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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 묵상

2012.02.12. 매일성경 묵상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 8장 26-39절입니다. 
   
      실제로 이 기사는 “저가 뉘기에...?”라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일련의 대답 중의 하나로 기록되어 있는 사건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본문을 읽을 때 본문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하고 그 답을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의 증거와 내용으로 삼아야 한다. 그런 작업은 각자가 해 보셨으면 좋겠다. ‘내가 믿는 예수님은 누구이며 어떤 분이신가?‘라고 물으며 그 답을 찾는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풍성하고 견고해 질 것이다. 오늘은 오히려 조금은 부수적이라고 할 수 있는 내용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한다. 

“갈릴리 맞은 편 거라사인의 땅에 이르러 육지에 내리시매...”

주님은 먼저 제자들에게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갈릴리 호수를 가로질러 이제 거라사인의 땅에 도착하셨다. 그러니 이 여행은 의도적인 여행이었다. 그렇다면 이 여행의 목적은 무엇일까?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이 사람을 만난 일은 우연이 아니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거라사 지방으로 여행을 결정하셨던 것이다. 

“이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

이 구절이 이 사람에 대한 첫번째 설명이다. 성경에는 ‘괜히’ 기록되는 정보가 없으며 그래서 이러한 묘사는 나름대로의 중요성을 지닌다. 귀신들린 사람의 상태에 대한 단순한 묘사가 아니라 악에 사로잡힌 사람의 일반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하나씩 살펴보자. “이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않았다” 단순히 나신으로 살아갔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옷은 원래  스스로가 지은 죄를 가리기 위해서 사용했던 나뭇잎에서 유래한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가죽 옷으로 대체해 주시면서 옷은 하나의 하나님의 ‘은혜’가 되었다. 그 옷 때문에 사람은 서로를, 그리고 하나님을 그나마 부끄럼 없이 만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 옷을 거부한다. 귀신에 들렸기 때문이다. 귀신이란 ‘실재하는 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귀신들렸다는 말은 그 귀신의 실제적인 지배를 받는 상태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악의 지배를 받는 사람은 우선 자신의 수치를 망각한다. 스스로가 죄인이라는 사실이 가져다 주는 수치와 또 자신이 행하는 죄가 덧붙이는 수치를 망각한다. 그래서 악의 지배를 받을 때 사람은 수치를 망각하게 된다. 그래서 그 수치를 가릴 수 있는 은혜를 거부하게 된다. 그렇게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뻔뻔한 존재가 되어져 간다. 이 뻔뻔함은 그가 다시 은혜로 옷 입게 될 때, 비로소 인식하게 될 또 하나의 죄악일 것이다.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며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

집은 인간이 그나마 쉼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인지도 모른다. 여기 저기서 빼앗긴 생명을 재충전하는 곳이 바로 ‘집’일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은 그 집에서 조차 거하지 못했다. 그 대신 그가 거했던 곳은 무덤이었다. 무덤은 죽음의 장소이다. 그는 그렇게 생명을 떠나 죽음 가까이서 ‘살아갔다.’ 아이러니다. 죽음 가까이에 거처를 정한다는 것, 죽음 가까이서 삶을 영위한다는 것은 어쩌면 악을 떠나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이 짊어져야 하는 아이러니다. 그렇다면 누가 인간의 이런 짐을 내려놓게 할 것인가? 죽음의 땅이 아니라 생명의 자리에서 쉼과 생명을 찾게 해 줄 것인가? 누가 이 사람을 참된 ‘집’으로 돌아가게 해 줄 것인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오니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귀신들린 사람, 악에 사로잡힌 사람은 속게 된다. 그는 악에서 평안과 만족을 찾으려고 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오히려 그러한 평안과 만족을 방해하는 괴롭게 하는 존재로 인식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인지 안다고 하더라도 결코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또한 이 사람의 자기인식은 혼란에 빠지고 분열된다. 귀신들린 사람은 ‘나’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것이 진짜 자기 자신일까? 지금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분의 형상, 원래의 자기자신인가?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이것은 분명 그가 한 말이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그가 한 말이 아니기도 하다. 그 ‘나’는 하나님의 형상이기도 하고, 귀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악에 사로잡힌 영혼은 이렇게 혼란과 분열 속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이런 사람에게 과연 평안과 만족이 있을 수 있을까? 사람은 때로 자신이 원하는 평안과 만족을 얻기 위해 악을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그 악은 결코 그에게 그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없다. 그의 불안과 분열은 더욱 심화될 뿐이다. 

“귀신이 가끔 이 사람을 붙잡으므로 저가 쇠사슬과 고랑에 매이어 지키웠으되 그 맨 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갔더라”

귀신에 들린 사람, 악에게 사로잡힌 사람의 특징은 그 누구도 컨트롤할 수 없는 통제불능의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자신도 통제할 수 없게 된다. 물론 ‘힘’은 있다. 힘은 더 세어지고 더 큰 능력이 주어진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악에 내어주는 이유는 바로 이 ‘힘’ 때문이다. 그 힘은 결코 우리들의 순진한 기대처럼 자신과 세상을 위해서 유익한 힘이 되지 못한다. 그 힘은 자신을 망치고 세상을 망치는 일에 사용되는 파괴적인 도구가 될 뿐이다. 그런데 그 힘에 대한 통제권이 우리에게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 힘이 만들어 내는 파괴를 그저 보고만 있어야 할 뿐이다.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것(쇠사슬)으로 묶어놓으려고 해도 이미 그 힘은 우리들의 통제 밖에 있다. 힘은 하나님의 손에 있고, 그것을 우리가 그 분께 순종하는 범위 안에서 빌어 쓸 때만 그나마 죄인인 우리에게도 긍정적인 도구가 될 수 있다. 

“거라사인의 땅 근방 모든 백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떠나시기를 구하더라”

이 반응은 거라사인이 최초에 보였던 반응을 닮아있다. 거라사인은 예수님을 그 누구보다도 제대로 인식했지만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고 했다. 그 지방 사람들은 거라사인에게 일어났던 사건을 전해듣고 “두려움”을 느꼈다. 이 두려움 자체는 바람직한 것이다. 참으로 고무적인 반응이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피조물인 인간이 보이는 가장 정당한 반응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후가 문제였다. 하나님 앞에서의 두려움은 그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그 분 앞에 엎드려 경배하게 하고, 결국은 인간을 인간의 자리로 돌아가게 하기 위한 ‘감정적인 은혜’이다. 그런데, 거라사의 사람들은 그 두려움을 긍정적으로 껴안지 못했고, 그 대신 그 두려움을 회피했다. 예수님에게 더 계시면서 자신들을 가르쳐 주시고 광인에게 일어났던 회복을 더 일어나게 해 달라고 간청하는 대신 떠나달라고 간청했던 것이다. 그래서 결국은 예수님을 떠나보내고 만다. 그것이 얼마나 영원히 손해보는 선택인줄도 모르고 말이다. 우리도 이런 저런 이유로 때로는 하나님이나 그 분과 관계된 일에 두려움을 느낀다. 그런데, 그 두려움 자체가 문제가 될 것은 없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두려움에 대한 우리 자신의 반응이다. 왜 두려움이 생길까? 그 두려움은 무엇을 위한 싸인일까? 그 두려움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두려움인 것이 사실이라면 그 두려움은 그 두려움을 주는 대상을 껴안도록, 피해서 달아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주시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생각해 보라. 두려움을 주는 대상이 있다면, 그 대상과 한 편이 되는 것보다 더 지혜롭고 유익한 선택이 있는지 말이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그 분은 어떤 분이신가? 그 무엇으로도 통제할 수 없었던 악령도 두려움에 떨게하며 명하여 좇아낼 수 있는 분이시며, 그 분의 허락하심이 없으면 세상없는 귀신도 제 맘대로 움직일 수 조차없는 그런 분, 바로 하나님이시다.(욥기를 보라)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의지적으로 거부하면 거기는 계실 수 없는, 거기서는 ‘하늘나라’를 보여주시지 않고 곧 떠나버리는 그런 분이시기도 하시다. 이것이 그 분의 이해할 수 없는 역설이며, 바로 여기에 우리가 그 분께 대해서 보이는 반응이 중요한 이유가 있다. 

하나님을 바로 안다면, 우리는 그 분께 그 지식에 합당한 반응을 드려야 한다. 그 분을 향한 두려움이 있다면, 그 분을 거부하고 멀리해야 할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 분을 더 가까이 해야 한다. 그 분을 껴안아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두려움을 구속하는 방법이다. 그 두려움을 진실로 거룩하고 우리를 살리는 두려움이 되게 하는 방법이다. 

 

하나님, 우리를 악에 사로잡히게 않도록 보호해 주시옵소서. 악의 거짓에 속지 말게 하시고 악이 가져다 주는 통제불능의 힘을 탐내지 말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 안에 있어서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반응을 하지 못하도록 막는 사탄의 방해를 이겨내게 하시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하시되 그 두려움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가는 저희들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