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에스겔 8장 1-18절
도입 : 우상숭배에 대하여
구약성경을 보면 우상숭배에 대한 말씀이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전부가 다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것들이죠. 우상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바로 십계명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 이외의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지어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에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우상숭배를 금지한 말씀 중에서 이것만큼 명확하고 분명한 말씀이 없습니다. 다른 신을 섬겨서는 안됩니다. 자신을 위해서 우상을 만들지 말고 거기 절하지 말며 섬기지 말아야 합니다. 그 어떤 모양으로건 만들어서 그것을 신이라고 불러서도 안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상에 대해서 우리에게 주신 명령입니다. 이것은 신양성경에 와서도 전혀 변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 51장 17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사람마다 우준하고 무식하도다 금장색마다 자기의 만든 신상으로 인하여 수치를 당하나니 이는 그 부어만든 우상은 거짓이요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 또 고린도 전서 8장 4절을 보면 우상에 대해서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 밖에 없는줄 아노라”라고 말합니다.
이 모든 말씀들을 종합해 보면 이런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다른 신은 없습니다. 다른 신이라는 것은 아얘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신 같아도 신이 아닙니다. 신이 아닐 뿐만 아니라 실제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특별히 우상으로 표현된 다른 신들은 정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실체가 없는 것이고 허무한 것입니다. 이것이 다른 신, 그리고 우상의 실체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런 우상을 섬기는 일을 가장 가증한 죄라고 이야기하면서 가장 강하게 금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아무 것도 아닌 것, 심지어는 없는 것을 섬기는 것을 그렇게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왜 성경은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고, 다른 신은 없다고 설명해 놓고 왜 그것들을 만들고 섬기는 일에 대해서 왜 그렇게 강하게 금지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상숭배 뒤에는 때로는 아주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때로는 아주 은밀하게 숨어있는 진짜 심각한 죄가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우상숭배는 형식적으로 보면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들을 섬기고 의지하는 것이지만 더 깊은 동기는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자기 자신을 숭배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이 위험한 이유는 이런 마음을 따라사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을 사탄에게 속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는 크게 보아서 두 가지를 추구합니다. 한 쪽에서는 종교라는 이름으로 실제적인 욕망의 만족을 추구합니다. 이런 쪽에 속하는 종교들은 물질욕이나 성적인 욕망 등과 직접 연결되어 있습니다. 고대 근동지방의 이방종교들이나 저급한 샤머니즘이 이런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 쪽에서는 인간 스스로가 신이 되려고 합니다. 이 쪽에 속하는 종교들은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다고 가르치고 그 방법을 알려줍니다. 불교나 힌두교가 여기에 속합니다. 실제로 뒤쪽에 속하는 종교들은 드디어 인간의 자기숭배가 노골적으로 진짜 모습을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이렇게 자기 안에서나 혹은 자기의 욕망을 표현한 만들어진 신을 통해서 만족을 찾으려고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아무 것도 아니고 있지도 않은 우상숭배를 그렇게 강하게 금하시는 이유입니다. 그것은 실은 다른 신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섬기는 것이고, 창조주 대신에 하나님의 피조물을 섬기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은 그렇게 해서 사탄에 속한 것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상숭배를 가장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 북문 : 투기의 우상
유다의 장로들이 에스겔에게 찾아왔습니다. 아마도 이들은 에스겔로부터 포로생활이 빨리 끝나게 될 것이라는 위로의 소식을 들으러 왔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때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 분의 모습은 허리 아래는 타는 불처럼 이글거렸고, 허리 위쪽으로는 발갛게 달아오른 쇳덩어리 같았습니다. 이번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모습은 정말 심상치가 않습니다. 하나님은 타는 불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우선 예루살렘 북문으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리고 거기 서 있는 우상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 우상의 이름은 ‘투기의 우상, 그러니까 ‘하나님의 투기를 격발케 하는 우상’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아직도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 영광은 에스겔이 들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다백성들은 아직도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러 있는 그 곳에 우상을 세워놓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우상 때문에 불이 되셨습니다. 질투로 타오르는 불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그 불은 이제 유다를 태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더 좀 더 먼 곳을 바라보라고 하셨습니다. 에스겔은 제단으로 통하는 문 앞에도 똑같은 우상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성전 바깥 뜰문 : 장로들과 제사장의 우상숭배
이것만 해도 에스겔에게 충격적이었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다시 다른 더 가증한 일’을 보게될 것이라고 하시면서 에스겔을 성전 바깥 뜰문으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좀 더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신 것입니다. 가만 보니 벽에 작은 구멍하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구멍을 파서 담을 헐라고 하셨고 에스겔은 그대로 했습니다. 그랬더니 거기에는 문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리로 들어간 에스겔은 정말 큰 충격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방 안에서는 믿지 못할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벽사방에는 온갖 곤충과 가증한 짐승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고, 그 동안 이스라엘 백성이 섬겨 왔던 온갖 신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방 안에서 제사가 행해지고 있었는데, 그 당사자가 70명의 유다의 장로들과 사반의 아들 야아사냐였던 것입니다. 장로들은 이스라엘을 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야 할 어른들이며 지도자들입니다. 손에 향로를 들고 있는 사람은 사반의 아들이었습니다. 사반은 요시야의 종교개혁 때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서기관이었는데, 그의 아들이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함께 모여서 우상에게 제사를 드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갓바위에 가서 몰래 몰래 치성을 드리던 어떤 타락한 교회 지도자가 어느 날 부터인가는 교회 지하실에 방을 꾸미고 사당을 만들어 놓고 온갖 잡신을 비밀스레 섬기기 시작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것도 변절한 목사와 다른 중직자들과 함께 말입니다. 얼마나 말이 안되는 행동입니까? 얼마나 대담해진 것입니까?
성전 안뜰 : 여인들의 담무스 숭배와 스물 다섯 명의 태양숭배
그러나 에스겔에게는 보아야 할 것이 더 남아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성전북문으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 문 앞에서도 충격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거기서는 유다 여인들이 담무스신을 위해서 애곡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안이 벙벙해 있는 에스겔을 데리고 더 깊이 들어가셨습니다. 성전 뜰 안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거기서는 하나님을 완전히 노하시게 할만한 일이 버젓이 행해지고 있었습니다. 성전 안뜰 현관과 제단 사이에 스물 다섯 명쯤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하고 있는 일이 가관이었습니다. 그들은 제단을 등지고 동쪽을 향하며 절을 하며 거기서 태양을 숭배하고 있었습니다.
유다의 우상숭배의 죄는 예루살렘의 어느 곳 한 곳도 예외가 없이 모든 곳에서 행해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성전의 중심으로 가까이 가면 갈수록 더욱 더 정도가 심해져만 갔습니다. 그래서 가장 깨끗해야 할 성전의 안마당은 이미 가장 더러운 곳이 되어 있었습니다. 신앙의 중심부에서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백성들의 모습은 하나님을 진노하시게 했습니다. 더 이상 이들을 참고 견디실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각각의 우상숭배의 의미
이제 에스겔이 보았던 예루살렘과 성전의 모습을 하나 하나 살펴보겠습니다. 예루살렘성 북문과 성전 안뜰로 들어가는 북문에는 ‘투기의 우상’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이 우상은 아세라였습니다. 당시 북쪽은 항상 외부의 적들이 예루살렘으로 공격해 들어오는 통로였었고, 그래서 예루살렘 거민들은 그 통로에 아세라를 세워서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보호받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도성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런데, 유다 백성들은 이 성과 성전의 보호를 바알의 어머니인 아세라에게 맡긴 것입니다. 세상이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의 도성과 하나님의 집의 보호를 아세라에게 맡기다니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상숭배가 어떻게 시작되는지 그 첫번째 이유를 볼 수 있습니다. 우상숭배가 시작되는 첫번째 이유는 하나님 한 분 만으로는 부족하고 불안하다는 하나님을 향한 불신 때문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이 예루살렘과 성전을 보호하기 위해 아세라 여신에게 의지했다는 것은 그들이 그만큼 하나님을 약한 신으로 생각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 부족하다고 여겼다는 뜻입니다. 예루살렘을 지켜야 하는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나님 자신을 보호하시기에도 부족한 분이시니 더 강한 다른 신의 도움을 빌려야 한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회원 여러분, 진수성찬으로 배를 불린 사람이 형편없는 죽 한 그릇에 침을 흘릴까요? 그럴리가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으로 충분하다는 사실을 알고 또 확신하는 사람은 우상을 만들지 않습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 한 분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기는 그 곳에서 생겨납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여전히 소유와 권력, 그리고 자신의 능력이나 신분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충분히 신뢰하지 못하니까, 하나님 한 분 만으로 충분하다는 믿음이 없으니까 자꾸 다른 것에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의지할 수 있는 것들을 성처럼 쌓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하나님 아닌 다른 것들을 자기의 기초로 삼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신앙적으로 옳은 방법이 아니라 실용성이나 효율성에 의지해서 교회를 세우고 든든하게 하려고 합니다. 이런 모습들은 에스겔 당시의 유다사람들의 모습과 전혀 다르지 않은 모습입니다.
4절을 보면 에스겔은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거기 있는데 내가 들에서 보던 이상과 같더라”라고 말합니다. 에스겔은 거기서 자신이 본 하나님의 영광은 자신이 들에서 보았던 그 영광과 동일한 것이었다고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3장 23절로 돌아가 보면 에스겔은 들에서 본 하나님의 영광은 자신이 그발 강가에서 보았던 영광과 같은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결국 에스겔이 아세라의 우상이 서 있는 그 곳에서 본 하나님의 영광은 그발 강가에서 보았던 그 엄청난 하나님의 영광과 똑같은 것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회원 여러분, 왜 유다가 거기 아세라를 세웠습니까? 왜 예루살렘을 지키고 성전을 지키기 위해서 아세라를 의지하는 말도 안되는 일을 했습니까? 그것은 거기 충만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면 하나님 한 분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믿음을 갖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불안해지고 그래서 다른 것들을 의지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그런 것들 위에 삶을 세우고 교회를 세우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가 되는 것입니다.
칠십 명의 장로들과 아야사냐가 온갖 우상을 그것도 성전 안뜰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은밀히 섬겼던 것도 마찬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우상이란 우상은 모두 끌어모았습니다. 이집트의 신들, 그리고 자신들이 지금껏 섬겨왔던 모든 신들을 방 사방 팔방에 다 그려넣었습니다. 이 신이 빵꾸내면 저 신이 메꿔줄 것이니 어차피 섬기는 것 다다익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그런 죄를 범하된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2절 후반부입니다. “그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지 아니하시며 이 땅을 버리셨다 하느니라” 이들이 성전 입구에서 그것도 은밀하게 이런 잡스런 우상숭배를 행했던 이유는 이들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보지 않으시고 이미 그 땅을 버리셨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들이 하는 말이었고, 이들이 이런 죄를 범한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24장 1-1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장로들에게 모세와 똑같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특권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민수기 11장 16-30절을 보면 이들은 모세에게 허락하셨던 동일한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70명의 장로들은 성령충만함도 잃어버리고 또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눈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떠났다고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마음대로 다룰 수 있고, 언제나 자기들 편을 들어주는 잡신들을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니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도 알 수 없었고, 그래서 앞장서서 우상숭배에 뛰어든 것입니다.
사실 상황만 보면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완전히 유다를 버리신 것 같았습니다. 이미 예루살렘은 함락당했고 백성들은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어디에도 하나님은 없고, 하나님의 영광도 없습니다. 그것이 눈으로 보이는 유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그들을 떠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는 오히려 여전히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증거였고, 유다를 다시 돌아오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가장 영광스러운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눈이 없어졌던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그런 행동은 전혀 은혜로운 행동으로, 자신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행동으로 보여지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을 섬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유다를 ‘보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에스겔에게 ‘네가 보았느냐?’고 물으셨던 것입니다. 회원 여러분 하나님의 눈은 단 한 순간도 그 백성을 떠나지 않으십니다. 징계하고 벌주는 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을 보고 계십니다. 비록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보지 않으신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은 내 느낌과 생각일 뿐 사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떠나신 것같은 상황, 하나님께서 버리신 것 같은 상황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가장 명확한 증거일 때가 많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더 가까이 부르시는 하나님의 큰 목소리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그 때는 하나님을 멀리하면 절대로 안됩니다. 그 때는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시력을 회복해야할 때이고 감겨 있었던 눈을 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할 때입니다. 다른 신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할 때이며, 원망과 불신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돌이킴의 고백을 해야 할 때입니다.
망가진 것은 지도자들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성전 입구 뿐 아니라 성전 안뜰까지도 상황은 꼭 같았습니다. 아니 더 심각했습니다. 여인들은 여인들의 마당에서 담무스를 위해서 애곡하고 있었습니다. 담무스는 풍요의 신입니다. 이 신이 겨울이 되어 죽으면 모든 식물들이 죽게 되는데, 이 때 사람들이 그 죽음을 슬퍼하며 애곡하면 담무스의 귀환이 빨라져 풍요로움이 주어진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애곡은 일종의 제사였던 것입니다. 유대의 여인들이 하나님의 성전에서 풍요의 신에게 풍년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기만 하면 풍년은 선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불순종과 불신앙 때문에 흉년이 찾아오자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신을 의지합니다. 그리고 그 신에게 드리는 제사를 하나님의 성전에서 드립니다. 이미 그들에게는 여호와 하나님만이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누구든지 더 쉽게 그들에게 안전과 먹을 것과 부요함을 가져다 주면 그가 하나님이 될 수 있었습니다. 담무스이던 여호와이던 상관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성전 뜰에서 아무런 가책이나 거리낌 없이 담무스를 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에스겔은 하나님의 안내를 받아 성전 안뜰, 그러니까 정확하게는 현관과 제단 사이에 있는 마당으로 갔습니다. 그가 거기서 목격한 광경은 더 충격적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스물 다섯 명쯤이 있었는데 그들이 여호와의 전을 등지고 태양을 향해 절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원래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을 향해 기도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성전을 향해 진심으로 기도드리면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하시겠다고 약속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지도자로 보이는 남자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제단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 제단을 등지고 태양을 향해 절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이렇게 이미 하나님을 등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경배와 제사를 다른 신을 향해 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징계를 내렸더니 더 멀리 멀리 아얘 떠나버리고 만 것입니다.
물론 이런 모습들은 모두 다 환상이었고 실제로 벌어진 일들은 아니었지만, 실제로 예루살렘에서는 내용상으로는 이와 전혀 다르지 않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고, 백성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그러한 우상숭배에 빠져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에스겔에게 예루살렘에 남겨진 유다의 속모습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유다의 배도의 이유
유다는 하나님께 징계를 받아 거의 다 망한 상태에 이르게 되었고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 동안의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복주심이 그들을 떠난 것 같았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그렇게 믿었고, 그래서 다시 이런 것들을 확보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야 다시 회복되고 다시 안전해 질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들은 다시 그것들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 였습니다. 첫째는 이미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버리고 떠난 하나님을 원망하며 영적인 절망상태에 있었습니다. 둘째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그 동안 익숙해져 있던 습관이나 삶의 방식들을 모두 내려놓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우리 삶속에서도 참된 회개를 가로막는 것은 모두 이러한 것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동안 내 곁에 있으면서 익숙해져 있는 것들, 그러면서 작은 즐거움과 만족을 주었던 것들... 우리가 회개할 때 우리는 이런 것들을 다 내려놓고 떠나야 할 때가 많은데 이렇게 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회개를 주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대신에 손쉽게 원하는 것들을 가져다 줄 수 있다고 믿어지는 다른 신들을 선택합니다. 그런 신들은 그저 비위만 적당히 맞춰주면 늘상 내 편을 들어주니까요. 적어도 그런 것처럼 여기지니까요. 보호가 필요하면 아세라에게로 갑니다. 될 수 있는대로 많은 신을 섬겨서 몇몇이 자기들을 버리더라도 최대한 자신들 곁에 많이 머물게 하는 안전장치를 마련합니다. 풍요로움을 위해서는 담무스를 섬기고, 빛되신 하나님 대신에 하나님께서 만드신 태양을 신으로 섬깁니다. 그것도 하나님을 완전히 등지고서 말이죠.
결론 : 신앙은 항상 하나님 중심이어야 한다
회원 여러분, 신앙은 언제나 하나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앙은 쉽게 흔들리고 변질되게 됩니다. 신앙이 하나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신앙이 나를 바라보고 나의 상황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항상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완전히 버리신 것같은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볼 수 있어야 하며, 하나님의 영광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같은 곳에서도 거기 충만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 대해서 완전히 무관심하신 것처럼 여겨지는 그 곳에서도 나를 주목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눈길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앙은 결국 당장 눈 앞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게 됩니다. 지금 보여지고 느껴지는 것이 다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께 돌아가고 하나님께 의지하며 하나님이 움직이시는 것을 기다리는 대신에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찾게 됩니다. 비록 그것이 진짜 우상이 아닐 때도 있지만,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는 것,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손쉬운 방법을 찾고 거기 의지하게 되기가 쉽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신앙은 성전을 향해 가지만, 성전 안에 있지만 또 성전 안 제단 앞에서 행해지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섬기고 의지하는 그런 유다의 신앙을 닮은 모습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어느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믿는지 믿음을 점검해야 합니다. 내가 이 세상 곳곳에 임해 있는 그러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있는지 영적인 시력을 점검해야 합니다. 또 나의 신앙은 혹시 중심으로 갈수록 더 엉망이었던 예루살렘의 성전을 닮아있지는 않은지도 살펴야 합니다. 내가 중심으로 섬기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정직하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 한분만으로 진짜 충분하다고 믿고 살아가고 있는지 그것을 챙겨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 충분하다고 믿지 못한다면 결국 우리는 그 모자라는 곳을 하나님 아닌 다른 것으로 채우려 들게 되어있고, 그것이 또다른 우상숭배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항상 하나님을 중심으로 생각하시고 또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께서 함께 계심을 놓치지 마시고, 그 분 한 분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진실로 경험하는 부족함 없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 속에서 날마다 우상을 닮은 것들이 제거되고, 그 뒤에서 우리를 속이며 일하던 사탄이 쫓겨가는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삶 속에서 항상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복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중심이 가장 깨끗하고 온전한 그런 신앙을 소유하게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