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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 묵상

2012년 매일성경 묵상. 시편 14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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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시편 144편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인 다윗이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드리는 기도이다. 


“나의 반석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저가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며 손가락을 가르쳐 치게 하시는 도다 여호와는 나의 인자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의 산성이시요 나를 건지는 자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피난처시요 내 백성을 내게 복종케 하시는 자시로다”(1-2절)


하나님의 뜻대로 싸우는 전쟁 속에는 역설이 존재한다. 그 역설이란 전쟁은 하나님의 전쟁이지만 직접 싸우는 것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 속에는 우리가 매일 싸우는 영적인 전쟁에 대한 진리가 숨겨져 있다. 우리의 전쟁이 가지는 특징은 무엇이며, 그 전쟁에서는 어떻게 승리할 수 있을까? 모든 영적인 전쟁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전쟁이다. 그렇지만 막상 직접 싸우는 것은 우리들이다. 하나님께서 세세한 싸움마저 대신해 주시지는 않는다. “저가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며 손가락을 가르쳐 치게 하시는 도다” 하나님은 우리의 손을 가르치시고, 손가락까지 가르치신다. 그렇지만, 그래도 싸워야 할 것은 여전히 우리들 자신이다. 그냥 앉아서 싸울 수 있는 전쟁은 없다. 집에 있으면서 승리할 수 있는 전쟁은 없다는 것이다.(물론 내면의 전쟁은 집에 앉아서도 싸울 수 있는 전쟁이기는 해도 그 때도 여전히 우리는 우리의 의지를 가지고 우리의 내밀한 죄성과 싸워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싸움, 우리가 영적인 전쟁이라고 부르는 것의 첫번째 특징이다. 아무래도 우리가 싸워야 한다는 것. 두번째는 그 싸움의 정체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다윗은 말한다. “나의 반석 여호와... 여호와는 나의 인자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의 산성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피난처시요” 이건 단순히 은혜로운 구절들의 나열이 아니다. 이 고백이 전쟁이라는 절대절명의 상황 가운데서 이루어진 것임을 생각해 보라.(물론 다윗은 평상시에도 그 고백 위에서 살았지만...) 전쟁은 죽고 사는 문제이다. 나라로 생각하면 한 나라가 흥하느냐 망하느냐의 문제이다. 상식적으로 볼 때, 전쟁에 문제가 되는 것은 병사의 수와 무기의 많고 적음이다. 군사적인 우세와 열세가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을 향한 ‘미사여구’만 늘어놓는 듯이 보인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사실은 하나님을 그렇게 믿느냐 믿지 못하느냐가 전쟁의 핵심이다. 싸우는 것은 분명 다윗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이다. 그런데, 그 전쟁은 하나님의 전쟁이다. 그렇다면 이 전쟁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순종’이다. 다윗이, 이스라엘이 과연 하나님의 뜻대로 할 것인가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하나님을 향한 순종에는 반드시 믿음이 필요하게 마련이고, 이 믿음의 진위를 가릴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환경인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면, 그 믿음이야 말로 진짜 믿음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전쟁의 승패는 군사력이나 전략의 문제라기 보다는 믿음의 문제였고, 하나님께서 원하는 믿음만 보일 수 있다면 그래서 승리는 언제나 주어지게 되어 있는 전쟁이었다. 하나님은 다윗이, 그리고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반석, 인자, 요새, 산성, 건지시는 자, 방패, 피난처’로 믿고 의지하기를 원하신다. 그 믿음과 신뢰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보길 원하신다. 사실 여기까지가 이스라엘에게 속한 전쟁이다. 직접 싸우는 것은 이스라엘이지만 진짜로 싸우는 것은 하나님이시다. 우리의 영적인 전쟁도 마찬가지이다. 영적인 전쟁이 전쟁인 이유는 그 전쟁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영적인 전쟁은 항상 ‘구체적인 현실’이 전쟁터가 된다. 현실적인 손해와 어려움, 그리고 그 반대편의 현실적인 이익과 안락함이라는 것을 우리 눈앞에 놓고 우리에게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를 묻는다. 얼핏 보기에는 손해와 어려움을 선택하는 것은 지는 것이고 그 반대는 이기는 것 같지만 영적인 전쟁에서는 그것이 정반대라는 것이 문제다. 그 지는 것 같아 보이는 그것이 이기는 것이다. 그래서 영적인 전쟁에서는 이기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패배를 통해서만 승리를 얻을 수 있을 때가 많으니 말이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믿음이다.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든 것’으로 믿고 신뢰할 수 있는 믿음 말이다. 이스라엘의 전쟁이 그랬듯이 그럴 수만 있다면 승리는 따놓은 당상이다. 왜냐하면 정작 결정적인 싸움은 하나님께서 싸우시기 때문이다. 또 하나 내가 그러한 결단을 내릴 때, 나를 따라 용기를 내어 동일한 싸움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들을 붙여주시고 함께 하게 하신다. 그것이 우리의 상급이며 가장 큰 위로다. 옳은 길을 갈 때 가장 힘들고 위험한 것은 ‘외로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장의 외로움을 이길 수 있다면 우리는 대군을 얻으리라. 나와 같은 길 가는 대군을 얻으리라. 하나님은 “내 백성을 내게 복종케 하시는 자”이시기 때문이다. 나에게 주어진 싸움을 이렇게 싸우는 사람만이 이 고백을 자신의 삶으로 경험하는 복과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알아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관대 저를 생각하시나이까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3-4절)


누가 자신의 연약함과 무의미함을 절감할 수 있을까? 바로 모든 것을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탁해 본 사람이다. 한계상황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지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것은 상황에 대한 절망도 아니고 자신에 대한 좌절도 아니다. 이것이야 말로 이제껏 알지 못했던 확실한 소망으로 나아가는 지름길이며, 가장 당당해 질 수 있는 견고함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 길을 갈 때부터 인간은 유한하고 연약한 자신이 아닌 무한하고 영원하며 가장 견고한 실재이신 하나님을 인생의 근거로 삼게 되기 때문이다. 위의 고백이 절망적으로 보이는가? 거기에서 어떤 슬픔과 허무함의 그림자라도 보이는가? 그렇게 보인다면 아직 먼 것이다. 참으로 나를 알고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있어서는 아직 출발도 하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에 대한 절망과 좌절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죄의 본질은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믿음의 본질은 그 길을 돌이켜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자신에 대한 좌절과 자신의 부질없음을 철저히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여전히 자신을 믿게 마련이고 꼭 그만큼은 절대로 하나님을 신뢰할 수 없다. 내가 ‘헛 것’이고 ‘그림자’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 그런 나를 알아주시고 생각해 주신다는 것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은혜이며, 그래서 우리에게 감격과 기쁨을 주는 일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러니 기꺼이 헛 것이 되자, 기어이 그림자가 되자. 그렇게 자기 자신의 허무함과 무가치함을 대면하는 일을 미루지 말자. 그리고 항상 그 사실을 묵상하자. 내가 절감하는 나 자신과 하나님의 ‘거리’가 멀먼 멀수록 우리는 그만큼 더 큰 하나님의 은혜에 기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5-11절은 대적을 물리쳐 달라는 요청이다. 그런데, 다윗은 적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8절과 11절이다. “이방인의 손에서 나를 건지소서 저희 입은 궤사를 말하며 그 오른 손은 거짓의 오른 손이니이다” 단순한 기도같아 보이는 이 구절 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들어 있다. 첫째, 이제 하나님을 전쟁을 위한 모든 것으로 삼았으니 하나님께서 모두 책임져 주셔야 한다는 의미가 있다. 다윗은 이미 자신의 전쟁에서 승리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으며, 그래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다. 거기까지가 그의 전쟁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하나님의 전쟁 뿐이다. 그 분이 나서실 차례이다. 또 하나는 나는 ‘이방인’들과 같지 않다는 것이다. 만약 다윗이 입으로 궤사를 말했다면, 오른 손마저도 거짓을 도구로 사용하며 살았다면, 다윗은 결코 대적들을 향해 그런 기도를 드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그 기도가 자신을 겨누는 화살이 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누가 자신을 향해 화살을 쏘겠는가? 이 기도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향한 호소이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악인들을 향해서는 심판의 도구가 되지만 의인들을 향해서는 구원의 손길이 된다. 하나님께서 의를 행하실 때, 그것이 나에게 어떻게 작용할 것인가는 철저히 나에게 달려있다는 뜻이다. 우리도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을 만큼은 우리의 삶을 정직하고 올바르게 살아가야 하겠다. 그렇지 않으면 대적들이 달려들 때,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없을 것이니 말이다. 그런데, 이런 삶도 결국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에서 나오는 순종을 통해서만 가능해 진다. 그러니 이런 기도를 드리는 사람은 상황이 아니라,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철저히 신뢰하면서 살아간 사람이라는 점이 분명해 진다. 


“우리의 아들들은 어리다가 장성한 나무 같으며 우리 딸들은 궁전의 식양대로 아름답게 다듬은 모퉁이 돌과 같으며 우리의 곳간에는 백곡이 가득하며 우리의 양은 들에서 천천과 만만으로 번성하며 우리 소수는 무겁게 실었으며 도 우리를 침노하는 일이나 우리가 나아가 막는 일이 없으며 우리 거리에는 슬피 부르짖음이 없을진대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도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12-15절)


그러한 전쟁이 끝나면 태평성대가 이루어진다. 자녀들이 장성할 때까지 질병이나 전쟁이 없고, 농사는 대풍이 되고, 부르짖어 울 만큼 억울한 일이 없어진다. 이 모든 복은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마음에 항상 이 마지막 구절을 새겨야 한다. 그리고 거기에 믿음을 더해야 한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이 믿음이 있어야 영적인 전쟁, 믿음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이 결국에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심을 믿지 못한다면 현실 속에서 그 싸움을 결코 감당해 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이 있는데 실제로 우리는 이스라엘과 다르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나라 전체가 교회였지만 오늘날 교회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흩어져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시편 144편의 약속(약속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 고백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다윗의 구체적인 고백이기 때문이다)은 실제의 현실로는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내가 사는 세상은 결코 그 전체로 믿음으로 움직여지는 세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약속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 약속은 분명히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것은 현실을 넘어 서 있다. 이 약속은 결국 하늘나라를 향해 있다. 완전한 샬롬은 결국 하늘에서나 이루어질 것이니까. 그러니 이 땅에서 우리가 직접 이런 일들을 경험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실망하거나 분노할 일이 아니다. ‘결국에는’ ‘반드시’ 이 약속이 이루어질 것이니 말이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영원히 복이 있도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싸움에서 승리하게 하소서.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몫을 하시도록 우리 자신을 내어드리게 하소서. 우리가 하나님을 모든 것으로 삼을 때, 그 때에야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이 되어 주심을 잊지 말게 하시고, 그렇게 하나님이 모든 것이 되어주실 때까지 우리의 믿음을 하나님의 약속에 더하게 하소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일, 비록 힘들고 길어도 그 길 끝에 영원한 복이 있음을 믿게 하시고 이 땅에서의 당당함이 놓여있음을 알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