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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 묵상

2012.02.11. 매일성경 묵상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 8장 16-25절입니다.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16-17절)

비유는 등불이다. 빛을 환하게 비추기 위해서, 진리로 들어가는 사람, 천국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진리와 천국을 더 환하고 확실하게 보게하기 위해서 불이 붙여지는 등불이다. 그러나, 이것은 비유가 ‘결국에’하게 될 역할이지 언제나 그리고 누구에게나 하는 역할은 아니다. 비유는 그 비유의 참된 의미가 드러나게 될 때, 그리고 그렇게 참된 의미를 알아차리는 사람들에게만 등불의 역할을 한다. 그러니 사실 비유라는 등불은 그 밝고 환한 빛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감춰진 비밀’로 남아있게 된다.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 빼앗기리라”(18절)

‘그러므로’라는 단어가 이 말씀이 비유에 대한 최총결론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주님은 이 말씀과 비슷한 맥락에서 먼저 이렇게 말씀하셨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8:8)” 누가 들을 귀 있는 자일까? 그는 진리가 들려올 때, 자신이 그 진리를 어떻게 듣고 있는지, 어떤 마음과 영혼의 상태에서 듣고 있는지에 대해 조심하는 자이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조심하는 이유는 ‘비유’가 등불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주님은 마지막으로 그렇게 조심해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신다.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무슨 뜻일까? ‘없는 자’는 ‘없는 자’인데 그가 자신에게 있는 줄로 아는 것이 무엇이며 또 ‘없는 자’가 무엇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을 빼앗기게 된다는 말씀인가? 하나씩 살펴보자, 우선 없는 자는 무엇이 없는 자인가? 밭의 비유로 돌아가 보면 그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바로 ‘열매’이다. 그에게는 열매가 없다. 그렇다면 그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도 ‘열매’이다. 그렇다면 왜 이 사람은 없는데도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것일까? 다른 어떤 것을 열매로 착각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씨앗일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미 죽어버린 씨앗말이다. 그는 그것을 열매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길 가와 좋은 땅은 여기 주님의 말씀과 상관이 없으니 제외해 놓고 생각해 보자. 모두가 말씀을 듣는다. 비유를 듣는다. 모든 땅에 씨앗이 뿌려진다. 뿌려진 씨앗은 어떤 모양, 어떤 상태로든 그 땅과 관계된 어떤 공간엔가 있게 된다. 그리고 때로 그 씨앗은 어느 정도 성장기도 한다. 그러나 이미 살펴본 대로 ‘어느 정도’의 성장은 결국 의미없는 성장이 되고 만다. 결국 그 성장이 열매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싹이 트기도 하고, 조금 더 자라기도 하고, 많이 자라기도 한다. 땅은 자신에게 씨앗이 뿌려진 것을 ‘안다.’ 그리고 어떤 형태로든 그것을 ‘받아들였다.’ 어떤 경우에는 그 뿌려진 씨앗 때문에 굉장한 기쁨을 누리게 되기도 한다. 아마도 이것은 “깨달음”이 주는 즐거움일 것이다. 이 즐거움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이지만 이 은혜가 열매로 이어지지 않을 때, 이 즐거움은 열매가 없는데도 열매가 있다고 여기게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기쁨’ 자체는 내가 지금 그 씨앗을 잘 지키고 성장시키며 열매맺게 하고 있다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 기쁨이 열매가 아니다. 기쁨에 속아서는 안된다. 본인의 경험으로는 진리를 깨닫는 단순한 지적인 즐거움과 참된 영적인 즐거움은 그렇게 분별이 쉬운 것이 아닌 것 같다. 깨달았다고, 그 기쁨이 있다고, 열매를 맺고 있다고 여기지 말자.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21절)

예수님의 가족이 예수님을 찾아왔다는 소리를 듣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리고 무리들에게 해 주신 말씀이다. 이 말씀은 찾아온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족이 아니라는 말씀이 아니다. 이 말씀은 찾아온 가족을 통해서 누가 참된 예수님의 가족, 그러니까 하늘나라의 백성인지를 알려주시기 위해서 주신 말씀이다. 누가 하늘나라의 참된 백성인가? 무엇이 그가 참된 하늘나라의 백성임을 알려주는 ‘표지’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다. 밭의 비유로 돌아가 보면 참된 하늘나라의 백성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들이다.” 이렇게 놓고보면 열매가 무엇인지 드러난다. 열매는 바로 ‘순종’이다. 그래서 힘들고 어려워도 인내로 순종이라는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그렇지만 오해하면 안된다. 여기서 순종이라는 것은 억지로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기 의를 쌓는 율법적인 행위가 아니다. 순종은 씨앗이, 비유가,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을 하늘나라로 인도하는 등불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 등불을 따라가기 위해서 필요한 노력들이다. 그 노력 끝에 저절로 맺혀지는 열매들이다. ‘저절로’라고 말하는 것은 이 노력들의 목적이 ‘열매’에 있지 않다는 의미이다. 등불이 인도하는 길로 따라가니 열매는 어찌보면 부수적으로 맺혀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길을 가는 것 자체가 순종이니 순종이라는 열매는  그 길을 제대로 가기만 하면 맺혀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저가 뉘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고 하더라”(25절)

말씀 한 마디로 미친듯이 날뛰는 호수를 잠잠케 하시고 자신들을 구해주신 예수님에 대해서 제자들이 한 질문이다. 대답은 이미 그들의 경험 속에 들어있다. 말씀 한 마디로 인간은 절대로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을 다스리신 분이라면 누구시겠는가? 그 자연을 만드시고 움직여 가시는 ‘하나님’이실 수 밖에 없다. 그 이적은 제자들에게 그렇게 가장 중요한 질문에 대해서 가장 명확한 대답을 주는 ‘비유’였다. 제자들은 그 비유 속에 감추어져 있는 진리를 보아야 했다. 그 등불이 비추는 빛을 보아야 했다. 그러나 아직 그들은 보지 못하고 있다. 우리 삶에 일어나는 은혜로 인한 기적들은 모두가 다 ‘등불’의 역할을 한다. 그것은 직접적으로 우리를 우리 삶의 여러가지 곤경으로부터 건져주지만, 그것은 오히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우리가 의지하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가리키는 가장 명확한 ‘비유’이다. 비유는 그 내용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비유는 그 참 뜻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손가락이 아니라 손가락이 어디를 가리키는지를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 

비유는 항상 감추어져 있다. 그러나 들을 귀있는 자는, 자신이 그것을 어떤 태도로 듣고 있는가에 주의하는 자는 그 감추어진 바를 보게 될 것이고, 알게 될 것이고 그래서 믿게 될 것이다. “참되고 온전한 순종”을 통해서 하늘나라의 백성이 될 것이고, 결국 더 받아서 온전히 풍성해 질 것이다. 


하나님, 우리의 눈을 열어주소서. 항상 내가 진리를 들을 때 어떻게 듣는가 주의하게 하시고 그래서 좋은 땅이 되게 하소서. 그 진리를 듣고 지키어 인내로 순종하므로 참된 하늘가족이 되게 해 주소서. 또한 우리 삶 속에서 베푸시는 은혜들을 통해 그 은혜들이 아닌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하시고, 그래서 하나님을 참으로 아는 지식을 갖게 하시고 진실로 하나님을 ‘믿게’ 해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