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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 묵상

2012.02.23. 매일성경 묵상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 11장 14-26절입니다. 
    예수님께서 벙어리 귀신(이 경우에는 분명히 귀신이었다)을 쫓아내신 일로 논쟁이 벌어진다.
 

“무리들이 기이히 여겼으나 그 중에 더라는 말하기를 저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고 또 더러는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니”

예수님께서는 벙어리 귀신을 내쫓으신 일에 대해서 사람들이 보인 반응이다. 그 어떤 반응도 바람직하고 온전한 반응은 없었다. 그들은 거기서 하늘나라를 보아야 했고, 그래서 믿음으로 나아와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람들이 없었다. 우리는 어떤 일이 눈 앞에서 벌어질 때, 그것에 대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반응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그 반응을 보여야 한다. 그러나, 그런 반응이 갑자기 생겨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생각해 두어야 한다. 믿음의 반응은 최소한 ‘믿음의 씨앗’을 간직하고 있던 사람들이 보일 수 있는 반응이 아닐까?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성경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생각’을 아셨다고 증언한다. 그 분이 전지하신 하나님이시니 그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실을 잊고 산다. 하나님께서 내 생각까지 알고 계신다는 것을 망각하고 살아간다. 내 생각까지... 그 분 앞에서 숨길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또 무엇을 숨기려고 한들 숨길 수 있을까?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잊어도 하나님은 잊지 않으시는데 말이다. 모든 것이 드러나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정직해지고 솔직해 질까? 적어도 우리가 범할 수 밖에 없는 죄악들에 부정직이라는 죄악을 더하지는 않을 것이다. 실제로 이것은 자유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위선을 부릴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위선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 때문에 부리는 거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께서 다 아시는데, 그런 생각까지도 다 아시는데,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데 그래도 사람때문에 위선을 부릴까? 그렇게 쌓인 위선을 나중에 다 어떻게 하려고...(한가지, 우리는 위선과 노력은 구분되어야 한다. 착한 척 하는 것과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은 엄연히 전혀 다른 문제이다. 전자는 스스로가 선해야 하며, 선하게 살아가고 싶다는 마음도 없이 보이는 행동이지만 후자는 그런 마음에서 나오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노력은 반드시 필요하다. 노력은 절대로 위선이 아니다.)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무너지느니라”

어린아이도 잘 아는 일반적인 원리이다. 너무도 분명한 역사의 교훈이기도 하다. 그런데, 유독 거기 모였던 어떤 사람들만 이것을 모르는 것 같다. 참 이상한 일 아닌가? 이 당연하고도 쉬운 원리 대신에 정말 우스운 결론에 이르다니 말이다. 이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면 다 가짜고, 다 잘못되었다는 교만한 자기의식때문에 생겨나는 어리석음이다. 그 교만이 일반적인 원리조차 적용하지 못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바알세불의 힘으로 귀신을 내쫓는다면 그것은 사탄의 나라가 내분하는 것이고, 결국 그 나라가 무너지는 것인데 그 나라의 왕이 그런 일을 허용할 것 같은가? 이것은 언어도단이다. 그런데도 무리들 중 일부는 그런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사실 예수님께서 귀신을 내어쫓는 일로 두 나라가 무너지고 있었다. 한 나라는 사탄의 나라다. 견고한 사탄의 나라는 이제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있다. 새롭게 도래한 하나님 나라의 공격에 저항할 힘이 없기 때문이다. 또 한 나라는 ‘사람들의 나라’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만일 그 일이 없었다면 서로 갈라질 일이 없었던 사람들의 나라를 여럿으로 갈라놓기 시작했다. 오늘 이야기 속에서만도 사람들은 셋으로 갈라진다. 그렇게 사람들의 나라 또한 예수님이 공격에 스스로 분열되며 무너지고 있었다. 

“만일 내가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이 땅에 도래하고 있었다. 이미 임해있었다. 그런데, 이 나라는 놀랍게도 누구에게나 그 모습을 드러내는 그런 나라가 아니었다. 그 나라는 그 나라를 볼 수 있는 사람에게만 도래한 그런 나라가 된다. 예수님의 말씀, 그 분이 하신 일을 통해서 하늘나라를 볼 줄 아는 사람들에게만 그 나라는 이미 와 있는 나라다. 이것이 하늘나라의 무서움이다. 그 나라는 엄청난 능력으로 이미 우리 속에 와 있지만 누구나 그것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래서 누구나 그 나라를 반기고 그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 이미 와 있는 하늘나라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 나라가 자신을 드러낼 때 오히려 정반대의 사건을 일으킨다. 점점 더 하늘나라에서 멀어지게 만든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께서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나 혹은 더 많은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이런 사람들은 이 땅에 도래한 하늘나라를 보면 볼수록 그 나라에서 더 멀어질 뿐이다. 우리의 눈은 이 땅에 이미 와 있는 하늘나라를 보는데 익숙해지고 민감해져야 한다. 그래야 그 나라의 백성이 되고자 하는 믿음과 소망이 강해진다.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더 강한 자가 와서 저를 이길 때에는 저의 믿던 무장을 빼앗고 저의 재물을 나누느니라”

더 강한 자가 왔다. 강한 자가 쫓겨나는 것은 더 강한 자가 왔다는 증거다. 그렇다면 누구 편에 설 것인가? 누구에게 속해서 누구의 방식으로 살아갈 것인가? 아직도 2000년이 지난 지금에도 누가 더 강한 자인지 분별하지 못하고 그래서 아직도 덜 강한 자에 기대서 살아가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 보다 더 어리석은 자는 없을 것이다. 그는 분명히 그 덜 강한 자가 완전히 망할 때 함께 망해버리고 말 것이다.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었느니라”

기독교적인 비움은 채움을 위한 비움이지 비움을 위한 비움이 아니다. 귀신을 쫓아내어 주시는 것, 사탄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또 제거해 주시는 것은 그저 그 상태로 놓아두시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 자리를 하나님으로, 성령님으로 채우시기 위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빈 자리는 다시 악마적인 요소들로 채워지게 된다. 그런데, 주님은 그 자리를 그냥 내버려 두면 결국에는 더 악한 것들로 채워질 가능성이 크다고 하신다. 실제로 우리는 현실 속에서 이런 일들을 많이 목격한다.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탐욕적이고 거짓이 많으며 심지어는 더 잔인하기까지 한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물론 쉽게 그 사람은 예수를 믿지 않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혹시 그 사람이 이런 경우에 해당하지는 않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 속에도, 내 안에도 그런 부분이 있다. 예수 믿기 이전보다 더 악해지고 잔인해진 그런 부분들 말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우리 자신 속에서도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는 그런 일 말이다. 주님이 우리 안에서 사탄의 영향력을 몰아내주시는 이유는 그 자리를 하나님으로 채우고, 성령님으로 채우라고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그 때, 예수님께서 벙어리 귀신을 내어쫓으실 때,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났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을 보면서도 거기서 하늘나라를 보고 믿음의 반응을 보이는 대신에 그 반대 방향으로 나갔던 것이다. 그 일로 하나님의 비우심을 보여주었더니 그 자리에 더 악한 것을 끌고 들어왔던 것이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우리를 비우시는 이유를 잊지 않게 해 주소서. 비워지지 않고는 채울 수 없기에, 그렇게 사탄의 영향력과 죄악들을 비워내지 않고는 하늘나라로 채울 수 없기에 우리를 비우신 것임을 잊지 않게 해 주소서. 항상 하늘나라로, 하나님으로, 그리고 성령님으로 우리 자신과 우리의 ‘관계’를 채워나가게 하셔서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는 일들이 일어나지 않게 해 주소서. 우리의 눈을 열어 우리 속에 이미 들어와 있는 하늘나라를 보게 하시고, 점점 더 명확하게 볼 수 있는 복을 허락해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