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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 묵상

2012.01.21. 매일성경 묵상


   오늘 본문은 마가복음 1장 57-66절입니다. 

   “이웃과 친족이 주께서 저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함께 즐거워 하더라”(57절)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았다. 젊은 시절에도 불임이었고 이제는 나이 너무 많아 출산의 기능이 완전히 정지된 엘리사벳에게서 ‘아들’이 나왔다. 얼마나 큰 귱휼인가? 얼마나 놀라운 불쌍히 여기심인가? 그런데, 엘리사벳만 그랬을까? 아니다. 모든 인류가 마찬가지였다. 원래 사람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었다. 스스로 생명을 얻을 수 없었다. 인간은 누구나 다 자신의 생명 그러니까 영생에 관한 한, ‘불임상태’와 같은 무능력한 상태였고 소망이 없는 상태였다. 영생을 얻어야 하나 결코 스스로 영생을 얻을 수도, 만들어 낼수도 없는 그런 상태였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류를, 특히 그 분의 백성들을 크게 긍휼히 여기셨다. 더 이상 큰 긍휼이 없을 정도로 크게 불쌍히 여기셨다. 그리고 그렇게 불쌍히 여기실 뿐만 아니라 그 곤경에서 건져 주셨다. 꽁꽁 닫혀진 인류의 태를 여시고 이 땅에 생명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과 영생을 주시는 생명이 오게 하신 것이다. 우리는 그 일의 목격자들일 뿐만 아니라 가장 직접적인 혜택을 입은 사람들이다. 그 큰 은혜 가운데 사는 우리들의 즐거움은, 그 기쁨은 어떠해야 할까? 그리고 지금 나의 즐거움은 어떠한가? 

“그 모친이 대답하여 가로되 아니라 요한이라 할 것이라... 저가 서판을 달라하여 그 이름은 요한이라 쓰매 다 기이히 여기더라”(60,63절)

세례 요한이 자신의 이름을 얻는 과정은 그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특별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온 세상에 알리는 가장 큰 증거가 되었다. 사람들은 그 이아에게 요한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된 이야기를 듣고서는 이렇게 반응한다. 

“듣는 사람들이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가로되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꼬 하니 이는 주의 손이 저와 함께하심이라”(66절)

이 일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였다. 그의 이름이 이렇게 인상적으로 모두에게 알려지고, 사람들은 계속해서 요한에게 관심을 보일 것이다. 요한에 대한 관심은 곧 요한이 살아가게 될 삶과 그가 하게 될 일에 대한 관심이 될 것이다. 이것은 그의 사역이 효과적인 사역이 되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준비이기도 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준비이기도 했다. 어떤 일이 이 세상에 드러나기 위해서는 그 일 하나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 일이 중요할수록 그 일을 더욱 온전히 행하시기 위해서 그 이전에 더 완전한 준비를 하신다. 문제는 우리의 눈에는 직접 드러난 일이 보일 뿐 그 준비는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 준비과정을 다 볼 수 있다면 드러나게 된 일을 보는 우리의 놀람과 기쁨은 얼마나 더 커질 것이고, 또 거기서 보이게 될 하나님을 향한 반응은 얼마나 더 온전해 질 것인가?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런 일이 허락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그저 보이는 것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드러난 일을 보면서 때늦지만 그 일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그 이전에 하나님께서 행하셨던 ‘준비’들을 헤아려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기쁨은 충분히 커질 것이고,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대한 믿음이 커질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이름’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세례 요한의 이름은 하나님께서 붙여주신 이름이다. 그런데, 요한의 이름만 그럴까? 우리 모두의 이름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사람이 붙여지는 이름이야 그렇지 않다. 그 이름은 그저 부모의  소망이나 좋은 뜻을 담은 그릇일 뿐이니까?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붙여주시는 이름은 그렇지 않다. 그 이름은 그의 존재 자이체며 그의 삶 자체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에 대해서 가지고 계신 계획이기도 하다. 그러니 그 이름은 하나님만이 아시고, 또 하나님만이 아시는 이름이다. 

하나님께서만 아시는 나의 이름은 무엇일까? 그 분은 지금 나를 어떤 이름으로 생각하시며 또 부르고 계실까? 그 분은 내가 어떤 이름에 걸맞는 존재가 되어 살아가기를 원하실까? 우리는 지금 내가 아는 이름, 그리고 사람들이 나를 아는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는 이름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다른 건 몰라도 하나님은 그 분이 우리를 부르시는 그 이름의 뒷켠에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드러나게 되기를 바라신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그 분은 우리 모두의 ‘형상’이시니까 말이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는 그 날은 그 분이 나를 부르시는 그 이름과 나의 존재가 하나로 합쳐지는 그 날이 되기를 소망한다. 그 이름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오히려 그 어떤 이름보다도 더 완전히 어울리는 그런 이름이 되기를 소망한다. 또한 여기 이 땅 위에서 살아갈 때는 사람들로 부터 “이 아이가 장차 어찌될꼬?”라고 기대하고 궁금하게 하는 그런 이름으로 불리고 싶다. 

하나님, 불임인 인류에게 예수 그리스도, 영원한 새 생명을 허락하시고 그로 인하여 우리를 크게 긍휼히 여겨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가장 큰 절망도 하나님께는 아무 것도 아님을 믿게 하시고, 그 은혜, 긍휼히 여기심을 기대하며 신뢰하며 살아가게 해 주시옵소서.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그 이름, 그 이름에 걸맞는 존재로 다듬어져 가게 하시고, 살게 하셔서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우리의 이름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비쳐나오게 해 주시옵소서. 주님 뵙는 그 날이 내 진정한 이름을 찾는 가장 영광스러운 날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