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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2012년 새벽설교. 벧전 2:11-25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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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2012-06-04

본문 : 베드로전서 2장 11-25절(11-12절, 21-25절)


제가 가끔씩 욕심을 주제로 설교를 하거나 가르쳐야 할 때면, 빠지지 않고 묻는 질문 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욕심은 꼭 필요한 것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여러분은 욕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욕심은 꼭 필요한 것입니까? 아마도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꽤 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우리는 이미 기독교 신앙의 입장에서 욕심에 대해서 배우기 전에 상식적이고 세속적인 수준에서 욕심은 개인이나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라고 배우고 또 그렇게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욕심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하게 되면 신앙에 대해서도 심각한 오해가 생겨나게 마련입니다. 신앙을 욕심을 추구하고 또 성취하는 도구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서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는 것을 신앙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그것은 오해입니다. 사람들이 욕심이 꼭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당연하게 여기는 이유는 욕심에 대한 대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발전과 진보를 하려면 욕심은 꼭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그것을 대신할만한 것을 전혀 찾을 수 없으니 욕심을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그것이 그다지 선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도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을 향해 “나그네와 행인과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라는 말로 베드로 전서의 실제적이 교훈의 두번째 부분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나그네와 행인들.... 이 말은 베드로가 우리에게 일관되게 일깨워주고 또 일깨워주기를 원하는 우리들이 누구인가하는 질문에 대한 해답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누구입니까? 예수믿는 우리는 이 세상에서 누구입니까? 바로 “나그네와 행인”입니다. 여행하는 사람이고 잠시 머무는 사람이며 심지어는 그저 지나쳐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말은 우리는 결코 이 땅에 터닦고 살아가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성도답게 사는 일에 자꾸 실패하는 가장 큰 이유가 있다면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나그네요 행인이라는 사실을 자꾸 망각하고 또 심지어는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 땅에 터 닦고 집 짓고 떵떵거리며 살 방도를 찾게 되는 것이고, 그래서 자꾸 욕심에 휘둘리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우리를 향해 “나그네와 행인”이라고 말한 후에 “육체의 정욕” 그러니까 “욕심”을 제어하라고 이야기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땅을 영원한 거주지로 여기는 사람들은 결코 욕심을 다스릴 수가 없습니다. 욕심에 휘둘리지 않을 방도가 없습니다. 세상을 얻으려 하니 세상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죠. 욕심에 휘둘리지 않고 욕심을 동기로 해서 사는 삶이 아닌 다른 모양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은 자신을 이 땅의 나그네로, 심지어는 행인으로 여기는 사람들 밖에 없습니다. 여기가 내 집이 아니라 내 집은 저 하늘나라며, 나의 영광과 부요함은 여기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저기 저 나라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고 영원한 것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음을 아는 사람들 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그리고 심지어는 믿는 사람들까지도 욕심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그래서 그것을 따라다니며 살아가는 이유는 사실은 자신이 왜 무엇 때문에 살아가고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11절은 우리에게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명령한 후에 1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라고 그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왜 다른 사람들처럼 욕심을 당연하게 여기면서, 그 욕심을 따라 살면 안될까요? 그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이유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이유와는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땅 위에서의 행복, 그것도 자신들이 만들어낸 틀에 꼭 맞는 행복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 때문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12절이 알려주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하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때가 오면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고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우리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삶의 이유와 목적으로 삼아야 할 우리의 소명입니다. 이 소명이 우리의 삶의 이유가 되고 또 목적이 된다면 우리는 욕심을 따라 살지 않으면서도 오히려 욕심을 따라 살 때보다 훨씬 더 견고하고 만족스런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11절과 12절을 가만히 살펴보면 욕심과 선행과 하나님의 영광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은 선을 행하며 사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선한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선을 행하려면 욕심을 다스려야 합니다. 우리가 욕심을 부리고 그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살아가는 한, 우리는 다른 이들을 위한 선한 삶을 살아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소명과 욕심은 항상 대립상태에 있습니다. 맘몬과 하나님이 서로 대립상태에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살게 하시기를 원하는 삶과 욕심을 따라 사는 삶은 우리를 서로 정반로 잡아당깁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꺼번에 두 가지 모두를 추구하는 그런 삶은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욕심을 따라 사는 삶은 편하고 행복하며 소명을 따라 살아가는 삶은 불편하고 힘들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편견이 우리가 소명을 따라 살아가는 삶을 방해합니다. 그러나 그건 말 그대로 편견입니다. 물론 욕심을 따라 살면 원하는 것을 빨리 그리고 많이 가질 수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가져다 주는 편리함과 넉넉함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소명을 따라 사는 삶이 욕심을 따라 사는 삶만큼 편하고 넉넉하지도 않고 때로는 힘겨운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성도 여러분, 불편하고 힘들다고 해서 거기에 만족이 없고 행복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입니다. 거꾸로 넉넉하고 편하다고 해서 그것이 곧 만족스럽고 행복한 삶을 보장해 준다고 생각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제로 있고 없음, 많고 적음은 만족이나 행복과 그다지 깊은 관계가 없습니다. 욕심이 아니라 소명을 따라 살아가다보면 가끔은 불편하고 가끔은 속상하기도 하지만 그게 소명을 따라 사는 삶의 전부가 아닙니다. 소명을 아는 사람, 그리고 그 소명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그 마음에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확신이 있습니다. 그리고 실은 소명이라는 것이 원래 우리와 전혀 상관없는 것이 갑자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우리에게 있었지만 우리가 잊어버리고 또 무시했던 하나님께서 원래 계획하셨떤 삶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우리가 소명을 따라 살 때 비로소 우리는 제 자리로 돌아가서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허무함은 없습니다. 무의미한 삶도 없습니다. 누가 무시한다고 해서 무시당하지도 않구요. 누가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그다지 속상하지도 않습니다. 바로 이러한 삶의 비결이 소명을 따라 살아가는 삶 속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그네로 부름받았습니다. 그저 이 땅을 지나쳐 가면서 거기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과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얼마나 아름답고 선하게 살아가며, 또 얼마나 행복할 수 있는지, 그 존재는 또 얼마나 넉넉하고 풍성한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 세상을 향해 얼마든지 욕심을 부리고 욕심에 휘둘리지 않는 행복하고 당당한 삶의 방법이 있음을 보여주고 그것을 통해 그들의 눈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하나님께로 돌리게 하는 그런 역할을 하는 하늘 나그네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진짜 행복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진짜 만족은 나그네답게 살아가는 삶 속에 있습니다. 비록 그렇게 살아가는 삶 속에는 애매한 고난도 있고 스스로의 자유를 제한해야 하는 어려움도 들어있지만 그렇게 사는 삶이야 말로 이 땅을 온전한 나그네로 사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삶이며, 그래서 우리 주님처럼 하늘의 영원하고 다함없는 영광을 보장받게 되는 그런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욕심을 위해서 부름받지 않았습니다. 이 땅의 영원한 거주자로 부름받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고 사심을 통해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사는 사람들이 되도록, 우리의 선한 일을 통해 세상에 하나님을 보여주는 나그네로 살아가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 소명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때로 화려하고 안락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우리는 거기에만 참 만족이 있음을, 그러한 삶을 통해서만 하나님께서 영광받으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거기에 예수님과 같은 충만함, 바울과 같은 기쁨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항상 내가 무엇 때문에 부르심을 받고 구원을 받았는지 기억하며, 또 거기에 삶을 맞추어 감으로써 그 길 가는 나그네들에게만 주시는 확신과 위로를 누리시며, 주님께서 누리시는 하늘 영광을 함께 누리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