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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 묵상

2012.04.20. 매일성경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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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본문은 야고보서 1장 1-11절입니다. 


야고보서는 대개 많은 사람들이 매우 불편하게 여기는 성경이다. 그것은 야고보서가 믿음과 은혜보다는 그 믿음을 가지고 은혜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그것도 아주 직설적이고 공격적으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렇기 때문에 야고보서는 ‘행위구원’을 이야기한다고 오해를 받기도 했고, 야고보서를 설교했다고 ‘행위구원’을 주장한다고 하여 이단이라는 구설수에 올랐던 설교자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기독교의 믿음에 대한 무지나 혹은 그 믿음의 반쪽에 대한 고의적인 무시때문에 생겨난 웃지 못할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원래부터 믿음과 행위는 나눠질 수 없다. 그리고 구원과 관련하여 성경이 문제삼는 행위는 ‘하나님 없이 이루어지는 선행’이나, 혹은 ‘율법준수 통해 구원을 얻으려는 시도들’이지 모든 행위들이 아니다. 실제로 성경은 참된 믿음에 있어서의 행위의 필수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야고보의 말대로 ‘행위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믿음의 진정성을 증명하는 것이 성령님을 통해 거룩하게 된 삶인데 그게 없다면 믿음은 그 어떤 것으로도 스스로의 진정성을 증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한 번 생각해 보자.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님을 주신다. 그렇다면 그 성령님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그 분은 우리 구원의 보증이시다. 그렇지만 구약의 설명에 의하면 성령님은 율법이 하지 못했던 마음의 할례를 행하고,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사람들이 되게하는 것이다. 성령님은 그 일을 성취하신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새 생명'이다. 그래서, 구원과 성령님, 그리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일은 선택가능한 신앙의 요소들이 아니라, 전체가 원래부터 하나로 계획된 것이다. 야고보서는 그런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 당시 야고보서의 독자들은 어찌보면 오늘날 한국의 성도들과 가장 많이 닮아있었다고 볼 수 있다. 믿음은 있다고 여겼고, 그래서 구원은 얻었다고 확신하고 있었지만 그들에게 ‘구원얻는 믿음’이 있음을 증명할 수 있는 ‘거룩한 삶-오해하면 안된다. 거룩이란 아주 구체적인 것이다. 거룩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야고보서만큼 오늘날의 한국교회와 성도들이 귀를 기울여 경청해야 할 말씀이 없는지도 모른다.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야고보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편지를 쓴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백성은 지금 쉬운 상황 가운데 있지 않다. 그들은 흩어져 있다. 단순히 지역적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들은 그 당시의 사회 속에서 ‘흩어진 자들’로 취급받으며 살고 있었다. 이것은 그들이 믿음을 지키는 것 자체가 고난이었음을 암시하는 말이다. 그러나 그 때 뿐이랴? 어느 시대이건 참으로 믿음을 지키려는 자들은 기꺼이 ‘흩어진 자’들이 되어야 한다. 바벨탑을 중심으로 세력을 결집하고 힘을 발휘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흩어진 자들’이 되어야 한다. 어차피 우리는 그 나라에 들어가기까지는 나그네로 살아가야 할 사람들일 수 밖에 없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야고보는 아주 단도직입적이다. 성품이 그렇기도 하지만, 당시의 상황이 그렇기도 했던 것 같다. 성도들, 흩어져 있는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는 “시험”을 당하고 있다. 이 시험은 단순한 삶의 어려움이 아니다. 분명히 신앙으로 인한 삶의 어려움을 의미한다(물론 일반적인 어려움에도 적용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문맥 안에서는 그렇다). 이러한 ‘시험’은 대개 두 가지로 다가온다. 하나는 ‘도전’이고 또 하나는 ‘테스트’다. 그런데, 실제로 이 두 가지는 신앙적으로는 하나다. 무언가가 우리에게 믿음의 테스트가 되는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도전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쉽게 넘을 수 없는 도전이 되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 신앙의 진정성을 훈련하고 검증하는 테스트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야고보는 이 시험에 대해서 굉장히 역설적인 주장을 한다. 그것은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는 것이다. 이런 말도 안되는 주장이 어디있는가? 신앙 때문에 어려움을 겪게 되고, 그것이 도전이 되고 또 시험이 될 때 그걸 기쁘게, 그것도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말한다니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저 “긍정적으로 생각해라. 다 잘 것이다.”라고 이야기하는 무책임한 그리고 듣기만 좋은 위로나 교훈이 아니다. 왜 우리는 믿음 때문에 어려움이 찾아올 때 그것을 기쁘게, 그것도 온전히 기쁘게 여겨야 할까? 어떻게 그렇게 여길 수 있을까? 만약 우리가 무언가를 반드시 소유해야 하는데, 그것을 얻을 단 하나의 길이 눈앞에 열린다면, 우리는 그 길이 아무리 험난하고 가기 힘든 길이라고 하더라도 그 길이 열리게 된 것을 기뻐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반드시 얻어야 할 그것이 영원하고 무한한 가치를 가진 것이라면 어떻겠는가? 그 때는 그 길이 어떤 길인가와 상관없이 정말 기뻐하고 또 기뻐하게 될 것이다. 물론 그 길을 갈 것인가는 그 사람의 선택에 달려있지만 우리의 최초의 감정은 기쁨이 될 것이 분명하다. 시험은 길이다. 하나 밖에 없는 길이다. 그러나 그 길은 험하다. 그리고 길다. 끝까지 가야하는 길이다. 그래서 시험(시련)은 인내를 요구한다. 그리고 그 인내는 우리의 믿음이 참된 믿음이라는 것을 드러내 준다. 우리를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만들어 준다. 하나님 앞에 서는 그 날 우리가 부끄럼 없이 그 분 앞에 서도록 해 준다. 그래서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영광스럽게 해 준다. 그러니 우리는 시험을 만날 때 온전히 기뻐할 수 있으며 또 기뻐해야 한다. 적어도 신앙의 논리 안에서는 그렇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시험을 만날 때마다 이런 것들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눈에 보이는 현실보다 그 현실을 인내했을 때, 내 존재가 얼마나 온전해 질 것이며, 그와 같은 온전함이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서 나를 얼마나 영광스럽게 해 줄 것인지를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아는 ‘감각’이 필요하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 감각이 없어졌나이다. 그 눈이 멀었나이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시험이 인내로 이어지고, 인내 뒤에는 지혜가 등장한다. 이는 인내가 우리를 마지막 영광 가운데로 인도하는 것이 분명하지만 그 인내는 지혜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인내는 지혜를 필요로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가질 때, 우리는 온전히 인내할 수 있다. 그 분별력이 우리가 가는 길에 대한 확신을 가져다 주며, 그 길을 이해하고 따라갈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그 지혜가 눈에 보이는 어려움은 그것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을 목적으로 하고 있음을 알게 해 주기 때문이다. 또한 지혜는 우리로 하여금 시험을 어떤 의미에서 ‘효율적으로’ 다룰 수 있는 능력을 준다. 인내는 그저 견디는 것이 아니다. 이유를 알고 또 방법을 알고 견디어 내는 것이며, 나아가서 시험을 선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하늘에서 오는 지혜이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하나님은 구하는 자를 박대하지 않으신다. 특히 시험을 당해서 지혜를 구하는 자에게는 절대로 거절하지 않으신다. 시험 중에는 그 시험 때문에 하나님을 의심하기 쉽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전능하심,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기 쉽다. 시험은 결코 하나님이 악한 분이시기 때문에, 상황에 대한 통제력이 부족한 분이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우리 삶에 다가오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죄인인 우리에게는 ‘선하고 좋은 것’만으로는 우리에게 주실 수 없는 진짜 좋은 것이 있기 때문에 우리 삶에 허락되는 것이다. 우리는 시험을 당할 때, 그 때가 우리 믿음이 흔들리기 쉬운 때라는 사실을 깨닫고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께 구한다면 그 분이 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한다. 그 믿음이 지혜가, 그리고 인내가 가능하게 하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우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아마도 당시 교회에는 부에 대한 올바른 시각이 없어서 생겨나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없는 사람은 없어서 문제였고, 있는 사람은 있어서 문제였다. 없는 사람은 없어서 주눅이 들어있었고, 또 부자인 사람들을 시기했었던 것 같다. 부자들은 자신들의 부유함을 자랑하며 없는 자들을 없신여겼던 것같다. 그것이 교회 안에서 많은 갈등을 만들어 냈던 것 같다. 이에 대한 근본적인 처방은 지금 눈에 보이는 부유함과 가난함은 그 차이가 아무리 대단해 보여도 결국 일시적이고 허무한 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인식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많이 가진 자건, 반대로 가진 것이 없는 자이건 바로 그것 때문에 일종의 시험을 당하고 있다. 그것은 자기비하의 시험과 교만의 시험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생겨나는 상호멸시의 시험이다. 그러나 그 차이는 영원한 하늘나라라는 견지에서 보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차이일 수 밖에 없다. 부유함에 대한 시험은 그 시험이 어떤 것이든 그것의 일시성을 인식할 때 참으로 극복해 낼 수 있다. 사실 모든 눈에 보이는 것 때문에 생겨나는 시험들은 다 그렇다. 우리를 스스로 높아지게 하는 것들, 그리고 또 비하하게 하는 것들... 이 모든 시험들은 다 우리를 그렇게 만드는 것들의 일시성을 인식할 때 비로소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 낮은 형제, 그러니까 가난한 사람들은 나중에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높아지게 될 것을 기뻐해야 한다. 이것은 이해가 잘 간다. 그런데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라는 구절은 이해해기가 쉽지 않은 구절이다. 부자가 자신의 가난해짐을 자랑한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 가난이 가난한 자에게 시험이듯이 부유함은 부자에게는 시험이다. 사실 가난한 자에게 가난이 시험이 되는 것보다 부유함이 부자에게 시험이 되는 정도가 더 심각하다. 왜냐하면 돈은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도 강력한 하나님의 경쟁자들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물론 부유함은 그것 자체로는 나쁘다고 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확실하다면 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복이든 그렇지 않든 부유함은 그 차제가 영적으로는 굉장히 위험한 것이 될 수 있다. 시험거리가 될 수 있다. 아무리 부인하려고 해도 정직한 사람들은 이것이 피할 수 없는 진실임을 알 것이다. 부자는 마지막 날 낮아질 것이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 그렇게 큰 차이를 만들어 내고, 그 차이 때문에 자신을 높은 자리에 올려놓았던 그 부유함이 풀의 꽃처럼 시들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 날이 부자로 살아갔던 성도들에게 슬픔과 애곡의 날이 될까? 그렇지 않다. 그 날은 그 어떤 날보다도 더 온전한 자유와 해방의 날이 될 것이다. 더 이상 부유함 때문에 당해야 하는 시험을 당하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그러면 그 날은 오히려 그에게는 자랑스러운 날이 될 것이다. 그는 그 자유함을 온 천하에 자랑할 것이다. 그런데 부자인 성도들은 그 날을 앞당겨 지금 여기에서의 삶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그 방법은 높아짐이 아니라 낮아짐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 방식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이 땅의 부유함이 그 날이 오면 시들어 버리고 없어져 버릴 것이라는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부유함을 낮아지기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섬김과 나눔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다. 부유함이 낮아짐의 도구가 된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의 부유함을 자랑해도 된다. 그런 부유함이라면 마음껏 누려도 된다. 그러한 부유함은 우리를 영원히 부유하게 해 줄테니 말이다. 부유함의 시험은 이렇게 그 부유함을 낮아짐의 도구로 사용하게 될 때, 그 때야 비로서 우리를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도록 도와주는 영원히 유익한 시험이 될 수 있다. 우리가 기뻐할만한 시험이 될 수 있다. 

"하나님, 땅에 살지만 보이는 것들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들이지만 그럼에도 그런 것들은 결코 영원한 것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 모두에게 시험을 당할 때, 온전히 기뻐할 수 있는 믿음을 주시고, 그 시험을 온전히 인내할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해 주시옵소서. 낮은 자리에 있다면 그 날에 높아질 것을 자랑하며 자유를 얻게 하시고, 지금 부유한 자리에 있다면 그 부유함을 자신을 낮추는 도구로 사용하며 자신을 영원히 영광스럽게 하는 지혜로운 삶을 살게 해 주시옵소서.”