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에스겔 22장 17-31절
서론 : 약한 우리들, 강한 말씀
공교롭게도 그저께, 그러니까 지난 금요일날 오늘과 같은 본문으로 새벽예배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지금은 한낮이어서 그래도 괜챦다고 생각되지만 새벽에 이런 본문으로 설교를 한다는 것이 설교자인 저에게는 여간 부담스럽지가 않았습니다. 새벽예배에 나오시는 분들 중에는 물론 아무런 문제가 없이 정말 자신의 믿음을 위해서 예배에 참석하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많은 분들은 긴급한 문제와 아픈 마음을 가지고, 혹은 하나님의 특별한 위로가 필요해서 갈급한 심정으로 나오시는 분들인데 그런 분들에게 이런 거칠고 충격적인 본문을 있는 그대로 설교한다는 것이 참 쉽지 않았습니다. 준비할 때도 마음이 무거웠지만 설교를 하는 동안에도 마음이 무겁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설교를 마치고 내려와서 기도하는데, 저절로 이런 기도가 나왔습니다. “하나님, 저처럼 마음 약한 사람에게 왜 이런 말씀을 맡기셨습니까?” 그리고, “하나님, 오늘 설교를 들은 성도들 중에 이 설교로 마음 아파하는 성도들에게 은혜를 주시고, 혹시 상처받은 성도들이 있다면 그 상처가 오히려 신앙을 더욱 든든히 하는데 밑거름이 되게 해 주세요.”라는 기도도 나왔습니다. 여러분도 이미 알아차리셨을지 모르지만 저는 그렇게 마음이 강한 사람이 아닙니다. 처음 제가 목회자가 된다고 했을 때, 저희 어머니가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하신 말씀이 “너처럼 여린 아이가 어떻게 목사가 되겠다고 하니?”라는 말이었을 정도였으니까요. 저는 목회를 하면서 제가 얼마나 여리고 약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새록새록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약한 제가 정말 끝까지 이 길을 제대로 갈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저만 여리고 저만 약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압니다. 여러분도 다 여리고 약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우리 모두가 상처도 잘 받고 낙심도 잘 하는 그런 여리고 약한 피조물들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우리가 성경에서 만나는 말씀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약하고 여린 우리들이 보기에는 정말 강하고 거친 말씀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읽고 묵상하다 보면, 정말 제대로 그 말씀을 대면하다 보면 가슴이 쓰리고 때로는 반항심과 불쾌한 마음이 생길 정도의 말씀들이 정말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렇게 여리고 상처를 잘 받는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셔서 이런 말씀들을 성경에 포함시켜 놓으셨을까요? 아닙니다. 그 분은 우리를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말씀들을 주셨다면 그것은 이 말씀으로 우리가 받을 상처보다, 만약 그 상처를 넘어서서 이런 말씀들을 받아들이게 될 때 얻게될 유익이 훨씬 더 크고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없으면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며 믿음을 지키기가 굉장히 힘들기 때문입니다. 또한 에스겔서를 비롯한 선지서들을 보면 한 번 읽기도 거북한 죄악들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 보시기에는 이런 말씀들을 읽고 들어야 할 우리들의 마음이 그러지 않고는 그 이야기를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단단해지고 무감각해지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치 아무리 혼을 내도 꿈쩍도 않는 자녀를 훈계하는 부모처럼 굉장히 강한 어조로 반복하고 또 반복해서 같은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들을 읽을 때는 그래서 말씀 자체가 주는 느낌보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에 집중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와 여러분의 본능과 연약함은 우리들이 이런 말씀들을 기피하게 만들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런 말씀 속에만 담겨있는 유익은 전혀 누리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혹시 앞으로도 그런 말씀들을 대하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오늘 제가 드린 이 말씀을 잘 기억하시고 여러분의 마음과 감정을 잘 다스리신 후에 말씀을 대하시기 바랍니다.
찌꺼기가 된 왕후 : 우리의 거룩함에 대하여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에게 “찌꺼기”가 되었다는 굉장히 충격적인 메시지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소유요 무엇보다도 그 분의 신부였습니다. 정말 그 누구도 귀하게 여기지도 않고, 관심을 갖지도 않는 자리에서 살려내시고 양육하셔서 가장 귀한 여인으로 만들어 왕이신 하나님의 왕후로 삼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랬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찌꺼기”가 되었다고 말씀하시면서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제부터 이스라엘을 찌꺼기처럼 대우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이 첫 구절을 읽으면서 우리의 ‘거룩함’이나 ‘귀중함’과 같은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말들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며 “하나님께 참으로 귀한 존재들”이라는 이야기를 수없이 듣습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참 감사하고 즐거워합니다. 뿌듯해 하기도 하고 자부심을 가지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그렇게 여기시고 또 그렇게 만들어 주셨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런 마음을 가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죠. 그러나,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가지는 거룩함과 소중함은 어떤 성질의 것일까요? 이것은 우리가 어떻게 살고 또 어떻게 행동하느냐와 상관없이 변함없이 존재하는 그런 것일까요? 어쩌면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하고 또 믿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과 같은 성경말씀들을 보면 그게 결코 그렇지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물론 처음 거룩함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 우리가 어떤 상태였는가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는 우리 책임이 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거룩함을 유지할 수 있는 환경이나 마음, 그리고 생각과 같은 은혜들을 주시고 그런 것들이 없다면 우리는 거룩함을 유지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처음 얻은 거룩함을 계속 간직하고 더 온전한 것으로 만들어 가는 것은 우리가 그 거룩함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고 또 지켜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귀중함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그 귀중함이 우리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임을 명심하고 그 귀중함을 귀하게 여기며 지켜나가려고 할 때, 그 귀중함도 언제나 우리 곁에 머물러 있는 그런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럴 때에야 하나님도 우리를 그만큼 가치있게 대우해 주십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이러한 ‘거룩함’과 ‘귀중함’을 지켜내려고 애쓰고 힘쓰지 않는다면 우리는 언제든지 그 거룩함과 귀중함을 잃어버리고 오늘 말씀의 표현대로 하나님 보시기에 “찌꺼기”같은 사람들이 되어 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하나님보시기에 그렇게 “찌꺼기”같이 보여진다면 하나님은 더 이상 우리를 거룩한 자들과 귀한 자들로 대우하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찌꺼기는 찌꺼기 같이 여기고 그렇게 대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철찌꺼기처럼 되어 버렸기 때문에 철을 다루는 직공이 찌꺼기들을 모아서 한꺼번에 용광로에 넣고 태워버리듯이 그들을 그렇게 태워버릴 것이라고, 하나님의 분과 노를 이스라엘 백성들 위에 불처럼 쏟아부어 녹여버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연단의 과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연단을 위해서 징계를 주실 때도 있습니다. 자식을 혼내는 아버지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오늘 본문이 말하는 것은 “정금처럼 나오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저 그 불같은 심판을 받게 하는 것, 31절의 표현대로하면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보응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백성들에게, 신부에게 그렇게 하실 수 있는가? 너무하시는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생각이지 하나님의 생각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상을 보면 이들에게 어울리는 것이 하나님의 그러한 불같은 진노 외에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느 한 구석도 깨끗하고 거룩한 곳이 없었습니다. 왕은 왕대로, 제사장들은 제사장대로, 그리고 방백들은 방백들대로 선지자는 선지자대로, 심지어는 일반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자기 위치에서 저지를 수 있는 악행이란 악행은 모두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더럽히며 하나님의 영광을 무시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영광을 손해보시지 않으시는 하나님
회원 여러분, 하나님은 결코 언제까지나 하나님의 영광을 손해보고만 계시지 않습니다. 그것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가장 견디기 어려워 하시는 것이고, 그것을 그냥 계속해서 내버려 둔다면 하나님의 가장 큰 목적이 다 망가지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그리고 성도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더럽히고 손상시키는 것을 언제까지 보고만 계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사랑이 많으시고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당장 움직이지 않으시고 오래 참으시지만 그것이 도에 지나칠 때, 그러면서도 사람들이 전혀 깨닫지 못할 때는 그 분의 이름, 그 분의 영광을 위하여 스스로 움직이십니다. 이 때가 오면 그 분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일지라도 전혀 아끼지 않으십니다. 찌꺼기를 용광로에 넣어 처리해 버리듯이 그렇게 처리해 버리십니다. 우리에게는 우리 속에 있는 죄악들을 있는 그대로 대면하는 일도 굉장히 불편하고 거북하지만 이런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죄는 지적되지 않았으면 좋겠고 하나님은 그저 언제나 속좋게 웃고만 계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불편하고 거북하다고 해서 이런 부분을 간과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균형을 잃게 될 것이고 우리 속에는 점점 불순물들이 쌓여가서 결국은 이스라엘처럼 “찌꺼기”같은 존재가 되어 버릴지도 모릅니다. 이것을 피하려면 거북하고 껄끄러운 우리의 모습, 그리고 과히 반갑지 않은 하나님의 모습 또한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마지막으로 찾으시는 사람
오늘 말씀을 보면 우리가 주의 깊게 묵상해야 할 아주 중요한 한 가지를 말씀해 주십니다.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 서서 나로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찾다가 찾지 못한 고로 내가 내 분으로 그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이 구절이 그렇게 중요한 이유는 이 구절이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어떤 개인이나 혹은 사회에 징벌을 내리실 때 마지막으로 하시는 일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움직이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시는 일은 “엉망이 된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 설 사람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크게 보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제자로, 빛과 소금답게 살아가는 것이지만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면 상황에 따라서 해야할 역할이 다릅니다. 평상시에는 그저 자기 자리만 잘 지키면 됩니다. 자기 자리에서 겸손하게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면 됩니다. 그러나 비상시가 되면, 자기가 속해있는 사회, 그리고 공동체가 무너져 갈 때는 그러한 소극적인 역할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무언가 적극적인 행동이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성이 무너지고 있다면 그 성을 다시 쌓기 위해 힘써야 하고 하나님께서 그 성을 무너뜨리려고 하신다면 스스로 하나님을 막아설 용기를 지녀야 합니다.
저는 에스겔서를 읽으면서 오늘날 우리나라의 상황이 그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과 너무 많이 닮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들의 모습을 보시고 에스겔서를 기록하신 것처럼 생각될 정도였습니다. 우리는 세상은 세상을 고칠 수 없고 교회만이 세상의 희망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틀림없는 진실입니다. 그렇지만 회원 여러분, 이게 실제로도 그렇습니까? 우리가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을만큼 스스로 거룩하고 정결합니까? 교회가 정직하고 바른 길을 가고 있습니까? 그런 길을 가려고 포기해야 할 것들을 포기하고 있습니까? 적어도 그렇게 하려고 무진애를 쓰고 있습니까? 애석하게도 요즘 신문이나 인터넷을 통해 들려오는 교회나 목회자 그리고 성도들에 대한 소식들은 우리가 그런 바른 자리, 소망스런 자리에 있다고 말해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소리치고 있습니다. 아프지만 이것이 오늘 우리의 진짜 모습입니다. 우리가 속한 사회 뿐만 아니라 교회들도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우리가 살아온 그 어느 때보다도 이런 현상이 심각합니다. 어쩌면 교회가 이렇게 내부적으로는 부패해 가고 외부적으로 비난과 멸시를 당하는 현실은 하나님이 이미 우리들을 우리생각만큼 귀하게 여기고 계시지 않으신지도 모른다고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회원 여러분, 이럴 때 필요한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그렇게 무너져 버린 사회를 다시 쌓는 수고를 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이 교회와 또 사회를 대적하실 때, 그 앞을 가로막을 수 있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이미 무너져 버렸고 또 무너져 내리고 있는 성벽을 다시 세우기 위한 다듬은 돌들이 될 때,이 사회는, 그리고 교회는 다시 한 번 서게되는 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더 무거운 죄는 사회적인 죄악이다
오늘 본문의 23절 이하를 보면 당시 이스라엘 사회의 각 계층이 저지른 죄악들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런 죄악들 때문에 하나님은 그렇게 진노하셨던 것입니다. 회원 여러분, 23절 이하의 목록을 가만히 살펴보십시오. 거기 나온 죄악들은 분명히 개인이 저지른 죄악들입니다. 자신이 지켜야 할 지라를 지키지 않은 결과들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그 죄가 만들어 내는 피해는 결코 개인에게만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작은 개인에게서 시작되지만 결국은 그 주변의 이웃들과 그가 몸담고 살아가고 있는 사회전체가 그 죄악의 열매로 신음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그토록 노하게 만들었던 죄악들은 결코 개인적인 죄악들이 아니라 사회적인 죄악들, 그러니까 그 부작용들이 나를 넘어서서 다른 사람들과 사회 전체, 그리고 교회 전체에 번져나가는 그런 죄악들입니다.
우리는 ‘죄’라는 단어를 들으면 자꾸 개인적인 죄를 떠올리는 버릇이 있습니다. 거짓말, 미움, 술담배, 분노, 기도 안한 것, 예배드리지 않는 것.... 이런 개인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먼저 그리고 더 강하게 우리 머리 속에 떠오릅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을 더 심각하게 생각합니다. 물론 이런 죄들도 죄인 것이 분명하지만 실제로 하나님을 그토록 크게 진노하게 만드는 죄는 이런 죄들이 아니라 사회적인 죄들이라는 사실을 주의 깊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집어삼키는 어리석음” 속에서 살아가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교적이고 지극히 개인적인 죄들도 생각하며 살아야 하지만 그것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우리가 어쩌면 당연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서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르는 그런 사회적인 죄악들을 주의깊게 살펴야 합니다.
사회적인 죄의 해결 실마리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도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제사를 드리고 십일조를 드리고 나름대로 경건한 행동을 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켜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했습니다. 사소한 죄에 붙들려 있으면서도 정작 하나님을 진짜로 진노하게 만드는 죄에 대해서는 그만큼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자신과 사회, 그리고 하나님을 더럽히고 결국 파국을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 왜 이 사람들이 이런 죄를 저지르고 이런 죄로 이스라엘 사회를 가득 채워서 무너져 내리게 했을까요? 자신들을 찌꺼기로 만들고 그래서 하나님의 불같은 진노가 그 위에 쏟아부어지게 만들었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자신의 욕심을 다스리지 않고 그 욕심을 모두 다 채우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손해를 끼치며 그들을 아프고 힘들게 하는 일을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은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의 세상에서의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는 일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하고 또 오늘 본문에서 보는 것처럼 사회를 다시 세우고 건강하게 하기 위한 성도의 역할에 대해서 자주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들이 현실성이 있는 이야기가 되고, 또 우리와 상관있는 이야기가 되게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야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 욕심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사고방식을 버리고 적어도 그 욕심을 따라 살지 않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신앙생활의 본질이 무엇이며, 여러분의 신앙이 꼭 도달해야할 목표지점이 어디라고 생각하십니까? 성경은 그것에 대해서 뭐라고 이야기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그 분이 내 삶에 허락하신 것들에 대해서 만족하고 그래서 그것을 온전히 누리는 자리에 이르는 것이 바로 신앙의 본질이며 또 목표입니다. 우리에게 이것이 없다면, 이 은혜에 만족하는 마음이 없고, 그 비결을 연습하고 또 배우지 않는다면 신앙조차도 우리에게 만족을 주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지금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로 충분히 만족함을 알게 될 때, 비로소 우리의 경건도 유익한 것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우리까지도 자기 욕심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그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애쓰며 살아간다면 누가 성을 다시 세우고 하나님 앞을 막아서는 그런 사람들이 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우리가 우리 속에 있는 욕심을 다스리고 또 내려놓지 못한다면, 적어도 그러기 위해서 매일 매일 애쓰는 삶을 살아가지 않는다면 우리의 소명은 그저 듣기좋고 말하기 좋은 허울에 머물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저는 사회도 그렇지만 우리가 속해 있는 교회가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행복하고 넉넉한 곳이 되지 못하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욕심을 다스리지 못하고 오히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니까 교회에도 사회에서 생겨나는 어려움과 갈등을 똑같이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욕심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면서 ‘나도 사람인데 어떻게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가?’, ‘어떻게 욕심을 내려놓고 살아갈 수 있는가?’라는 말만 반복한다면 사회에서도, 교회에서도 우리는 아무런 답도 내놓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생각하십니까? 왜 우리 마음에 평강을 주시고 위로를 주시며 하늘의 소망을 주신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것에서, 내 욕심과 소원을 이루는 일에서 만족을 찾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만족은 하나님에게서 찾고 무너진 성벽을 쌓는 사람으로, 하나님 앞을 막아살만한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래서 그 귀한 은혜를 주시는 것이고, 나아가서 하나님 자신이신 성령님을 우리 안에 충만하게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결론 : 건축자와 수비자가 되자
이런 사회를 보며, 또 이런 교회의 모습을 보며 한숨 쉬기만 할 것이 아닙니다. 손가락질만 할 것도 아닙니다. 지금 그런 사람들이 부족해서 우리 사회가, 그리고 우리의 교회들이 무너져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한숨 쉬는 자가 아니라 건축자와 수비자를 찾으십니다. 스스로 그 일에 나설 자를 찾으십니다.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무너진 곳을 세우시고, 그런 사람들에게 져 주셔서 진노를 거두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그 시작은, 그런 사람이 되는 일의 시작은 욕심을 좇는 삶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스스로 마음의 허기를 채우기 위해서 달려왔던 지금까지의 삶의 길을 바꾸고 하나님이 주시는 것들도 만족하며 살아가는 것을 연습하는 것입니다. 그 만족의 능력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악을 선으로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며 하나님이 마지막으로 찾으시는 그런 사람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보시기에 “찌꺼기”가 아닌, 건축자와 든든한 수비자가 되어서 사회와 교회를 다시 세우고 든든하게 하는 하나님의 사람들로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욕심이 아니라 은혜와 소명으로 사셔서 하나님 앞에 가장 영광스럽고 순결한 성도로 서게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