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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 묵상

2012.02.27. 매일성경 묵상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 12장 1-2절입니다. 
      오늘 본문은 어제 본문의 주제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오늘 본문에서는 외식과 사람을 향한 두려움, 그리고 예수님을 부인하는 문제에 대한 말씀이 이어진다. 아래에서는 이 세 가지-실은 내일 본문과 모레의 본문의 주제도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를 연결시켜 이해해 보자. 이것은 억지 연결이 결코 아니다. 예수님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야기들을 아무 때에나 아무렇게나 툭툭 던지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그 분의 말씀은 모두가 다 내적인 연결점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함께 이야기된 것들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복음서를 볼 때,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이런 연결점들을 찾는다면 말씀의 진짜 깊은 의미와 은혜들을 찾는 복을 누릴 수 있다)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할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집 위에서 전파되리라”

왜 사람들은 위선이라고 부르는 ‘외식’에 빠지게 될까? 그것은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위선을 모를 것이라고, 결코 알아차릴 수 없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두 가지 점에서 잘못되었다. 첫째, 이것은 자기 자신만 ‘고수’라고 생각하는 말도 안되는 착각에서 생겨나는 맹신이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라는 속담이 있다. 이 말은 괜해 생겨난 말이 아니다. 나는 항상 내가 제일 똑똑하고 주도면밀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항상 나보다 똑똑하고 눈치 빠른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이 나를 보면 수가 훤히 보인다. 그 사람의 본질이 다 들여다 보인다.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은 한 두 사람이 아니라 실은 부지기수다. 나만 다른 사람들이 나를 모른다고 생각할 뿐, 다른 사람들은 이미 나를 다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두번째로, 내가 가장 똑똑하고 주도면밀하며 연기의 달인이어서 모든 사람들을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단 한 분 하나님은 결코 속일 수 없다. 그 분은 다 알고 계실 뿐 아니라 다 기억하고 계신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라는 말이 거짓인 것 같은가? 괜히 겁주려고 하는 말인 것 같이 여겨지는가?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할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집 위에서 전파되리라”라는 말씀이 일어나지 않을 일에 대한 비유라고 생각하는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야 말로 가장 어리석은 자이다. 이 일은 분명히 마지막 날에 그대로 이루어질 일에 대한 언급이다. 주님께서는 그 날 그 분 앞에서 우리의 위선을 그렇게 훤히 드러내실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위선’을 바리새인의 누룩이라고 말씀하신다. 누룩은 모르는 사이에 퍼져서 덩어리 전체를 자기 세상으로 만들어 버린다. 위선이라는 것이 그렇게 위험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삶 전체를 자기 영토로 만들어 버린다. 내 존재 전체를 완전히 다른 것으로 바꾸어 버린다. 그것도 결코 그렇게 되어서는 안되는 그런 것으로 말이다. 그런 일이 모르는 사이에 이루어진다는 것이 위선의 진짜 무서운 점이다. 왜 그럴까 어쩌면 그것은 우리의 본능과 딱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다. 나를 부풀리고 포장해서 실제의 내가 아닌 더 그를 듯한 나로 보이고 싶어하는 그런 은밀한 본능을 만족시켜주는 것이 바로 위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혀 몰랐다는 것은 실제로는 내가 그것을 좋아했기 때문이고, 그것이 주는 바람직하지 못한 유익을 은근히 즐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이 나를 온통 삼켜버릴 때까지 모르는 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땅에 사는 그 누구라서 위선을 완전히 청산할 수 있을까? 그러나 알고 있기는 해야 한다. 위선이란 그런 것이고 영원하 위선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그 모든 위선은 결국 하나님 앞에서 다 드러나게 된다는 것을 말이다.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넣는 권세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위선의 문제가 갑자기 두려움의 문제로 넘어간다. 이것은 위선과 두려움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다.(물론 더 직접적으로는 8절 이하와 연결되어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연결되어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우리가 왜 사람들 앞에서 위선을 ‘떨까?’(앗, 죄송하다. 이런 말을 써서. 그러나 위선에는 고상한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떤다’는 말이 위선과 가장 어울리는 말이다) 그것은 사실 사람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그들 앞에서 원래의 나 이상으로 보여야 할 이유가 없다.(물론 내 모습이 그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서는 약간은 그럴 필요가 있기도 하다. 그래서 위선과 덕을 세우려은 행동의 경계가 모호할 때가 많다. 이 모호함이 만드는 문제는 각자가 양심껏 해결해야 할 일이다) 그들의 판단이 두렵다. 그들이 나를 높여주지 않을까 두렵다. 그래서 그들 앞에서 위선을 “떠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사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실은 진짜 두려워해야할 대상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 주지 않고 나를 존경해 주지 않으며 내가 바라는 대로 나를 평가해 주지 않는다고 내가 죽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설사 사람들이 나를 죽게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죽일 수 있는 것은 내 몸 밖에 없다. 그들은 그 어떤 경우에도 켤코 내 영혼을 손댈 수 없으며, 그래서 나에게 영원한 영향을 미칠 수가 없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떤가? 그 분은 그 두 가지를 모두 다 죽일 수 있으시다. 몸의 생명도 죽이시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그 분이 영혼도 죽이실 수 있는 유일한 능력을 가지신 분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를 두려워해야 하는가? 사람인가? 아니면 하나님인가? 하나님이다. 하나님을 두려워 해야한다. 그리고 진실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진실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순간 사람에 대한 두려움은 자취를 감추고 만다.(경험해 본 분은 아시리라!) 

“참새 다섯이 앗사리온 둘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라도 잊어버리시는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너희에게는 오히려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참새는 아주 가치가 낮은 새다. 하루 품삯의 8분의 1만 주면 두 마리를 살 수 있을 정도로 가치가 없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그렇게 가치없게 생각하는 참새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단 한 마리도 잊지 않으시고 기억하신다. 돌보시고 섭리하신다. 나중에도 말씀하시지만 그 분의 자녀된 우리라면 그 분은 우리를 얼마나 귀하게 생각하시겠는가? 얼마나 지극한 관심을 가지고 계시며, 얼마나 면밀하고 완벽하게 돌보시겠는가? 주님은 하나님께서 우리 머리털의 숫자까지도 다 세고 계신다고 말씀하신다. 그것을 우리가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로 제시하신다. 그저 비유일까? 아니다. 사실이다. 그렇지 않으시다면 우리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가 된다. 오늘 아침 세수할 때 자기 머리가 몇개 빠져나간 줄 아는 사람이 있는가? 정확하게?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신다. 오늘 아침 몇 개가 빠져 나갔으니 이제 몇 개가 남았다. 그것이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할지라도 그것 또한 하나님의 사전허락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그만큼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그 분의 뜻 안에서 이루어진다. 여기에 우리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할, 또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가 있다. 사람이 나를 해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철저히 하나님의 허락 아래서 하나님이 허용하시는 범위 안에서이다. 그리고 그 범위는 최대한으로 잡아봐야 우리 몸의 목숨까지이다. 우리의 영혼은 우리 아버지께서 꼭 붙잡고 계시다.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전능하신 그 손 안에 붙들고 계신다. 우리가 살고 죽는 문제가 사람의 손에 달린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두려워해야할 대상이신 그 분만을 두려워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를 두려움에 빠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확신과 견고함 가운데 거하게 해 준다. 이것이 ‘경외함’의 역설이다. 경외함은 우리에게 악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없다. 단 한 분 두려워해야할 분을 두려워하게 될 때, 우리는 모든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된다.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담대함을 원하시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을 두려워 하라.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함을 받으리라” 

이것도 두려움의 문제다.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은 그 일에 대한 그 사람들의 반응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그 사람들의 반응이 나를 죽일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최악의 경우 그들이 내 목숨을 빼앗을 수는 있어도 결코 내 영혼에는 손 조차 대지 못하며, 그 모든 일의 권한은 모두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 진리에 믿음을 더해야 한다. 우리가 사람이 무서워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은 순간이지만, 예수님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것은 영원한 부인이 될 것이다. 이것이 그 분이 나를 모른다고 하시는 그 말씀 한 마디가 가지는 무게이다. 그러나, 그런 ‘말로하는 부인’이 용서될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이 말씀은 교리적으로도 가치가 있다. 우리는 한 순간 이런 저런 이유로 예수님을 거역할 수 있다. 그러 죄는 돌이키면 용서받을 수 있다. 사도 바울이 그 명확한 예가 될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한다. ‘성령을 모독한다’는 말의 의미에 대해서는 대대로 논란이 되어져 왔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이 말이 그 앞에 나오는 ‘말로 인자를 거역하는 일’과 반대되는 일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것은 말로 거역하는 것 이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성령’은 우리 내면에 역사하시는 분이시다. 우리 안에서 구원을 이루시는 분이시다. 그렇다면 성령을 모독한다는 말은 그 분이 이렇게 일하시는 내적인 역사를 고의로 그리고 의지적으로 악하게 무시하고 거부하는 것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은 이 역사를 거부할 때, 더 이상 방법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조금은 다행인 것 같다. 그래도 일시적으로 말로 주님을 거부하는 것은 용서를 받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별로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말로 그 분을 거부하는 것이 언제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것에 대한 거부로 이어질지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바울처럼 그렇게 돌이킨다면 결과적으로는 괜챦겠지만 그런 일이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래서 이 구절은 우리에게 일시적인 거절로 인한 절망을 벗어나게 해 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일시적인 거절 또한 만만하게 볼 일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기도 하다. 

“사람이 너희를 회당과 정사 잡은 이와 권세 있는 이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 것을 염려치 말라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리라”

왜 갑자기 이런 말씀을 하실까? 주님은 이 말씀 속에서 제자들이 사람들에게 붙잡혀 갈 것을 전제로 말씀하신다(이런!). 그런데, 그런 상황이 닥치기 전에 그렇게 되면 무엇을 어떻게 말할까에 대해서 미리 걱정하고 궁리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 이유는 미리 생각하는 것은 많은 경우 두려움에서 나오게 마련이며, 그러다 보면 진짜 말해야할 것들을 담대하게 말하기 보다는 두려움에서 나온 변명을 말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그것은 위에 나온 언어로 표현한다면 하나님이 아닌 사람을 두려워하는 행동이 된다. 주님은 이것을 방지할 방법을 미리 알려주신 것이다. 주님은 일이 닥치면 그 때 가서 생각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즉흥적인 사람이 되라고 하신 것도 아니다. 주님은 근심에 빠져 할 말을 궁리하기 전에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먼저라고 말씀하신다.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이 약속을 믿어야 한다. 이 약속에 의지해야 한다. 우리가 이 약속을 믿으면 분명히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우리가 해야만 하는 가장 적절한 말을 하게 하실 것이다. 베드로가 그랬고, 바울이 그랬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들은 굉장히 능력있고 견고한 말들이었다. 심문하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꼼짝 못하게 할만큼 말이다.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는 방법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고, 그 두려우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위선을 이기는 것도, 두려움을 이기는 것도, 근심을 이기는 것도 모두가 다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 그 두려운 분을 신뢰하게 될 때 가능한 일이다.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하소서. 진실로 당신을 두려워하게 하소서. 그 둘려움 안에서 사람들을 향한 두려움을 이기게 하셔서, 위선과 위축됨을 이기게 하소서. 또한 그 두려운 당신을 신뢰하게 하셔서 그 신뢰함 속에서 근심을 이겨내게 하소서. 사람과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게 하셔서 항상 담대하게 주님을 증거하며 살아가게 해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