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 전서 4장 6-13절
* 이번 설교는 읽지만 마시고, 꼭 한 번 '들어주세요.' 제 '마지막' 부탁입니다. ^^
사람들은 어떤 신분을 가진 사람이든지 간에 그 사람이 그 신분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주길 바랍니다. 그래서 경찰은 경찰답기를 원하고, 선생님들은 선생님답기를 기대하듯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리스도인들 답기를 요구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그런 요구를 하지 않는데 유독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만 많은 요구를 하고 민감하게 대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단 한 번도 불교를 믿는 사람에게 불자답지 않다고 비난하는 것을 본 적이 없고, 무당이 무당답지 않다고 신문에 나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믿는 사람이 잘못하나 저지르면 난리가 납니다. 기독교 전체가 싸잡아서 욕을 먹습니다. 우리는 이럴 때 조금은 억울해 하고 또 영적으로 민감하게 반응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사실 성도가 된 이상 지고갈 수 밖에 없는 짐, 그것도 영광스러운 짐입니다. 저는 지금 우리가 욕먹는 것보다 더 두려워하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더 이상 그 누구도 우리를 욕해주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아마 그 때가 오면 사람들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 조차도 우리를 떠나실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내가 예수 믿는 순간 나는 더 이상 나 개인으로만 남아있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원해도 그럴 수가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곧 주변사람들이 지워주는 성도다우라는 짐, 그리스도인 답게 살아가라는 짐을 지게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믿지 않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도의 공인으로써의 영향력과 책임은 교회 안에서도 그대로 존재합니다. 교회 안에 있는 한 이미 내 행동은 나 개인의 행동이 아닙니다. 내가 이미 그래왔고 또 지금도 그런 상태에 있듯이 교회 안의 누군가 나의 행동을 보고 있고, 그 행동에 좋게든 나쁘게든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의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진리에 관한 최고의 내용들을 가르쳤습니다. 그건 아볼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두 사람은 정말 최선을 다해서 탁월한 복음의 메시지들을 그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수년간 성경을 연구해서 발견해 낸 진리들,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로 받은 것들... 그들이 고린도의 성도들에게 가르친 것은 정말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당대 최고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아볼로는 그들을 말로만 가르치고 끝내지 않았습니다. 6절을 시작하면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 바울과 아볼로가 고린도의 성도들에게 보여준 것은 지식 말고도 또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의 원리를 그대로 따르는 그들의 인격과 삶”이라는 최고의 시청각 교재였습니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들이 왜 서로 다투게 될까요? 그건 저마다 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라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거나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된다면 갈등은 거기서 끝나고 싸움으로 이어지지 않겠지만 대개 그러지 못하기 때문에 말다툼이 싸움이 되고 그 싸움은 점점 더 커져가게 됩니다. 당시의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모습이 꼭 이랬습니다. 여러 개의 파벌로 나뉘어서 다투었던 그들은 저마다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는 동일한 말씀을 표어로 삼았습니다. 서로 평행선을 달리던 그들이 놀랍게도 그 점에서는 일치를 보였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향해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주장 속에는 “나는 넘어가지 않았다”는 자기주장과 함께 “그런데, 너는 넘어갔다”라는 비난이 들어있었습니다. 그 속에 “나는 진리이고 너는 진리가 아니다. 그러니 나는 우월하고 너는 열등하다”라는 교만한 주장이 들어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바울은 자신과 아볼로가 삶과 사역으로 이미 그들에게 어떤 본을 보여주었다고 말합니다. 그 본은 바로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는 말의 온전한 의미를 가르쳐 주기 위한 본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은 바울과 아볼로의 삶과 사역을 지켜보면서도 그것을 보지도 배우지도 못했던 것입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보여주었던 본은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들의 삶을 옷감으로 삼아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옷을 만들게 하기 위한 패턴이었습니다. 사실 바울과 아볼로가 그 패턴을 처음 만들어 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도 그 패턴을 스승인 “예수 그리스도”께 받았고, 그 패턴에 따라 옷을 만들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자신들이 그랬듯이 그 패턴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서 꼭같은 옷을 만드는 사람들을 더 많아지게 하라는 임무가 맡겨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했습니다. 고린도의 성도들에게 최선을 다해서 예수 그리스도라 패턴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패턴을 사용해서 옷을 만들어가는 구체적인 방법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들은 아무 도 그 옷을 만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 노릇 하였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노릇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의 왕 노릇하기를 원하노라” 바울이 보기에 그들의 왕노릇은 아직 너무 때이른 왕노릇, 자격없는 자들의 왕노릇이었습니다. 물론 바울과 아볼로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자신들이 고린도의 성도들과 함께 왕노릇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왕노릇은 지금 땅 위에서 하는 왕노릇이 아니었습니다. 서로가 잘났다고 떠드는 유치하고 질낮은 왕노릇도 아니었습니다. 그 왕노릇은 마지막에 도착해야 할 곳에 다 도착한 후에, 만들어야 할 옷을 다 만든 후에, 맨 처음 그 패턴을 만드신 예수님과 함께 누려야 할 영원하고 참된 왕노릇이었습니다. 바울과 아볼로가 일생을 통해 그렇게 큰 수고를 감당하며 진정으로 얻기를 원했던 것은, 마지막 날 그 곳에서 그들과 함께 무한히 영광스러운 왕노릇 하는 것이었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고린도의 성도들은 자신들의 손에 쥐어진 그 패턴이 도대체 어떤 패턴인지, 무슨 옷을 만드는 패턴인지 조차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과 아볼로를 비롯한 사도들의 삶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도다” 바울은 사도들이 “죽이기로 작정한 자” 그러니까 로마군이 다른 나라와의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올 때, 이미 죽이기로 작정하고 로마의 승리를 나타내기 위해서 구경거리로 행렬의 맨 마지막에 끌고가는 전쟁포로들과 같은 신세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처지로 만드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10절 이하에서는 그는 이것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말합니다. “우리는 미련하고, 약하고, 비천하며, 지금 이 순간까지 배고프고 목 마르고 헐벗고 매맞으며 청처가 없이 떠돌고 있으며, 그러면서도 자기 힘으로 생활문제를 해결해야 하며 저주를 받아도 복을 빌며, 억울하게 중상모략해도 친절하게 답변한다. 그렇게 살았더니 지금에 와서는 마치 만물의 찌꺼기 같은 모습이 되었다. 이것은 모두 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이다.”
이것이 바울과 아볼로가 자신의 삶과 사역을 통해서 고린도의 성도들에게 보여준 본이었습니다. 자신들과 꼭같은 옷을 만들라고 손에 쥐어준 패턴이었습니다. 사실 이 패턴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그대로 흉내낸 패턴이었습니다. 주님도 그랬습니다. 주님도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리고 목마르고 매맞고 오해받고 정처가 없으셨으며 억울하게 중상모략을 당하셨습니다. 그렇게 구경거리와 만물의 찌끼처럼 되셨습니다. 주님은 그 패턴을 사도들에게 주었고, 그래서 지금 사도들은 그 패턴대로 그리스도로 옷 입기 위해서 옷을 만들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바로 이 패턴이 고린도의 성도들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의 성도들은 정반대의 옷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배불렀습니다. 이미 부요했습니다. 그들은 어리석어 지는 대신 스스로 지혜로워졌으며 약해지는 대신 더욱 강해졌고 비천해 지는 대신에 스스로를 존귀하게 만들었습니다.
기독교는 패턴의 종교입니다. 사도들이 예수님을 흉내내고, 사도들의 제자들은 그 사도들을 통해서 예수님을 흉내내고.... 그렇게 들려지고 보여진 진리를 통해서 이 세대에서 저 세대로 이어지며 생명을 이어가고, 약속의 성취를 향해서 나아가는 종교가 바로 우리가 믿는 기독교이고, 우리 신앙의 본질입니다. 패턴이 내 손에 있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내가 그 패턴의 전승자라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실제로 내가 그 패턴을 가지고 만들어야 하는 옷을 만들 수 있고, 지금 그렇게 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 손에 쥐어져 있는 패턴은 어떤 옷을 만들기 위한 패턴입니까? 나는 그 패턴으로 어떤 옷을 만들어야 합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옷입니다. 우리는 우리 손에 있는 패턴과 나의 인생이라는 옷감을 사용해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가장 영광스러운 옷, 그 왕의 옷을 만들어 내야 합니다. 그 옷은 우리가 만들어도 되고 만들지 않아도 되는 그런 옷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옷을 반드시 만들어야만 합니다.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들 때문이 아니라 나 자신을 의해서 업니다. 그 옷만이 우리가 나중에 주님과 더불어 왕노릇하게 될 때 입을 수 있는 유일한 공식지정 유니폼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기서 그 옷을 열심히 만들어 가지 않으면 그 날 내가 입을 왕복은 없을 것입니다. 나는 그 분과 더불어 왕노릇하지 못할 것입니다.
두번째로 알아야 하는 것은 이 옷을 만드는 과정에는 결코 “이미 왕노릇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때때로 교회와 성도는 이 세상에서도 큰 승리를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승리가 아무리 큰 승리라고 해도 그것은 마지막의 완전한 승리가 아닙니다. 그저 중간 중간 경험하는 잠깐의 승리에 불과합니다. 그것에 만족하고 거기 머무르려 해서는 안됩니다. 바울은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노릇하였도다”라고 말합니다. 길을 안내해 주는 선발대가 아직 목표지점에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후발대는 이미 도착해서 파티를 벌이며, 승리를 자축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있을 수 있다면 한 가지 가능성 밖에 없을 것입니다. 후발대가 잘못된 곳에 도착해서, 거기가 목표지점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 말입니다. 바울이 보기에 당시의 고린도 교회가 바로 이런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잘못된 중간지점에서 이미 왕노릇하면서 착각에 빠져 있었습니다. 아직 선발대는 열심히 목표지점을 향해 가고 있는데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들이 서로를 향해서 뜻도 모르고 외쳤던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그 말의 참 뜻은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이 땅은 성도가 왕노릇할 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는 땅에서의 왕노릇을 넘보고 탐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 땅 위에서의 삶은 왕노릇을 준비하는 과정이며, 그 영광을 바라보며 애쓰는 시간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고린도의 성도들처럼 이 땅에서 “이미 왕노릇”해서는 안됩니다. 완전히 다 이긴 사람처럼 살면서 왕노릇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 대신 아직은 싸우는 사람으로, 아직은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은 사람으로, 그리고 아직은 그 패턴을 따라 옷을 만드는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이 땅에서 예수님께서 그러셨고 그 분의 뒤를 따랐던 모든 참된 성도들이 그랬듯이 오히려 예수님을 위해서, 그 분의 복음을 위해서 어쩌면 때로는 너무 “당연한” 것들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이 그렇게 자랑스러워하는 삶의 반대방향으로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정해주신 땅에서의 한계를 절대로 넘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 오시는 날, 그 나라에서의 왕노릇을 생각하며, 또 내 뒤를 따르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오늘 여기서 왕노릇하고 싶은 욕심을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사실 그건 왕노릇도 아닙니다. 그저 섣부르고 유치한 흉내내기에 불과합니다. 그저 묵묵히 가던 길을 계속 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 날 주님의 눈에 주님처럼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로 발견되어 그 분과 함께 영원히 왕노릇하는 영광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