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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2012년 3월 1부예배 2. 아버지에로 돌아가니라


  교 일 :  2012년 3월 11일

설교본문 :  누가복음 15장 11-20절

 

도입 : 나를 알고 하나님을 알고...

전통적으로 신앙에 대한 여러가지 설명이 있어왔지만, “신앙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또 사람을 아는 것이다”라는 칼빈의 설명만큼 적절한 설명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우선 신앙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 분의 존재와 그 분의 성품, 그 분의 무한한 가치에 대해서 바로 아는 것이 바로 신앙의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인간을 제대로 아는 지식입니다. 우리가 인간, 그러니까 우리 자신에 대해서 모르면 결코 그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분을 믿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록 신앙이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지만, 그것을 위해서는 우리 자신을 바로 아는 지식 또한 반드시 필요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신앙이 일방통행이 아니라 쌍방통행이라는 점에서도 그럴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신앙은 두 인격 사이의 일입니다. 하나님이라는 인격과 인간이라는 그 분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격 사이의 관계가 바로 신앙입니다. 이 관계에 있어서도 하나님과 인간 둘 모두를 아는 지식은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둘 중의 하나라도 오해를 하게 되면 바로 그 부분에서 우리의 신앙은 일그러질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소개

우리들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어려가지의 설명이 존재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은혜롭고 감동적인 설명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그리고 우리들을 그 분의 자녀로 설명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시라니... 얼마나 푸근하고 넉넉합니까? 그런데, 이 “아버지와 자녀”라는 관계도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아버지와 자녀라는 두 당사자가 존재하고, 이 관계를 온전히 알고 누리려면 우리는 반드시 아버지의 아버지됨에 대해서 우리의 자녀됨에 대해서 올바로 이해하고 그 기초 위에 이 관계를 세워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제가 실제로 성도들을 살펴보면 이 두 가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신앙의 풍성함을 찾아 누리지 못하는 분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 중에도 자신의 자녀됨과 하나님의 아버지됨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신앙의 참된 풍성함을 누리지 못했던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탕자의 비유’는 그래서 주신 비유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하나님의 아버지되심과 그들의 자녀됨에 대해서 제대로 가르쳐 주시려고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탕자의 비유’는 그 분의 자녀된 우리를 위한 훌륭한 치료약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됨과 하나님의 아버지됨이라는 신앙의 두 기둥에 대한 가장 올바른 그림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오늘 부터 두번이나 혹은 세번에 걸쳐서 이 주제를 집중적으로 살펴보고 묵상해 보겠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 자신을 보고 또 하나님을 봄으로써 우리의 자녀됨과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이 온전히 회복되어지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1막. 둘째 아들, 독립선언을 하다. 

한 아버지가 두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큰 아들은 아주 착실하고 말 잘듣는 훌륭한 아들이었지만, 둘째는 정반대로 말 그대로 개차반이었습니다. 도통 집안 일이라고는 돌볼 줄 모르고 항상 제 멋대로 굴었습니다. 게다가 현실감마저 없어서 근거없는 자신감에 빠져 허황된 꿈만 꿀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둘째가 아버지에게 와서 당당하게 말합니다. “아버지, 제 몫의 유산을 주십시오. 이왕 주실 거 조금 일찍 주신다고 문제될 것 없지 않습니까? 저는 더 이상 이 답답한 시골구석에 처박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대처로 나가 대박을 터뜨릴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버지는 둘째가 하자는 대로 합니다. 

여기까지가 오늘 비유의 1막입니다. 한 아버지의 사랑하는 아들이 자기 아버지를 죽은 아버지로 만들면서까지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삶, 자신이 주인이 되어 사는 삶을 향해 치닫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 아버지는 아들이 하고 싶은대로 하도록 그냥 내버려 둡니다. 붙잡아 놓고 흠씬 두들겨 패도 부족할텐데 전혀 그렇게 하질 않습니다. 이런 아버지는 좋은 아버지라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아무 생각이 없는, 자식에게 휘둘리는 나약한 아버지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태초에 이런 아버지가 계셨습니다. 아담이 처음 죄를 지을 때 하나님께서는 꼭 이 아버지처럼 행동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하와와 함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는 것을 가로막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이 이 세상에 죄와 죽음을 가져올 줄 알고 계시면서도 그저 그대로 두셨습니다. 힘없고 무능한 아버지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왜 아담을 가로막아서 그런 영원한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지 않으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그 분의 자녀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신 동시에 인격이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이 두가지 모두를 말합니다. 그래서 그 분의 형상인 인간이 인격적인 존재인 동시에 영적인 존재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자유의지’입니다. 인간에게 윤리적으로 무언가를 의지하고 결정할 자유는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그 자유를 주시지 않으셨거나 그 자유를 구속하려 든다면 인간은 이미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할 수 없는, 그저 입력된 대로만 움직이는 로보트같은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처럼 선한 생각과 의지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하나님을 섬기기를 바랬습니다. 그 귀한 자유의지를 거기에만 사용해 주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렇지만 인간은 정반대로 갔습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자녀로 남는 대신 자신이 주인이 되고 왕이 되는 삶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마치 아버지의 둘째 아들처럼 말입니다. 

2막 1장. 둘째 아들, 패가망신하다

이제 둘째 아들은 서둘러 집을 떠납니다. 아주 먼 나라로 갑니다. 될 수 있는대로 아버지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고 동시에 기회가 많은 곳으로 간 것입니다. 그러나 환경이 바뀐다고 갑자기 사람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가져간 재산을 그저 놀고 먹는데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허랑방탕한 삶을 살아갑니다. 당연히 얼마 가지 않아서 가진 돈은 모두 바닥나 버립니다. 엎친데 덮친다고 갑자기 그 나라에 큰 흉년이 찾아옵니다. 이제 둘째 아들에게 남은 것이라곤 해결할 길 없는 배고픔 밖에 없습니다.   

여기까지가 이 이야기의 2막 1장입니다. 둘째 아들은 집에서 ‘자기 몫’을 챙겨서 떠났습니다. 그렇게 의기양양하게 먼 나라로 길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가 없으면 그에게는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우선 그는 아버지에게서 생명을 받았습니다. 아버지가 없으면 자신도 없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부인하는 것은 자신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몫이라고 챙겨나온 재산도 결코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전부가 다 아버지에게서 받은 아버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하나님에게서 독립하려고 하고 그래서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려고 하지만 실은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 생명도 하나님에게서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의 유지에 필요한 모든 것들, 양식, 물, 공기, 태양... 그 모든 것들도 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심지어는 자기 힘으로 살아보겠다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부인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것들까지 모두가 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그렇게 철저히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는 존재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무에서 만들어 낸 것들입니다. 그 분께 존재를 빚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난 모든 것들은 결국 무로 돌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는 없습니다. 

오늘 비유는 이렇게 말합니다. “둘째 아들이...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하나님으로 부터 떨어져 나온 인간은 당장 죽지 않습니다. 자기 몫이라고 챙겨나온 것들을 사용하면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이전보다 더 잘 살게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더더욱 지금 자신이 어디로 가까이 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그 삶의 모양이 어떠하든 허랑방탕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자신을 망가뜨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는 더 이상 올바른 목적이라는 것이 남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살고 존재하는 유일한 목적은 하나님과 그 분의 영광입니다. 그렇게 살며 존재할 때 제 자리에서 제 기능을 하며 비로소 만족스럽게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 바로 사람입니다. 하나님 없는 인간은 길도 방향도 모르면서 그저 정처없이 열심히 걷는 사람이나 마찬가지가 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삶은 낭비되게 되어있고 결국에는 허무에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아는 이 세상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겉으로만 보면 점점 더 풍요로워지고 만족스러운 것같지만, 자신의 존재와 삶의 가벼움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늘어만 가고 있는 현실은 이러한 설명을 증명해 주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해 문제를 느끼지 못할 때는 이 세상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저 평화롭고 풍요롭게만 느껴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궁핍함을 처하게 될 때, 세상과 그 속에 있는 것들의 도움을 절실하게 필요로 할 때가 되면 우리는 세상이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실은 이 세상도 그 스스로는 전혀 해결할 수 없는 심각한 흉년으로 매말라 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원래부터 세상은 이렇게 풍성한 곳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이 이미 유일하고 풍성한 샘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사람들의 궁핍한 땅이기 때문입니다. 

2막 2장. 둘째 아들, 돼지를 치다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2막 2장은 아버지를 떠난 아들, 하나님을 떠난 그 분의 자녀들의 실상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는 이유는 하나님을 떠나야 자기 힘으로 자유롭고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현실은 정반대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그 때부터는 세상에 기대어 거기서 자신의 필요를 채워야만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에서 필요한 것을 얻으려면,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나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을 해야만 합니다. 돼지를 치는 것 같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는 해서도 안되고 할 수도 없는 그런 정결치 못한 일들도 해야 합니다. 그것도 세상이 원하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부자유함과 비참함입니다. 그런데, 정말 안타까운 것은 이런 비극이 실제로 성도들의 삶 속에서도 계속해서 재현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형식적으로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삶의 원리나 방법은 하나님과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게 해야 성공할 것 같고, 자유로워질 것 같아서 그런 방법을 택한 것입니다. 세상은 처음에는 그가 바라는 자유와 풍요함을 주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복이 아니라 미끼입니다. 시간이 흐를 수록 그는 이 세상에 묶이게 됩니다. 그 세상이 시키는 일을, 그 세상이 원하는 방식으로 해야만 합니다. 

우리나라의 선교초기에는 그 마을에 사는 성도들이 무서워서 관리로 부임하기를 꺼려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돈을 써서 관직을 샀습니다. 그리고 그 마을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거기 부임한다고 한들 믿는 사람들이 협조해 주지 않을 것이 뻔하니 거기서는 부정을 저지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부임을 포기한 것입니다. 그 때 적어도 그런 마을들에 사는 성도들은 자신의 의지만 있다면 양심을 지키며 순결하고 자유로운 성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성도들은 세상에 자기 마음과 생각의 기준을 양보하기 시작했습니다. 세상과 좀더 부드러운 관계 속에서 좀 더 편하게 지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성도들은 세상 속에 좀 더 잘 섞일 수 있게 되었고 세상과 좀 더 부드러운 관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성도들이 양심을 지키며 사는 일이 거의 불가능해 졌습니다. 그 옛날에는 예수쟁이들은 정직하고 올곧은 사람이어서 함부로 대할 수도 없고, 불의한 것을 요구할 수도 없는 그런 사람들로 여겨졌고, 그래서 성도들은 충분히 성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었지만, 이제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더 이상 우리들을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이라고 생각해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양심과 신앙적인 순결함을 지키려고 하면 오히려 우리를 위선자라고, 자기만 깨끗한 척한다고 비아냥거립니다. 세상은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 돼지를 치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을 돼지치는 일에도 거리낌 없이 부려먹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세상의 잘못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믿는 우리의 잘못입니다. 이것은 아버지를 떠나 세상에서 만족을 찾으려고 하다가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낸 자승자박입니다. 

그렇지만 어떻습니까? 그렇다고 그가 만족을 얻었습니까? 자존심을 포기하고 돼지를 치는 일까지 마다하지 않았지만 그가 독립을 얻었고, 자유와 풍성함을 얻었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것이 그가 만난 이 세상의 현실이고 또 성도가 그 세상에 기대어 살아가려고 할 때 맞닥뜨리게 되는 현실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세상에 기대어 살면서 거기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의 실체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쥐엄나무 열매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그것 밖에 없습니다. 세상은 원래부터 우리에게 그것 이상의 것을 줄 생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가치 있는, 우리를 참으로 만족하게 하고 풍성하게 하는 것들을 줄 수 없는 능력도 없습니다. 그 매마른 땅이 줄 수 있는 것이라곤 그것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참 견디기 힘들어 하는 것 중에서 ‘허무함’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현대인들이 이 허무함 때문에 방황하며 고통스럽게 살아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성도 여러분 그런데, 이 허무함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사람들이 그렇게 견디기 힘들어 하는 허무함의 실체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영혼이 느끼는 허기’입니다. 속사람이 느끼는 배고픔입니다. 이 허기는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것들의 부풀려진 화려함에 빠져 있을 때는 잘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치 수도가에서 물을 잔뜩 마신 아이처럼 만족해 하며 살아갑니다. 그렇지만, 언젠가 사람이 그 거품과 화려함 뒤에 있는 것이 넉넉하지 않은 쥐엄나무 열매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것이 결코 자신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더더욱 심각한 실망과 허기에 시달리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장 많이 닮아있는 부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한 것, 무한한 것이 아니면 결코 온전히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이 주는 것은, 비록 그것이 이 세상의 전부라고 하더라도 유한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 영혼은 이 세상의 것으로는 절대로 만족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곤 쥐엄나무 열매 밖에 없습니다. 그것도 아주 조금 밖에 얻지 못합니다. 우리 영혼이 이것으로 만족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입니다. 

2막 3장. 둘째 아들, 드디어 아버지를 생각하다

이제 이야기는 2막 3장으로 넘어갑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에 스스로 돌이켜...” 어둡기만 하던 무대에 환한 빛이 비춰집니다. 그 동안의 어두움은 이 환한 빛을 위한 준비였던 것 같습니다. 아들은 드디어 세상이라는 현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 자신의 무능함과 비참함도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보고 싶어하지 않았던, 그렇지만 반드시 보아야만 했던 것들을 한꺼번에 보게 되었습니다. 실패, 굶주림, 각박함, 돼지치기, 쥐엄열매... 이런 것들이 그동안 닫혀있던 눈을 열어 세상과 자신을 보게 해 주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진짜 빛은 그런 것들 뒤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진실에 ‘직면’하는 일을 굉장히 두려워합니다. 자기의 진짜 모습을 직면하기를 싫어하고 세상의 참된 모습을 보기를 꺼려합니다. 그 두 가지가 자신의 모든 것이기 때문에, 그 두 가지에 실망하게 되면 결국 자신에게는 아무 것도 남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과 자신을 직면하지 않으면 인생은 진짜로 보아야 할 참된 것을 볼 수가 없습니다. 

둘째 아들은 자기 자신을 보고, 또 세상을 보았습니다. 진짜 모습을 직면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과 세상에 대해 실망했습니다. 그제서야 그의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아버지의 부요함”이었습니다. 그제서야 둘째 아들은 자신이 아버지 곁에서 누리던 그 아버지의 부요함이 얼마나 풍성하고 만족스러운 것이었는지를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아들은 진심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아들은 그렇게 가장 낮고 겸손하지만 그래서 가장 풍성하고 또 온전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실망과 궁핍함을 넘어서 아버지께로!!!

어쩌면 우리는 둘째 아들을 지켜 보면서 그 아들의 무례함과 방탕함, 그리고 어리석음과 불효에 대해 그를 비난하고 또 화를 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둘째 아들은 우리 모두의 원래의 모습, 그리고 지금도 포기하지 못하고 붙들고 있는 우리들의 현재 모습이기도 합니다. 성도 여러분, 원래 우리는 모두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양식과 그 밖의 필요는 물론이고 자신의 생명까지도 하나님께 받아 누리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자기 힘으로 자기가 생각하는 자유와 풍요함을 움켜쥐려고 했던 둘째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를 떠나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끊임없이 아버지를 떠나려고 했던 어리석고 교만한 둘째 아들, 세상에서 만족을 얻기 위해 세상이 요구하는 대로 돼지치는 일을 하면서도 그 세상에 묶여 여전히 굶주려 있었던 그런 둘째 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어느 정도는 그런 삶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은 둘째 아들이기도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크고 작은 궁핍함과 허무함, 그리고 실패와 절망을 경험해 왔습니다. 사람들도 세상도 우리를 온전히 만족시킨 적은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그런 경험들로부터 ‘너의 욕심이 부족하니 더 욕심을 부려야 한다’는 메시지, ‘더 많은 것으로, 더 부풀려진 것들로 너를 완전히 채워야 한다’는 메시지만 들어왔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메시지는 거짓입니다. 우리를 영원히 궁핍하게 하고 영원히 허무하게 하려는 사탄의 거짓입니다. 우리의 실패, 우리의 실망, 그리고 우리의 궁핍함은 우리가 세상으로 향하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런 것들은 오히려 하나님께로 돌이키고, 하나님의 부요함을 바라보게 하는 이유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만 그런 것들은 참으로 가치있고 의미있는 것이 될 수 있고 또 오히려 영원히 유익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더 이상의 둘째 아들의 실망과 궁핍함은 필요 없습니다. 세상이 얼마나 실망스럽고 얼마나 궁핍한지 끝까지 경험해 보아야 할 이유는 더더욱 없습니다. 혹시 이 자리에 단 한 번도 진정으로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못한 분들이 계시다면 이제 그 길을 바꾸시기를 간곡히 권면합니다. 여전히 욕심과 성공의 신화에 붙들려서 그것이 나를 만족하게 해 줄 것이라는 생각 속에 계신다면 이제 그 둘째 아들의 길을 떠나 참된 아들의 길, 그 부요한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는 길로 나아오시기를 바랍니다. 거기에만 여러분이 찾는 참된 만족이 있으니 꼭 그 길로 돌이키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 돌이킴의 싸움을 계속하고 계시는 분이 계시다면 아무리 힘드시더라도 그 싸움을 결코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 싸움만큼 가치있는 싸움은 없습니다. 그 싸움은 우리를 하나님의 부요함으로 인도하는 싸움이고 또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로 모셔 그 분을 영광스럽게 해 드리는 유일한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한 걸음, 한 걸음 아버지 하나님께로 돌이켜서 그 분 안에만 있는 참되고 넉넉한 만족을 더 많이 알게 되고 또 더 많이 누리게 되는 복된 인생, 아버지께로 온전히 돌이킨 자녀의 인생을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