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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2011.12.18. 새벽예배

날짜 : 2011-12-19

본문 : 시편 118편 01-13절



“하나님은 나를 지키시는 자 나의 우편에 그늘 되시니 낮의 해와 밤의 달도 나를 해치 못하리 눈을 들어 산을 보아라 너의 도움 어디서 오나 천지 지으신 나를 지으신 여호와께로다” 참 은혜롭죠? 너무 힘이 되죠. 지난 금요기도회 때 불렀던 찬양입니다. 여러분은 무슨 목사가 저러나 하고 생각하실지도 모르지만 저는 금요일날 이 찬양을 부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라서 잠시 찬양을 멈추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지키신다, 내 우편에 그늘이 되어 주신다, 그래서 낮의 해와 밤의 달조차 나를 해롭게 하지 못한다... 구구절절히 힘이 되고 은혜가 되는 말들이지만 내가 이렇게 힘차게 그렇다고 찬양하고 있지만 정말 우리의 현실이 정말 그런가?라는 생각들이 떠올라 한참을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성경은 참 은혜롭고 힘이 있는 책이지만 때때로 우리를 당황하게 할 때가 있습니다. 성경의 이야기와 내 경험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여겨질 때가 바로 그럴 때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산성이시요, 요새시며, 반석이시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그 분께 피하는 사람은 영원히 안전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나는 분명히 그런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그런데도 어려움이 있고 슬픔이 있습니다. 견디기 어려운 난관이 끊이지를 않습니다. 지금의 나는 결코 안전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해를 당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신앙에 있어서 이러한 불일치와 부조화를 해결하는 일은 과히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불일치를 해결하지 못하면 언젠가는 신앙에 대한 낙심과 회의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오늘 시인은 자신의 시를 “여호와께 감사하라”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감사로의 초대입니다.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함께 와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자고 말하는 것입니다. 감사해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과 실제로 감사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또 그저 감사한다고 말하는 것과 확신과 감격 가운데 참된 감사를 드리는 것도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실제로 확신과 감격 가운데 드리는 참된 감사이며 시인은 우리를 이러한 감사로 초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우리가 왜 하나님께 그렇게 감사할 수 밖에 없는지 그 이유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이 선하시고 인자하심이 영원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시라는 이야기는 그저 그 분이 그런 성품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 그렇게 훌륭한 분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제가 지난 금요일 텔레비젼을 보니 박태준 전 포스코 명예회장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전 그 분이 그렇게 훌륭한 분인 줄 몰랐습니다. 그렇게 선하고 생각이 바른 분인줄 몰랐습니다. 한 출연자는 그 분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나 보다, 나보다도 더 가난해!”라고 말하며 오열하기도 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 기부해서 집 한 칸 남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바르고,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인지 모릅니다. 그와 친분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그 분을 좋아하고 존경했습니다. 저도 비슷한 감정들을 느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제게 그 분에 대한 감사가 생겨나지는 않았습니다. 모든 좋은 감정들이 생겨났지만 이상하게도 그 분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은 생겨나지 않았습니다. 일반적인 감사야 조금 생겨났지만 개인적인 감사는 생겨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이유는 제가 그 분이 하신 일들이나 베푸신 것들의 직접적인 혜택을 입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구체적으로 몸으로 느낄만한 그런 정도로 말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생각하면서, 그리고 그 분이 이 세상에 베푸신 은혜들을 생각하면서 충분히 감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일반적인 ‘생각들’만으로는 오늘 시편에서 시인이 말하는 그런 감사는 드릴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와서 함께 감사하자고, 아니 너도 감사해야 한다고 명령할 수 있을 정도로 살아있는 감사를 드릴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참되고 진실한 감사, 우리까지도 확신과 감격에 빠질 수 있을만한 그런 감사를 드릴 수 있으려면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우리의 현실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풍성하게 우리의 삶 속에서 경험되어질 때 비로소 그런 감사가 가능해 집니다. 오늘 시인이 오지랖 넓게 이 사람, 저 사람 찾아다니면서 너도 감사해야 한다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과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그의 삶 속에서 계속해서 경험된 그런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내용은 5절과 13절에 나옵니다.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광활한 곳에 세우셨도다”, “네가 나를 밀쳐 넘어뜨리려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셨도다” 시인은 굉장히 좁은 곳에 있었습니다. 용신할 수 없을 정도로, 까딱하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곳, 아주 고통스러운 곳에 있었습니다. 시인은 거기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것 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은 시인에게 응답했습니다. 그를 그 좁은 곳에서 나오게 하시고 넓은 곳에 서게 하셨습니다. 넘어지지 않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시인의 반복되는 하나님께 대한 경험이었습니다. 그게 시인이 경험했던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었습니다. 그리고 시인은 이러한 경험 덕분에 그렇게 생생한 감사를 드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시편 속에서 발견하는 놀라운 것은 시인이 지금 편안하고 걱정 없는 상태에서 그런 감사를 드리고 있거나 혹은 그렇게 감사하자고 외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시편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7절 이하의 모든 내용은 8절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다 “현재는 이런 상황이지만 미래는 이렇게 될 것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그 현재라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사람이 시인을 어떻게 하려고 합니다. 시인은 지금 미움을 받고 있습니다. 열방은 그를 에워싸고 있습니다. 벌과같이 에워싸고 있습니다. 이것이 시인이 지금 그렇게 생생한 감사를 드리고 있으며, 함께 감사를 드리자고 외치고 하고 있는 시인이 처한 상황입니다. 

이것은 어찌보면 역설입니다. 도저히 감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가장 생생한 감사를 드리고 있고, 그것도 다른 사람들을 향해 그렇게 하자고, 그렇게 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 하나님에 대한 과거의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죽을 병을 고쳐주신 경험, 마음이 상처를 고쳐주신 경험, 힘들고 어려운 상황, 그 누구도 도와주지 못할 그런 상황에서 건져주신 경험 등... 누가 물어보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대해서 대답해 줄만한 간증거리 몇 개쯤은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감사하지 못합니다. 진정한 감사, 생생하게 살아있고 힘있고 확신있는 감사를 드리는 일을 어려워 합니다. 다른 이들의 감사를 일깨우는 일은 더더욱 힘들어 합니다. 

오늘 시편은 우리에게 이러한 우리의 고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치료약을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언제나 생생하고 확신에 찬 감사를 드릴 수 있는 방법, 고통과 고난 가운데서도 오히려 감사할 수 있는 역설적인 신앙의 비결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 방법이란 바로 과거의 경험에 대한 감사를 감사에만 머물러 있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오늘 시편은 과거의 경험 뒤에 미래에 대한 확신을 덧붙여 놓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답입니다. 적어도 시인에게 있어서 과거의 경험은 과거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과거는 뒤를 돌아보고 감사하고 끝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과거의 경험을 통해 미래의 확신, 그 미래에도 과거처럼 일하실 하나님께 대한 확신으로 나아갔습니다. 시인은 현재의 고통과 고난 속에서 과거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지금처럼 죽을 것만 같은, 깊은 수렁에 빠진 것같은 상황에 놓였던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 밖에 할 수 없어서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살려달라고 했더니 번번히 건져 주시고 살려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괴롭혔던 사람들이 어떻게 되는지를 여러 번 보여주셨습니다. 문득 시인에게는 이제까지 성경에서 보고 또 배워왔던 하나님의 성품이 생각납니다. ‘신실함’, ‘영원함’... 그 때 시인은 깨닫고 확신하게 됩니다. “아, 이게 하나님의 신실하심이구나, 역시 하나님은 영원히 변함없으신 분이시구나. 지금까지 그래 오셨다면 앞으로도 반드시 그렇게 일하시겠구나.” 추측이 아닌 확신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외치게 되었습니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 “여호와께 피함이 사람을 신뢰함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함이 방백들을 신뢰함보다 낫도다” 

신앙의 역설은 하나님의 진짜 은혜와 능력은 우리가 우리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고통과 고난 가운데 있을 때 경험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고통과 고난은 마치 하나님이 선하시지 않으시며 능력도 없는 분이라고 말하는 것같아서 반대로 우리의 불신앙과 낙심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역설적인 것입니다. 진짜 신앙은 역설적인 방법으로 증명되고 또 드러나며 능력있게 일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그런 신앙이 되려면 우리에게 꼭 필요한 연습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의 과거의 경험을 감사에 머물게 하지 말고 믿음으로 이어지게 하는 연습입니다. 그 연습은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 가장 효과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그 연습이야 말로 실습이 되기 때문입니다. 힘들고 어려우면 현실에 집착하게 되기 쉽습니다. 그 때 우리는 일단 과거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과거에 반복되었던 그 소중한 은혜에 대한 기억들을 기억의 창고에서 끄집어 내어 내가 무엇으로 어떻게 살아왔는가?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나를 어떻게 대해 오셨는가를 기억해 내야 합니다. 그런 일들이 얼마나 많이 반복되었는지를 떠올려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면 의미가 없습니다. 별로 능력이 되질 않습니다 그 다음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성품을 연결하는 것입니다. 그런 반복되는 경험들이 모두 하나님의 선하시고 변함없이 인자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증명해 보이는 증거들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해야 할 일은 바로 믿음을 미래로 던져넣는 일입니다. 이제 증거가 충분하니 믿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믿을 수 있고, 그 성품으로 미래에도 동일하게 일하실 하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믿음이 생겨나면 비록 과거를 되돌아 보면서 드리는 감사라고 할지라도 힘 없고 흐지부지한 그런 것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생생하고 확신에 찬 그런 감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 감사는 단순히 감상적인 감사가 아닙니다. 그런 감사는 믿음에서 나오는 감사이고 더 크고 견고한 믿음의 재료가 되는 그런 감사입니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베풀어 주신 은혜는 우리들의 감사의 원천이기도 하지만, 미래를 위한 믿음의 샘근원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과거의 은혜에 대한 감사를 미래의 믿음으로 이어지게 한다면 우리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담대하고 충분히 넉넉한 신앙 속에서 삶과 성경이 부딛히지 않는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 연습을 계속하시기 바랍니다. 고난과 곤경 속에서 자신을 설득하는 연습, 현재의 현실이 아닌 과거의 은혜와 미래를 향한 믿음에 집중하는 연습을 계속하시기 바랍니다. 이 연습은 주님의 약속대로 여러분을 범사에 유익하게 할 것이며, 하나님께 가장 큰 영광을 돌려드리는 그런 연습이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기쁨과 확신 속에서 “주는 선하시며 인자하심이 영원하시도다”라고 넉넉하게 외칠 수 있는 그런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