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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 묵상

2012.03.16. 매일성경 묵상

   
     본문은 ‘기도’에 대한 주님의 교훈이다. 전반부는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할 것’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주신 비유와 교훈이며, 후반부는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 정확하게는 이런 사람들의 기도에 대한 주님의 평가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전반부를 생각해 보자. 말씀드렸거니와 성경의 바른 해석과 묵상, 그리고 적용을 위해서는 ‘문맥’이 중요하다. 문맥이 무시되면 가장 중요한 메시지를 알아차릴 수가 없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문맥’은 무엇인가? 앞으로 가 보자. 오늘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라고 묻는 것으로 시작된다. 예수님께서는 그 질문에 대해서 대답해 주시며, 어떤 사람이 심판의 날에 구원을 얻을 것인가를 덧붙여 말씀해 주신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다음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왜 본문에 나오는 기도에 대한 비유가 ‘재판’의 상황을 그리고 있는지 아시겠는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기도’에 대한 교훈의 맥락이 단순한 기도가 아니라 마지막 심판과 연관된 기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8절의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는 주님의 말씀에도 확실하게 드러난다. 이 기도는 단순히 소원성취를 위한 기도가 아니다. 비록 일반적인 기도에도 마찬가지의 원리가 적용될 수 있다고 해도 적어도 오늘 본문은 그것에 대한 말씀은 아니라는 것이다. ‘마지막 심판’이라는 맥락을 놓치고 그저 일반적인 기도만 생각하면 이 본문은 매우 이기적인 말씀이 된다. 그저 무엇이든 이렇게 기도해야 할 것이라고 가르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혀 아니다. 실제로 성경 어디에도 기도를 그렇게 이기적으로 이해하고 가르치는 곳은 없기 때문이다. 비록 기도에 ‘항상 기도하고 낙망하지 말아야 함’이라는 원리가 일반적으로 적용된다고 하더라도 성경은 분명히 ‘욕심대로 구하는 기도’는 주님께서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욕심대로 기도하면 들어주시지 않을까? 정답은 ‘욕심대로 드리는 기도는 이미 기도가 아니기 때문이다’라는 것이 되겠다.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오늘 본문은 이런 재판관을 가정하고 있다. 실제로 예전에 법이 느슨할 때는 이런 재판관은 얼마든지 있었다. 자의적이고 자기 이익중심으로 판결을 하는 재판장 말이다. 예수님은 최후의 재판관이신 하나님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일부러 흔히 찾아볼 수 있지만 극단적으로 불의한 이런 재판관을 등장시키신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한다? 그렇다면 이 사람에게 남는 것은 자기 자신밖에 없다.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주소서 하되”

당시의 미망인은 가장 낮은 자, 그 누구의 보호도 기대할 수 없는, 그러면서도 가장 힘없는 사람의 대표였다. 누구도 돌보려 들지 않고 누구도 귀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니, 이 사람이 살면서 당하는 억울한 일이 얼마나 많겠는가? 본문에 나오는 미망인도 원수에게서 억울함을 당했다. ‘원한’이라고 표현할 만한 억울한 일이 있었다. 그 미망인은 그 불의한 ‘원한’이 바로 잡혀져서 ‘정의’가 실현되기를 바랬다. 힘이 없고 돈이 없으니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관에게는 이미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 여인에게는 무기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끈질김’이었다. 이 여인은 ‘자주’ 재판관을 찾아가서 탄원하고 또 탄원했다. 재판관을 아주 귀챦고 괴롭게 만들었다. 

“그가 얼마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세상이 자신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자신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사람을 무시한다고 스스로를 평가하는 사람이 있을까? 이 사람은 그렇게 악하고 교만한 사람이었다. 자신이 그런 사람임을 알면서도 결코 그 악한 자리를 떠나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다. 악인이 악인이 되는 것은 이렇게 하나님과 이웃이 아니라 자기자신이 중심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경향을 지닌 사람은 역설적으로 자기 손해는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여인이 계속해서 자신을 괴롭힐까봐 그 여인의 원한을 풀어주기로 한다.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우리는 우리의 기도가 좌절되는 것같은 생각이 들 때마다 항상 불의한 재판관이 말을 기억해야 한다. 그는 굉장히 악한 사람이었지만 그 미망인의 끈질김에 무릎을 꿇고 만다. 물론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었기는 하지만 말이다. 불의한 재판관이었지만 결국 그 여인의 ‘원한을 풀어줄 것’을 결심한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시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불의한 재판관을 떠올렸는가? 불의함에도 불구하고 그 여인의 원한을 풀어주기로 결정했던 그의 결정을 떠올렸는가? 그렇다면 그 다음에 반드시 해야할 일이 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다. 가장 먼저 떠올려야 할 단어는 “하물며”다. 불의한 재판관이 그렇게 했다면 “하물며 하나님은?”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은 불의하시지 않다. 자기 중심적이지도 않으시다. 게다가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신다. 그 하나님이 재판관이다. 그런 분이 그 분의 백성들, 그 분의 자녀들의 탄원을 듣지 않으시겠는가? 들으시고 우리의 원한을 풀어주시지 않으시겠는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불의한 재판관보다도 못한, 그 사람보다 더 악하고 이기적이며 우리를 향한 사랑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분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오늘 비유는 무엇보다도 하늘나라를 소망하면서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일이 우리 편에서 본다면 ‘원한’이라고 부를만큼 부당하고 불공평한 일들을 경험하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재판관만 불의한 세상이 아니다. ‘원수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이 세상에서 세상의 방법을 따르지 않고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것은 마치 ‘과부’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과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억울한 원한은 얼마든지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그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까? 주님은 기도하라고 하신다. 위대하고 완전하신 재판관이신 하나님께 탄원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런 일이 있었다고, 그러니 하나님께서 풀어주시고 바로잡아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오늘 비유가 마지막 심판을 그 문맥으로 하고 있음을 생각해 볼 때, 그 탄원의 해결은 현실 속에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섣불리 기대해서는 안되는 것 같다. 그 해결은 언제 이루어질지 모른다. 그리고 결국 이루어지기는 하겠지만 그 성취의 시기는 마지막 심판의 날이 될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 이 불의하고 힘든 상황이 언제 바로잡아질지 모른다. 그리고 그 바로잡아짐은 내 살아생전의 일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다시 상기하자. 이 말씀은 최후의 심판을 그 맥락으로 하고 있다) 우리는 그래도 기도해한다. ‘밤낮 부르짖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믿음이다. 주님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의 원한을 반드시 풀어주실 것이라고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지나치게 늦게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덧붙이신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우리가 항상 기도하고 낙망하지 않기 위해서는 끈질김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끈질김은 인간적인 끈기와 불굴의 의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끈질김은 기도에 필요한 끈질김이기 때문이다. 이 끈질김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만 나올 수 있다. 하나님을 신뢰할 때, 그 신뢰가 흔들리지 않을 때 우리는 계속해서 기도하고 또 기도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낙망하지 않을 수 있다. 그 믿음이란, 그 신뢰란 어떤 신뢰를 말하는가? 이미 본문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반드시 택하신 자의 원한을 풀어주시는 분이라고, 내 생각이나 느낌처럼 느지막하게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라고 믿는 믿음과 신뢰’를 말한다.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며 사는 일 때문에 부당하고 억울한 피해자가 되더라도 하나님을 그런 분으로 믿는 흔들리지 않는 신뢰를 의미한다. 이런 믿음을 끝까지 유지하는 것이 쉬운 일일까? 불의한 재판관들의 세상에서 신원하시는 하나님을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그 하나님을 닮은 의로운 성품을 가지고 의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 쉬운 일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그래서 주님은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불의한 상황에서도 의로운 삶을 포기하지 않고, 그러면서도 낙망하지 않으면서 계속 기도하려면 반드시 하나님이 신원하시고 가능한 한 가장 속히 움직이시는 분이심을 믿는 믿음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 믿음은 생각처럼 쉬운 믿음이 아니다. 이 믿음은 계속해서 기도하며, 계속해서 믿음의 싸움, 하나님이 듣지 않으시는 것같은 상황, 그리고 하나님께서 너무 더디 움직이시는 것같이 여겨지는 상황에서도 계속 하나님을 신뢰하려는 믿음의 싸움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믿음이다. 아마 우리는 그 싸움을 계속하면서, 그 싸움 덕분에 부족하나마 그 믿음을 간직하다가 주님을 뵙게 될 것이다. 우리는 믿어야 한다. 결국 마지막 주님 다시 오시는 날에는 이 모든 불의와 불공평, 그리고 그로 인한 억울함이 완전하게 바로잡아질 것이며 그 안에서 믿음을 지킨 영원히 영광스러운 상급이 그 피해자들에게 주어질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이 믿음이 우리를 견디게 할 것이다. 그 분이 다 바로잡으실 뿐만 아니라 완전히 바로 잡으실 것이고, 또 믿음을 지킨 자에게, 주님이 찾으시는 그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 상을 주실 것을 믿는 믿음이 우리를 끝까지 견디게 할 것이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누가 다른 이들을 멸시하게 될까? 특히 신앙적인 영역에서... 바로 자기를 의롭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반드시 다른 사람들을 불의하다고 여기며 무시하게 되어 있다. 적어도 그 기준에서 보면 자기보다 못한 사람은 굉장히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이 사람들은 자기 기준에서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이지 하나님의 기준에서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이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기준에서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평가하고 있다고 여길 것이다. 그래서 그 평가는 정당하다고 확신할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것이 있다. ‘의와 불의’ 사이에는 중간영역이 없다는 것이다. 10페센트 의롭다거나 50퍼센트 불의한 것은 없다. 하나님에게는 의롭지 않으면 다 불의한 것이다. (이 말을 모든 죄가 다 동일한 무게를 가지는 것이라는 말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가끔씩 그런 주장을 듣는다. 하나님께는 작은 죄나 큰 죄가 차이가 없다는 주장 말이다. 이런 주장에 속으면 안된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윤리적인 기준이 사라지게 될 것이고 살인과 도둑질을 같은 죄로 여기게 될 것이다.   간음과 마음 속의 미움을 동일한 무게로 취급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한다. 분명히 더 큰 죄가 있고 더 작은 죄가 있으며, 그래서 주님이 더 무겁게 취급하시는 죄가 있고 그렇지 않은 죄가 있다. 하나님은 작은 거짓말과 살인을 같은 무게로 다루시는 분이 결코 아니시다. 그렇게 기준이 모호한 분이 결코 아니시다. 그렇게 생각하게 되면 때로는 술담배를 끊지 못하는 문제를 탈세나 투기보다 더 큰 죄라고 여기게 되기도 하는 혼란이 발생하기도 한다.) 만약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으려면 그 사람은 자기 힘으로 완전히 의로워야 한다. 율법으로 말한다면 단 하나도, 단 한 번도 어기면 안된다. 그래야 비로소 의롭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 의롭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자신을 의롭다고 여긴다면, 그는 의를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기준에서가 아니라 다른 이들과 자신을 비교하는 상대적인 기준, 그리고 때로는 자기가 자기의 기준이 되는 그런 의미에서의 절대적인 기준에서 자신을 평가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둘 중의 하나다. 열등감에 시달리든지 아니면 우월감에 빠져 다른 이들을 멸시하든지. 오늘 본문의 후반부의 비유는 바로 그런 자들에게 주신 비유이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로 계산과 평가가 끝난다. 아, 거룩하고 의로운 사람과 죄인이 성전으로 올라가고 있구나. 바리새인은 몰라도 어떻게 저런 죄인이 성전에 올라갈 수 있을까? 하나님은 분명히 바리새인은 기뻐하시겠지만 새리의 기도는 절대로 받지 않으실 것이다. 

“바리새인은 따로 서서 기도하여 가로되...”

당연하다. 바리새인은 죄인과 섞일 수 없으니까. 의인은 죄인과 함께 있을 수가 없으니까 말이다. 그는 될 수 있는대로 지성소 가까이로 나아갔을 것이 분명하다. 의인이니까, 그래서 거리낄 것이 없으니까 말이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당연히 감사해야할 일이다. 죄인들이 들끓는 세상에서 그들처럼 살지 않을 수 있다면 그것은 정말 엄청난 복이기 때문이다. 바리새인의 이 기도에 거짓은 없다. 그는 남의 것을 빼앗은 적도 없고, 불의를 저지른 적도 없으며 간음한 적도 없다. 특히 세리처럼 동족의 등을 치지도 않았다. 이것은 모두 사실을 말한 것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앞에서 하지 않는 것을 나열했다면 여기서는 하고 있는 것을 나열한다. 정해진 것보다 더 많이 금식한다. 충분하고도 남는다. 소득이 십일조를 드린다. 이렇게 의무를 충분히 다 하고 있다. 그런 성공적인 삶을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왔다. 그리고 감사하고 있다. 이 사람에게 문제가 무엇일까? 이런 감사 속에 자신의 부족함과 불의함에 대한 고백과 애통함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 바리새인은 다른 사람에 비하면 ‘비교적’ 의롭다. ‘훨씬’ 의롭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바리새인은 그것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모든 인간의 의로움 속에는 이미 불의가 섞여 있다는 사실. 인간은 결코 그 불의를 완전히 처리할 수 없다는 사실 말이다. 그래서 아무리 내가 의롭다고 한들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고 받아들여 주시지 않는다면 나나 극악한 죄인이나 마찬가지의 운명에 처해질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세리는 죄인이었다. 만인이 공인하는 죄인이었다. 그리고 엄밀하게 말하면 그는 결코 그를 죄인으로 만든 그 죄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목구멍이 포도청인지라, 또 당시의 세리라는 직업 자체가 가지고 있는 본래적이고 구조적인 불의함 때문에 그 죄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객관적으로 본다면 그는 계속해서 죄인의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세리도 성전으로 올라왔다. 기도하기 위해서 올라왔다. 그러나 그는 지성소로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다. 그저 멀리 서서 하늘-하나님이 계신 곳을 보지 못하고 가슴까지 쳤다-왜 가슴을 쳤는지 저절로 자신의 가슴을  쳐본 사람은 잘 알 것이다. 그의 기도가 어떠했는지는 여기까지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으리라.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세리의 기도는 아주 짧다. 그리고 그가 자신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죄인입니다’라는 것이 전부다. 그래서 ‘불쌍히 여겨달라고 말씀드리기도 힘들지만, 불쌍히 여겨주셔야만 한다’는 것이 전부다. 당연한가? 세리는 죄인 중의 죄인이니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당연한 것인가? 

“이 사람이 저 사람보다 의롭다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두 사람에 대한 주님의 평가는 파격적이고 충격적이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평가이기 때문이다. 누가 누구보다 의롭다고? 세리가 바리새인보다? 항상 동족의 ‘등을 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직업을 가진 세리가? 지금도 자기 죄때문에 기도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세리가 토색하지도 않고 불의하지도 않으며 간음한 적은 더더욱 없고 일주일에 한 번도 모자라 두 번씩이나 금식하고 꼬박 꼬박 십일조를 드리는 바리새인보다 더 의롭다고? 이것은 ‘의’에 대한 사람들의 기준을 완전히 깨뜨리는 평가다. 말도 안되는 평가다. 이것은 마치 평화롭고 거룩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예배시간에 별 문제없이 평안하고 기쁜 마음으로 앉아있는 나보다 내가 잘 알지는 못하지만 어제 엄청난 거짓말을 해서 다른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서 그 죄를 고백하느라 펑펑 눈물을 쏟고 있는 저 사람이 훨씬 더 의롭다고 하신 것이나 마찬가지다.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그 사람이 나보다 하나님보시기에는 더 의롭다는 것을 당신은 받아들이실 수 있겠는가?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의롭다고 여기시는지, 어떤 사람을 받아주시는지를 깨닫게 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의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람, 자신의 죄인됨 때문에 그 의를 기대할 수 조차 없다고 여기는 사람을 의롭다고 하시며 그를 받아주신다.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며 그것에 대해 감사하는 사람, 그저 평안하고 기쁜 감정만 가지고 앉아있는 사람이 아니라 말이다. 그 이치는 이렇다. 어차피 인간은 스스로 의로울 수 없는 존재다. 자기가 깨닫는 죄가 많건 그렇지 않건 누구나 다 위로부터 오는 의를 덧입지 않으면 결코 의롭다하심을 얻을 수 없는 존재다. 만약 자기가 의롭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결코 위로부터 오는 의를 절실하게 필요로 할 수 없다. 그러면 그는 위로부터 오는 의를 덧입을 수 없다. 꽉 채워져 있는 그릇에는 다른 것을 채울 수 없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생각해 보자. 바리새인과 세리 둘 중에서 누가 평안한 마음과 확신을 가지고 집으로 내려갔을까? 바리새인이다. 올라올 때부터, 기도를 하는 중에도 그의 마음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이 기쁨과 확신만이 가득 차 있었으니 그가 집으로 내려가면서 갑자기 그 평안과 확신이 깨어졌을리가 없다. 세리는 정반대였을 것이다. 그는 그저 멀리 서서 가슴을 치며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죄인됨을 고백할 뿐이었고, 그런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간구했을 뿐이었다. 이 기도가 그에게 얼마만큼의 기쁨과 평안을 회복시켜 주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이 사람의 만족과 확신이 바리새인의 것보다는 훨씬 덜했을 것은 분명하다. 진심으로 죄를 고백해 본적이 있는 사람은 그 이후의 감정이 자기만족과 확신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 것이다. 이 사실로 보건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게 여겨주시는 것은 우리 쪽에서 어떤 감정을 느끼느냐 하는 것과는 그다지 상관이 없음을 알게 된다. 그 분이 허락하시는 ‘의롭게 여기심’은 그저 그 사람이 얼마나 자신을 죄인으로 인식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죄를 죄로 안타깝고 슬프게 여기고 있는지, 그래서 얼마만큼 절실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고 있는지 하는 것하고만 관계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누가 높아지는가? 자신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고, 자신의 신앙으로 충분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결코 아니다. 그의 감정은 그가 높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평가하지 않으신다. 그 대신 자신을 낮추는 자가 높여진다. 하나님은 자신이 죄인임을 너무나 절실하게 인식하기에 자신을 낮추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을 높이신다. 그렇게 가슴을 칠 수 있고, 또 그렇게 불쌍히 여겨주실 것을 애끓게 간구할 수 있는 사람을 높이신다. 그런데 왜 의롭다 여기심의 주제가 갑자기 높여주심과 낮추심의 주제로 넘어온 것일까? 그 이유는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의롭다 여기시는 자만을 받으시고, 또 하나님께서 받아주신 사람만이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고, 그렇게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시는 자만이 높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만이 하늘의 백성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 믿음으로 충분하다 여기는 자, 자기 행함이면 된다고 여기는 자, 다른 사람보다는 훨씬 의로우니 나는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는 훨씬 나은 자라고 여기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의를 필요로 할 수 없고, 그래서 하나님의 의를 덧입을 수 없고, 그래서 그래서 그 분이 원하시는 의에 도달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는 그와 상관없는 것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항상 죄를 지을 수 밖에 없어도, 그 죄 때문에 괴로워하는 자, 그 죄 때문에 가슴을 치며 다만 불쌍히 여겨달라는 말 밖에는 별다른 기도조차 할 수 없는 자는 언제나 하나님의 의에 철저히 의지하게 마련이며, 그래서 그 의를 덧입게 되고 결국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하늘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다. 여기에 또 하나의 하늘나라의 역설이 존재한다. 그 나라는 의인의 나라이다. 그러나, 그 의인들은 자기 힘으로 의로워지고 그래서 자기 의를 확신하는 의인들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하나님의 의가 아니면 절대로 안되기 때문에 그 의를 갈구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완전한 의를 덧입은 ‘완전히 죄인이면서 완전히 의로워진’ 의인을 말한다. 이런 자들만이 하나님의 완전함이라는 기준에 합격한 자들이 될 수 있고, 그래서 하늘 백성이 될 수 있다. 아뭏든 그 나라는 그런 나라다. 

우리가 하늘나라를 바라보고 사느라고 불의한 차별과 억울한 일을 당한다고 해도, 비교적 다른 이들보다는 의롭고 정직한 삶을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믿음을 가지고 그 모든 현실을 하나님께 탄원하면서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우리는 죄인일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우리의 의가 가지는 한계다. 완전할 수 없다는 것, 완전하려하면 할수록 더 큰 부족함 밖에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 말이다. 그래서, 이 땅에서 하늘나라를 바라보며 하나님께 탄원하며 살아가는 제자들은 결코 바리새인이 될 수 없다. 그들은 오히려 항상 세리에 가까운 모습으로 살아간다. 항상 멀리 서서 하늘도 바라보지 못한 채로 가슴을 치며 “나는 죄인입니다. 제발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기도자로 살아가게 된다. 중요한 것은 내 감정이나 내 만족, 심지어는 나의 확신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이다. 그런 애통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다. 우리가 그 의를 덧입은 자가 될 때에만 우리는 하늘나라에 받아들여질 수 있고, 그래서 참으로 높여진, 부작용 없이 영원히 높여진 자들이 될 수 있다.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하나님 아버지,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이 세상에서 의롭게 정직하게, 그리고 믿음으로 살아가려고 아무리 애쓴다고 해도 우리는 항상 부족한 죄인입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항상 그리스도의 의로 새롭게 해 주시옵시고, 또 새롭게 받아주시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행위와 믿음으로 만족하여서 가슴치는 갈구를 잃어버리고 어줍잖은 감사만 남은 사람들이 되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이 땅에서 조금 불안하고 조금 더 슬퍼하며 또 조금 더 많은 죄책감을 가지더라도 하늘의 아버지께 받아들여진, 그 나라에서 확신있고 기뻐하며 자유로운 자리에 앉는, 참으로 높여진 자들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