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 2012-01-29
본문 : 누가복음 4장 14-29절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첫번 사역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첫번 사역지는 갈릴리였습니다. 갈릴리로 돌아오신 예수님은 거기서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회당에서의 가르치심은 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라나신 동네인 나사렛에서는 정반대의 대접을 받으셨습니다. 정확하게 설명한다면 처음에는 나사렛에서도 비슷한 대접을 받으셨지만 곧이어 나사렛 사람들이 가지게 되었던 한 가지 의문 때문에,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스스로 내린 답변 때문에 정반대의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 정반대의 반응을 보이게 되었고 그것은 아주 불행한 사건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향마을로 돌아가셔서도 관례대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셨고, 거기서 자기 차례가 되자 이사야서의 말씀을 읽고 또 해석해 주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께서 읽고 해석하신 말씀은 두 군데였습니다. 이사야서 61장 1-2절과 이사야서 58장 6절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하셨습니다. “이 글이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이것은 정말 충격적이고 놀라운 선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이사야의 이 말씀이 다름 아니라 오실 메시야에 대한 예언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스스로를 메시야라고 주장하는 셈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충격적인 예수님의 선언에 대해서 사람들은 아주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저희가 다 그를 증거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씀을 기이히 여겨...” 여기서 ‘그를 증거했다’는 우리 말로 번역된 말의 원래 뜻은 그의 편을 들고 칭찬했다는 의미입니다. 처음 예수님께서 이사야서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예수님 자신에게 적용하였을 때, 그 분의 말씀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처럼 은혜롭게 들려졌고 그래서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거부하기 보다는 기쁘고 경이롭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 뒤를 이어 생겨난 하나의 질문은 그들의 그러한 올바른 반응을 모두 망쳐놓고 말았습니다.
거기 모인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예수님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는 그 동네에 사는 가난한 목수 요셉의 장남이었습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예수는 목수 요셉의 아들이지 절대로 그 이상의 사람이 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생각은 예수님에 대한 반감으로 바뀌었고 이제 예수님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증거가 필요하다는 회의적인 생각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이런 마음을 읽으신 예수님께서는 선지자가 자기 고향에서 환영받는 일은 없다고 하시면서, 거기에 두 가지 이야기를 덧붙이셨습니다. 그 이야기들은 엘리야 시대에 사렙다의 과부 사건과 엘리사 시대의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단지 그 시대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니라 이방인들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기적적인 은혜를 받았다고 이야기하려고 인용한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이야기를 통해 이스라엘 사람들의 영적인 현주소가 어디인지를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예수님 앞에 있는 사람들이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의 사람들과 같은 상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기회를 그들이 무시하는 이방인들에게 빼앗겨 버릴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그 두 이야기의 요지였습니다.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알아듣고 크게 노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붙잡아서 낭떨어지까지 데리고 갔고 거기서 밀어 떨어뜨리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거기까지 끌고 갔고 그래서 자기들 마음대로 죽일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착각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유히 그들 사이를 그것도 걸어서 빠져나가셨습니다. 그런 사람들 속에는 더 이상 머물 수 없으셨고, 머무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진리와 복들을 나눠줄 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 속에서 나사렛 사람들의 영적인 실패를 목격하게 됩니다. 너무 너무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들이 처음부터 예수님을 거부한 것이 아니었고, 처음부터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중간에서 길을 잘못 들어섰기 때문입니다. 본문 속에는 이들을 이런 상태에 떨어지게 했던 두 가지 이유가 들어있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이 이렇게 큰 영적인 실패와 또 죄를 저지르게 된 첫번째 이유는 그들이 가난한 자, 부족한 자, 연약한 자가 되기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들은 물질적으로 볼 때 아주 아주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자신의 처지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마음과 영혼은 하나님 앞에서 가난해지고 연약해지지 않았으며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에 대해서 활짝 열려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서의 말씀을 읽으시고 복음이, 자유가, 다시 보게함이, 그 모든 것을 포함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희년이 자신을 통해 이미 사람들에게 주어졌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그 이야기를 듣고 예수님을 칭찬했고 놀라기도 했으며 은혜스러운 감정을 갖기도 했지만 정작 그 복음이 가져온 진짜 복들을 누리는데 까지는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진실로 가난한 자, 포로된 자, 눈먼 자가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가난한 자, 진실로 포로된 자, 그리고 진실로 눈 먼자들은 결코 자신을 믿지 않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삶과 구원에 대해서 스스로가 얼마나 무능하고 부족한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이들은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필요한 구원을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절실하게 깨닫고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절대적으로 기대합니다.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만이 복음을 진짜 복음으로 듣습니다. 절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을 붙듭니다. 복음을 받아들이고 구원을 붙잡기 위해서는 더 이상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조차도 흔쾌히 내려놓게 됩니다. 당시의 나사렛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이 되어 이런 사람들로 살아가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눈 앞에 자신들을 위한, 자신들에게 꼭 필요한 은혜와 구원이 놓여있었지만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비록 그들은 경제적으로는 가난하고 육체적으로는 부족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여전히 자신을 믿고 자신을 의지해서 살아가려는 뿌리깊은 교만을 버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나사렛 사람들의 영적실패의 두 번째 이유는 그들이 ‘익숙함의 저주’에서 빠져나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분을 칭찬했으며, 그 말씀에서 은혜를 느낀 직후에 그들의 마음 속에는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라는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이 질문은 궁금증에서 나온 질문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에 대해서 너무나 확실히 알고 있는 지식으로 부터 생겨난 의혹의 표현이었습니다. 이 질문은 사실은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기 때문에 저 사람은 결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대단한 사람일 수 없고, 스스로가 말하는 그런 메시야일 수가 없다”는 뜻으로 내린 예수님에 대한 부정적이고 확정적인 평가였던 것입니다.
무언가에 익숙하다는 것은 참 좋은 것입니다. 사람이나 물건이나 환경이나 익숙해져야 편안하게 대할 수 있고, 또 제대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익숙하다는 것은 동시에 굉장한 장애물이 되기도 합니다. 익숙하기 때문에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다고 결론짓고 전혀 다른 방식으로는 보려고 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볼 때, 익숙함은 우리의 영혼에 굉장히 위험하기도 하고 또 저주스러운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 익숙함의 대상이 하나님이나 예수님, 그리고 두 분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가 될 때, 우리는 영적으로 고착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사랑하고 진리를 깨닫고 은혜를 누리는데 있어서 더 이상 진전을 보일 수 없게 됩니다. 익숙함이 장벽이 되어서 새롭게 임하는 은혜와 진리에 대한 지식들을 가로막아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 때부터 영적인 성장이 멈춰버리는 것은 물론이고 신앙에 대한 굉장히 편협한 오해에 빠지게 됩니다.
갈릴리 사람들이 이사야서의 말씀에 나오는 그런 가난하고 부족한 사람들이었다면, 그렇게 되기를 꺼려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들이 익숙함의 저주에 걸려넘어지지만 않았다면 그들은 그렇게 귀하게 얻은 은혜의 기회들을 스스로 저버리지 않았을 것이고, 예수님을 그런 식으로 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진정으로 가난한 사람들이었다면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 마음이 더 가난해져서, 빼앗겨버릴지도 모를 은혜를 더 단단하게 붙들었을 것입니다. 또 그들이 익숙함의 저주를 극복할 수 있었다면 그들은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라는 질문에 대해서 “그렇지만 예수는 예전의 예수와는 전혀 다르다”라고 대답하면서 예수님으로부터 더 깊고 풍성한 진리와 은혜를 얻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갈릴리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난하고 무능한 사람들이 되기를 원치 않았고, 익숙함의 위험성을 이겨내지도 못했습니다. 스스로 부요한 자요, 고정되고 확실한 사람이 되어서 심각한 영적인 실패에 빠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를 오래 믿다가 보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 두 가지의 영적인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기가 얼마나 쉬워지는지 모릅니다. 처음 은혜를 알았을 때는 그 은혜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가난하고 무능하며 또 죄 때문에 갇혀 있는 사람인지를 철저히 깨닫고 인정하게 됩니다. 그래서 더 은혜를 갈망하게 되구요.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이러한 마음의 갈증과 절실함이 해소되기 시작하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가난함과 무능함에 대해 무감각해지고 또 망각하게 됩니다. 더 이상 스스로를 가난하게도, 무능하게도 여기지 않습니다. 은혜 아니면 안된다는 절실함도 희미해져서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이 약해집니다. 이 순간이 바로 첫번째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는 순간입니다.
또 한 가지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신앙생활 안에 포함된 모든 것들에 대해서 익숙해져 갑니다. 하나님도 충분히 아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도 그렇고 은혜에 대해서도 다 아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전부이고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 그것이 신앙생활에 대한 움직일 수 없는 고정관념이 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신앙 속에는 ‘새로움’이 비집고 들어올 틈 조차 없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워질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도 알아차리지 못한 상태로 두번째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게 됩니다.
신앙에 대한 익숙해지고 굳어져 버린 고정관념과 가난한 채로, 무능한 채로 은혜에만 의지해서 살아가고 싶어하지 않는 우리의 마음은 우리가 진정으로 은혜를 경험하며 날마다 새로운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며 살아가려면 반드시 처리해야 할 마음입니다. 그러려면 우리는 아는데 있어서도 믿는데 있어서도 그리고 살아가는데 있어서도 겸손함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알고 경험하는 것이 형편없이 부족하며 불완전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며, 그래서 날마다 새로워지고 더 풍성하게 채워져 가야함을 인정하는 그런 가난하고 부족한 마음과 생각으로 자신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께서는 우리 속에 거하시면서 날마다 더 풍성한 은혜로 우리를 새롭게 해 주실 수 없으십니다. 그 다함 없는 새로움과 풍섬함도 우리와는 상관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주님은 그저 우리 가운데를 지나쳐서 다른 곳, 그 더 은혜에 갈급하고 겸손한 영혼에게로 가실 수 밖에 없으십니다.
여러분 모두가 언제나 더 가난하고 더 불완전하며 더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날마다 더 새롭고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와 그 분을 아는 지식에서 성장해 가며 그 분이 주시는 자유와 구원을 받아 누리는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