 길어지게 됩니다. 그가 바울을 가두어 놓은 채로 2년이나 방치했던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런 상황이라면 우리는 얼마나 답답하고 힘들었겠으며 또 심각한 영적인 침체를 경험했겠습니까?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는 그 2년의 세월을 그냥 훌쩍 뛰어넘어버린 것 같습니다. 2년 전이나 그 후나 여전히 흔들림이 없고 서두름이 없습니다. 억울함에 대한 분노도 없고 좌절도 없습니다. 그는 누구도 속박할 수 없는 자유를 가진 자처럼 행동합니다. 회원 여러분, 그의 이러한 견고함은 어디서 나왔을까요? 모든 것을 가졌으면서도 가장 불안하고 부자유스러웠던 두 명의 총독과 전혀 다른 이 당당함과 여유는 과연 어디서 온 것일까요? 

바울의 견고함의 이유는 소명이었다

답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모든 것들은 자신의 소명에 대한 확신에서 나왔습니다. 바울은 항상 자신이 누구이며 왜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는지를 확실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복음을 위해서 부름받은 복음의 일꾼이라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습니다. 그는 항상 자신을 복음의 종으로 인식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나 가이사랴에서나 그가 재판을 받는 모습을 보면 이것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자신을 변호하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빼놓지 않고 항상 말하는 것, 어찌보면 위험을 무릅쓰며 이야기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공회 앞에서도 벨릭스 앞에서도, 그리고 베스도 앞에서도, 자신을 고소하기 위해서 증인으로 나선 유대교 지도자들에 앞에서도 그는 입을 열기만 하면 복음을 전합니다. 피뭍은 십자가의 복음, 그리고 부활의 복음을 전합니다. 인간이 저주받은 죄인인 것과 그 해결책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음을 당당하게 선언합니다. 그는 온통 복음을 전하는 일에 마음과 생각을 빼앗겨 있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그를 향한 부르심, 그러니까 소명이었기 때문입니다. 

소명의 능력

소명은 참 신기한 점이 있습니다. 그 소명을 받기 전에는 그 소명은 나와는 젼혀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그 소명이 나에게 주어지면 갑자기 이 세상에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어지게 됩니다. 부모도, 자녀도, 자신의 인생과 편안함도, 심지어는 자기 목숨까지도 이차적인 것이 되어 버립니다. 이것이 소명이 가진 신비이며 능력입니다. 소명이 이런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소명은 단순히 어떤 사람에게 어떤 일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완전히 새롭게 창조하는 그런 부르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소명을 주시고 우리가 그 소명을 받아들이면 그 소명은 우리를 완전히 새롭게 합니다. 다시 만듭니다. 그 전에는 전혀 상관없던 일이 이제 그것 아니면 절대로 안되는 일로 바뀝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모든 것을 떠나고 모든 것을 버리면서도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아파하고 눈물흘리면서도 그렇게 하는 것을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소명에 순종하는 일을 가장 큰 만족으로 여기며, 그 일을 제대로 할 때 가장 큰 행복을 누리게 하십니다. 바울의 견고함은 일차적으로 바로 그 부르심에서 왔습니다. 그가 소명을 받아들였을 때, 그 소명은 바울을 붙들게 되었고, 그는 결코 흔들림이 없는, 2년동안의 억울하고 답답한 옥살이도 결코 흔들 수 없는 견고한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소명은 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아, 그러면 나는 그런 소명이 없는데 어떻게 하지?”하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이 세상에 그런 소명이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소명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소명에는 우리를 목사나 선교사와 같은 특정한 역할로 부르시는 소명도 있지만, 그것과 더불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으로 부르시는 소명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중에서 진짜 중요한 것은 첫번째가 아니라 두번째의 소명입니다. 실제로 우리에게 주시는 특정한 일로써의 소명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의 역할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목사로 일하고 선교사로 일한다고 해도, 심지어 그 일을 위해서 목숨을 건다고 해도 거기에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목적이 생략되어 있다면 그건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소명에 따라 살아가는 삶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런 직업이 없고 옥에 갇혀 있거나 심지어 병으로 몸저 누워있다고 하더라도 거기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신뢰하면서 믿음을 굳건히 지켜낸다면 그것은 참으로 소명을 지키며 살아가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장사를 하면서 어떻게 고객들을 대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길일까를 고민하고, 자녀를 양육하고 손주들을 돌보면서는 내가 이 아이를 어떻게 대하고 양육하는 것이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방법일까를 고민하며, 일터에서는 어떻게 일하고 또 동료들과 어떤 관계를 갖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일까를 고민하며, 비록 병상에 누워있을 때라도 내가 어떤 마음과 어떤 믿음을 유지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될까를 고민하고 거기서 얻은 대답에 순종하는 것.... 이런 방식의 삶이야 말로 정말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이며 그 누구라도 어떤 상황이나 처지에 있다고 하더라도 행할 수 있는 소명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소명이 없는 사람도 없고, 전혀 그 소명대로 살아갈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도 없습니다. 문제는 진정으로 내가 이 소명을 나를 향한 소명으로 받아들이고 거기 순종하겠는냐 하는 것입니다. 내 생각과 욕망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부르심을 따라 사는 삶을 살아가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삶의 방식이 괴롭고 힘들까봐 불행할까봐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삶을 잘 살펴보십시오. 그가 괴롭고 힘들기만 했습니까? 불행한 삶을 살았고, 손해만 보고 살았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마 이 세상에 바울처럼 자유롭고 충만하며 행복하고 당당한 삶을 살았던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바울처럼 흔들림 없는 삶을 살았던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물론 그런 삶이 쉽고 편하기만 한 것은 아니지만, 그런 어려움과 불편함을 감수하는 만큼 상상할 수 없는 큰 유익이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버스에 타고 있습니다. 그런데 버스가 심하게 흔들립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그렇습니다. 손을 뻗어 손잡이를 잡아야 합니다. 만약 버스 안에 잡을 수 있는 손잡이가 전혀 없다면 그 사람은 넘어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회원 여러분, 우리는 스스로 자신을 위한 손잡이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내 밖에서 나에게 주어진 손잡이가 필요합니다. 우리 삶 전체를 든든히 지탱해 주고,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 우리를 다시 균형잡게 하고, 다시 세워줄 수 있는 손잡이 말입니다. 우리에게 그런 손잡이가 있다면 우리는 결코 세상이 흔들릴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더 이상 내 삶이 흔들릴까봐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 손잡이만 꼭 잡으면 되니까요?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미 그 손잡이가 하나 있습니다. 그 손잡이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라는 소명의 손잡이 입니다. 이제 여러분 자신의 손이나 이 세상이 내미는 손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온 영원히 든든한 소명이라는 그 손잡이를 붙드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그 손잡이를 강하게 붙들면 붙들수록 여러분의 삶은 그만큼 견고해질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경험자로서 드리는 말씀이니 믿고 그렇게 하셔도 결코 속는 일이 없으실 것입니다. 

물론 이 일이 하루 아침에 완전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선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 나를 위한 가장 중요한 소명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매일 매일 그것이 나의 가장 우선적인 관심사가 되도록 되새기시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내 삶의 큰 틀이 하나님의 영광을 향해서 움직여 가도록 조금씩 조금씩 삶의 방향을 수정해 가야 합니다.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소명을 따라서 믿음의 발걸음을 내딛으셔야 합니다. 

결론 :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견고한 삶을 살자

무엇을 하든 어떤 상황에 있든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 무엇인지 고민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다음 최선을 다해서 그 답을 따라 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삶과 영혼은 점점 더 든든해 질 것이고, 진동이 잦아들 것입니다. 참된 당당함과 평안이 무엇인지를 아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소명이라는 든든한 손 잡이를 꼭 붙드셔서 흔들리는 세상, 불안하기 짝이 없는 세상에서 흔들림 없는 바위같은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