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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 묵상

2012. 02.24. 매일성경 묵상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 11장 27-36절입니다.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도다”

예수님의 사역과 가르침을 옆에서 지켜보고 또 들었던 한 여인은 벅차오르는 은혜로운 감정을 주체할 길이 없었다. 그 여인은 그래서 위와 같이 고백했다. 얼마나 아름답고 복된 고백인가? 그런데, 주님은 이 고백을 듣고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마리아는 역사상 가장 큰 특권을 누린 여자였다(물론 세속적인 기준에서는 가장 저주받은 여성으로 생각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주님은 자신의 어머니 마리아보다 훨씬 더 복이 있는 사람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다. 왜 이들이 마리아보다 더 복이 있을까? 주님은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 그 이유는 8장 19절 이하로 가 보면 분명히 드러난다. 거기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모친과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단순히 ‘듣는 것’이 아니라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주님은 듣는 것과 행하는 것, 그러니까 순종하는 것을 하나로 묶어놓으신다. 참으로 듣는 것은 순종으로 이어진다. 애초에 참으로 듣는 것은 순종과 한 덩어리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밭에 떨어진 씨앗의 비유에서도 명확하게 가르쳐 지고 있다-은 그가 이미 하늘의 가족이며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뜻이다. 주님은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자신의 어머니인 마리아 보다도 더 복된 사람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는 이미 자신의 태도와 삶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요 또 하늘나라의 백성임을 증거하고 있으니 그 사람이 가장 복된 사람일 수 밖에 없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된 것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 

갑자기 등장한 이야기 같지만 11장 14-16절로 가 보면 이 이야기가 어제 이야기에서 계속되는 주제를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제 본문은 예수님의 사역을 바알세불을 힘입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향한 것이었다면, 오늘 본문은 정확하게는 16절에 언급되어 있는 사람들인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에 관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세대 전체를 그렇게 말씀하신 것으로 보아서 당시에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런 태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오늘날도 이런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많다. 물론 이미 예수님을 믿기는 하지만 역시 오늘날도 눈에 보이는 현상과 기적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며 또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들이 있다. 오늘 말씀은 그런 사람들을 향한 경고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표적을 구하는 세대는 악한 세대이다. 그것은 표적을 구하는 세대는 그것 아니면 믿음을 유지할 수 없고, 또 실제로는 표적으로 인한 자극을 찾고 그것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표적이 믿음을 돕는 경우는 간혹 있어도 그것 자체가 믿음을 만들어 내는 경우는 없다는 것이다.(우리는 누가복음을 통해 이적이란 이미 일어난 구속사건을 겉으로 드러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보고 있다) 그래서 표적을 구하는 일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내가 보여줄 기적은 요나의 표적 밖에 없다고 말씀하셨다. 흔히 요나의 표적은 그가 물고기 뱃속에 있다가 삼일만에 밖으로 나온 일로 해석된다. 그렇지만 그렇지 않다. 물론 바리새인들은 우리들처럼 ‘요나의 표적’이라는 말을 들을 때 분명히 그것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하는 요나의 표적은 32절 이하의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회개의 메시지를 선포했을 때, 그들이 회개했던 사건 자체를 가리킨다. 이러한 해석은 뒤에 등장하는 표적을 구하는, 그러면서도 믿음을 갖지 못하는 사람들이 정죄받을 때, 그 증인으로 서게될 사람들의 목록을 보면 분명해 진다. 

“심판 때에 남방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첫번째 증인은 남방 여왕이라고 표현되어 있는 ‘시바의 여왕’이다. 구약을 보면 이 사람은 그저 솔로몬의 지혜로운 메시지를 들으려고 엄청난 선물을 가지고 먼길을 달려왔다. 시바의 여왕이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을 정죄할 수 있는 것은 그가 표적이 아니라 솔로몬의 메시지를 구했기 때문이다.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두번째 증인은 이미 등장했던 니느웨 사람들이다. 이들이 회개한 것은 요나가 일으킨 무슨 이적 때문이 아니었다. 실제로 이들은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 동안 있다가 나왔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혹시 그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더라도 믿었을리가 만무하다. 그런데, 그들은 요나의 메시지를 듣고 대대적으로 회개한다. 그래서 이들 또한 표적만을 구하는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할 자격이 있다.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이것이 ‘이 세대 사람’이 정죄받는 더 크고 정당한 이유이다. 시바의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먼 길을 마다하지 않았고,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메시지를 듣고 회개했다. 그런데 지금 ‘이 세대 사람들’ 앞에는 그 둘보다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다. 그런데도 이들은 예수님의 메시지를 듣고 거기서 하늘나라를 보지 못한다. 그 말씀이 요구하는 진정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이들은 정죄받아 마땅한 것이다.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그래서 중요한 것이 눈이다. 빛을 받아들이는 눈이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눈이 어두우면 아무리 밝은 빛에 노출되어 있어도 소용이 없다. 그는 여전히 암흑 가운데 있을 수 밖에 없다. 표적을 구하는 세대는 눈이 어두운 세대다. 표적은 단지 예수님의 말씀의 진정성을 증거하는 증거다. 그래서 사람들은 표적을 통해 표적만  보아서는 안된다. 단지 놀라기만 하고 더 맣많은 표적을 구하는 것은 결코 믿음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믿음을 방해하고 오늘 말씀에 의하면 마지막 날에 정죄받을 이유가 된다. 신앙 안에서는 이적도 일어난다. 표적도 발생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구하는 신앙을 가져서는 안된다. 그것 중심의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된다. 때로는 이적과 표적을 필요로 하게 되더라도 우리는 결국 그것들을 통해서 빛을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하나님을 드러내며 하늘의 진리를 드러내는 빛을 보아야 한다. 그 빛을 받아들여 온 몸을 환하게 해야 한다. 온전히 밝게 해야 한다. 

표적을 찾고 구하는 것은 오히려 눈을 어둡게 하는 행동임을 잊지 말자.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불신앙의 소치임을 기억하자.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참으로 보아야할 것들을 보지 못하고 또 보지 않으려고 하는 자들이 걷는 비뚤어진 길임을 잊지 말자. 이제 우리도 요나의 표적을 구하자. 그가 회개의 메시지로 니느웨 성읍 전체를 뒤집어 엎었던 것과 같이 우리도, 그리고 우리 교회도, 그리고 이 땅의 모든 성도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렇게 회개하게 되는 그 ‘요나의 표적’을 구하자. 그리고 남방 여왕의 기쁨을 배우자. 그는 이적이 아니라 솔로몬의 지혜로은 메시지를 찾아 먼길을 마다하지 않았고 큰 댓가를 지불하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우리는 솔로몬보다 더 큰 이의 말씀을 ‘손에 쥐고’있다. 게다가 그것은 공짜다. 무엇을 주저하는가? 왜 거기서 진짜 기쁨, 진짜 만족을 찾기를 왜 주저하는가? 그 게으름과 무관심을 무엇으로 합리화할 것인가? 내 눈을 살펴보자. 나는 무엇을 찾고 무엇을 구하는가? 무슨 표적을 바라며 무슨 이적을 구하는가? 

눈이 밝아야 한다. 참으로 눈이 밝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만으로 기뻐하고 만족하고 그 말씀만으로도 삶이 새로워질 정도로 눈이 밝아야 한다. 


하나님, 우리의 눈을 열어주소서. 이적을 구하고 표적을 찾지만 하나님의 진리의 참된 빛에는 감겨져 있고 어두워져 있는 우리의 눈을 열어 주소서. 우리가 정죄받게 될 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기적을 일으키지 못해서가 아니라 요나보다 큰 이, 솔로몬보다도 큰 이의 참된 말씀을 가지고도 만족하지 못하고 온전해지지 못하는 교만함과 무감각한 게으름 때문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하소서. 우리가 당신의 진리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우리 속에 기쁨과 만족이, 그리고 참된 돌이킴이 있게 해 주시옵소서. 그 말씀에 순종하는 변화가 있게 해 주시옵소서. 보이는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주의 진리를 통해서 믿음을 견고하게 가꿔갈 줄 아는 지혜로운 자들이 되게 해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