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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 묵상

2012.02.26. 매일성경 묵상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 11장 45-54절입니다. 
     어제 본문에 이어서 일련의 ‘화’선언이 이어진다. 누구나 욕먹는 것은 즐거워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언제나 욕은 먹어야 한다. 그 욕먹음은 인간의 부족함이 존재하는 한, 인간의 악함이 존재하는 한 언제나 정당한 것이다. 욕을 먹는 일이 심하게 불쾌한 것은 그 속에 자신이 거부하고 싶은 진실이 들어 있기 때문일 때가 많다. 그러니 불쾌할수록 자신을 향해 주어지는 욕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저 화만 내고 불쾌하게 생각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말이다.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바른 것을 가르칠 수는 있다. 그 임무 자체는 꼭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그 가르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일 때는 그저 옳은 것을 말하는 것으로만 충분하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의 교사들에게 옳은 것을 가르치고 말할 뿐 아니라, 그들의 짐을 나누어 지며, 그들의 짐을 가볍게 해 주는 임무를 함께 맡기셨으며 그러한 임무가 훨씬 더 중요한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손수 감당하신 일이기도 하다. 그 분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으며, 그렇게 자신에게 나아온 사람들을 안식 가운데로 인도하셨다. 그렇다고 쉼만 주셨는가? 그렇지 않다. 그 분은 ‘새 계명’도 주셨다. 계명 중의 계명, 모든 계명들을 계명되게 하는 계명도 가르치셨다. 어찌 보면 그 계명들은 이전의 계명들보다도 훨씬 더 무거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 분이 주신 ‘멍에’가 가벼운 이유는 그 짐을 지는 자와 함께 그 짐을 지셨고, 또 더 주도적으로 지셨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렇게 하셨던가? 먼저는 스스로 모든 율법을 이루셨고, 그 의를 자신을 믿는 자에게 덧입혀 주심으로써 더 이상 율법이 저주의 이유가 되지 않게 해 주셨다. 또한 그 분은 성령을 주심으로써 우리가 그 능력으로 그리고 자발적으로 율법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 무엇보다도 그 분은 우리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알려 주셨고, 그 관계를 회복시켜 주셨으며, 그 관계에 집중하게 하셨다. 우리를 그 분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게 해 주셨고, 그 관계에 집중하게 해 주셨다.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은혜 속에서 가르치는 자리에 있을 때, 누군가에게 무언가 옳은 것을 이야기 해야할 때 그 이야기와 더불어 어떤 일을 해야하는지를 배우게 된다. 우리는 무언가를 가르칠 때, 우리의 불완전한 순종 위에는 언제나 완전한 그리스도의 의가 있으며, 우리는 단순히 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 순종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그 모든 순종의 능력은 성령님으로부터 충분하게 주어지고 있음을 더불어 말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그 은혜의 능력을 증거하는 살아있는 실례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우리에게 듣고 또 배우는 사람들에게 져야 할 짐을 지워주면서도 그들의 짐을 가볍게 해주고, 그들이 그 짐을 기꺼이 그리고 포기하지 않고 지고가도록 도와줄 수 있다. 

“화 있을진저 너희는 선지장들의 무덤을 쌓는도다 저희를 죽인 자도 너희 조상들이로다 이와 같이 저희는 죽이고 너희는 쌓으니 너희가 너희 조상의 행한 일에 증인이 되어 옳게 여기느니라”

두번째로 나오는 화 선언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지만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예수님을 거부하고 그 분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은 그 이전의 어떤 세대가 자신들을 위한 선지자들에게 했던 어떤 악행보다도 큰 것이며, 그래서 그 이전 세대가 선지자들의 무덤을 팠다면 이제 이들이 할 일은 그 무덤을 완성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 모든 악행을 완성하는 세대가 될 것이다. 우리는 그 어떤 죄보다도 악해서 결코 용서받지 못할 죄악이 바로 예수님을 거부하는 죄임을 알게 된다. 지금 그런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자.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지고도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율법사들의 문제는 ‘무지함’에 있지 않았다. 그들의 문제는 ‘알고 있다는 것’에 있었다. 그들은 ‘지식의 열쇠’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열쇠로 문을 열어 다른 사람들을 들어가지 않게 할 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그리고 들어가려고 들지 않았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열쇠를 맡기신 이유와 정확히 반대된다. 만약 그들의 생각대로 그들이 ‘지식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면, 그들은 그것을 그 열쇠가 없는 자들을 위해서, 그리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용해야 한다. 그렇지만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이 한 일이라고는 그 열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자랑하고 기뻐한 것 밖에 없었다. 그 열쇠를 유리 상자에 넣어 놓고 그 상자 앞에다는 ‘우리 율법사 소유’라는 이름표를 붙여놓음으로써 자신들과 다른 이들을 구분하며, 그 일에서 즐거움과 만족을 찾고 있었다. 그러니 그들의 화는 몇 배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첫째 자기 자신도 들어가지 않았다는 점에서, 둘째 다른 이들도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는 점에서, 세째 그것을 차별과 자랑의 기준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권력의 도구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그 열쇠를 오남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때로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남보다 많은 것을 볼 수 있을 때가 있고 또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때가 있다. 그럴 수 있는 눈과 마음이있다는 것은 정말 크나큰 특권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것 자체로는 복이 될 수 없다. 그것은 나를 위한 하늘문의 열쇠로, 그리고 그 열쇠가 없는 자들을 위한 하늘문의 열쇠로 사용할 때에만 가치와 소용이 있게 된다. 그런 용도가 아니라 다른 용도로(자랑거리나, 차별의 이유 등) 사용한다면 결국 그것은 자신에게 ‘화’만을 쌓는 일이 될 것이다. 


“하나님, 때로 가르치는 자리에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로 하여금 이 일을 온전히 행하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의 가르침이 남에게 짐을 지우고, 더 무겁게만 만드는 일이 아니라 그들에게 마땅한 짐을 지우나 그 짐을 가볍게 해 주고, 또 더 잘 지도록 돕는 일이 되게 해 주소서. 무엇보다도 가르치는 나 자신을 위해서 내가 선포해야할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부인하는 일이 없게 하시고, 내게 주신 크고 작은 열쇠들을 나와 그들을 위해 하늘문을 여는 일에만 사용하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의 귀한 직분이 우리에게 화의 이유가 되지 말게 하시고, 그 날 당신 앞에서 영광을 얻는 이유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