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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2011년 매일성경 설교 6. 여호와를 송축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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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시편 104편 1-18절



성경을 읽어보면 거기에는 우리를 향한 수많은 요구들이 나옵니다. 그런 요구들 중에는 우리가 한 명의 사람으로써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면서 실천해야 하는 윤리적이고 실질적인 요구들도 있지만, 직접 하나님께 대해서 그렇게 해 드릴 것을 요구하는 것들도 많이 나옵니다. 여러분은 어떠셨는지 모르지만 저는 언젠가 뒤쪽에 속한 명령들과 요구들을 생각하면서 참 난감해 진 적이 있었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우리에게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라고 요구하는 것들이 실천하기 더 어려울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적어도 어느 순간까지는 직접 하나님을 향한해있는 의무들이 훨씬 더 행하기 어렵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명령합니다. 그것도 힘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합니다. 또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합니다. 목소리를 높여서 찬양하라고 합니다. 기뻐하며 찬양하라고 합니다. 물론 이런 명령들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피조물이 창조주를 사랑하고 찬양하는 것은 아주 기본적인 의무이기도하지만 피조물로 존재하는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것을 알고 또 인정하더라도 사랑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힘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사랑하는 사랑은 절대로 억지로 되지 않습니다. 찬양도 마찬가지입니다. 찬양은 원래 자랑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너무 기뻐서 있는 목소리를 다하여 진심으로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은 억지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이런 것들을 권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명령’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사람에게 가장 억지로 되지 않는 두 가지를 성경은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과연 성경이 이런 명령을 할 때, 우리에게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것일까? 하나님은 이 두 가지가 사람들에게 가장 억지로 안되는 일이라는 것을 모르고 그러셨을까? 돌아온 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얻은 결론은 성경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항한 최고의 사랑을 명령하고 있고, 하나님을 최고로 자랑하라고 요구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스스로에 대해서 그런 요구를 하셔도 좋을만큼 충분히 사랑스럽고 충분히 가치있는 분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그 분을 제대로 알기만 하면 그렇게 그 분을 사랑하고 그렇게 그 분을 자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성경이 우리에게 하나님만 사랑하라고 하는 것, 그 분께만 영광을 돌리고, 그 분만 자랑하라는 것은 어떤 요구가 되겠습니까? 그럴만한 가치도 없고, 그렇게 사랑스럽지도 못한 대상에 대해서 어울리지 않는 사랑과 찬양을 바치라고 하는 유치하고 억지스러운 요구가 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누군가 여러분에게 당신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를 말해 달라고 한다면 몇 가지나 말할 수 있겠습니까? 또 하나님에 대해서 흥분하는 이유를 말해달라고 한다면 몇 가지나 말해줄 수 있겠습니까? 아마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찬양받으시고 사랑을 받으실만한 합당한 이유가 그것 밖에 없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서 그 만큼 밖에 모르기 때문이고 더 근본적으로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관심이 턱없이 부족하고, 또 그 분을 알려는 노력이 그만큼 부족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시편은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라고 시인이 자기 자신을 하나님을 향한 기쁜 찬양의 잔치로 초대하면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시인은 자신이 하나님을 찬양할 수 밖에 없는 이유, 하나님을 기뻐할 수 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서 정말 수없이 많은 것들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시인을 기쁨에 들뜨게 한 이유, 그를 찬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만든 이유는 그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어떤 유익을 주셨고 어떤 사랑을 베푸셨고 어떻게 인도하셨는지에 대한 것들이 아닙니다. 시인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이유들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분 앞에서 그렇게 기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인은 자연을 바라보면서 그 자연 속에서 하나님께서 하셨고 또 하시고 계신 일들을 생각하면서 그렇게 흥분하며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어찌보면 자기 자신의 당장의 필요나 유익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 우리가 항상 우리 주변에서 보면서도 무심하게 지나치고 있는 것들을 통해 하나님을 보고 느끼고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어 견딜 수 없는 마음이 되어 하나님을 높이며 자랑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기쁨이 되고 자랑이 될 때, 우리가 우리의 신앙 안에서 하는 모든 것들은 억지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들 조차도 우리를 향한 복된 초청이며 또한 기쁨과 감격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려면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 분이 얼마나 풍성한 분이신지, 얼마나 놀라운 분이신지, 얼마나 위대하며서도 세밀하고 정확하신 분이신지, 그래서 그 분의 아름다움은 얼마나 찬란한 것인지, 왜 그 분은 영광을 받으실 수 밖에 없는 분인지를 제대로 그리고 넓고 깊이있게 알아야만 우리는 정말 그 분을 마음과 정성을 다해, 뜻과 힘을 다해 그 분만을 사랑하고자 하는 열망을 품을 수 있으며, 진심으로 그 분을 향해 소리치며 그 분을 자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전혀 억지스러움이나 부담감 없이 말입니다. 


우리는 다분히 우리 삶에서 얻는 실제적인 유익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데 멈춰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마음을 치료해 주시고, 병든 몸을 낫게 해주시고,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해 주시고... 이런 몸으로 느껴지는 경험들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고 느끼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러면 하나님은 ‘나’라는 틀에 갇힌 하나님 밖에 되질 못합니다. 내가 그 분을 사랑하는 이유도 그 분이 나에게 잘 해주고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기 때문이지, 그 분 자신이 가지고 계시는 영광스러움이나 사랑스러움, 놀랍도록 광대하고 풍성하심 때문에 그 분께 반해서 그 분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우리는 거의 언제나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너무 부족하고 빈약하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가책을 느끼곤 하는데, 그렇게 되는 가장 큰 이유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그 영광스럽고 탁월한 모습, 아름다우신 성품을 잘 알지 못하고 또 거기에 매료되어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숙제를 풀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실은 엄청난 열심을 내거나 숭고한 헌신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 이전에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고 그래서 그 분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열심도 헌신도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서 나와야 하나님께 참된 의미가 있고, 그것이 우리의 공로나 억지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늘 시편은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많은 유익을 줍니다. 오늘 시편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반해버린 사람들, 그 분을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들, 그 분을 사랑하는 사랑으로 기뻐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는지를 알려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장 20절을 보면 “창세로 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라고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불신자들의 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모른다고 하며,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다”는 부분입니다. 하나님은 그 분의 능력과 하나님으로서의 영광을 그 분이 만드신 만물을 통해 드러내 놓으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만물은, 그리고 그 만물이 서로 어울려 만들어 내는 질서나 이 세상은 그 분의 영광과 성품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시편 기자는 그 거울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자연 속에서, 그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속에서 하나님의 위엄과 위대하심, 영광과 놀라운 능력, 따뜻한 배려와 풍성한 사랑 등, 그가 하나님께 반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만드는 모든 것들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충만한 기쁨 가운데서 자신의 영혼을 향해서 이런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인이 보았던 것은 특별한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언제나 자기 주변에서 보아왔던 것들입니다. 시인은 그 모든 자연, 그리고 그 속에서 살며 존재하는 동물과 식물을 묵상하면서, 그 속에 숨겨져 있는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태’(姿態)를 보았고, 또 그 모든 것들의 질서를 잡으시고 그 모든 것들을 붙드시고 또 모든 것들을 위한 부족함이 없는 세밀하기 그지 없는 공급자가 되어 주시는 하나님의 풍성함과 자비로우심을 보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회원 여러분, 우리를 진실로 기쁘게 하고 만족스럽게 할 수 있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들이 아닙니다.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고 또 그 분을 자랑할 수 있게 하는 것은 그 분이 우리 손에 쥐어주신 것들이 아닙니다. 우리를 가장 만족스럽게 하고, 기쁘게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과 그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을 보면서 거기서 그 모든 것의 모든 것 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알게 될 때, 우리는 가장 큰 만족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 말이 굉장히 모호하게 들리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이유는 우리가 그만큼 우리가 하나님 자신을 맛보아 알며 그것에 즐거워하는 일에 익숙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록 간접적으로이지만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과 세상을 통해서 그 분을 그 분으로 느끼고 아는데 익숙해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런 ‘훈련’이 잘 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이 세상과 또 자연, 그리고 그 속에서 만나는 하나 하나의 사건들은 모두가 다 하나님을 ‘가르치는’ 스승이요, 학교의 역할을 합니다. 실제로 나 자신의 경험을 넘어서지 못한다면 내가 아는 하나님은 ‘하나님의 크기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 하나님은 ‘내 경험의 틀’ 속에만 계신 하나님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회원 여러분, 어린아이가 엄마를 생각할 때 느끼는 풍성함과 성인이 되어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느끼는 풍성함이 같은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어린아이는 어머니를 생각할 때, 어머니의 존재보다는 자신의 필요를 중심으로 생각하게 마련입니다. 먹여주는 사람, 입혀주는 사람, 보호해주는 사람... 이것이 어린아이에게 엄마가 가지는 의미입니다. 아이는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엄마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나중에 성인이 되어 생각하는 어머니는 그 의미가 전혀 다릅니다. 그저 어머니라는 이름만 생각해도 가슴 가득한 만족과 뿌듯함을 느끼게 됩니다. 오히려 이제는 내가 어머니를 위한 공급자가 되어 있지만 어머니를 생각할 때 어머니라는 존재 자체가 가지는 풍성함은 어머니가 제공하는 실제적인 것들과는 상관없는 기쁨과 만족감을 주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 경험의 틀 속에서 이해하는 하나님은 어린아이 수준에서 엄마를 이해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이해하게 될 때, 그것은 성인이 되어 어머니를 생각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저 하나님만 생각해도 좋고 만족스럽고 기쁘고 즐거워 집니다. 


저는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이 견고함과 풍성함을 잃어버리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지 못하고 어린아이처럼 그저 ‘나’라는 틀 안에서만  그 분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내’가 흔들리면 신앙도 흔들리고 내가 생각하는 하나님도 흔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선대하신다고 느껴질 때는 한없이 좋으신 하나님, 믿고 의지해도 좋을 하나님이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금새 나를 사랑하지 않는 하나님, 믿을 수 없는 하나님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하나님을 묵상하는 ‘묵상’이 아닌가 합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성경을 통한 묵상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비춰주며 보여주고 있는 이 세상과 그 속에 존재하는 만물과 그 질서들을 통해 그 분을생각하고 알게되는 묵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빛, 바람, 물, 구름, 불, 땅, 샘, 짐승과 새들, 풀과 그것들을 있게 하시고 또 그것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양식을 생각하면서 그 속에서 ‘하나님을 보는’ 그런 묵상 말입니다. 그런 하챦은 것들을 통해서 그 분의 풍성하심과 광대하심, 그리고 세밀하시고 자비로우심을 목격하는 묵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온 세상의 모든 것들은 그 어떤 것 하나도 하나님 없이, 하나님의 섭리를 떠나 존재하지 않습니다. 또 어느 모양으로건 그 분을 드러내지 않고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처음 생겨날 때도 그랬고 자라며 살며 여기 땅위에 머물러 있는 시간 속에 하나님을 드러내지 않는 순간은 없습니다. 비록 때로는 부족하고 때로는 일그러진 모습이지만 여전히 만물 속에는 하나님의 어떠하심과 그 분의 영광이 드러나 있습니다. 그것을 볼 수 있는 사람에게는 그 분께 감탄하고 또 사랑할 수 밖에 없게하는 이유가 되면서 말입니다. 그렇게 신앙을 감격있게 하고 견고하게 해 주면서 말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을 인정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모든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며, 느끼며 그 분께 반해버릴 준비가 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 우리들을 그렇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은혜를 사용해야 합니다. 나라는 좁은 틀, 나의 경험이라는 좁은 울타리 속에서만 하나님을 알고 느끼려고 하지 말고 온 세상과 만물이 너무나 풍성하게 드러내고 있는 하나님의 아름다우심과 사랑스러우심에 반할 수 있는 이 은혜로운 기회를 살려야 합니다. 그래서, 그 분께 매료되어야 합니다. 점점 더 그 분을 사랑하게 되어가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신앙은 결코 억지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만 사랑하라는 명령, 온 맘과 뜻과 정성,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도, 그 분만을 높이고 찬양하라는 요구도 전혀 부담스럽지 않은, 오히려 나를 가장 기쁘게 하는 가장 복된 초대로 여겨질 것입니다. 


회원 여러분, 이제 세상을 좀 더 다른 눈으로 바라보는 연습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시인이 그랬던 것처럼 세상을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보이는 대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게 하시는 대로 세상을 보는 연습, 모든 것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연습, 그 분의 풍성함과 완전함을 보는 연습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분께 반하는 연습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눈을 여셔서 길가에 자라있는 가장 볼품 없는 풀 한 포기 속에서도 가장 큰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시는 은혜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벌레 한 마리 속에서도 그 분의 온전한 풍성하심을 보게 하시는 은혜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 분을 더 사랑하게 되고, 더 자랑하게 되며, 풍성하고 흔들림이 없고 확신있는 신앙을 갖게 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약속 : 우리가 하나님께 반하게 될 때, 하나님은 우리 신앙을 가장 풍성하고 견고하며 행복한 신앙이 되게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