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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2012년 매일성경 설교. 사마리아의 한 촌에 들어갔더니


날짜 : 2012-02-18

본문 : 누가복음 9장 51-62절(51-55절까지만)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무언가 무거운 짐을 지게 되는 일을 싫어합니다. 일평생 좋은 일만 계속되면 좋겠고, 건강하면 좋겠고, 하는 일마다 잘 풀리면 좋겠고, 걱정이 없이 편안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면서도 아주 의미있고 가치있는 삶을 살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가 경험하고 관찰한 바로는 이 두 가지를 모두 취할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제가 길게 살지는 않았지만 살면서 반복해서 깨달게 되는 것은 “이 세상에 가치있고 의미있는 일들 중에서 쉽기만한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가치와 의미는 거의 언제나 우리의 욕망이나 본능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우리의 욕망과 본능을 적어도 어느 정도라도 거슬르지 않으면 의미와 가치는 추구할 수가 없는 것이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일이 우리 기대처럼 쉽고 간단하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 일만큼 가치있고 의미있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만큼, 그리고 영생을 얻는 일만큼 가치있고 의미있는 일이 어디있겠습니까? 만약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보다 가치있고 의미있는 일이 없다면 실제로 그것보다 쉽지 않은 일도 없다는 결론에 이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를 진심으로 원한다면 그 일이 만날 수 없는 장애물들을 예상해야 하며 그 장애물들에 잘 대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자신이 예루살렘으로 가셔야만 한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십자가를 지셔야 할 때가 가까와지고 있는데, 그 십자가를 져야할 곳이 바로 예루살렘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일은 예수님에게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길과 거기 도착해서 당하게 될 일이 얼마나 견디기 힘든 일들이 될 것인지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시는 일도 그렇지만 그 과정에서 당하게 될 일들은 고통과 비난, 오해와 반대, 그리고 배신은 지금까지 공생애 기간동안 겪으셨던 모든 고통과 어려움을 최대한도로 압축하고 확대한 듯한 엄청난 일들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아셨고 그래서 그 여행은 예수님의 굳은 결심이 없이는 계속할 수 없는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굳게 결심하고 그 길을 떠나셨습니다. 그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서 하늘나라의 문을 활짝 여는 유일한 열쇠가 되는 그렇게 중요하고 가치있는 일임을 아셨기 때문에 기꺼이 그 짐을 지기로 하셨던 것입니다. 

그 분의 여행은 출발부터 아주 힘겨운 발걸음이 이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를 통해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택하셨습니다. 사마리아에도 구원의 소식이 전해져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첫번 머무시려고 했던 사마리아의 한 마을이 예수님과 일행이 거기 들어오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내어주시려고 그 힘겨운 여행을 하고 계신데, 그리고 그 소식을 전하시려고 일부러 그 마을을 선택하신 것인데 막상 그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들어가시는 것 조차 완강하게 거부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내가 바로 살기만 하면, 의미있는 선택을 하기만 하면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환영해 줄 것이고 그 앞에 평탄한 길이 열릴 것이라고 기대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사람들의 기대대로 돌아가 주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가 될 때가 더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은 좋은 소식입니다. 그들에게 구원을 말하고 영생을 전하는 것이니 그것을 듣는 이들에게 그것보다 좋은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반응은 정반대입니다. 거부하고 무시하며 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박대합니다. 우리는 왜 이 좋은 소식을 거부하며, 그 좋은 것을 전하는 나를 이렇게 함부로 대하는가 이해할 수 가 없지만 그것이 복음을 모르는 세상이 보이는 일반적인 반응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이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의 방문을 거부한 것은 정말 말도 안되는 이유때문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고로...” 그들이 예수님을 거부한 것은 그저 그 분이 예루살렘을 향해서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유대사람들과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야 말로 철천지 원수였습니다. 그러니, 자기 마을은 그저 거쳐가는 곳일 뿐이고 그 분의 진짜 목적지는 예루살렘이라는 사실을 듣고는 예수님을 거부할 정도로 자존심이 상했던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예루살렘에 대한 그들의 거부감 때문에 예수님을 거절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다가,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다가 경험하는 거절과 거부가 그래도 거창하고 논리적인 이유 때문이라면 우리 편에서도 비교적 수긍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향한 사람들의 반대와 거절은 정말 말도 안되는 이유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지기도 하고 심지어는 아무런 이유가 없을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향한 거절과 거부가 이런 종류의 것일 때가 많다는 것을 미리 생각해 두어야 합니다. 이유가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많다는 것을 말입니다. 

반대와 거절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은 우리가 말도 안되는 이유로 똑같은 어려움을 당할 때의 반응과 많이 비슷한 것 같습니다. 제자들은 정말 엄청나게 화가 났습니다. 대표적으로 화가난 사람이 바로 야고보와 요한이었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주님, 우리가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게 해서 저들을 다 태워버릴까요?” 그런데 이 이야기를 들으시고 나서 주님은 그들의 말에 동의하시는 대신에 제자들을 나무랐습니다. 그리고는 제자들을 그저 다른 마을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우리가 복음 때문에, 그리고 가치있고 의미있는 일을 하다가 반대와 핍박을 경험하게 되면 우리는 제자들과 같은 마음이 되기 쉽습니다. 분노에 사로잡히게 되고, 마음으로 그들을 욕하며 저주하게 됩니다. 힘이 있다면 그들을 혼내주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마음을 나무라십니다. 왜 입니까? 단순히 그런 감정 자체가 바람직하지 못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다가 거부와 불이익을 당하게 될 때, 그런 악한 마음을 가지게 되는 이유는 우리가 우리의 소명을 오해하고 있고 또 제대로 알고 있더라도 거기 순종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앞으로 예수님 대신 그 일을 해야할 사람들입니다. 이 말은 그들에게 맡겨진 일은 사람들을 벌주고 저주하며 그들과 싸우는 일이 아니라 그들을 건지고 살리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제자들과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생명의 시대이고 구속의 시대이지 저주와 멸망의 시대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늘나라의 문이 활짝 열려졌고 우리는 그리로 사람들을 초청하는 임무를 맡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우리를 거부한다고 해서, 우리를 몰라주고 때로는 힘들게 한다고 해서 그들을 향한 악한 마음을 품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와 또 그 시대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거기에 순종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고 복음을 전하면서 맞닥뜨리게 되는 반대와 불이익에 대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반응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악하고 대립적인 감정을 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저주와 미움, 분노의 시대가 아니라 구원과 초청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미 하늘문이 활짝 열린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고 하다가 복음을 전하다가 반대와 무시에 부딛힐 때,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이 우리의 삶과 말을 통해서 사람들을 하늘나라로 초청하는 일임을 기억하시고 그 때 생겨나기 쉬운 악한 감정을 잘 다스리시기 바랍니다. 

세상에 예수님보다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큰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분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시고, 그 생명을 주실 정도로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한 간절함과 안타까움이 크셨던 분이십니다. 이런 사실과 오늘 우리가 본문에서 만나게 되는 너무나 쉽게 그 마을을 지나쳐 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보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이 자신을 거부하는 영혼들을 사랑하지 않으신다는 성급한 결론을 내려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의 이런 행동은 그런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은 끊임없이 복음을 전하시고, 믿음을 가지라고, 믿음으로 살라고 촉구하시며 때로는 꾸짖기까지 하셨지만 단 한 번도 없는 믿음을 만들어 주신 적은 없습니다. 믿음에 관한 한 어떤 식으로든 억지를 부리신 적은 없으셨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생각할 때 반드시 포함시켜야 할 믿음에 대한 사실은 믿음은 우리가 인력으로 어쩔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성령님께서 죽은 자를 부르시고 그에게 복음을 들려주실 때만 그 마음에 생겨날 수 있는 은혜입니다. 그만큼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하는 일입니다. 그 이전에는 아무리 억지를 부리고 심지어는 협박을 한다고 하더라도 억지로 생겨나게 할 수는 없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그 마을을 그렇게 지나치셨을까요? 그것은 그 분이 그 누구보다도 믿음에 대해서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누구보다도 안타까워 하셨지만 누구보다도 마음 아파하셨지만 그래서 일단은 그렇게 억지 부리지 않으시고 그 자리를 떠나셨던 것입니다. 그 모든 일을 나중 제자들에게, 그리고 하나님께 맡기시고 말입니다. 

심방을 하다보면 가족들을 전도하려고 하다가 그 가족을 미워하게 되고, 그 가족을 향해 화를 품게 되는 분들을 만나곤 합니다. 저는 그런 분들에게는 항상 믿음과 구원이 인간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믿으시라고 권면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 삶으로 그 복음을 믿는 일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를 보여줄 수는 있어도 그것으로 억지로 믿음을 만들어 낼 수 없다는 사실을 말씀드립니다. 여러분, 우리가 복음을 전하다가 그를 향한 안타까움이 미움과 원망으로 바뀌려고 할 때마다 우리는 믿음은 우리의 소관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역할은 씨앗을 뿌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겸손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그 심정이야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그래도 그들을 걱정하고 안타깝게 여기는 선한 마음이 악한 감정으로 바뀌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열심이 많으면 많을수록, 열정이 뜨거우면 뜨거울수록 더 큰 역효과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우리의 감정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미워하고 원망하고 있으며, 그 이유가 복음 때문이라는 것을 아는데 어찌 그들이 우리의 말을 순순히 듣겠습니까? 오히려 더 빗나가고 어긋나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열심과 열정은 그렇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오히려 믿음의 걸림돌이 되고 말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을 따라 사는 것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항상 반대와 거절을 동반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그만큼 가치있고 의미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살리고 다른 이들의 영혼을 살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순진해서는 안됩니다. 그 대신 순수하고 지혜로워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시대를 분별하고 우리 앞에 닥쳐오는 장애물들을 넘어서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이 순수함과 지혜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알며 거기 순종할 때 생겨납니다. 언제나 내가 사는 시대는 구원과 초청의 시대이며 내가 맡은 일은 사람을 살리는 일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또 우리는 씨앗을 뿌리는 사람들이지 열매를 만들어 내는 사람이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소명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 소명의 범위를 넘어가지 마십시오. 그러면 이 가치있고 소중한 일을 하다가 마음을 다치고 감정을 상하며 그것 때문에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 소중한 일을 스스로 방해하게 되는 부작용을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혜와 겸손함을 주셔서 우리 앞에서 닥쳐오는 장애물들을 넘게 하시고, 우리의 삶과 말이 언제나 사람을 살리는 하늘나라의 초청장으로 쓰임받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