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성경 묵상

2012.02.10. 매일성경 묵상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 8장 16-25절입니다. 

“예수께서 ... 하나님 나라를 반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또한 ... 여러 여자가 함께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니라”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일에는 예수님, 열 두 제자들, 그리고 여러 여자가 함께 했다. 예수님이 직접적인 선포자였다면, 제자들은 함께 하면서 배우는 자들이었고, ‘여러 여자들’은 그 일이 소요되는 모든 것을 서포트하는 사람들이었다. 아마도 이것은 특히 하늘나라를 전파하는 소명을 행함에 있어서 교회가 취해야 하는 가장 현실적인 모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직접적인 선포자가 있으면 그와 함께 하면서 배우는 자가 있고, 또 그 일을 간접적이지만 실질적으로 섬기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 시대에 그랬다면 그 이후의 모든 시대에는 그 일은 더욱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는 현실 속의 존재다. 그래서 현실적인 필요가 채워지지 않으면 사역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직접 사역하는 사람들 뿐아니라 간접적인 지원자들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본문에서 우리가 꼭 보아야 할 것이 하나있다. 예수님께서 전하신 것이 하늘나라였으며, 실제로 그 일의 지원자들이었던 여인들은 그렇게 선포된 하늘나라가 자신의 삶 속에서 이미 경험되어지기 시작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의 사역을 ‘자기들의 소유’로 섬겼다. 이렇게 해서 이들은 이미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전에도 ‘보물을 하늘에 쌓는 일’을 하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확실하고도 효과적인 투자자들의 길에 들어서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그들은 어떻게 해서 이 땅의 눈에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를 위해서 투자할 수 있었을까? 

“하늘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들에게는 허락되었으나...”

해답은 여기에 있다. 그들은 자신의 삶에서 일어난 회복을 통해서 하늘나라가 어떠 나라인지 몸소 경험했을 뿐 아니라 소식(복음 혹은 말씀)을 들었고 그것을 통해서 하늘나라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나라의 능력, 그 나라의 가치를 알게 되었으니 거기에 ‘자기들의 소유’를 투자하는 일에 주저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저희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가치있는 것은 그 가치를 아는 사람에게 주어져야 한다. 천국이 공짜라고 해서 아무에게나 아무렇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천국은, 그리고 복음은 엄밀하게 말해서 그 참된 가치를 아는 자들을 위한 것이다. 그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원천봉쇄’되어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천국을 비밀에 붙여놓으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을 비유를 통해 말씀해주셨다. 비유는 그림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그림을 볼 줄 아는 사람에게는 그것보다 더 확실하고 구체적인 것이 없지만, 그 그림을 볼 줄 아는 눈이 없는 사람에게는 그저 아무 의미없는 죽은 사진에 불과하다. 그래서 항상 ‘비밀’일 수 밖에 없다. 마치 암호로 되어 있는 극비문서처럼.... 

그러나, 누군가가 ‘너희’에 속할 것인가 아니면 ‘저희’에 속할 것인가를 정하는 것은 복음이라는 비밀문서 자체가 아니다. 왜냐하면 들을 귀가 있다면 누구나 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누구에게나 무차별적으로 주어지기 때문이다. ‘씨앗’이 스스로 땅을 가리지 않듯이 ‘하늘나라의 복음’도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길가, 바위, 가시덤불, 좋은 땅... 어느 땅에나 씨앗은 뿌려진다. 여기서 땅은 분명히 사람이다. 사람의 마음이며, 생각이며, 가치관이며, 영혼이며 그 사람의 존재다. 누구나 다 아는 내용은 생략하려고 한다. 이제 비유에 대한 예수님의 설명을 넘어가 보자. 

길가는 ‘길 옆(by)’이다. 마음이 길이라면 이 길은 씨앗에는 영 관심이 없는 땅이다. 씨앗을 아얘 옆에 두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 다음은 ‘바위 위(on)’이다. 길 보다는 나아보인다. 그래도 씨앗을 옆이 아니라 위에 두었으니 말이다. 그 다음은 ‘가시떨기 속(in)’이다. 바위보다는 조금 더 나은 것 같아 보인다. 그래도 씨앗을 자기 ‘속’에 두기는 했으니 말이다. 마지막은 ‘좋은 땅’이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이 좋은 땅은 씨앗이 자기 속으로(into) 깊이 파고들도록 했다. 그 씨앗을 완전히 받아들였다. 그렇게 해서 자기 자신이 그 씨앗의 발아와 성장, 그리고 열매맺는 일의 환경이 되게 했다. 

길은 생각하지도 말자. 길은 씨앗과는 완전히 상관없었으니 말이다. ‘바위 위’부터 시작하자. 엷게 덮힌 흙 덕분에 여기 뿌려진 씨앗은 처음에는 잘 자라는 듯했지만 결국은 그 ‘단단함’ 때문에 더 이상 성장할 수 없었고, 그 ‘매마름’ 때문에 결국 말라죽고 말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바위, 그러니까 흙이 얇게 덮힌 땅을 닮은 마음과 영혼을 지닌 사람은 천국 복음을 들었을 때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였고 또 기뻐했다는 것이다. 사실 이 바위는 이 기쁨 때문에 스스로 속은 것 같다. 그렇게 기뻐하기만 하면 다 되는 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기쁨이 자신을 영원히 살게 할 줄 알았지만 얄팍한 마음에 뿌려진 씨앗은 뿌리를 내릴 수 없었다. 그 얄팍함 속에서는 성장을 위한 자원을 얻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기쁨은 잠시적인 것이었다. 있다가 없어지고 사라져 버리는 그런 기쁨이었다. 문제는 시험이었다. 비가 내리지 않으니, 그 얄팍함은 더 이상 씨앗이 성장하게 하는 일을 포기해 버린 것이다. 그렇게 해서 씨앗은 고사하고 말았다. 이 비유가 말하는 것을 알겠는가? 마음에 기쁨이 있다는 것이 나에게 생명이 있음을 증명하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증거 중의 하나가 될 수는 있지만 충분한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이 기쁨을 추구하는 자들은 지속적인 외부적인 자극을 통해서 이 기쁨을  얻고 확대시키려고만 한다. 그래서 무슨 기도원이다, 집회다, 세미나다... 그런 일시적인 자극을 주는 것에 현혹되고 만다. 그렇게 해서 기쁨만 유지되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그러나, 그 기쁨 때문에 속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 기쁨이 오히려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가시떨기는 바위 위 보다 나은 상태인 것 같다. 위가 아니라 안에 말씀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론은 위의 두 토양과 다르지 않다. 씨앗의 성장은 결국 실패하고 열매맺는 것은 좌절되고 만다. 자라기는 많이 자라지만 열매까지 이르지는 못한다. 그 경우, 일이 이 지경에 이른 이유는 조금 다른 것 같다. 엄밀하게 말해서 이 경우 문제가 되는 것은 땅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땅 자체는 씨앗이 성장하고 열매맺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가시떨기가 제거되지 않았다. 그것을 그냥 내버려둔 것이 화근이었다. 땅을 개토할 때, 그 안에 있는 가시떨기 씨앗들을 잘 보아야 했다. 그것을 걸러내는 수고를 해야만 했다. 그러나 게을렀다. 그 마음의 소유주는 안일하고 무관심했다. 겉으로 보기에 괜챦으니 괜챦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씨앗이 뿌려지자 문제가 발생했다. 가시들이 먼저 자라고 더 강하게 자랐던 것이다. 막상 씨앗이 성장해 감에 따라 그 가시들이 씨앗의 성장을 결정적으로 방해하고 좌절시켰던 것이다. “염려와 욕심, 그리고 일시적인 쾌락에 대한 요구는 씨앗이 열매로 이어지려면 반드시 제거되고 처리되어야만 한다. 처음에 골라내지 못했다면 나중에라도 반드시 처리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씨앗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결국 결정적인 순간에 그 가시들에 가로 막혀서 더 이상 자라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애석하고 안타깝지만 결국 열매맺는 일은 좌절하고 만다. 

마지막은 너무 좋으니 한 가지만 살펴보고 그냥 넘어가자. ‘착하고 좋은 마음’이라는 표현 속에 담긴 것이 너무 많다. 성경은 이 토양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좋은 토양이라야 열매를 맺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좋은 토양이 열매를 거저 맺는 것은 아니다. 좋은 땅은 우선 하늘나라의 복음을 듣는다,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씨앗을 잘 ‘지킨다’. 이것은 그저 잘 간직한다는 말이 아니다. 빼앗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늘나라가 요구하는 바에 자신의 삶과 존재를 맞추어 간다는 뜻이다.(어느 나라의 언어에든지 ‘지킨다’라는 말 속에는 소극적인 의미와 적극적인 의미가 다 담겨있는데, 이 ‘지킨다’라는 단어가 성경에서 사용될 때는 언제나 잃어버리지 않는 것 뿐만이 아니라 그 지켜야하는 진리에 순종한다는 의미가 있다. 실제로 성경이 증거하는 성경의 진리를 아는 유일한 방법은 그 진리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인내’가 필요하다. ‘바위 위’를 생각하게 한다. 바위 위에 뿌려진 씨앗은 ‘뿌리’가 없어서 말라 죽었다. 인내는 뿌리에서 나온다. 우리의 존재에 충분한 깊이로 뿌리내린 씨앗만이 외부의 충격을 견디게 한다. ‘결실’은 그 인내의 결과다. 인내가 없으면 열매가 없다. ‘착하고 좋은 마음’이란 바로 이렇게 하기에 충분한 영혼의 상태를 말한다.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 복음에 순종하고(복음을 믿는 것만이 순종이 아니다. 복음적인 삶 또한 순종이며, 이것이 진짜 순종이다) 열매가 맺혀질 때까지 끝까지 견디는 그런 마음을 이야기 한다. ‘착하고 좋은 마음’이란 그저 선하고 순진한 마음을 이야기하는 일반적인 뜻으로 쓰인 말이 아니다. 아뭏든 이런 착하고 좋은 마음이 아니라면 열매는 기대할 수 없다. 

그런데, 본문의 비유가 ‘하늘나라의 비밀’을 알리는 것이라면 이 ‘말씀’이라는 씨앗은 곧 하늘나라에 대한 복음이며, 그래서 우리의 상급이 아니라 구원과 직결되어 있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본문의 ‘열매’는 곧 우리의 구원이며 영생일 수 밖에 없다. 네가지 땅 중에서 좋은 땅만이 열매를 맺었다. 나머지는 상태는 달랐지만 모두 열매에 이르지 못했다. 구원에 이르지 못했다는 이야기이다. 우리는 ‘복음을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도식에 익숙해져 있다. 물론 진리이다. 그러나, 그렇게 말할 때 ‘믿음’이라는 말이 과연 구체적으로 어떤 믿음을 이야기하는지에 대해서는 별반 관심이 없다. 그저 들려온 복음이 거짓이라고 거부하지만 않으면 될까? 이성적으로 동의하고 수긍하면 될까? 본문의 비유는 복음을 믿는 믿음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해 준다. 본문은 하늘의 복음을 믿는 믿음은 곧 열매맺는 믿음이라고 말한다. 그 두 가지가 다르지 않은 하나라고 말한다. 

씨앗은 토양을 시험한다. 그 토양이 어떤 토양인지를 드러낸다. 다행인 것은 들을 귀가 있는 자에게 이 비유는 저주가 아니라 복음이 된다는 것이다. 이 비유를 듣고 자신의 영혼을 살필 수 있는 사람은, 그리고 정직하게 평가내릴 수 있는 사람은 그 자리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길이든 바위든 가시덤불이든 좋은 땅이 될 수 있다. 좋은 땅이 되기를 소망하며 간구하면서 그 씨앗이 자기 영혼 깊은 곳까지 뚫고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고, 그 씨앗이 발아하고 성장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그 씨앗의 요구에 순종하는 ‘인내’를 감당해 내면 된다. 그러면 지금 땅의 상태가 어떻든 구원의 열매는 맺혀지게 마련이다. 그 씨앗은 그런 토양에서는 결코 빼앗기거나 죽게 되는 경우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땅에 살지만 하늘을 위하여 살아가는 은혜를 누리게 해 주시옵소서. 보물을 하늘에 쌓는 지혜로운 삶을 살게 해 주시옵소서. 하늘의 복음을 들을 때, 그저 듣고 기뻐하는 일로 만족하지 않게 하시고, 그 씨앗이 내 영혼과 존재를 깊게 뚫고 들어가 충분히 깊은 뿌리를 내리도록 우리의 삶과 존재를 내어놓는 일을 위해 인내하게 하시고, 그래서 구원의 열매를 보는, 천국의 열매를 거두어 드리는 참되고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해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